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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 : 소울 콜렉터 1권 (5화)


2. 찰거머리 (2)

초록색과 하얀색 바탕으로 이루어진 간판, 간판에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형상을 띈 로고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커피향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편안한 생활 소음이 가득한 카페. 적당한 노을빛 조명이 카페 내부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염라와 여성은 마치 젊은 남녀가 소개팅을 하고 있는 듯 서로 마주보고 앉아 각자 하나 씩 마실 것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자신이 좋아하는 초코 라테를 홀짝홀짝 마시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금비에요, 한금비. 그쪽은 박염라 씨 맞죠?”
“네.”
금비인지 은비인지 아무튼 그녀를 빨리 떠나보내고 집에서 실컷 자고 싶던 염라는 굉장히 성의 없는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만나 뵙고 싶었어요. 솔직히 이렇게 쉽게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아하, 네.”
그가 계속 대화의 맥을 끊자 금비는 입을 삐죽 내밀며 초코 라테를 탁 내려놓고 톡 쏘듯 물었다.
“…뭔가 되게 언짢으신가 봐요. 저한테 초코 라테 하나 사준 게 그렇게 아까워요? 의외로 쫌생이?”
아메리카노를 후룩 마시고 있던 그는 복잡한 기분이 섞인 숨을 내쉬며 천천히 내려놨다.
“초코 라테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스케줄에 없는 일이 발생하면 되게 귀찮아하는지라 용건만 말하고 갈 길 가면 안 될까요?”
“얼굴은 되게 인기 있을 거 같은데 성격이 개차반이네요.”
‘개차…….’
요새 왜 이렇게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만 만나는 걸까. 오늘 처음 본 사이는 아니지만 거의 처음과 다름없는 사람이 이렇게 공격적으로 말을 내뱉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괜히 자비를 베풀고 굳이 모으고 있던 힘을 써가며 악마랑 분리시켰나 싶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가 뭔지도 알면 저런 소리를 내뱉을까.
“용건만 말씀하세요. 아니면 바로 갈게요.”
그가 일어날 준비를 하자 금비는 핫, 하고 눈을 크게 뜨며 다급하게 그를 손을 붙잡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앉아요!”
염라는 귀찮아서 뿌리치고 갈까 했지만 또 그녀가 이상한 소리를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귀찮아질 것 같아 그는 자리에 다시 착 앉았다.
그녀는 안 떠나서 다행이라는 듯 작게 안도의 숨을 쉬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심각한 건지 마음을 굳게 먹고 말하려는 듯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마음을 정한 그녀는 둥그런 눈에 힘을 꾹 쥐고 말했다.
“나, 퇴마사 되게 해주세요.”
“…….”
염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 잘 안 들어온 듯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커피는 제가 사는 거니까 잘 드시고, 다음엔 뵙지 말죠.”
그가 갑자기 일어나려 하자 금비는 이게 아닌데, 하며 그가 가기 전에 재빠르게 일어나서 다시 그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왜요!”
염라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가는 팔을 보며 누군가의 팔과 오버랩 된 듯 쯧 혀를 차며 적의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제가 그쪽을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전 다른 퇴마사랑은 전혀 달라요. 그쪽이 저한테 배울 수 있는 건 없단 뜻입니다.”
“그게 뭔데요?”
“퇴마에 대한 지식도 없으신 분한테 장황하게 설명해 줘 봐야 알아듣지 못해요. 애초에 퇴마사들도 못 알아듣겠지만. 아무튼 그쪽은 퇴마랑 전혀 관련도 없으니까 다른 일 알아보세요.”
염라는 억세게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나가려고 하자 그녀는 악에 바친 듯 소리쳤다.
“전 그 이후로 귀신이 보인단 말이에요!”
카페가 떠나가라 소리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금비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끌시끌했던 생활소음이 가라앉고 오싹할 정도로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돌변했다.
스스스―
이내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쑥덕이는 소리.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흉보는 소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와중에 염라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더니 주위 시선을 의식한 듯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 없는 말을 속삭였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원랜 죽었어야 할 인생이었지만 제 변덕으로 살아난 거니까 귀신을 보는 건 죽다 살아난 대가라 생각하고 살아가세요.”
어쩜 이렇게 어이없고 냉정할 수가. 죽었어야 할 인생이지만 변덕으로 살았다니?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는 그로 인해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최대한 용기를 갖고 외친 건데 그는 그걸 무참히 차버렸다. 무책임한 그의 행동에 화도 나고,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됐다는 창피함, 구겨진 자존심이 무자비하게 섞여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꽉 쥐고 입술에 피가 나도록 꽉 물었다.
염라가 그녀에게 떨어져 멀어지자 그녀는 그제야 눈물을 글썽이며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 테이블 위에 있는 초코 라테를 들어 그를 향해 홧김에 던졌다.
철퍽―!
“…….”
쑥덕거리던 가게 안이 또다시 조용해졌다.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자 점원을 포함한 가게 안 사람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가게 점주 정도.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라테가 정확하게 그의 머리에 맞고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옅은 핑크빛 피부를 따라 내려가며 하얀 목 티를 검붉은 커피색으로 물들였다.
머리와 옷에 초코 라테 냄새가 배어 나오자 염라는 옷 버렸다는 듯 아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내 머리에 이고 있던 종이컵을 손으로 툭 건드려 떨어뜨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커피를 마시며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아 구경거리와 가십거리가 된 그녀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는 다시 제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떨었다.
드디어, 드디어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나 찾았을 때, 그것은 그녀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상 이것도 재능이랑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그냥 얻어 걸린 거니까.
퇴마가 뭔지도 모르고, 사실 귀신만 보면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이 남자를 찾을 게 아니라 어디 점집이나 절이나 성당 같은 곳을 찾아갔어야 했을지도.
좀 전, 퇴마사들 찾아서 자신을 퇴마사로 키워 달라 부탁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우선 점집부터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아주 우연히도 악마로부터 자신을 떼어낸 남자를 만난 것이었다.
앳된 얼굴이 취향이기도 했고, 자신을 살려준 은인이기도 했으니, 자신이 귀신이 보인다 하면 어떤 동질감을 얻고 함께 해주지 않을까 작은 기대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에 부응해 주기는커녕 그 근처도 못가고 냉정하게 차버렸다.
“바보, 멍청이 같아.”
더 심하게 말하면 병신. 도대체 뭔 짓이란 말인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대하고 있다니. 부모님이 알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그렇게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 정도 기분이 진정이 되자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보통 이러고 있으면 다가와서 손수건 같은 거 건네주거나 마지못해 같이 가자고 하거나 할 텐데.’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인가. 현실은 드라마보다 비참하니까.
그녀는 더 이상 일없단 생각에 울긋불긋해진 눈가를 비비고 일어났다.
다시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해야지. 뭘 해야 할지 모르지만 뭐라도 하면 뭐라도 생기겠지.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며 쑥덕이는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고 카페를 나섰다.
“……?”
카페를 나서자마자 그녀는 부어오른 눈을 크게 뜨며 앞을 바라봤다.
방금 전 자신을 찬 남자가 커피를 마시며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뭐, 뭐예요?”
뭐야, 이 흔한 드라마 같은 상황. 그녀는 괜히 가슴이 쿵쾅거리고 설레었다. 다음 대사는 아마도…….
“잊고 말 안했는데 세탁비 내놓으시죠. 커피 값이야 그렇다 치고 남이 사준 커피를 아무리 화가 나도 유분수지. 사람에게 던져요?”
“하.”
그럼 그렇지. 금비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핸드백 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를 곱게 접어 던졌다.
탁―!
이번에도 그냥 맞을 줄 알았던 그는 순식간에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날아오는 지폐를 쥐고는 다시 잘 펴서 돈을 세고 있었다.
“모자를 것 같은데.”
금비는 뭐 이딴 남자가 다 있지 생각하며 한 대 치고 싶은 감정을 참기 위해 숨을 꽉꽉 눌러 담았다.
“세탁소까지 따라오시죠. 값이 얼마인지나 한 번 봅시다.”
“아, 네.”
금비는 더 이상 그를 향해 호의적인 미소는커녕 오히려 적의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졸졸 쫓아갔다. 어쨌든 커피를 던진 건 자신이 잘못한 것이고 세탁비 정도야 얼마든지 내주고 얼굴에 침이나 뱉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번화가를 빠져나가 주택가로 들어온 염라와 그 뒤를 조용하게 따라 걷고 있는 금비. 금비는 추운 듯 앞을 채우고 빨개진 코를 찔찔 거리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세탁소 가는데 어디까지 가는 건가. 그냥 다 때려 치고 도망갈까 했지만 그러면 왠지 저 저급한 남자와 똑같은 수준이 될 거 같아서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쫓아갔다.
“……?”
그런데 그가 이동한 곳은 좀 달랐다.
세탁소라고 보기엔 누가 봐도 집. 보통 세탁소 간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작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금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멀뚱히 대문 앞에서 서성였다.
염라는 그녀가 따라오는지 아닌지 관심 없는 듯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야? 아씨, 나만 두고 그냥 들어간 거야? 뭐 저딴 남자가……!”
덜컹―!
5분 뒤 패딩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캡 모자를 쓰고 손에는 코트와 하얀 목 티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따라오시죠.”
말 안 해도 갑니다, 하며 금비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애꿎은 돌멩이만 박차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잠깐 걷고 보니 금비는 그가 왜 자신의 집에 들어간 건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거기서 옷을 벗고 맡길 수는…….’
금비는 잠시 그의 몸을 훑어보듯 위아래로 스캔했다. 패딩 때문에 몸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으나 다리는 생각보다 얇았다. 남자의 다리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으나 그녀의 기억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남자 다리가 그렇게 얇지만은 않았건만 생각보다 얇아 혹시 그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상상조차 하고 있었다.
주택가에서 한 5분 정도 더 걷자 번화가와 주택가 사이에 작은 슈퍼마켓이 보였다. 그리고 같은 건물 안에 세탁소 간판이 걸려 있는 것도 발견했다.
“아, 어서 오세요!”
세탁소 아저씨가 밝은 표정으로 염라를 맞이하자 염라는 옷에 묻은 커피 자국을 가리키며 이것 좀 지워줄 수 있겠냐고 했다. 세탁소 아저씨와는 친한 듯 둘의 대화는 어색함 하나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문이 좀 밀려 있어서, 내일 쯤 오셔야 할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급한 건 아니라서. 가격은 얼마나 할까요? 선불로 내고 싶은데.”
“아아, 네.”
세탁소 아저씨가 가볍게 손가락 두 개를 펴자, 염라는 그에게 돈을 선불로 내고는 내일 찾아오겠단 말을 남기고 세탁소를 나왔다.
결국 그녀가 기껏 따라왔어도 한 게 없었다.
“…왜 오라 한 거예요?”
“그러게요. 다시 돌아가세요.”
“…….”
금비는 당장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올 뻔했다. 아무리 사람이 참을성이 많아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사람의 인내심을 어디까지 시험하려는 건가.
아니, 그녀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참고 있던 인내심이 폭발해 그녀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잠깐, 저기를 봐요!”
확하고 그의 안면을 후려칠 찰나, 위협이라도 느낀 건지 염라가 한쪽을 가리켰고,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 같은 모습에 금비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도로 너머의 상가. 상가 입구에는 늙수그레한 노파가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숙자인가 싶었으나 노파의 눈에는 눈동자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
귀신. 그것도 여태 보던 귀신과는 좀 다르게 섬뜩했다. 노파도 그녀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걸 알아차린 걸까, 마치 태엽인형이 태엽이 덜 감긴 채 움직이듯 드드득 떨며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후웅―!
자동차가 지나간 순간 노파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노파가 사라졌단 걸 인지하고 그녀가 염라에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키야아아아!”
노파가 나타나며 그녀를 놀래 켰다.
“꺄악!”
삼류 영화처럼 갑툭튀로 놀래키자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그녀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느새 노파가 낄낄거리며 저 멀리 도망치듯 멀어지고 있었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귀신으로, 사실상 무섭게 분장한 것과 다름없었다.
“…아씨!”
사람이나 귀신이나 왜 이렇게 놀리는 걸 좋아하는 건지. 그녀는 쿵쾅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귀신 보는 건 진짜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