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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 : 소울 콜렉터 1권 (4화)


2. 찰거머리 (1)

도시의 번화가.
옅은 핑크빛을 내는 불그스름한 피부를 가진 검은 머리의 앳된 얼굴의 남자.
그는 그의 피부와 대비되는 하얀 목티에 검은 롱코트를 입고, 막대사탕이나 입에 물고 날백수처럼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에 벤치에 앉아 사람이 지나다니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하아.”
그는 추운 겨울의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시선을 돌려 심심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봤다.
며칠 전에 만난, 귀여운 얼굴의 여성의 몸에 빙의 된 악마를 만난 뒤 그의 마음은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 있는 바다에 빠진 것처럼 울적한 기분이었다.
말로는 반드시 돌아간다고 했지만 막상 외치고 나니 자신이 왜 그랬나 싶었다.
그는 저승의 지배자인, 아니 저승의 지배자였던 염라대왕이었다. 자신이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한 여동생의 배신과 함께 저승사자들이 저승의 삶을 부당하게 느끼고 들고 일어나며 저승에서 죽을 뻔한 상황을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말 그대로 ‘탄핵’당한 것이었다.
저승에서 도망쳐 나온 상황이 떠오르자 갑자기 부아가 치민 듯 입안에서 살살 녹이고 있던 막대 사탕을 으득 깨물며 요새 탄핵당하는 게 유행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자신이 벌써 저승에서 도망쳐 나온 지 1년.
1년 동안, 정말 사람 같지 않게 살았던 나날이었다.
양의 세계, 소위 인간세계라 부르는 곳에는 천 년 전에 잠깐 유희를 온 이후로 처음 온 것이기 때문에 너무 많이 변한 선진 문물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저승에서 혼들의 일생을 관찰할 때 변화된 세상을 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박 겉핥기식. 마치 공룡 박물관에 가면, 공룡의 뼈가 전시된 걸 보고 저렇게 생겼구나, 하고 단순하게 인지하는 것과 다른 게 없었다.
주술로 신분증을 만드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돈이나 금을 만드는 건 왜 그렇게 절차가 복잡한지, 고유 번호가 있는 건 또 뭔가. 다행히 옛날 시대의 유물 몇 개를 가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땡전 한 푼 없이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야 했었다.
1년 동안 어찌어찌 살 만한 월세 집과 이 사회를 배우기 위해 여기저기 일터도 많이 다니며 그는 이제야 막 세상을 깨우친 어린 아이 수준의 지식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인간 세계에 녹아들어 살다보니 여기도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승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이곳에서 여자 하나 잘 만나서 잠깐 동안의 유희를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평화로운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는, 그가 저승으로 돌아가야 할 계기가 생겨났다.
영혼을 인도하고, 퇴마사들을 도와 인간세계에 있는 악마들을 퇴치하는 저승사자들이 어째서인지 악마들은 잡지 않고, 인도해야 할 혼을 악마들처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는 염라대왕이었던 그가 저승의 율법으로 철저히 금지시켰던 일. 저승의 질서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걸 느낀 그는 저승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저승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당장 저승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동생이었던 염리에 의해 가지고 있던 힘이 전부 봉인을 당했고, 남은 힘이라고는 고작 1할. 겨우 이 정도 가지고는 염리를 필두로 저승에 있는 그 대군들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다음은 자신과 동급이자 저승을 같이 관리하는 신들. 시왕(十王)들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일단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은 저승이 멸망해도 염라와는 달리 신계에서 놀고먹으면 되는 일이었기에 도와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신계가 위협받는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가 도움을 요청해 봐야 비웃기만 할뿐 도와주지 않을 것이리라.
결국 저승에 다시 돌아갈 방법은 하나. 최대한 힘을 모아서 저승으로 돌아가는 단순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며 힘을 언제, 얼마나 모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염라대왕은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최상위 신이었다. 그런 그가 힘이 1할밖에 남지 않았고, 다시 힘을 모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이곳에서 힘을 쌓아야 하는가.
심지어 힘을 모으기 위한 방법으로는 죽은 생물의 백, 생물의 남은 넋이자 혼의 육신이라 불리는 백(魄)을 흡수하는 것과 저승의 율법으로 금지한, 모든 생물의 핵인 혼(魂)을 먹는 악마들이 하는 방법뿐이었다.
스스로 법을 어기고 혼을 먹는 방법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될 일이며, 심지어 먹을 수 있다 쳐도 아마 지구상의 생명체란 생명체는 거의 다 사라져야만 그의 힘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남은 건 혼보다 조금 못한 백을 모으는 방법. 백은 혼이 새로운 육신을 갖고 태어날 때마다 생겨나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공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염라가 원래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모든 게 그에게 좋지 않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그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안전하게 백을 모으기로 했고,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있으려고 했다.
며칠 전의 악마만 안 만났다면.
자신의 속을 살살 긁어 대는 통에 결국 화가 난 그는 홧김에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악마와 염리에게 전하라니. 나 잡아줍쇼 하는 짓 아닌가. 염라는 자신이 멍청함을 떠올리며 자책하듯 키득키득 웃다가 얼굴 확 일그러뜨렸다.
“아, 제기랄!”
또다시 그때의 멍청했던 일이 떠오르자 그는 애꿎은 벤치만 쾅 치며 분을 표출했고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 자신을 쳐다보자 그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쩝 하고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세계에 살면서 힘을 축적하려면 돈도 모으고, 힘도 모으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난 방법이 바로 퇴마.
주변의 악령이나 악마를 퇴치해서 최대한 인간세계가 어지럽혀지는 걸 막아내고, 그로 인한 보수도 받고, 힘도 차곡차곡 쌓고. 무려 일석 삼조였다.
저승사자들이 악마들과 악령을 잡지 않고 악마들은 있는 힘껏 날뛰어주는 덕분에 그의 퇴마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마들을 퇴마하며, 최대한 저승사자들의 눈을 피하면서 힘을 축적할 때까지 기다린다. 이후 최소한 본래 힘의 7할만 모으면 염리를 치고, 저승의 율법을 어긴 저승사자를 모두 처단. 이 세상이 안정이 된다면 저승으로 돌아가 저승의 질서를 다시 바로 세우고, 다시 모두가 두려워하는 염라대왕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막연하지만 그것이 그의 현재 계획이었다.
그런 바쁜 와중에 그는 오늘은 쉬기로 했다. 당장 저승사자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저승사자들은 지금의 염라 모습을 알아보진 못할 테니 급하게 쫓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일주일을 악마랑 악령만 잡고 돌아다니기엔 너무 피곤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매일 일을 하는 건 능률을 낮추는 법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할 일 없이 벤치에 앉아 휴식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흠, 집에서 자기 좋은 날씨군.”
쌀쌀한 겨울이라 여기에 계속 있기에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 했고, 남들의 눈치도 보이니 그만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찾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꽉 안고 그를 붙잡아 세웠다.
“……?”
팔에 느껴지는, 약간의 볼륨감. 크진 않더라도 적당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팔을 붙잡은 누군가의 두 팔은 백옥 같은 피부에 뼈와 가죽만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얇았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앳된 목소리, 고등학생인가, 생각하며 요새는 다들 발육이 좋군, 하고 고개를 돌렸다.
검은 단발머리에 앞머리를 일자로 잘랐고, 빠져들 정도로 까만 눈과 적당하게 자란 속눈썹, 하얀 피부에 생기 있어 보이는 불그스레한 볼. 거기에 젖살이 덜 빠져서 귀염성이 가득한 여성이었다. 누가 봐도 고등학생의 모습이었지만, 이 시간에 학생이 학교에 있지 않고 여기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구냐?”
“네?”
너무 만만해 보여서 하대해 버렸나. 일 년이 지나도 말투를 고치기 어렵던 염라는 당황하고 있는 여성을 보며 다시 말했다.
“누구십니까?”
되게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외모가 예쁜 건 수도 없이 봐온 그였기에 그런 여성이 붙어 있어도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다.
“에에, 뭐야! 저 몰라요?”
그녀는 실망했다며 예쁘장한 인상을 찡그렸다.
“하루에도 길거리 지나다니면 보이는 사람이 수십 명인데 제가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합니까.”
그러고는 놓으라며 팔을 흔들자 여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꽉 안기며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와, 제가 그냥 지나가는 사람 수준이었단 거예요?”
“굳이 정확히 말하자면 ‘행인1’수준이란 거죠. 기억 안나요, 그쪽 누군지! 그러니까 좀 놔요!”
보통 이렇게 까칠하게 말하면 실망하고 물러서거나, 사람을 잘못 본 줄 알거나, 더 심하면 눈물을 글썽였을 텐데 여성은 그 세 가지 모두 해당이 안 되는 듯 찰거머리처럼 붙었다.
“너무하네! 그럼 이것도 기억 안나요?”
여자는 염라의 팔을 자신의 한 쪽 팔로 잡고 꽉 끌어안으며 남은 한쪽 팔에 소매를 걷어 손목을 드러냈다.
“손목을 드러내면 유혹한다는 걸로 알고 있지만, 전 안 통하는데요.”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잘 봐요, 여기!”
여성이 인내심에 조바심이 난 듯 자신의 손목을 염라의 눈앞에 흔들었다.
하얀 손에 안타까움을 자아낼 정도로 거뭇거뭇한 무언가로 흉이 져 있었다. 팔찌는 아니었고, 모양새를 보니 뭔가에 꽉 묶여 있던 자국이었다.
“보여요? 전 팔이 묶였었어요!”
두서없이 다가와 두서없이 말하는데 도대체 이 여성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싶었던 그는 더 이상 상대하기 귀찮은 듯 그녀가 자신의 팔을 붙잡은 걸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헉, 기다려요!”
여성은 자신이 온 몸무게를 이용해 당기고 있는데도 질질 끌려가자 당황한 눈빛으로 힘차게 잡아당겼지만 의미 없는 짓처럼 계속 끌려가고만 있었다.
“아씨, 몸무게가 그렇게 빠졌나? 아닌데… 그래봐야 한 삼 킬로…….”
이렇게 힘껏 끄는데도 멈칫할 생각조차 없는 그를 보며 여자는 자신의 몸을 보고 중얼거렸다. 염라는 인간 형태로 둔갑했기에 인간들은 모를 테지만, 애초에 염라의 실체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크기였기에 인간 수준인 그녀가 아무리 몸무게가 많이 나가봐야 염라의 발가락 하나 조차 멈추지 못한다.
그런 걸 알 리가 없는 여성은 안면 근육까지 모두 동원해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낑낑 끌었다.
“하아.”
염라는 날파리 수준이 자신을 끌고 있어서 아무런 힘도 안 들지만 자꾸 툭툭 건드는 느낌에 귀찮은 듯 한숨을 쉬며 걸음을 멈춰서고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예요. 용건만 말하고 좀 놔주시죠.”
그제야 그가 멈추자 여성은 다시 놓칠세라 양팔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런 여성을 지그시 바라보던 염라는 뭔가 떠오른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혹시 그건가?”
혹시 기억이 난 건가, 여성은 눈을 반짝반짝 하며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전 아무것도 안 믿어요.”
“…….”
“만물의 어쩌고, 저쩌고 해봐야 저한텐 하등한 생물이 재롱부리는… 아니, 아무튼, 제가 갈 길이 바빠서.”
“아씨!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세요? 뭐 믿으라고 하는 거 아니라니까.”
사이비 종교로 오인 받자 여성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찡그리며 씩씩 거렸다.
“백이면 백 다 그렇게 말하던데요. 물론 그쪽은 보통 사람보다 더 찰거머리처럼 붙네요.”
“아, 정말! 좋아요! 숨기려고 하는 거 같아서 말 안했는데 다 말할 거야! 그쪽이 침대에 묶여 있는 내 배 위로 올라가서……!”
여성이 누구나 오해할 만한 자극적인 말을 내뱉고, 가뜩이나 번화가에 출근하려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호기심에 동해 그녀의 입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아, 잠깐!”
그제야 염라는 뭔가 떠오른 듯 그녀의 입을 다급하게 막으며 주변을 바라봤다.
싸늘한 시선. 누군가는 스마트 폰을 들고 신고를 하려는 사람까지 보였다.
“하하, 이 사람… 기억났으니까 그만해요.”
염라가 멋쩍게 웃으며 주변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굉장히 다정하게 있는 척 하려 하자, 여자는 자신의 입에서 그의 손을 거칠 게 떼 내며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라봤다.
“기억나요?”
“…알았으니까 어디 다른 데로 가죠.”
“왜요?”
염라는 그녀의 표정이 알면서도 물어보는 짓궂은 표정이란 걸 읽어내고 가볍게 무시한 뒤 물었다.
“혹시 커피 좋아하세요?”
염라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회유하려고 하자 여성은 눈알을 굴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금 귀엽게 배시시 웃었다.
“전 초코 라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