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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 : 소울 콜렉터 1권 (2화)


1. 저승에서 온 퇴마사 (2)

한금비. 스무 살의 그녀는 어릴 적부터 굉장히 평범하게 살아왔다. 밝은 성격에 원만한 대인관계. 엄청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엄청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마치 흰색과 검은색 중에 어디로 가겠냐고 하면 딱 그 중앙에 설 아이.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살아왔던 아이는 특출 나게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릴 때 다 한 번씩은 생각한 미래를 그녀만이 꿈 없이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는 영재교육, 과외, 음악 학원, 미술 학원 등을 다니며 튀지도 않게 적당히 공부하다가 자기 취미 없이 중학교로 올라오고, 중학교 때는 미술 학원과 음악 학원을 그만두고 수학 학원과 영어 학원을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거기에 더해 골고루 가르치는 학원을 하나 더 다니며 하루하루 오로지 공부, 공부, 공부밖에 하지 않는 일과였다.
그나마 숨 쉴 구멍이라고는 시험이 끝난 후 학원가기 전에 잠깐 친구들과 노래방. 이게 전부였다. 고등학교 때 연애 한 번 한 적 없이 외길로만 달려온 인생.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 살아온 그녀는 높은 성적을 거두며 드디어 이 일이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닥쳐온 시련은 그를 한 번 더 저 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대학에 과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다들 아무런 생각 없이 가는 곳으로 정할까.
하지만 막상 주변의 친구들은 하나 씩 꿈을 가지고 있었다.
유치원 교사, 배우, 사서, 통역사, 바리스타 등. 그 주변에 자신만 맴돌고 있는 듯 꿈이라고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텅텅 빈 유리병 밖에 남지 않은 자신.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가족은 내가 어디로 가든 밀어주겠다고 하지만 정작 도와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 갈 길은 알아서 가라는 듯… 스스로 걸어본 적 없는 내가 어디로 갈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공무원 시험을 볼까? 또 공부인가? 지겹다, 지겹다, 지겹다. 빠져나오고 싶어서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또 아무런 목표 없이, 닿지 않는 물결을 잡아보려는 것처럼 빈 공간을 휘젓는 행위를 또 해야 하는가.
그녀는 애써 밝게 웃으며 친구들과 돌아다녔다. 대학교 생활을 아주 잠깐 동안 만끽해 봤다.
하지만 왜 내 친구들은 다 각자 꿈이 있는 걸까. 왜 다 하고 싶은 게 있는 걸까.
인터넷에서 보면 꿈이 없어서 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던데 왜 내 주변엔 없을까, 왜 내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없을까.
왜 부모조차 이런 내 심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그녀는 무엇 하나 특출난 재능을 가져본 적도, 찾아낸 적도 없었다. 나를 위해 공부를 시켰던 그녀의 부모는 손을 잡고 이끌던 그 손을 어느새 놔버리며 가는 길을 밀어주기만 한다고 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두루뭉술한 계획이지만 확고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꿈이 뭐냐 물었을 때.
…그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녀는 방 안에 앉아 조용하게 입을 막고 오열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소외감이 들어서.
그때부터였다.
어디선가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대로 살아.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닥치는 대로 먹고, 닥치는 대로 남자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닥치는 대로 싸우고… 설령 이게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주지 못하더라도 이 슬픈 감정은 자제할 수 있지 않겠냐며 유혹했다.
남들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는데 너는 왜 그렇지 못하냐며, 억울하지 않냐며, 이제부터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냐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온몸을 맡긴 순간.
그녀는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었다.
“…….”
어둠 속에서 꿈을 꾸듯 아주 희미한 세상이 보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붙잡고 괴롭혔다. 강간을 당하고 있나? 내 몸에 왜 손을 대? 뭐하는 짓이지? 그녀는 온 몸을 움직이고 싶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두 팔, 두 다리가 묶여 있다.
‘엄마, 엄마, 도와줘요! 아빠, 어디 있어!’
애타게 부모를 부르며 찾아 해맬 때 자신의 방 밖에서 부모가 자신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 사춘기 때도 이런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다. 기껏 부모의 손에 이끌려 따라왔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파국을 맞이했다.
「죽이자, 복수하자, 마음대로 살자! 저 따위 부모는 도려내서 매달아야 해!」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듯, 마음은 살아 있는 것처럼 외쳤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렇게 결박을 당해야 해? 아, 하는 입장에선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겠구나.
‘다 죽여 버릴 거야!’
모든 흐름을 마음이 외치는 소리에 맡기자 모든 게 편해졌다.
엄마의 뱃속, 그 침착하고 잔잔하며 편안한 양수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말 오랫동안 잔 거 같다.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희미한 시야 속에서 남자가 보였다. 또 인가?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내 맘대로 살고 싶어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방해꾼이 많은 걸까.
다행인 건 이번 남자는 상당히 귀엽게 생겼다.
‘내 또래인가?’
아니 조금 더 많아 보이는 느낌. 하지만 자신의 또래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언니들이 딱 좋아할 스타일이랄까.
그때 귓가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퇴마사군. 크흐흐, 이번엔 어떤 오빠야? 목소리 들어보면 뻔질나게 오던 다 늙어 빠진 쭈그렁탱이 늙다리는 아닌 거 같은데?”
누가 말하는 거야, 아니 그걸 인지하기도 전에 자신의 입이 움직였다는 걸 인지했다. 성대를 타고 바람결에 따라 흘러나오는 목소리.
맙소사, 내가 지금 이런 목소리를 내는 건가?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묶여 있구나.’
상황은 전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하지만 점점 뿌연 안개가 걷히고 있는 기분이었다. 밤의 장막이 활짝 열리며 눈부신 태양이 자신의 방 너머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는 상체를 숙이고 사랑을 속삭이듯 속삭였으나 그 소리만큼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희뿌연 세상이 맑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뭐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드디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걸 알게 된 그녀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던 거고, 뭘 하는 거지? 희미한 정신 속에서 자신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단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자신의 몸의 뭔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걸 느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피가 돌기 시작했고, 성대가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이 소리치듯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것이 된 성대로 마음껏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정신을 차린 그녀는 염라를 향해 힘껏 소리치고 있었다. 악마의 족쇄에서 빠져나온 건가, 의외로 강한 정신을 가진 아이라고 생각한 염라는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책상에 있던 그녀의 노트를 하나 찢고 펜꽂이에 있던 펜을 쑥 뽑아 무언가를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아가씨, 조금만 참아요. 그놈이 그쪽 잡아먹지 못하게 꽉 잡고 있어.”
“자, 잡으라뇨?”
금비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이 좀 이상하단 건 알고 있지만 그녀는 심령, 오컬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자신의 방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무교인 그녀의 방에 십자가라니, 부적이라니, 불상이라니. 게다가 저 낙서들은 뭐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자세한 건 좀 이따 알려줄 테니, 눈앞에 집중해.”
편안한 남자의 목소리에 금비는 눈을 끔뻑이며 정면으로 눈동자를 집중했다.
“…헉.”
그 순간,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이 녹아내려 흉측한 모습의 괴물이 자신의 몸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 남자처럼 생겼으나 피부는 보랏빛이었고, 눈알은 고양이의 눈처럼 뾰족했고, 분노에 가득 찬 것처럼 눈이 충혈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에 가슴에는 털이 북슬북슬해 마치 징그러운 짐승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어, 어…어! 저, 저기요! 싫어!”
그녀는 겁에 질려 몸을 흔들며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글을 쓰고 있던 염라는 발버둥 치는 그녀를 향해 굉장히 평화로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걱정 마, 아가씨. 그놈은 아가씨의 마음먹기에 따라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어. 지금은 아가씨 몸에 이도저도 못하고 붙잡힌 상태야.”
하지만 그녀는 들리지 않는 듯 온몸을 흔들며 격정을 내고 있었다.
“싫어, 꺼져! 싫다고오오오!”
“이런, 이런. 그런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사실 이렇게 자기 의지로 빠져나오는 사람은 몇 없는데 말이야. 좀 격한 방법을 써야 했거든. 이렇게 정신을 차리니 그런 방법도 못 쓰겠네.”
염라의 계획은 당초 이런 상태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마음 속 깊이 잠식한 악마였기에 꺼내려면 아예 그녀의 혼과 함께 통째로 끄집어냈어야 했다. 그러면 저 여성은 정신적 타격과 함께 잘못되면 자폐아로 살아갈 상황이 오기도 했다. 염라는 딱히 저 여성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악마만 족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단 주의였기에 그녀가 자폐아가 되든 상관이 없단 뜻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악마의 유혹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나온 그 정신과 노력을 높게 여기고, 심지어 그 기회를 틈타 빠져나온 악마를 손쉽게 몰아낼 수 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그녀를 멀쩡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들고자 했다.
“싫어어어어어!”
그녀의 비명이 방은 물론 집이 떠나가라 크게 외치자 항상 이런 일을 하게 되면 일어나는 상황이 왔다.
쾅―!
“문 열어! 무슨 일이야!”
“우리 딸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며 부모가 자식을 위해 소리쳤다. 금비는 구세주를 만난 듯 눈물을 글썽이며 잠긴 방문을 바라보며 외쳤다.
“엄마아아! 아빠아아!”
“후우, 정말… 귀찮은 주술이거늘.”
염라는 피곤한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종이를 들고 뭔가를 하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스스스―
그의 몸을 중심으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그 아지랑이가 보이는 듯 몸을 덜덜 떨었고, 불안감에 온몸이 옥죄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자신은 죽는 걸까? 도대체 이 남자는 뭘까? 눈앞에 있는 이 괴물이랑 한 패가 아닐까.
그때 문고리가 덜컥덜컥 흔들리며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딸한테 떨어져, 이 새끼야!”
그녀의 아빠가 달려들어 뒤에서 그를 덮쳤으며 염라는 그 힘에 놀라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악! 무슨 짓입니까!”
“너야말로 내 딸한테 뭐하는 짓이야!”
그녀의 아빠가 그를 짓누르고 격하게 막자 금비는 구세주가 드디어 나타난 느낌으로 글썽였다.
“아빠아아아!”
“우리 딸, 괜찮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아빠의 눈을 보며 금비는 부자간의 사랑과 먹먹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감동, 기쁨, 슬픔. 그런데 그 감정이 점점 검은 먹물이 뒤섞이듯 점점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 감정은 거짓이란 걸, 점점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아.”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방금 전까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괴물이 역한 입 냄새를 뿜어내며 그녀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으, 우우, 으아아아!”
금비는 다시 지레 겁을 먹으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부부는 깜짝 놀라 금비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 남자는 잡았는데 왜?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둘의 눈에는 당연히 금비와 염라가 보이는 게 보일 리 만무했다.
“엄마, 엄마! 이 사람! 이 사람 치워줘요! 내 눈 앞에서 치워달라고!”
도대체 누굴 가리키는 건가. 그녀의 시선은 천장을 향해 있었다. 천장을 향해 소리치며 치워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발을 동동 굴리며 금비 아빠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 어떡해요! 어떡해요!”
그러자 금비 아빠는 이 모든 게 자신이 깔고 있는 남자 때문이라는 듯 머리를 짓누르며 소리쳤다.
“내 딸한테 뭐 했어! 당장 멈춰!”
염라는 가만히 이 상황을 보며 한 숨을 푹 쉬었다.
아마 이 악마의 농간이었으리라. 어쩐지 왜 이리 일이 쉽게 풀리나 하고 있었다. 이 간악한 악마는 부모가 자식의 정에 약하다는 걸 미리 알고 몸에서 일부러 나와 그녀가 가족을 향해 감정으로 호소하게끔 만든 것이었다.
다른 퇴마사들도 이 때문에 물러간 것이라 판단했다.
‘똑똑한 새끼.’
과연 악마다운 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