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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환생기 (18화)

배덕자의 마을 ― (3)


프쉬케는 자신의 뱃속을 관통한 검날을 보며 불신감과 극심한 고통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믿을 수 없었다. 벌써 십여 년째 옆에서 모시면서 성은을 받아왔는데…….
그녀의 불신 어린 눈에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는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파테르의 모습이 어렸다.
“어차피 폐기할 때가 되었으니까. 크크크, 너도 그만 신께 가야 되지 않겠나…….”
“커허헉… 파테르시여…….”
대검에 복부가 뚫려 죽어가면서도 신성을 부르짖는 나체의 여자. 사람을 폐기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 . 하지만 그런 기괴함과 잔혹함을 목격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죽음의 기운에 질식된 방 안은 무겁고도 공포스러운 침묵만이 감돌뿐이었다.
엄한 생명을 희생시키고 나서야 살심이 줄어든 트위드가 다시 엄숙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날이 오늘내일하는 불쌍한 영혼에게 신은을 내려주었으니, 이 또한 축복이 아니겠는가.”
“파테르시여. 신은에 감사드립니다.”
“파테르시여. 신은에 감사드립니다.”
이십여 명의 여자들은 한 목소리로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프쉬케는 성찬으로 올리도록 해라.”
트위드의 명령에 어렌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년, 아비는 뭐하고 있나?”
트위드는 멜핀의 아버지를 언급하자 살심이 도는지, 다시 매섭게 올라간 눈에서 붉은 기가 감돌았다.
어렌은 괜히 눈을 마주쳤다간 화를 당할세라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자신이 친위대장이지만, 신의 대리자인 파테르의 눈 밖에 나면 죽음뿐이다. 뛰어난 전사였던 멜핀의 아버지, 사네가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리보전하고 식음을 전폐한 지 벌써 사흘째라… 오늘내일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년 아비가 편히 죽는 꼴은 못보겠어. 신이 노하고 계시단 말이야. 이방인 방문 건 마무리하고 바로 그놈에게 신벌을 내리겠어. 그리고 멜핀. 그년. 그 조그만 년이 문제인데, 일단 무조건 잡아와! 크크크.”
트위드의 입가에는 살소가 맺혔고, 그것을 본 어렌은 급히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마을 앞 이방인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들에게 신벌을 내려라. 혹시 그럴 일 없겠지만 네 선에서 처리가 불가능하다면 굳이 건드리진 마. 그러다 신군에 피해가 가면 손해니까.”
어렌에게 할 일을 지시한 그는 석조 의자에서 인간세계로 내려가 알몸으로 그의 신은을 기다리는 여자들과 한 몸으로 얽히기 시작했다. 옆에 가슴이 참혹하게 갈라져 죽어나자빠진 여자의 시체가 있었으나,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조치한 일 역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

“왜 이렇게 문도 안 열어주고… 꼬맹이, 너 마을 주민 맞냐?”
로렌트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툴툴대었다. 그럴 만한 게, 벌써 마을 입구에 도착한 지 한 시간여나 지났다. 로렌트와 헤른은 미카엘에게 마을에 도착했으니 우리의 소임을 다했다며 멜핀을 두고 가자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멜핀이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해야 된다면서 그냥 저렇게 묵묵부답이었다.
“죄… 죄송해요. 이제는 가셔도 되는데. 지금 미카엘 님들이 계셔서 안 열어주시는 걸 수도 있어요. 이제 그만 가세요. 예?”
“도련님. 꼬맹이도 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당사자가 가라고 하니까. 우리 이만 가자… 응?”
미안해하는 멜핀과 투덜대는 이들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미카엘은 눈앞에 비친 마을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하였다.
1시간 가까이 살펴본 결과, 좀 이상한 곳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중원의 화전민 마을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마을의 규모는 상당했다. 중앙의 건물을 중심으로 빼곡히 둘러싼 건물이 일백여 개나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건, 건물들의 상태는 양호한 게 거의 없었다. 특히 외벽 쪽에 위치한 건물은 천장과 벽 곳곳이 죄다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서 과연 저기서 사람이 살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반면 안쪽에 위치한 소수의 건물은 재질이 좋고 상태도 양호하였으며, 맨 가운데 있는 건물은 이렇게 옹벽한 마을에 있는 것치고는 의외로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튼튼한 석재로 이루어져 있는데다 지붕 쪽에는 나름대로 문양도 낸 것이, 한껏 멋을 부려 도심지에 있는 귀족가의 고급저택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통 평민의 주거 공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나름 괜찮은 모습이었다.
지금 마을에서 가장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마을을 둘러싼 방어벽과 중앙의 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멜핀아. 저기 지붕 문양.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
미카엘의 말에 멜핀이 두려운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었다.
“저 문양은 태양신 휘페리온의 상징이고, 저기는 태양신의 대리자인 파테르의 거처예요.”
무슨 화전민의 마을에 태양신은 뭐고, 대리자는 뭐란 말인가. 미카엘은 의구심에 재차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파테르가 뭔데?”
“그…는 우리들의 수호자이자 신의 대리자예요.”
멜핀이 감히 불경을 입에 담는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미카엘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아무래도 이건 수상하다.
저기 망루를 지키는 사람들.
다른 사람은 워낙 거리가 멀어 안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극도로 발달된 미카엘의 시력에는 이들이 똑똑히 보였는데, 마을에 먹을 게 없다는 멜핀의 표현과는 다르게 잘 발달된 근육과 적당히 살이 오른 모습은 상당히 영양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미카엘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마을의 방어벽 바로 옆에 설치된 망루에서 누군가가 나타났고, 망루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호오…….”
작은 감탄성.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기감이 발달한 미카엘에게는 경지가 확연히 느껴졌다.
로렌트와 최소한 비슷해 보이는 경지인 에퀘스 하급. 내공만 따지면 일류고수 수준은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마음속의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화전민의 마을 같은 곳에 정규 기사급이 있다니.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게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물이 우글거리는 지역에 살려면 그 정도 되는 이가 있다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지도.
‘일단 관망하자’
태도를 결정한 미카엘. 그때, 망루 위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우리 마을을 내방하신 외지인들이여, 어떻게 오셨는지 용무를 말씀해 주십시오.”
무도한 무리가 산다는 배덕자의 마을에 맞지 않게 격식 있는 말. 그 주인공은 미카엘이 주시하고 있던 사내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멜핀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미카엘 님. 이제 그만 가세요. 예? 제발요. 부탁이에요.”
안달이 나는지 발까지 동동 굴렀는데, 그 모습을 보니 더욱 가기가 싫어졌다.
“저자가 누구인데 그러지?”
미카엘의 말에 우물쭈물하던 멜핀이 이제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저분은 파테르의 친위대장 어렌이에요. 진짜, 진짜로 강해요. 삼년 전인가 마을을 허락 없이 방문한 사람을 죽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러니 제발 가세요. 예?”
미카엘은 작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 마. 네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아라네아를 내가 다 처치했잖니. 거기다 여기 모든 것을 얼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옴므트리체도 있으니까 안심해.”
“저… 정말 그럴까요?”
“그럼. 안심해도 돼.”
미카엘의 말에 옴므트리체 역시 멜핀의 손을 잡아주자 그녀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쳇, 나도 몇 마리는 처리했다는 말이지.”
로렌트는 자신은 아예 번외로 취급하는 미카엘의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구시렁거렸다.
한편 미카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단 그냥 갈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단 그들의 꿍꿍이속을 파헤쳐 보기로 했다.
“우리 잠깐 재미있는 놀이 하나 할까?”
미카엘의 계획이 설명될수록 로렌트와 헤른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트와빈 백작령의 수습 기사, 로렌트.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여기 있는 소녀의 안내로 누추한 이 마을로 발길을 이끌게 되었다. 어서 문을 열어 영접하라. 쉬고 가는 답례는 톡톡히 하겠다.”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톤. 얼굴 표정은 굳었고, 몸은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망루까지의 거리 덕에 받아들이는 당사자는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정은 딱하나 우리는 외부인을 받지 않소. 마을의 안전 때문이니 이해해 주시오.”
높은 곳에서 말하는 탓에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목소리. 로렌트는 다시 미카엘의 일러준 말을 그대로 읊어대었다.
“의심 많은 자여. 그대의 무례를 이번만은 용서하리라.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고결한 혈통 귀족, 미카엘 도련님과 헤른 도련님. 그리고 명예를 아는 기사, 나 로렌트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어서 빨리 열어라. 그리고 마물들의 습격으로 피곤해 지친 우리를 위해 뜨거운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하도록 해라.”
철없는 귀족 일행임을 한껏 드러내는 절정의 연기. 할수록 연기가 느는 것이 희극 광대의 기질이 다분히 보였다.
그리고 상대는 절정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
“그러시오. 그렇단 말이지요… 흐흐, 정말… 잘 되었소.”
어렌이 보기에도 거리가 멀긴 하지만 과연 기사라고 말하는 이 말고는 마을의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기사라고 있는 작자는 제대로 된 이가 아니라 겨우 수습 기사라고 한다.
아무리 어렌이 바깥 사정을 모른다지만 이 정도는 안다.
“큭큭큭… 일이 쉬워지는군.”
득의의 미소를 흘린 그는 마을의 출입을 재가한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문을 열어라.”
어렌의 명을 받은 성문지기가 도르래를 밀기 시작하자 두터운 헤르헤 나무에 철을 댄 강철 쇠사슬로 양쪽에 매여진 도개교 형식의 문이 철커덕 소리와 함께 밑으로 서서히 내려지기 시작했다.
“방어에 최적화된 마을이군.”
미카엘은 내심 내려진 성문 크기에 혀를 내둘렀다. 쿵! 하는 소리가 땅을 울렸는데, 먼 거리임에도 그 두께만 어른 몸체 두 명이 겹쳐 있을 것 같은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내려진 성문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활을 소지하고 있는 인원 이십여 명과 미카엘이 주목한 한 사람. 어렌이었다.
미카엘은 로렌트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저들의 수준이 어때 보여? 로렌트.”
“조금은 놀랐습니다. 배덕자의 마을에 이정도 군기라니. 웬만한 영지병은 뛰어넘는 것 같습니다.”
“맞아. 확실히 뛰어넘었지.”
한 손에 활과 허리춤에는 대검을 소지한 경무장 인원 이십여 명은 오러는 얼마 없어 보였지만, 절도가 나름 몸에 배어 있었다.
“저기 맨 앞에 선 자는 너하고 수준이 비슷하다.”
“에이, 설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