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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환생기 (17화)

배덕자의 마을 ― (2)


검은색 물감이 흰 도화지에 붓으로 흩뿌려진다.
점점이 아름다운 선이 갈대처럼 휘날리고, 그렇게 공백에 검은색의 아름다운 물결이 수놓아진다.
상황을 모른다면 무척이나 예술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아라네아 새끼!”
하지만 현실은 로렌트가 검에 눌어붙은 아라네아의 점액질 피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는 것에 불과했다.
“아, 진짜. 꼬맹이는 도대체 우리 있는 곳까지 어떻게 왔대.”
한껏 신경질적인 반응이나 미카엘 빼고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여정. 어떻게 어린 소녀에 불과한 그녀가 거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럴 만한 게, 겨우 세 시간 가는 동안 벌써 네 차례나 아라네아 무리와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로렌트는 꼭 한 마리씩은 맡아서 신체 강화 없이 싸워야만 했다.
그 결과 온몸에 자잘한 상처와 함께 탈진 증세까지 오고 있었다.
미카엘은 혀를 찼다.
“어찌 있는 걸 활용을 못하니. 오러를 좀 제대로 써라.”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나마 오러를 쓰니까 이렇게 버티는 거예요.”
억울한 표정을 짓는 로렌트였으나, 미카엘이 보기에는 비효율의 극치였다.
“굳이 신체 강화를 안 하더라도 오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만 해도 이런 게 가능하다고.”
말과 함께 검에 살짝 검기를 불어넣는 미카엘이었다. 저 싸우는 데만 바빠서 미카엘이 검기를 일으키는 장면을 처음 본 로렌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우와. 도련님이 세신 줄은 알았지만… 역시 에퀘스 중급이셨습니까?”
“검기 발현이 에퀘스 중급이었나?”
미카엘의 반문대로 검기 발현은 에퀘스 중급의 상징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오러 메핑이라는 말로 대신했지만 말이다.
피곤을 잊은 듯 눈이 또롱또롱 해진 로렌트의 표정에 미카엘은 피식 웃었다.
“야. 이건 지금의 너도 가능한 거야.“
“거짓말.”
당최 믿지 못하니 완맥을 낚아채 오러를 주입시켰다.
“어… 어… 이게 어떻게.”
로렌트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는데, 그 이유는 완맥이 잡히지 않은 손에 들려 있던 검에서 희미한 검기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느낌. 잘 기억해. 내가 이끈 경로대로 오러를 인도하면 검기가 맺힐 거야.”
미카엘이 손목을 놓았음에도 그저 멍한 표정을 짓던 로렌트는 굳은 표정으로 검을 쥐었다 폈다를 계속하였다.
그러기를 이십여 분.
드디어 로렌트의 검에는 아까보다는 옅긴 했지만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검기가 살짝 맺혔다.
“으… 으아!! 나… 나… 도련님! 오러 메핑! 오러 메핑. 우왓!”
“어떻게 여기는 오러 연공법이 이렇게나 비효율적인지, 되는 게 당연한데 말이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방방 뛰는 로렌트 앞에서 미카엘은 혀를 찼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헤른은 미카엘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해줘!! 오러 메핑 만드는 방법!”
“넌 오러 연공법이나 더 연마해. 넌 오러가 모자라서 시도할 수도 없어.”
오러가 모자란다는 말에 헤른은 작게 입을 비죽였다.
“자, 출발.”
미카엘은 일행들이 어느 정도 휴식을 취했다는 생각에 짧은 휴식의 끝을 고하였다.
그러자 아까와는 달리 로렌트는 의지에 차 있었다.
“네, 갑니다. 가요. 흐흐, 아라네아 더 안 나오나.”
“아, 나도 오러 메핑 하고 싶은데. 흑흑. 그리고 나 지금 이고 있는 짐 너무 무거워.”
이게 꾀병만은 아닌 것이, 어느새 짊어진 헤른의 등짐에는 무려 40여개나 되는 아라네아 등껍질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아라네아의 등껍질이 그나마 돈이 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고, 등껍질 운반 담당은 전투에 별로 도움 안 되는 헤른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이다.
헤른은 피멍이 든 어깨를 직접 까서 보여주며 사정하였다.
“미카엘. 이 사촌 형이 죽겠어. 응? 제발. 이 등껍질, 인간적으로 너무 많지 않냐?”
“안 그래도 누가 거미 새끼들 죄다 얼려버려서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닌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것만 아니었어도 등껍질이 50개는 넘었을 텐데.”
옴므트리체는 앞서가려다 그 소리를 듣고 움찔하였다. 하지만 이왕 말을 꺼낸 김에 미카엘은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하였다.
“옴므트리체는 1서클이라면서 왜 그렇게 빙계 마법이 센 거야? 다른 마법은 젬병이면서.”
“그건… 제 체질이 특이해서…….”
저렇게 숫기 없어 보이는 모습만 보면 천상 여자인데.
미카엘은 혀를 찼다.
그때 그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투정이 다시 들려왔다.
“이젠 한계야. 제발 등짐 좀 나눠 줘. 저 꼬맹이도 몇 개 끌라고 그래… 응?”
“그 무거운 것을 우리 멜핀이 어떻게 끌고 가나?”
미카엘은 괘씸한 말을 하는 헤른을 째려보았다. 움찔하는 헤른. 하지만 진짜로 그에겐 한 톨의 여력도 안 남아 있었다.
“저… 정말 오죽하면 동생인 너한테 부…탁하겠니. 나 진짜 한계야.”
겨우 몇 시간 만에 퀭해진 두 눈. 그것을 보자니 아무리 미카엘이 철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지만 측은지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몸이 저렇게 곯았다니.”
희망적인 미카엘의 말에 헤른의 표정이 반색하였다.
“그, 그렇지. 너도 인간이라면…….”
하지만 다음 말은 헤른을 기절초풍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역시 등짐을 나르려면 강건한 육체가 필요하겠지. 알았어,이제부터 로렌트처럼 로비츠 연공법을 정식으로 연마하는 것을 허락할게. 이건 나만의 비전인데 특별히! 허락하지. 사촌 좋다는 게 뭐야.”
“아… 안 돼!!”
헤른의 얼굴은 마치 말린 무화과마냥 핏기가 바싹 마른 표정이 되었다.
그걸 매일 하라니. 어제 같은 그 고통을? 그 고통을 매일 겪느니 그냥 죽는 게 낫다.
어제 30분 하는데도 돌아버리는 줄 알았는데?
절망과 분노에 찬 그를 향해 따뜻하게 감싸오는 손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제 로비츠 연공법의 동반자(?) 로렌트였다.
환히 웃고 있는 로렌트.
자신만 갖고 있었던 아픔을 남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이던가.
“같이 하자구요. 헤른 도련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로렌트 경, 아니 아저씨!!”
로렌트 연공법 가입을 권유하는 체험자 로렌트. 강매를 안 당하려는 헤른의 실랑이가 이어지는데, 앞쪽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던 멜핀에게서 드디어 마을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어요. 우리 마을이 저기 보여요.”
멜핀의 말에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졌다.
“아, 진짜 다 왔네.”
“나 미치는 줄 알았네. 이제 해방이다!! 흑흑흑. 잘 가라, 꼬맹이. 다시는 보지 말자.”
겨우 4시간만의 여정. 그러나 더없이 힘들었던 여정의 끝에 배덕자 마을의 정경이 모습을 드러내자 안심을 한 헤른과 로렌트는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마을 정경을 바라보는 미카엘의 눈빛은 웬일인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조그만 창 하나밖에 없었지만 태양이 내리비치는 것 같은 방 안.
그 착각을 들게 한 건 태양이 휘감는 걸 연상시키는 빨간색 휘장이 온 방 안을 감싸안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휘장의 중심은 바로 중앙의 큰 석조 의자.
수놓아져 있는 조각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웅장한데다가 석조 의자 크기 자체가 과연 사람이 앉을까 싶을 정도로 크고 거대하다.
처음 이 방 안을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절로 이 석조 의자에 앉은 사람에게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외지인이 이곳에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군. 한 3년만인가.”
그 석조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내로부터 질문이 나왔다.
약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
각진 얼굴형의 길고 굵은 눈썹, 그리고 이마서부터 시원하게 내려온 턱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정리된 긴 턱수염까지. 어느 고위 귀족가의 귀족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의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
이 사내에게서 조금 흠을 찾자면 눈빛이 혼탁하고 눈이 위로 치켜져 있어 다소 음침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인다는 것.
“그렇습니다. 파테르. 신의 대리자시여.”
시립해 있던 어렌은 석조 의자에 앉은 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극도의 예를 표했다.
하지만 이를 행하는 사내는 결코 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차고도 넘치니 말이다.
석조 의자에 앉은 이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렌. 저들이 왜 왔을까?”
어렌이라고 불린 사내는 질기고 신축성이 좋은 라이레거(마물의 한 종류) 가죽으로 된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오른쪽 눈가는 짐승의 발톱에라도 당했는지 삼지창 같이 길게 세 개의 줄로 된 상처가 나 있었고, 온몸 곳곳에는 잔 상처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거기다 온몸의 근육은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전투에 특화된 근육이 빼곡히 채우고 있어 딱 봐도 경험 많은 전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주인인 헤사다 트위드 앞에선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제 생각에는 우연히 이곳으로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망루를 지키고 있는 초소병에게 물어보니 벌써 1헤나(1시간) 넘게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 거기다가…….”
급격히 말끝을 흐리는 어렌의 행동에 트위드는 그를 의문스레 바라보았다.
“거기다가… 뭐 말인가?”
“죄송합니다. 신의 대리자시여. 그 무리 중에서 멜핀을 본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뭐라? 멜핀이!!”
어렌의 말을 듣자 사내는 얼굴을 징그럽게 일그러뜨렸다. 분노에 찬 그의 얼굴은 준수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치켜진 눈과 어울려 그를 잔인하게 보이게 하였다.
“그년이 어떻게 마을 밖으로 나갈 수가 있나? 앙? 마을 방비를 그따위로밖에 못해?”
좀 전의 나른하면서도 위엄찼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 시립해 있던 어렌과 벌거벗은 채 엎어져 있던 이십여 명의 여자들이 벌벌 떤다.
“신의 대리자시여. 노여움을 거두소서.”
“파테르시여.”
하지만 트위드의 화는 좀체 누그러지지 않았다.
덜컥.
벽면에 걸려 있던 대검을 대뜸 집어 든 그의 행보에 공포는 더욱 확산되었다.
이미 눈이 벌게진 그는 살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눈과 마주칠까 사람들은 고개를 더욱더 숙였다.
트위드는 가장 먼저 그의 측근이자 이 일에 가장 책임이 많은 어렌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애써 참으며 분노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렌은 마을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 현존하는 에퀘스급 전사.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를 허무하게 화풀이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 파테르는 조금의 실수도 용서치 않는다. 크크.”
괴소와 함께 뽑아든 검. 휘장의 색이 반사된 검날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듯이 보였다. 그 불길한 색은 희생양을 찾아 더운 피를 향해 질주했다.
“커억… 저… 저를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