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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환생기 (16화)

배덕자의 마을 ― (1)


미카엘은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미남을 싫어하는 여자도 있던가. 아니, 있긴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를 제외하고 이런 심미관의 소유자를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미카엘의 이런 혼란스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현실감을 찾은 그녀는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거예요. 하지만 같은 남자끼리니까 상관없으시지 않나요? 그저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쯧.”
미카엘은 혀를 찼다. 그러고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가슴까지 여미어져 있는 붕대를 가리킨 것.
이미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가리킨 것인데, 그녀는 이를 달리 받아들였다.
“아, 까먹고 있었네요. 화살을 뽑아야 되는데…….”
“이미 뽑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통증이 거의 없어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카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포션을 썼으니까.”
“저,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눈은 더욱 감동으로 물들었다.
사실 포션까지 써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치료해 줄 의무 따위는 없었기 때문.
의뢰 대상을 보호해야 할 용병이 오히려 도적으로 돌변했고, 자신 또한 이유야 어쨌든 그 일행이었으니 같은 도적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귀한 포션까지 써주다니…….
거기다 화살에 맞은 상처를 이렇게 거의 완쾌시킬 정도라면 족히 중급 이상의 포션.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찌 그리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별로. 어차피 난 포션 별로 쓸 일도 없고. 신경 쓰지 마라.”
딱히 대가를 바라지 않은 행동. 그녀는 더욱 감격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대가로 당분간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비록 자신이 귀족을 싫어하고 어떤 사유로 미남형을 싫어하지만, 목숨을 구해준 대가는 그 모든 가치를 뛰어넘었다.
거기다 소녀를 구해주는 것으로 보아 귀족답지 않은 의로움까지 갖추고 있다.
그녀가 고마운 마음에 다시 한 번 어깨를 어루만지니, 손가락에 까끌까끌한 감촉이 감돌았다.
‘이게 뭐지?’
뭔가 싶어 로브 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붕대가 아주 솜씨 좋게 감아져 있었고, 매듭 또한 예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더욱 감격했다.
‘어쩜 이렇게 세심할 데가.’
그의 세심한 배려에 더욱 고마움을 느끼던 마법사는 문득 붕대를 매려면 가슴을 동여맨 압박붕대를 풀어헤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꺄악!”
뒤늦게 알아채고 비명을 지른 그녀.
그 모습을 보던 미카엘은 혀를 찼다.
이제야 알아채다니… 이 여자, 좀 둔하다.
혹시나 더 큰 오해가 발생하기 전에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흠흠. 아, 가슴? 벼… 별로 못 봤다.”
“짐승.”
진짜로 짐승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에 미카엘은 머리를 한 차례 긁적거리며 한쪽 구석에서 이미 자고 있던 소녀를 가리켰다.
“당신이 구한 저 소녀. 이름이 멜핀이라더군. 멜핀이 감은 거야. 오해하지는 마.”
“예… 예?”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만약에 내가 치료했으면 아주 기겁을 했겠군.”
멜핀을 시켜 치료하기를 잘했다는 생각과 왠지 모를 서운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모닥불이 탁탁거리는 불빛 아래 순간 말이 없어진 두 사람.
문득 미카엘은 여태껏 상대의 이름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저는 오… 옴므트리체라고 합니다.”
“…옴므트리체? 이름이 참 특이한데. 꼭…….”
‘억지로 남자 이름을 지어낸 것 같은 데’라고 말하려다 말을 얼버무렸다. 왠지 모르게 상대의 얼굴이 슬퍼 보였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이 없어진 두 사람.
이번에는 옴므트리체가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 미카엘 도련님?”
“왜 그러지?”
“감히 제가 물을 것은 아니지만… 아까는 왜 그리 잔인하게 손을 쓰셨나요? 물론 그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너무 수법이 잔인하셔서 감히 여쭤봅니다.”
“난… 원래 그렇다.”
미카엘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생에서 피를 손에 묻히지 않은 날이 있던가? 전장에서 아니면 무림에서 그의 손에선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도련님은 아직 어리시잖아요.”
“난 어리지 않다”
“그… 그러시군요. 귀족이시니 저희와 기준이 다르시기도 하시겠지요.”
의미를 달리 받아들인 옴므트리체는 살짝 얼굴 표정을 굳혔다. 보아하니 귀족에 대한 감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뭐, 상관없겠지.’
마음을 다잡았지만 은근히 그녀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일까, 한참이 지난 후에 툭하고 말을 껴냈다.
“조금은 나이에 맞게 행동해 보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 보면 그간 현생의 미카엘로서의 자각이 없긴 했다. 항상 판단의 가치를 전생일 때에 맞춰 행동했다. 그런 만큼 현생의 삷에 조금 더 충실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자신은 전생처럼 송 황제의 꼭두각시가 아니니 내키는 대로 살면 그만이다.
미카엘은 조금은 더 가벼워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라. 내일부터는 바쁠 테니.”
아까보다 좀 더 편해진 표정에 옴므트리체는 안도했다. 감히 귀족에게 어쭙잖게 나섰던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던 차였기 때문이다.
“주무세요. 제가 여태까지 잤으니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불침번은 필요 없어. 내가 여기에 마물이 못 들어오도록 조치를 취했으니까.”
“네에?”
옴므트리체가 반문을 하였으나, 미카엘은 어서 누우라는 듯 손짓했다.
양보 없는 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누운 옴므트리체.
그녀의 발밑에는 어느새 따뜻한 담요가 깔려 있었고,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모닥불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아, 따뜻해.’
그녀는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아까 같은 악몽은 없을 것 같은 밤. 안 들리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미카엘 님.”
“별말씀을. 특이 취향 아가씨.”
미카엘은 용케 그 목소리를 듣고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자기가 자리한 곳이 마물이 우글거리는 지역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고, 깊어가는 밤과 꺼져가는 모닥불에 헤른과 로렌트의 신음 섞인 잠꼬대가 어우러지며 그날의 험난했던 하루를 보내주고 있었다.

***

다음날.
미카엘은 먼저 일어나서 어제 모닥불을 피웠던 자리를 정리하다 옴므트리체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말을 걸었다.
“일어났네. 몸은 좀 괜찮나?”
“예. 도련님 덕분에 이제는 거의 괜찮아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밤새 마물이 안 달려들었네요.”
사실 그녀는 전에 없는 가뿐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깬 이후에는 악몽을 시달리지 않은 것이다. 따뜻한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인 것일까?
그때, 미카엘이 그녀가 말한 것에 대한 답을 하고 있었다.
“음. 믿으라고 했잖나.”
“푸웃.”
앳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오십 살은 넘은 듯한 중년스러운 말투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에 급하게 입을 가렸지만 미카엘은 정작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다. 그 표정에 자신감을 얻은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미카엘 님.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말투는 왜… 그렇게 하세요?”
미카엘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였다.
“내 말투가 어때서 그러지?”
“꼭 나이 든 아저씨처럼 말하잖아요. 했잖나∼ 그렇군∼ 이렇게요.”
옴므트리체의 말에 미카엘은 그제야 자신의 말투가 이상했음을 알아챘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그 나이 든 말투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말투를 버리자니 낯간지러워서 도저히 말투를 바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옴므트리체는 뭘 생각하는지, 멍한 얼굴을 보이고 있는 미카엘을 보자 웃음이 절로 또 나왔다.
“후훗.”
“왜 자꾸 웃나?”
그러자 비웃나 싶어 슬쩍 미간을 찌푸린 미카엘이었고, 그 말에 그녀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하였다.
“아… 제가 웃었군요. 이렇게나 자주 웃을 수도 있었군요.”
자신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옴므트리체의 모습에 더 화내기도 무엇하여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뻘쭘하게 서 있던 미카엘. 그때, 그런 그를 구원해 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앗! 언∼니. 깨셨네요. 저 때문에… 흐흑. 많이 아프셨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배덕자의 마을 출신 소녀, 멜핀.
하지만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미카엘은 마음속으로 멜핀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멜핀은 옴므트리체의 품안에 쏙 안겼는데,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움찔하긴 했지만 이내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이 작은 소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멜핀 때문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봐, 지금은 멀쩡하잖니?”
“정말, 정말 괜찮아요?”
따뜻한 그녀의 말에 안심을 한 멜핀은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눈물을 쓱쓱 닦았다.
옴므트리체는 밝게 웃으며 팔을 휙휙 돌려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에 이제는 웃음을 보이는 멜핀이었다.
“그것보다 언니가 부탁이 있는데…….”
“뭔데요?”
“당분간 언니가 여자라는 건 숨겨줬으면 좋겠어.”
“예엣? 미카엘 님은 이미 아시는데?”
어젯밤 사이 많이 친해진 덕에 귀족님이 아닌 미카엘 님으로 호칭하는 멜핀이었다.
옴므트리체는 미카엘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미카엘 님께서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지켜주실 거야. 그렇죠?”
강요하는 듯한 그녀의 눈에 미카엘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정 원한다면. 일단 저기 저 바보 둘은 아직 모르니까.”
미카엘이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바로 로렌트와 헤른이 있었다. 어제 어찌나 호되게 당했는지, 아침이 밝았음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둘이서 손을 꼭 부여잡고 자는 모습이었다.
“참 다행이네요. 그런데 두 분은 아직 안 일어났네요?”
“어제 힘들었거든. 흔들어 깨우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못할 거야.”
옴므트리체는 그 사실에 안심하며 로브에 달린 두건을 벗었다. 여자라는 정체를 숨기느라 너무 오래 쓰고 있어서 불편했던 탓이다.
두건 속에 어떻게 이런 삼단 같은 머릿결이 숨겨져 있던 것일까? 은하수 같이 곱게 흐르는 갈색 물결이 고운 손길에 따라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흩날렸다.
미카엘은 그동안은 옴므트리체의 얼굴을 보면서 잘생겼다라고만 느꼈는데, 여성스럽게 머리를 다듬는 모습을 보니 웬일인지 두근거렸다.
“내… 냄새 나죠?”
옴므트리체는 빤히 보는 미카엘의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남자들 틈에 끼어 있느라 두건을 벗지 못하고 다닌 탓에 괜히 찔려서였다.
미카엘은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일부러 툴툴대었다.
“말이라고 해? 저리 가서 털어.”
그 말에 상처를 받은 옴므트리체는 입을 삐죽 내밀었고, 미카엘은 옴므트리체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되니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크흠, 내가 왜 이러지? 별일이군.’
미카엘은 민망한 마음을 감추려 괜히 툴툴대었다.
“이제 두건 써. 저 녀석들 깨워서 가야 한다고.”
옴므트리체는 짧았던 해방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다시 고운 머리결을 두건 속에 숨겼다.
다시 고이 위장된(?) 모습을 확인한 미카엘은 로렌트와 헤른을 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깨우기 시작했다.
“아앗… 제발. 그만, 그만.”
“아아아, 미카엘. 제발. 나 형이야, 형. 응. 안 돼, 안 돼.”
하지만 그런 잠투정이 미카엘에게 통할 리 없었다. 미카엘은 발로 사정없이 그들의 엉덩이를 한차례씩 걷어찼다.
“앗! 누구얏!”
“아파. 아프다고.”
“확, 그냥… 오전부터 로비츠 연공법 들어갈까 보다.”
그 무시무시한 말에 두 사람은 언제 그렇게 요령을 피웠냐는 듯 군기가 바짝 든 병사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미 로비츠 연공법에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그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실상 미카엘의 노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