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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환생기 (15화)

드러난 정체 ― (2)


“살려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일어나라고. 난 이런 과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제가 처음에는 귀족님인 줄 모르고 감히 함부로 얼굴을 뵈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지금의 네 태도가 더 나를 불편하게 해. 그러니 어서 얼굴을 들도록 해.”
하지만 어린 소녀는 고개를 들 줄을 몰랐다.
미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소녀의 목을 들게 하는 일이 이리 힘들 줄이야.
차라리 적의 목을 따오라고 하는 것이 속편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는 수없이 미카엘은 마법사를 향해 도움의 눈길을 청하였다.
그러자 그 저의를 눈치챈 마법사가 소녀를 조금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어깨를 다독이며 몇 마디 묻기 시작했다.
미카엘보다는 어렵지 않은지 소녀는 머뭇머뭇하더니 마법사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고, 그것을 본 마법사는 살짝 몸을 떨더니 조용히 소녀의 몸을 안아 주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몰라 하는 일행에게 마법사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과일 하나.
“이게 뭐지?”
“미카엘 님. 이것은 ‘테테’라는 겁니다. 너무나 써서 사람은 못 먹는 과일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왜?”
그 말에 마법사는 소녀를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소녀는 이것을 구하러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뚫고 왔다고 하네요. 이 과일 몇 개를 구하려고요.”
“…아.”
지금까지 그저 덤덤하기만 했던 미카엘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눈앞의 이 가냘픈 소녀. 어디에서 그러한 용기가 나왔다는 것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왔기에 겨우 이것을 구하러 왔단 말인가.
“넌 어디에서 왔지?”
“저, 저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왔어요.”
그 말에 놀란 것은 마법사였다.
잠시 후, 격동의 감정을 억누른 마법사가 그 놀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 워툼데세로 구역 안에서 마을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곳은 단 한군데밖에 없어요. 바로… 배덕자의 마을이요.”
“배덕자의 마을!!”
로렌트와 헤른은 왜 그렇게 마법사가 놀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왜라고 묻는 듯한 미카엘의 표정에 로렌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였다.
“배덕자의 마을은 몹쓸 것들이 있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영주의 지배가 싫어서 도망친 것들이죠. 저 소녀가 가엾기는 하지만, 현시대를 안정시킨 영웅의 후대 치세를 못 견디고 도망친 사람들의 무리일 뿐이니 어떻게 구제의 길이 없네요.”
“웃기고 있네. 영웅의 치세는 무슨…….”
영웅의 후손이란 허울로 폭정을 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로렌트에게는 힐난을, 그리고 소녀에겐 따뜻함을 담은 미카엘이 말하였다.
“마을까지는 내가 데려다 주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겠지.”
“예엣?! 도련님, 안 됩니다.”
“미카엘, 안 된다고…요. 난 못 가…요.”
미카엘의 말에 정작 발작을 한 것은 로렌트와 헤른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 조그만 소녀도 여기까지 왔는데 너네들이 못 간다고? 그러고도 사내라고 할 수 있냐?”
“도, 도련님. 그게 아니라… 그곳은 현세의 지옥이라 불리는 곳이란 말입니다.”
“마을까지 가는 길이? 아니면 마을 자체가?”
“둘 다요.”
미카엘의 얼굴은 침중해졌다. 생각해 보면 오죽하면 이 어린 소녀가 사람은 써서 못 먹는 과일을 구하러 여기까지 왔겠는가.
“그렇게 말하니 난 더 가고 싶은데? 너는 그렇게 험악한 길을 이 어린 소녀 혼자 보내고 싶냐?”
“아, 아니, 그래도… 그 아이는 배덕자의 마을 아이인데…….”
미카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흠칫하였다. 특히나 헤른의 반응이 격했는데, 아직도 잔상 속에 아까 전 무자비로 살인을 자행하던 미카엘의 모습이 남아 있던 것이다.
“좋아. 얘만 데려다 주고 오는 것으로 하지.”
확정적으로 매듭짓는 미카엘의 말
어쩔 수 없이 로렌트와 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로엠시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지도를 왜 도적에게서 뺏었겠는가?
‘거기까지 가면 일단 끝이지.’
속으로 슬며시 미소를 짓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어린 소녀가 머뭇머뭇하며 말을 걸었다.
“…가…감히 귀족님께 그런 결례를…….”
“괜찮아, 괜찮아. 그 정도쯤이야.”
어차피 더 빠른 길로 관통해서 가려고 마음먹던 중이었다.
그런 만큼 가는 길에 떨구어 주고 가면 그만인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 정작 감격한 이는 따로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법사는 오로지 미카엘의 입만 바라보다 드디어 소녀를 마을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겠다는 승낙의 말이 떨어지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어이, 어이. 그렇게까지 네가 좋아하면 어떡해?”
“…….”
미카엘이 쓰러진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그가 이미 의식이 없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맞다. 그 화살.”
잊고 있었다.
워낙 아픈 기색 없이 따라왔던 터라 그가 화살을 맞은 것을 깜빡한 것이다.
비록 빗겨 맞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장시간 내버려두다 보면 상처가 덧나서 잘못하면 팔을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어떻게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을 수 있지? 헤른, 너라도 나한테 얘기해야 할 거 아니야?”
“아, 나도 까먹고 있었다고…요 . 네가 그렇게 살벌한 기세로 사람을 쪼개 버리는데 어떻게 제정신을 차리냐고…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헷갈리는 어투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헤른이 얼레벌레 변명을 하였다.
이맛살을 찌푸린 미카엘은 얼른 마법사를 안고 치료할 만한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풍덩한 로브를 덮고 있어서 몰랐는데, 안고 보니 의외로 가볍고 여린 체구.
마침 르와벡 나무가 있는 나무둥치가 있기에 그곳에 자리를 편 미카엘은 일단 박힌 화살부터 양끝을 잘라 뽑아내고 제거하였다.
그러자 뚫린 구멍에 핏물이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둘러 지혈을 위해서 로브를 벗기기 시작하다 보니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꺼림칙한 느낌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겉옷 안에 불필요하게 속옷이 많이 껴입어져 있었던 것.
“무슨 남자가 옷을 이렇게나 많이……. 무슨… 남자가… 헙!”
“그…분 남자 아닌데.”
같은 여자끼리 통하는 게 있어서인지, 진작에 정체를 알아챘던 소녀의 중얼거림이었다.
미카엘은 일단 벗겼던 로브를 다시 재빨리 입혔다.
그러고는 지혈을 위해 허공을 격하고 빠르게 점혈을 가하기 시작했고, 수영이 더해질수록 피는 빠르게 멎어들었다.
혈맥을 봉하여 일시적으로 출혈을 막은 것이다.
한시름 돌렸다는 살짝 미간을 편 그였으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건 진짜 임시방편.
치료를 위해서라면 로브를 벗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치료하기에는 주변의 시선도 있으니 난감한 구석이 있었다.
“그럼 일단 치료에 제일 방해되는 요인부터 제거하자.”
우선순위를 정한 미카엘은 로렌트와 헤른의 뒤를 은밀히 점했다.
그러고는 몰래 그들의 마혈을 봉했다.
“어, 왜 그러세요?”
“미… 미카엘! 왜 그러는 거야?”
방심하다가 당한 둘은 당황하여 소리를 쳤다.
심지어 헤른의 말에는 물기까지 젖어 있었다. 그만큼 아까의 살행을 자행하던 모습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
미카엘이라고 뭐라 둘러대기가 궁색했다. 그래서 기껏 둘러댄 것이…….
“잠깐만 여기서 연공법 좀 하고 있어”
“에엣?!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잔말 말고 잠깐만 하고 있어.”
“마… 말도 안 돼요! 으갸갸갸!”
반항하려던 로렌트에게 밀려온 것은 익숙하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로비츠 연공법이었다.
“하루라도 강해지는 것이 내가 덜 귀찮아지는 길이겠지.”
“으…으으으으.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걱정 마라. 이번에는 동료도 있으니.”
영문 모를 말을 한 미카엘은 이번에는 겁에 질려 있는 헤른에게 로비츠 연공법의 술에 따라 진기를 도인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악! 자… 잠깐. 이… 이거 뭐야… 뭔데 이렇게 아파!”
“시끄럽다.”
본인이 시켜놓고 시끄럽다며 아혈까지 막아버리는 미카엘
그러자 그 둘은 눈만 뒤룩거리며 고통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으으(죽겠어. 말이라도 하고 싶다. 이 악마 같은 도련님).’
‘으으으으(미친 미카엘 놈. 이 악마. 나 오늘 여기서 죽나 보다… 어어엉).’
미카엘은 손뼉을 털고 일어났다.
당장은 고통이나, 이것이 그들에게 장래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에 죄책감도 없었다.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저기, 잠깐 이리 오는 게 좋겠는데.”
“저… 저요?”
겁먹은 듯 눈을 깜빡이는 소녀.
“응, 그래.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내가 치료하기가 조금 곤란한 구석이 있어서 말이야. 네가 같은 여자이니 나를 도와 치료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아… 네! 알겠습니다, 귀족님!”
작은 여아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녀 또한 자신 때문에 다친 마법사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다.
미카엘은 저도 모르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구나.”
귀엽게 느껴져서 대수롭지 않게 행한 행동. 어린 소녀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미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숨길 수 없는 호감이 담겨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내 말대로 하려무나.”
미카엘은 포션과 천을 소녀에게 건네었고, 미카엘의 지시에 따라 소녀의 조그만 손이 야무지게 오감에 따라 여자 마법사의 얼굴 표정은 점점 편하게 변해 갔다.

***

‘헤르미안, 흐흐흐… 당신도 이런 게 좋지요? 응? 하하하. 아, 맘에 안 든다고? 그럼 이번엔 이걸로 할까?’
“아… 안 돼!!”
큰 비명과 함께 상체를 일으킨 여자.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홍건하게 맺혀 있었다.
“휴우… 꿈이었구나.”
심연 속에서 부르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는 현실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두려움을 주었다.
“깨었나 보군.”
그녀는 화들짝 놀라. 완드부터 찾았다.
비록 10골드를 주고 산 싸구려이나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경계를 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일단 동료이니 말이야.”
“아…….”
어느샌가 완전한 밤이 되어버렸는지 루비콘(만월)의 달이 하늘 높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 은은한 빛에 비치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누… 누구시죠!”
악몽에서 막 깨서 그런지 현실감을 찾지 못한 그녀의 말에 미카엘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다, 미카엘 공자.”
바로 앞에선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달빛의 후광과 모닥불의 은은함을 받자 더없이 신비롭게 보였다.
어떤 여자라도 반할 만한 모습.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꿈에서 그 녀석의 얼굴을 봤기에 오늘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후우… 후우…….”
거친 한숨을 쉬는 그녀의 모습에 미카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아… 죄송합니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잘생긴 얼굴만 보면 반사적으로…….”
미카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뒷말은 빤하지 않겠는가?
‘잘생겼다는 얘기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흡족하게 받아들였겠지만 최근의 아메린 건으로 인해 외모만 좋아하는 여자들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졌던 터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시… 싫거든요. 죄송해요. 제가 잘생긴 사람을 싫어해요.”
“에… 싫다고?”
“예. 제가 좀 특이해서… 죄송해요,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