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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환생기 (12화)

뜻하지 않은 여정 ― (4)


마물과의 첫 전투가 마무리되고, 용병단장은 낭패한 행색으로 미카엘에게 다가왔다.
“저기… 미카엘 대공자님. 저희랑 동행하시지요.”
온몸에 난 잔상처와 먼지는 꽤나 전투가 힘들었음을 예상케 했다. 그 뒤쪽에 보이는 용병단원들 역시 잔상처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고, 헤른과 그 미청년 마법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왜 동행해야 하지? 싫어. 지금 상태로 이동하는 게 난 딱 좋군.”
톰핸슨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제는 같이 동행하자고 하더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마 톰핸슨에게 좀 더 큰 목적이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폭발했을지도 몰랐다.
“도련님. 여기서 전진하면 더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힘을 합쳐서…….”
“나 하나도 안 위험해. 그리고 겨우 이 정도 마물에 뭐가 위험하다고 그러나?”
인내심의 한계를 자극하는 깐죽거림.
톰핸슨은 기사의 보호를 자신의 능력인 양 착각하는 저 귀족 애송이의 입을 주먹으로 막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도련님. 설마 이곳이 이 정도로 끝이라고 보시면 큰 오산입니다. 이곳은 보다 더 센 마물들 즐비합니다. 우리가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합니다.”
“더 센 마물?”
미카엘은 잃었던 호기심을 다시 되찾았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돌아갈까 했는데, 방금 이 말에 조금만 더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말에 더 마음이 동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흐흐흐, 더 센 마물이라… 좋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같이 동행하시죠. 위기 속에 꽃피는 우정, 얼마나 좋습니까? 괜찮죠, 도련님?”
망설이던 찰나 행동을 결정해 버린 로렌트의 행동에 미카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관도의 끝에 이르러서 이 용병대가 어찌 행동할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좋아. 그럼 같이 가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도련님.”
감사를 표하는 용병단장.
미카엘은 살짝 비린 미소를 보여주었다.
“과연 감사할까?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같이 가보자구.”
“예… 예?”
“아니다. 후후, 그나저나 저기 저 녀석은 설득한 거냐?”
미카엘은 손가락으로 헤른을 가리켰고, 용병대장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둘러 그에게 다가간 용병대장. 뭐라고 쑥덕쑥덕하더니 잘 얘기가 안 되었는지 헤른은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용병대장이 뭐라 더 얘기하니 헤른은 씩씩대면서도 참는 표정을 보였다.
이런 상황을 보니 과연 용병 털보 사내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졌다.
“하기사, 얼마 못 갈 인연이니 궁금할 것도 없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미카엘이었다.

***

그 뒤로 한 2마일이나 이동했을까. 그 짧은 이동 중에 일행은 이클롭의 습격을 두어 번 더 받아야 했다.
그 결과 용병단은 말할 것도 없고, 기사인 로렌트 역시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여기서 안 지치고 멀쩡한 사람은 바로 미카엘뿐.
그가 이렇게 멀쩡한 이유는 물론 강하기 때문이었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그냥 뒤에서 안전하게 논 탓이다.
사실 남들 모르게 슬쩍슬쩍 해치웠지만, 그냥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유일하게 일행 중 노는 사람.
물론 귀족이니 당연하긴 했지만 같은 귀족인 헤른마저(잘난척하면서 해치우긴 했지만) 돕는 마당에 그러니 일행들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못했다.
특히 로렌트는 무지막지하게 강한 도련님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미카엘은 실력을 내보이지 않는 게 의도적이었다.
그렇게 일행의 불만이 극대화 되었을 때쯤, 용병대 대장 톰핸슨이 다가왔다.
“도련님. 죄송한데, 여기서 조금 쉬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톰핸슨의 제안에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지. 적당한 곳에서 쉬도록.”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병들은 팔자 좋게 놀러라도 온 것처럼 풀밭에 보자기를 깔더니 진수성찬 같은 음식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휴우… 이클롭 새끼들,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킬킬, 네놈은 얼마 잡지도 않았잖아. 거기 포도주나 좀 꺼내 봐.”
등짐에 죄다 그런 것만 있는지, 베이컨과 빵, 오리고기 그리고 포도주 같은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꼬락서니를 본 미카엘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주 가지가지하고 있네.”
무려 한 달을 예정한 여정. 그런데 이렇게 부피가 큰 음식을 가지고 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여기 의심 없는 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
“우왓! 자네들, 언제 이렇게 준비를…….”
“흐흐흐, 우리 용병단 신조가 ‘먹을 때는 제대로 먹자’라서요. 기사님 같이 드실랍니까?”
“그… 그래도 될까?”

미카엘은 반색하는 로렌트를 보고 혀를 쯧쯧 찼다.
그 옆을 보니 마법사 사내도 이런 음식 장만을 예상 못했는지,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원래부터 일행이 아니었던 게 확실하군.’
미카엘이 그렇게 판단을 내릴 때 로렌트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음식 쪽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미카엘은 그의 손목을 탁하고 쳤다. 그러자 손이 음식을 집지 못하고 움츠려 들었고, 로렌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아얏! 왜 그러세요?”
“먹지 마라. 먹으면 탈난다.”
“우와, 도련님. 지금 용병단이 먹는 거라고 무시하신 거예요?”
정말 탈날까 봐 걱정되어서 말리는 말이었지만 로렌트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미카엘은 혀를 끌끌 찼다.
우직한 것은 좋지만 당최 눈치라곤 어디에도 없는 녀석이다.
봐라, 탈난다는 소리에 용병단 놈들이 괜히 찔려서 움찔거리지 않은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용병단원은 단 하나. 바로 저 곱상하게 생긴 마법사 녀석이다.
얼굴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는데, 아마 귀족에 대해 평소 꽤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이런 표정을 보고 가만 있지 않았겠지만 미카엘은 그가 이 상황을 모르고서 행동한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더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무심한 눈길에 마법사 사내도 무안했는지 눈을 금방 내리깔았다.
‘성격 참 희한하군… 소심한 것 같긴 한데.’
미카엘은 품 안에서 꺼낸 딱딱한 건량을 씹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 번 씹어야 특유의 짭조름한 맛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한 내구도를 자랑했지만, 그래도 먹다 보니 나름 괜찮았다.
한편 난감해진 건 용병단원과 로렌트였다.
특히 톰핸슨 단장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망설임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그렇게 두 그룹 내 애매한 상황이 이어질 때쯤, 갑자기 극적인 상황 변화가 벌어졌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아직 앳된 여아의 목소리.
착각했나 싶어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저 멀리서 여아 하나가 바삐 뛰어오고 있었다.
그 나이가 10여세 가량이나 될까.
그보다 이 외진 곳에서 왜 이리 바삐 쫒기고 있는 것일까.
바로 그때, 미카엘의 의문을 해소해 주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어, 저게 뭐지? 무슨 거미 같이 생긴 놈들이 저 꼬맹이 뒤를 바짝 뒤쫓고 있는데…….”
“뭐… 뭐라고 말했습니까? 거미 같이 생겼다고요?”
화들짝 놀란 톰핸슨은 눈에 안력을 더하였다. 하지만 그는 미카엘 같은 오러가 없었기에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저것은… 아라네아!!”
“아라네아?“
그게 뭐지 하고 되묻는 미카엘의 반문에도 용병단 단장은 대답을 해주기 보다 같은 용병단 일행들을 챙기기 바빠했다.
“도망치자. 마계의 암흑지저거미 아라네아다!”
“허업! 정말이다. 아라네아다!”
그게 무엇인지 설명도 안 해주고 자기들만 부리나케 도망치는 용병단원들.
이러다 보니 어어 하는 사이에 남아 있게 된 사람들은 헤른과 그 마법사, 그리고 로렌트와 미카엘. 이 네 사람이 전부였다.
“뭐야? 아라네아가 뭔데 저래?”
“도련님. 우리도 도망쳐야 합니다. 지금 당장요!”
로렌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비록 아라네아를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그 흉명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단단한 외피. 그리고 치명적인 마비독. 무엇보다 수많은 마물 종 중에서도 최강으로 꼽히는 군집 공격.
에퀘스급 기사라면 아라네아 세 마리에서 네 마리까지는 감당하겠지만 열 마리 이상이 한꺼번에 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말이 떠돌 만큼 기사급에게도 아라네아는 공포의 존재로 통했다.
하지만 이미 미카엘의 눈에는 호기심이 동해 있었다.
“로렌트, 넌 여기 있던지. 난 손 좀 풀고 와야겠다.”
거기다 눈앞에 위험에 처한 소녀가 있지 않은가.
비록 자신이 선인은 아니지만 충분히 구할 수 있는데 구하지 않는 악취미는 없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람처럼 사라진 신형.
이러다 보니 남겨진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이 그렇게 가시면 저희들은요?!”
로렌트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달려 나가는 미카엘의 입가에는 기대감으로 웃음이 맺혀 있었다.
아까 그 이클롭이라는 놈은 너무 싱거웠다.
그때, 소녀를 삼키려고 하는 아라네아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끼어든 미카엘.
검두로 크게 벌린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타앙!
강하게 튕겨져 나간 아라네아.
오러가 아닌 단순한 육체의 힘으로 후려쳤을 뿐인데도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둥글게 말린 모습으로 무려 십장 넘게 튕겨져 나간 아라네아는 곳곳에 서 있던 수 개의 나무를 부순 끝에 그중 가장 단단해 보이는 나무 중간에 박히고 나서야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너무 간단한데.”
“아… 아니,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소녀는 구함을 받은 처지라는 것을 잊을 만큼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악명 높은 아라네아를 하찮게 대하는 태도와 위용이 기막혔기 때문이다.
크르르르르.
사십여 마리의 아라네아는 자신들의 동료가 심한 꼴을 당하게 되자 한꺼번에 달려들려고 했다.
“조… 조심하세요.”
잔뜩 겁에 질린 소녀의 표정을 본 미카엘은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고 빨리 저쪽으로 물러나 있어.”
“그… 그래도.”
망설이던 소녀는 뒷걸음질로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그만큼 사십여 마리의 아라네아가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크르르르르.
미카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턱을 후려 맞았던 아라네아는 입 부분이 길게 찢어져 너덜너덜 하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거 꽤나 단단한데?”
미카엘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투의 말이 나왔다.
“일개 미물 주제에…….”
“크르르르르.”
미카엘의 말에 화답하는 듯한 괴음.
반대로 ‘인간 주제에’라고 말하는 듯하다.
“좋아. 재미있어.”
미카엘은 지루하기만 했던 표정을 지웠다. 드디어 풀어내기 시작한 내력.
비록 표피에 대부분의 내공이 뭉쳐 있어 약 30년의 내공밖에 활용하지 못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크르르르르.”
아라네아는 그새 포위 진형으로 둘러쌌다.
그 포위진이 마치 인간의 합격진처럼 조밀하기 그지없었는데, 다섯씩 줄을 지어 일제히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