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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휴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워낙 황태자와 격 없이 지내는 이니 궁에 다녀온 줄 알았는데 궁이 아니란다. 지금 궁보다 더 급한 곳이 어디란 말인가?
“있어. 그런 게…….”
이안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난데없이 오밤중에 저택에 도착해 발칵 뒤집어 놓더니 제멋대로 외출을 감행했다. 그가 간다고 하면 못 갈 곳은 없었지만, 엄연히 전쟁 중이고 그는 사령관이었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 봤자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안 밀러를 알고 있는 휴는 순순히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상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깔머리 나오기 전에 피하는 게 좋다 판단한 휴가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전쟁 때문에 몇 년 얼굴 안 보고 살 때는 좋았는데…….
미친 황제의 정복 전쟁이 끝을 보였다. 현 황제는 미쳤다. 다행이라면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는 제정신이라는 점이다. 미친 황제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팍팍해졌지만, 시기를 잘 탄 귀족들은 전쟁 물자 조달이나 가로채기로 인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밀러가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인 이안은 그렇게 청렴한 자가 아니었고 철저한 기회주의자인 그가 눈앞에 보이는 황금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슬쩍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다본 휴가 기다란 복도를 걸어갔다. 황궁보다 크기는 못할지언정 화려함은 뒤처지지 않은 수도의 공작가였다. 몰래 왔다고는 호언장담했으나 수도에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아랫사람들의 일을 줄여 주기 위해 변복을 할 리도 만무한 상전이었다. 조금 있으면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 저택에 몰려올 것이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휴의 일이이기도 했다.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휴가 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이 있어 그 먼 곳에서 수도행을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원하던 결과를 얻은 후였는지 이안은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방금까지는 한숨이 나왔지만 상전의 불행한 모습에 저절로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휴가 응접실로 향했다. 말 많고 돈 밝히는 귀족들의 입단속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흠…….”
이안은 이른 아침에 만난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일정한 속도를 내며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이었다. 비공식적인 방문이었기에 마차에는 공작가를 상징하는 그 어떤 문양도 없었다. 하지만 겉만 초라할 뿐 안은 공작이라는 직위에 맞게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안은 오랜만에 수도의 풍경을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하루하루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전쟁터와는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입은 옷은 깨끗했으며, 아이의 손을 잡은 어머니의 얼굴은 여유로웠고 상점에는 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이안이 생각에 빠졌다. 처음 편지로 이시도르 황태자의 계획을 들었을 때 그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이시도르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다. 전쟁에 지친 튼튼한 종마들은 여인의 향기가 풀풀 나는 핑크빛 종이 쪼가리에 열광했고 잘 짜인 각본에 의해 가문에서 원하는 대로 전쟁터에 있는 귀족 영식과 수도의 영애들은 연애를 시작했다. 수도에서 시간을 죽이며 나이를 먹어 가는 영애들의 가문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의 아들을 혼인시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모두 이시도르의 결정에 찬성했다. 게다가 어차피 귀족들의 결혼은 정략이었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가문끼리 이야기를 맞추고 관대한 부모인 척 자식들의 연애 놀음을 지켜봤다. 끝이 정해져 있는 일이니 부모들 처지에서도 전혀 손해 가는 장사가 아니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는지 이시도르는 이 일로 귀족들에게 꽤 많은 자금을 뜯어냈다. 이른바 뚜쟁이 비용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황폐해진 곳을 지원할 계획이라며 좋아했다. 전쟁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뜻밖에도 연애 놀음은 처참한 전쟁의 상황을 가릴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뜻밖의 행운은 이안에게도 찾아왔다. 처음 렌이 핑크색의 편지를 서류철에 올렸을 때 이안은 본가의 휴가 미친 것인지 아니면 렌이 미친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M은 이안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암호 문자였고 겉봉투에 쓰인 M이라는 글자를 빤히 바라보고도 그것이 제게 온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전쟁터는 수많은 서류가 오가는 장소였고 전쟁을 이끌고 있다고 해서 집안의 일을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M자가 박힌 편지 봉투를 받고 이안의 미간이 굳어지자 렌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편지의 내용은 가관이었다. 다짜고짜 희롱하는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는 편지는 구를 만큼 굴렀다고 자부하는 이안이 보기에도 과했다. 아니 단순히 과한 것이 아니었다. 타자기로 정갈하게 쓴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성희롱이었다. 그것도 아주 수준 높은.
어이없는 편지 내용이었지만, 가문의 암호를 알고 있는 자가 보낸 편지였다.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 암호일지도 모르니 해석하려 노력한 제가 무색할 만큼 야하고 야했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안이 보기에도 그것은 암호로 만든 비밀 편지이기보다 한 편의 야설이었다. 그런데도 선뜻 태우려고 하면 잘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읽고 태우자 결심하고도 내일 태우자고 결심이 바뀌길 수십 번이었다. 그래서 그저 잘 정리해 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공작님 도착했습니다.”
생각에 빠져 있던 이안에게 마부가 황궁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황궁의 정문이 아니라 뒷길로 돌아왔기에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이안은 비밀 통로를 통해 금세 황태자의 집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뒷길은 복잡한 절차가 없어서 좋았다.
“어서 오게.”
예법을 생각한다면 황제를 먼저 알현하는 게 맞았다. 아니, 이안은 맞게 왔다. 다만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이가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였을 뿐이었다.
“제법 잘 어울리는군.”
“칭찬인가?”
이시도르는 업무를 보던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을 맞았다. 사촌으로 동갑의 친구로 격 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가볍게 포옹을 끝낸 후 이시도르가 이안을 소파로 이끌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고생은.”
“…….”
이시도르가 자리에 앉아 지긋이 이안을 바라봤다. 말을 웅얼거리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먼저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전쟁은…… 일주일 이내에 끝날 것입니다. 이스란은 이미 힘을 잃었고 제국의 첩자들이 이미 이스란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일주일, 그 안에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전쟁은 끝이 날 것입니다.”
이안의 말에 이시도르의 얼굴에 환희가 비쳤다. 정신 나간 황제로 인해 무의미한 전쟁이 길어졌다. 백성들의 굶주림은 더해졌고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실은?”
이안이 이시도르를 바라봤다. 이시도르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이마를 짚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저를 낳아 준 이를 해하는 일이었다. 황제는 심각한 치매 증상을 보였고 이를 틈타 젊은 황비가 황궁을 넘어 제국을 흔들고 있었다.
“이쪽도 약속대로…… 끝날 거야. 모든 준비는 마쳤어.”
이시도르의 말에 이안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황제는 미쳤다.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황제는 미쳤으나 그는 여전히 황제였고 황제라는 직책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눈을 가렸고 달콤한 말로 귀를 막았다. 황제는 더는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일주일 뒤야. 이안.”
황태자는 집무실을 나가는 이안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이 길로 이안은 곧장 전쟁이 한창인 남부로 떠날 터였다. 오는 길이 말을 타고 사흘 걸렸으니 가는 길도 사흘. 전쟁을 마치고 다시 수도로 돌아오려면 최소한 석 달은 걸릴 터였다.
이안은 고집스럽게 돌아보지 않는 황태자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왔다.
다음번에 이시도르를 볼 땐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로 볼 것이다. 한시가 급했다. 이안은 그 길로 마구간으로 가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남부로 향했다. 가장 친한 친우의 황제 즉위식에 바칠 선물이 필요했다.

[M에게.
지난번 내가 이야기한 것은 잘 시행했니?
잘 기억하고 있겠지. 나는 말을 듣지 않는 학생은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그런데 M, 너는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지난번 답장에서도 내가 낸 문제를 풀지 못했지 않니?
엉덩이를 맞아야겠구나.
엉덩이가 싫다고? 그럼 어디가 좋을까?
네가 좋아하는 곳을 알려 주렴.
그럼…… 편지 기다리마.
― 너의 S가.]

이안과 이시도르가 계획한 대로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제국의 황제가 바뀌었다. 수도는 한밤중의 반란에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했다. 첫날은 황제와 황비의 머리가 내걸렸다. 둘째 날은 황비 외척들의 집안에서 줄줄이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수도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전쟁이 한창 중인 남부에 닿을 지경이었다. 뒤가 켕기는 귀족들은 침묵했다. 하룻밤에 황제가 바뀌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황태자의 반란은 그림자 반란이라 일컬어질 만큼 소리도 소문도 나지 않았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아침이 돼서야 나라의 태양이 바뀌었다는 소식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뀐 소작농들은 그저 새로운 주인에게 허리를 굽힐 뿐이었다. 그들에게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별로 영향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납세해야 하는 이가 바뀌었을 뿐…….
이시도르 황태자는 그렇게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이 났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이안은 승리자가 되어 개선문을 통과했다. 그를 맞이한 것은 황제가 된 이시도르였다.

***

“완전히 작정했네. 작정했어. 이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벨라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나체의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모습은 저도 모르게 뒤에 누가 있는지 살피게 했다.
“네가 쓴 글은 생각도 안 해? 나는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야.”
물담배인 시샤를 길게 빨아들이며 힐다가 낄낄거렸다. 콧등에 걸친 안경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아니…….”
분명 제가 쓴 글에 맞춘 그림이기는 했다. 하지만, 글로 보는 거랑 그림으로 확인하는 것과의 차이는 엄청났다.
“어머 어머. 이런 체위가 가능해?”
얼굴이 열일하는 끌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정부와 확인해 보든지.”
힐다의 말에 끌로에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 교육받은 귀족답게 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 몰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 삽화에서 눈을 떼지 않는 끌로에였다.
달파란.
귀족 여인들이 모여 만든 후원회를 빙자한 모임이다. 제국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재력을 가진 공작가의 힐다와, 제국의 17번째 황녀 끌로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안의 여인들이 모여 만든 허울 좋은 모임은 주로 젊고 능력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그리고 모인 모두 스스로가 예술가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임의 수장은 벨라 스완. 제국 문학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문학 교수였다.
“그래도 이건…….”
벨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딱 좋구먼.”
어깨너머로 삽화를 본 힐다가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그래 평소라면 힐다의 목을 껴안고 환호하거나 더 야하게 해 달라고 구체적인 주문을 넣었을지 모르는 벨라였다. 하지만, 요즘은 꿈도 뒤숭숭하고 몇 달 전쯤 불시에 찾아온 밀러가의 젊은 공작이 자꾸 떠올랐다. 편지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하자 곧 포기했는지 연락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수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벨라의 심장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쿵쾅거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벨라의 표정을 살핀 힐다가 안경을 벗고 와인 잔을 들었다. 힐데가르트 드 타베르나.
제국 거상의 외동딸로 한때 공작이 힐다의 재산을 보고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말 그대로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돈 많은 변태 언니. 게다가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타베르나에 살 수 없는 물건은 세상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변태성이 다분한 여자가 돈까지 많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알려 주는 힐다였다. 어릴 때 돈 처들여 배운 회화를 야화로 승화시킨 그녀는 진정 돈 많은 변태였다.
“흠…….”
“뭐야 뭔데 그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상인이라 그런 것인지 나이가 가장 많아서 그런 것인지 힐다의 눈은 날카로웠다. 눈 밑이 거뭇거뭇한 거야 매일 밤 밤을 새워 마감한다는 핑계로 둘러댈 수 있었지만, 비어져 나오는 한숨을 무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일을 해서 그런지 벨라의 입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게다가 힐다와 끌로에는 이미 엄청난 비밀을 공유한 사이였다. 그런데 정작 핑크 편지의 일을 숨기자니 지켜보는 이도, 숨기고 있는 벨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편집장이 또 지랄하든?”
대외적으로 벨라의 매니저를 맡은 힐다가 들고 있던 시샤를 내려놓았다. 출판사의 사장은 힐다였으나 벨라의 담당자인 편집장은 덕후답게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쉽게 말하면 벨라의 속을 긁는데 선수라는 이야기다. 물론 실력도 좋은 자였다. 그녀의 편집 솜씨와 소위 뜰 만한 글을 추려 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끌로에가 서둘러 일어나 손을 휘저으며 창문을 열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느닷없는 벨라의 비명에 창문을 열고 돌아오던 끌로에가 걸음을 멈추었다. 양손을 펴고 얼굴을 묻은 벨라를 보며 둘은 입을 다물었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며 제국의 칭송을 한 몸에 받는 벨라 스완의 실체는 야설 작가였다. 그것도 엄청 잘나가는…….
이름을 들으면 “응?” 하게 되는 제국의 시골 남작가의 넷째 딸로 태어나 소똥을 밟으며 풀밭을 뛰어놀던 벨라가 좋아하는 것은 책 보기였다. 마을의 하나밖에 없는 서점의 단골로 드나들다 친해진 끌로에가 황제의 숨겨진 딸이었다는 것이 벨라가 가진 첫 번째 행운이었다. 사실 끌로에 어머니의 미모는 영지에서도 유명했다. 서점을 운영하며 뜨개질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반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벨라의 두 번째 행운은 우연히 본 제국의 문학공모전에 접수한 소설이 당선되면서 수도의 클라우디 아카데미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이었다. 그 시기 끌로에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하루아침에 끌로에는 제국의 황녀가 되었다. 수도로 오기 전날 밤 둘은 서로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때 끌로에는 수도 아카데미로 유학 오는 벨라를 향해 연신 ‘다행이다’를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