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밤마다 끄적거리던 소설을 벨라 대신 접수한 것은 끌로에였는데 공모전에 대상으로 당선된 사람이 열여섯 살의 소녀였다는 사실이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벨라의 소설을 읽은 심사위원들은 모두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문학 교수와 소설가였고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천재가 나타났다!’

그렇게 벨라는 정든 산골 마을 떠나 클라우디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비가 워낙 비싸 귀족 중 귀족들만 다닌다는 그곳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벨라와 하루아침에 황녀가 된 끌로에는 그렇게 수도에서 멀고도 가깝게 살 수 있었다.
말이 전액 장학금이지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문학을 전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관람해야 하는 공연도 많았고 봐야 하는 책도 많은데 모두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없었다. 말했다시피 벨라의 집은 말뿐인 남작가였다. 예술은 배가 고픈 것이라 했지만, 굶주림과 다른 이들의 멸시는 어린 벨라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아무도 관심 없어 하는 17번째 황녀의 외출이었다. 만나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수다밖에 없었지만, 수도에서 둘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였다. 황녀라고는 하나 뒷배 하나 없는 끌로에의 삶은 남작가의 영지에서보다 초라했다. 초반에야 다른 황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끌로에였지만, 곧 17번째 황녀가 나타나면서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끌로에였다.
벨라가 천재 이긴 천재였는지 아니면 야설에 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인지 첫 작품인 ‘검은 꽃’은 말 그대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벨라의 아카데미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그리고 야화를 그리는 힐다를 만나 절정에 이르렀다.
과거의 생각에서 깨어난 벨라는 주변을 돌아봤다. 힐다가 마련한 이곳은 황제의 방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빨간색에 금색 레이스로 멋을 더한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커튼을 배경으로 검은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끌로에가 어느새 힐다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난데없는 벨라의 비명에 바짝 긴장한 것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후…….”
일인용 소파에 주저앉아 있던 벨라는 다시 한번 얼굴을 묻었다.
“……벨라.”
끌로에가 힘없는 목소리로 벨라의 눈치를 보며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오른쪽에 앉은 힐다가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도 벨라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
힐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땐 얼음을 띄운 잔에 갈색 액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힐다 다운 행동에 벨라가 두말없이 잔을 받아 들었다.
“크으.”
단숨에 독한 위스키를 넘긴 벨라가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위스키가 스치고 간 목구멍과 가슴이 홧홧했다.
“저기 벨라……. 내가 뭐 실수했어?”
제국의 황녀지만 귀족의 영애보다 보잘것없는 대우를 받는 끌로에가 눈치를 봤다. 느닷없이 끌로에한테 소리친 것이 생각나 벨라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한 행동에 끌로에가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절제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 나오는 한숨을 삼킬 수가 없었다.
“하아…….”
힐다가 준 술이 독했는지 머릿속이 멍해졌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끌로에를 향해 무엇인가 말을 해 줘야 했지만, 빈속에 들어간 술은 머릿속의 생각을 정지시켜 버렸다.
‘땅 꺼지겠다.’
스스로의 생각이 웃겼지만, 지금의 심정은 땅이 꺼지든 하늘로 솟든 이대로 사라지면 좋겠다 싶었다. 벨라가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천장이 잠시 빙빙 돌았을 뿐 자신이 사라지거나 앞에 앉아 있던 이들이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열려라! 차원의 문이여!”
팍!
“으악!”
벨라의 난데없는 주문에 힐다가 미련 없이 등짝을 내리쳤다. 술김에 한 행동의 대가치고는 옴팡지게 아팠다. 취하라고 먹은 술이 한번에 확 깨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말 안 할래?”
힐다의 눈썹이 쭉 하고 올라갔다. 저것은 위험 신호!
“후…….”
“쓰읍.”
바람 빠지는 한숨 소리에 힐다가 다시 벨라를 향해 입술을 깨물었다.
“편지요…….”
“편지?”
편지라는 말에 가만히 앉아 있는 끌로에한테 눈이 쏠렸다. 그랬다. 귀족이 주최하는 예술인의 후원회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황태자를 만나고 토론하던 중 지나가듯 말했던 병사들의 위문편지에 황태자가 관심을 가졌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만난 황태자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친구인 끌로에를 구원하는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황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필요에 따라서 뒷방 늙은이나 변태에게 팔려 갈 처지의 끌로에한테 희망을 주고 싶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침실로 끌어들였고 그 와중에 생겨난 아이들은 황궁에 넘쳐흘렀다. 미모도 출중한 데다가 머리도 좋은 끌로에라면 좋은 값에 귀족에게 팔 수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끌로에는 가끔 즐겁게 웃다가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황후 소생의 황태자는 생각보다 잔인한 사람이었다. 제 동복동생인 레제 황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이라 인정하지도 않았다.
벨라는 황제를 만난, 그날 바로 한 편의 연애 소설을 완성했다. 내용은 제국의 황녀와 전쟁터의 기사가 편지로 사랑을 이루는 내용이었다. 황녀와 이름 없는 기사. 전쟁에 처참함에 용기를 잃은 기사를 아름다운 황녀님이 편지로 위로해 주다 사랑에 빠진다. 기사는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제국의 황녀. 신분의 차이로 괴로워하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황녀!
제국의 젊은 남녀가 열광할 만한 소재를 뚝딱 만들어 낸 벨라는 그것으로 황태자와 거래를 시작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지방 귀족의 작위를 가진 장남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부자 기사님을 물색하고 황태자는 그 가문과 거래를 했다. 이 편지 프로젝트의 시작은 모두 황궁에 처박혀 팔릴 날 만을 기다리고 있는 끌로에를 탈출시키기 위한 벨라의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그 핑크색 편지는 그래! 그냥 장난이었다. 오밤중 야설을 쓰다 터져 버릴 것 같은 음욕의 대상을 풀 곳이 없어 주절거리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보낸 편지를 공작이 받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여자도 가끔 확 하고 달아오를 때가 있는 법이었다. 순간의 음욕과 유난히 밝았던 보름달에 외로움이 차올랐고, 거기에 혼술까지 총 범벅이 되어 벨라는 응축된 음욕을 하얀 종이 위에 쏟아 냈다. 거기서 끝났어야 하는데……. 한창 S에 빙의하던 때라 M이 필요했던 벨라였다. M을 찾아 떠나보낸 편지에 정말 M이 대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벨라는 갈색 눈을 굴렸다. 손을 까딱거리는 힐다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 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함께 공범이 되는 것이다. 벨라는 천천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공범이 되기를 자처하니 안 나눌 수가 없었다.
“편지가 뭐?”
역시 편지의 주인공인 끌로에가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전쟁으로 얼룩진 제국 국민의 관심을 전환하기 위한 황태자의 사기극에 대본을 쓴 벨라와 주인공이 된 끌로에…….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황태자는 끌로에를 늙은 귀족에게 팔아 버리리라.
“끌로에의 편지가 아니라…….”
“아니라?”
이번엔 힐다였다. 잠시 놓아두었던 시샤를 길게 빨아드린 힐다가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손을 내젓는 행동에 성급한 그녀의 성격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 내가 보낸 편지 말이에요.”
“…….”
“그 답장…… 주인공이……. 하아.”
벨라가 보낸 편지의 내용과 답장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끌로에의 글재주가 그리 좋지 못해 셋이 머리를 맞대고 편지를 쓰다 여기 있는 모두가 이름 모를 병사에게 편지를 썼었다. 그림을 그리는 힐다는 야화까지 정성 들여 그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벨라의 편지에 답장이 온 순간 이 방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짝!
끌로에의 갑작스러운 박수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편지의 주인공이 찾아왔구나! 멋져.”
끌로에의 말에 힐다의 눈이 커졌다. 벨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아!”
여자들의 비명이 하늘을 날았다. 쿠션에 얼굴을 묻고 깔깔거리는 힐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리에서 웃지 않는 것은 벨라뿐이었다. M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끌로에와 힐다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편지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면…… 웃지 못할 텐데. 미리 마음껏 웃어 두렴.’
벨라는 그녀들의 웃음이 그칠 때까지 위스키를 한 잔 더 마셨다. 사내를 능욕하는 편지를 보내고 설마 답장이 있을까 했지만 세 번째 편지까지 보냈을 때 뜻밖에 답장이 도착했다. 답장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굉장했다.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더는 장난이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 즈음 벨라는 가벼운 SM 소설을 쓰고 있을 때라 편지를 보내는 것에 더 빠져들었었다. 생각해 보니 첫 답장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깔깔거리며 웃었었다. 그때는 벨라도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큭큭……. 능욕 대상 학생은 누구야?”
힐다가 눈가의 눈물을 지우며 말했다. 눈가의 주름에 부쩍 신경 쓰느라 웃음을 삼가던 모습은 어디 가고 신나게 웃은 모습이었다.
“미……ㄹ.”
밀러라는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벨라는 술을 한 잔 더 마셔야 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뭐?”
벨라의 작은 목소리에 끌로에가 반문했다.
“이안 밀러.”
“…….”
벨라의 말에 깔깔거리며 웃던 이들이 순식간에 웃음을 멈추었다. 얼마 동안 정적이 찾아왔다.
“맙소사!”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연장자인 힐다였다.
“밀러? 그 밀러가의 공작?”
힐다의 말에 벨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 처진 어깨에는 이미 희망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헉!”
놀란 것은 힐다뿐만이 아니었는지 끌로에는 숨을 들이켠 채 내뱉지 않았다.
“확실해?”
다시 위스키 잔을 들던 벨라의 손을 저지한 힐다가 되물었다. 벨라는 말없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가져갔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카!”
절로 나오는 소리와 찡그려지는 얼굴.
아무도 벨라를 막지 않았다.
“밀러 공작이 찾아왔다는 거야? 언제?”
“석 달 전에요.”
“석 달 전?”
벨라의 말에 힐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석 달 전이라면 밀러 공작이 전쟁터에 있어야 했다. 상인은 정보에 민첩했다. 더군다나 밀러 공작가는 최대 구매자이기도 했고 판매자이기도 했다. 그런 밀러 공작이 수도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녀가 몰랐다니…….
“석 달 전이 맞아요. 제가 보낸 편지를 들고 S를 찾아왔어요.”
“…….”
또 한 잔.
벨라는 침묵하는 일행을 바라보고 들고 있던 잔을 들이켰다. 잔은 어느새 작은 온더락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금방 갔어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벨라는 착실히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다른 연락은?”
힐다가 몸을 앞으로 쭉 빼며 물었다. 벨라 앞에 놓인 잔과 병을 옆으로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벨라는 그런 오랜 친구인 힐다를 보며 웃었다. 천장이 빙글거리며 도는 것을 보니 제가 취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없었어요.”
벨라의 말에 모여 있던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소리 없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석 달 전. S의 소식을 알 수 없다는 벨라를 향해 한껏 비꼬며 능력 비하를 일삼던 공작을 떠올리며 벨라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 더 불안한 이유가 뭘까? 벨라의 생각은 곧 끌로에의 말에 의해 멈추었다.
“그럼 뭐야? 거기서 끝난 거 아니야?”
저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았던 끌로에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벨라의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드레스를 입으면 뭐 하나 레이스라 훤히 다 보이는데…….
“그러네.”
힐다도 조심스럽게 끌로에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말끝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수도의 오랜 공작가 중 하나인 타베르나의 현 공작 부인인 힐다가 밀러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소문에 알려진 것에 의하면 밀러 공작은 여성 편력이 심하고 까탈스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속사정은 더 했다. 그는 엄청난 집착남이었다. 한번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어떤 짓을 해서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다.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이가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챙기는 과정은 타베르나 상점을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적으로도 그가 원하는 물건을 가지기 위해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이안 밀러는 거상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은 힐다가 진땀을 흘린 몇 안 되는 손님 중 하나였다. 그렇게 쉽게 물러날 위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힐다는 외면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벨라에게 절망을 던져 줄 수는 없었다.
“그래. 그걸로 끝난 거야.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 없어. 밀러가 쪽에서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 줄게.”
힐다가 벨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상황을 잊고 싶은 의지가 담긴 두드림이었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밤이었다. 힐다도 벨라도 독주에 몸을 맡겼다. 잊을 수 있을 때 잊어 두는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