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젠장. 똥 밟았다.’
할 수만 있다면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앞에 앉은 동굴 목소리의 남자가. 그것도 모자라 제 재산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황태자의 사촌에, 제국의 공작이 ‘변태’라는 거지?
아침에 먹은 크레그의 블루베리 파이가 이상한 것인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침착, 침착해.’
벨라가 작게 침을 삼켰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사람 중 그에게 저 편지가 갈 이유가 뭐란 말인가? 게다가 그 답장들은…….
벨라는 눈앞에 앉은 이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동굴 목소리, 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리신 완벽한 작품…….
겉에 치중하느라 머릿속은 깜박하신 건가. 왜 하필 그가 M이란 말입니까? 벨라는 속으로 절규했다.
‘왜 잘난 남자는 유부남이든가. 게이든가. 그것도 아니면 변태란 말이냐.’
“죄송합니다만, 그런 것만으로는 편지의 주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거리던 벨라의 눈이 순식간에 썩은 동태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앞의 남자를 피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
남자의 탄식에 설탕이라도 섞인 것인지 단내가 풀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벨라는 도무지 눈앞의 남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몸을 해서 왜 써먹지를 못 하는 건가? 사나운 짐승처럼 달려들어 야성미 넘치게 덮쳐 주는 것이야말로 벨라가 생각하는 이안 밀러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검은색 옷감에 싸여 있어도 알 수 있는 저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주인님 때려 주세요.’라니.
게다가 M은 토끼 꼬리도 좋아했다. 저 허리 아래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에 몽실몽실한 토끼 꼬리라니……. 할 수만 있다면 말하고 싶었다.
‘그 엉덩이 그렇게 쓸 거면 나 줘요.’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담당자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알 수 있다는 건가요?”
‘응?’
순간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싸늘한 목소리가 벨라의 귓가에 닿았다. 이안 밀러를 앞에 두고 망상의 세계를 떠돌던 벨라가 뜨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살 떨리는 멋진 목소리를 내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안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물었다. S를 찾기 위해 전쟁터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수도까지 달려왔는데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누르며 벨라에게 제 목적을 이야기했다.
왜 갑자기 연락을 끊었는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편지의 주인이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인을 찾는 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벨라는 차분하게 말하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눈치 없이 콩닥거리던 심장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 상대는 변태였다.
남의 것에 괜히 흥분하고 침 흘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얼굴을 보니 푹 빠진 것이 살짝 안타깝기는 했다. 그가 찾는 S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핑크 편지를 앞에 두고 시시덕거리는 학생들의 젊음이 얄미워 벨라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이었다. 맨정신엔 절대 쓸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편지를 바라보며 벨라가 입맛을 다셨다. 눈앞의 남자는 제 것이 될 수 없었다.
‘안녕. S…….’
게다가 그 싹수에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라니……. 정중하게 요청하던 남자가 제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돌변했다.
“그럼 당신이 그 자리에 앉아 하는 일은 뭡니까?”
잘생기면 화내는 것도 멋지다. 물론 그 대상이 본인이 아니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였다. 단둘만 앉아 있는 방 안. 싸늘한 이안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 벨라였다.
“뭐, 뭐라고요?”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화가 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제까지 일에 대해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멍청하게 굴지 않았다. 주어진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한 벨라였다. 한데 난생처음 본 남자는 그런 벨라를 무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총책임자인데 이런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 예상조차 못 한 모양이군요.”
삐뚜름한 입술. 무시하는 듯한 눈빛. 이안의 행동에 벨라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에라도 ‘M 네 이놈’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차, 찾으려는 목적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벨라가 제법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후……. 본인의 능력 부족을 감추시겠다?”
“뭐예요!”
이안의 이죽거림에 벨라가 말 그대로 폭발했다. 하마터면 밀러 공작을 향해 ‘야 이 M놈아!’라고 소리칠 뻔한 벨라였다.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벨라를 가소로운 듯 바라보는 이안이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 편지의 주인공입니다. 스완 교수님.”
피곤한듯 찡그린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이안이 말했다. 큰소리 내 봤자 일만 시끄러워질 뿐이니 얼른 달래고 끝내겠다는 심산이었다.
“…….”
“이런 일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대비책 또한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이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면 협박이라도 할 기세였다.
“……저, 저기.”
“설마…… 아무런 대책을 세워 두지 않고 일을 벌이신 겁니까?”
눈빛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것 같았다. 벨라는 오싹한 이안의 눈빛을 맨몸으로 받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편지의 주인공이 아닌가?’
분명 이안이 보여 준 편지는 벨라가 보낸 것이 맞았다. 게다가…… 다른 것은 몰라도 봉투 앞의 M자는 벨라가 직접 손으로 쓴 글자였다. 제가 제 필체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생각보다 무척 무책임한 분이군요.”
“에?”
벨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프로젝트 때문에 며칠, 혹은 몇 달을 가슴 졸인 벨라였다. 짜고 치는 편지였지만, 덕분에 진실한 사랑을 찾을 수 있었다며 간혹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뿌듯했는데 남자의 말 한마디는 그런 벨라의 모든 노력과 수고를 수포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위가 바늘로 찌른 것처럼 아파졌다.
“마,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정신을 겨우 차린 벨라가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일이 잘못되었을 시 대책에 대해 들어 보고 싶군요.”
이안이 가소롭다는 듯 벨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벨 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이안을 내려다봤다.
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남자를 향해 뭐라고 쏘아 줘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황금 문학상을 세 번이나 받은 자신이 말싸움에서 지다니…….
저절로 이가 갈리고 몸이 떨렸다. 이런 일에 대해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위 귀족들의 명부는 모두 벨라가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편지는…….
언젠가 M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M이 고위 귀족. 그것도 전쟁의 총사령관일 거라고는 벨라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벨라의 복잡한 표정을 읽은 이안이 탁자에 올려 두었던 편지를 갈무리했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한 여자를 찾아 천 리 길을 달려오다니……. 누가 알까 무서운 일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이안 밀러가 말이다.
이안은 두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라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책임자라니……. 쯧.”
밀러 공작이 다시 한번 벨라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딱히 할 말이 없는 벨라가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안은 벨라를 자세히 관찰했다.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리였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사람을 대하고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시도르 녀석. 괜찮은 여자를 아군으로 맞았군.’
이안이 벨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처음엔 제 외모에 혹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해롱거리더니 일이 연관되자 두말없이 미련을 버리고 공적으로 저를 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벨라 스완은 화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공적으로 잘 대하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고집불통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실 그건 이안의 착각이기도 했다. 이안이 그 핑크 편지를 꺼내고 벨라가 봉투 겉면에 쓰인 자신의 글자를 발견할 때부터 이안은 벨라에게 그저 변태에 불과했다. 서로를 오해한 채 이안은 벨라의 교수실을 나왔다. 넓은 교정과 그 길을 걷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이안이 결의를 다졌다.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수도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포기가 되질 않았다. 대체 S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야 했다. 마구간에 맡겨 놓았던 말을 몰며 이안은 다짐했다.

***

“교수님 갔어요? 그 남자!”
조교인 안나가 노크 없이 들어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미 이안이 떠난 뒤였다.
“노크.”
벨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지만, 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교수님 그 사람 누구예요? 엄청 잘생겼던데…… 어느 집안사람이래요?”
벨라의 말을 무시한 안나가 호들갑을 떨며 소파에 앉았다. 과연 그 정도의 꽃미모면 지루한 일상에 며칠간 활력을 줄 만했다.
“노크.”
벨라는 이안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노크 없이 제 방처럼 들어와 수선을 떠는 안나의 행태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노크요. 네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할게요. 근데 그 사람은 누구예요.”
벨라와 안나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기억하는 것으로는 3살? 초반에 너무 착하게 대한 것이 탈이었을까? 밑에 딸린 동생들이 줄줄이 있다는 말에 매년 재계약을 했던 것이 잘못된 것일까? 날이 갈수록 안나의 행태가 불편해지는 벨라였다.
아무렇지 않게 간식 바구니에 손을 대는 안나를 보며 벨라가 결심했다. 올해 계약이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안나를 해고해야겠다고 말이다.
“안나. 나가 줘요.”
이안으로도 충분히 속이 시끄러운데 안나까지…….
“교수님, 누구냐니까요!”
목소리를 높이는 안나를 향해 벨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가라는 소리 못 들었어요?”
“참……. 별꼴이야.”
벨라의 호통에 구시렁거리는 안나를 보며 혈압이 올랐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구시렁거리는 안나를 한 번 더 쏘아본 후 벨라가 소파에 늘어져 생각을 정리했다.
이안이 나간 후 벨라는 어이가 없었다. 장난으로 보낸 편지를 이안 밀러가 받았다니…….
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혹시 몰라 편지를 일방적으로 중단했던 것도 벨라였다. 전쟁 중에 편지가 끊겨 궁금하더라도 전쟁에 참여 중인 기사가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한데 그 편지를 받은 이가 최고 사령관이고 전쟁 중에 저를 찾아온 것이다.
‘아이고 머리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인 것도 골이 아플 지경인데 그 엄청난 답장은 뭐란 말인가?
벨라는 저절로 머리를 짚고 소파로 쓰러졌다. 장난삼아 보낸 편지였고 답장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첫 답장을 받았을 땐 그대로 이불에 파묻혀 웃음을 터트렸었다. 맨정신으로 보기에도 홧홧한 그 답장의 주인공이 이안 밀러라니.
벨라는 소파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교수실을 돌아다녔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심장이 콩닥거리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이안 밀러가 S를 만날 일은 없었다. 벨라는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앉았다. 곧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에도 한참이나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변태가 이안이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였다.

***

[멍청한 것! 주인도 알아보지 못한 방종한 것에게 벌을 내려 줄 시간이구나.
대체 네 녀석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게냐!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겐 벌을 내려야겠지.
하지만, 나는 인자한 선생님이니…… 벌은 뭐가 좋을까…….
그래! 내일은 속옷을 입지 않고 바지를 입는 거다.
그게 좋겠어!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질 네가 상상되는 구나, M.
아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네 빨간 얼굴.
― 너의 선생님, S가.]

피식.
핑크의 편지지와 어울리지 않는 글의 내용을 곱씹던 이안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전하?”
보좌관인 휴가 혼자 웃는 이안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시도르 황태자와 쑥덕이더니 별안간 전쟁터에서 돌아온 공작을 보고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오밤중의 광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휙 하고 말을 몰고 새벽에 나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참이었다.
“계속해.”
이안은 들고 있던 편지를 갈무리하며 휴에게 턱짓했다.
“늘 보고 드렸던 대로입니다. 이게 서류고요. 직접 확인해 보셔야지요.”
재산이야 넘치는 집구석이었고 식솔들에게 팍팍하지 않은 이였지만, 누가 제 것을 명령 없이 건드리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남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제 집 안에 도둑이 있다는 사실을 불쾌해했다.
“됐어. 지금쯤이면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다 알 텐데……. 숨은 쥐를 쫓을 필요는 없지. 오후에 궁에 들어가 봐야 해.”
“궁에 다녀오신 게 아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