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023화 : 드디어 길드로!]
“재밌긴…….”
테르핀이 건일에게 핀잔을 준다.
그는 방금 마검을 만질 뻔했기에 이 잡동사니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메르시도 선뜻 상자를 만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공을 들인 티를 팍팍 내는 상자는, 마치 독이 있는 벌레가 화려한 색을 가진 것처럼 경고색인 듯 보였다.
유심히 상자를 내려다보던 메르시가 자신의 반지를 문질렀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험한 건 아닐 거야. 위험했다면 우리 노인네가 말을 했겠지.”
“그럼 증명해 봐.”
건일이 장난삼아 툭 말했다.
설마 아무 준비 없이 만질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진짜로 메르시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건일은 설마 진짜 만지겠냐는 생각에 한 박자 반응이 늦었다.
그리고 그가 메르시를 말리기 전에, 메르시가 상자를 열고 말았다.
“어?”
그러나 생각 외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자는 깔끔하게 열렸고, 반지를 꽂아놓는 구멍이 보였다.
물론 그 구멍 역시 지독하게 공을 들여 조각을 새겨 놓았다.
안에도 음각으로 뭔가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도 같아 보였다.
메르시가 뚫어져라 음각으로 새겨진 지도를 보다 말했다.
“어… 이건, 우리 레이라 왕국의 지도인데?”
“레이라 왕국?”
건일이 설명을 듣기 위해 테르핀과 아이린을 바라봤다.
테르핀은 아무 말이 없고, 대신 아이린이 대답해 줬다.
“우리가 사는 왕국이야. 북부 대륙에서 중간 규모지.”
“흐음.”
건일이 턱을 문질렀다.
이런 잡화점에, 왜 왕국의 지도를 새긴 보석 상자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고민을 이어가기 전에 메르시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 할 셈이야, 그거?”
테르핀이 물었다.
잠시 보석 상자를 내려다보던 메르시가 대답했다.
“우리 노인네가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남겨둘 위인이 아냐. 뭔가 생각이 있어서 남겨둔 거겠지.”
“돈이 안 된다든가?”
건일이 또다시 장난삼아 툭, 내뱉었다.
그러나 메르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어. 이렇게 공들여 조각한 보석 상자가 돈이 안 된다니 말이 안 돼. 아마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럴 거 같긴 해.”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기상천외한 곳에서 마지막에 나온 게 평범한 상자라니. 김이 빠지는데.”
건일의 시선의 끝이 이 잡화점에서 나온 별별 괴물 같은 쓰레기들에 닿았다.
무기나 함정용으로 쓸 수 있는 건 거의 다 챙겼고, 저기 있는 건 진짜로 위험한 것들뿐이었다.
건일로서는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다 메르시에게 물었다.
“어떻게 처리할 거야, 저것들?”
“전문 업자가 있어.”
메르시가 즉각 대답했다.
아주 당연히, 그녀도 생각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건일이 무척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런 무시무시한 잡동사니를 아무 조치도 안 하고 냅둔다면 말 그대로 재앙이 덮칠 터였다.
잠시 잡동사니들을 보던 테르핀이 문득 중얼거렸다.
“장 아저씨도 진짜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네… 난 그저 고기랑 가죽이나 취급하는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괜히 만물 잡화점이겠어. 자, 이제 슬슬 자자. 하루 종일 움직였더니 피곤해.”
메르시는 불평을 쏟아내며 살림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날 밤이 저물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다.
더블 오 길드가 이 도시를 떠나는 날이다.
당연하게도, 고이진이 직접 잡화점에 나타났다.
그는 예의바르게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이진이 메르시와 마주치기 전에 건일와 테르핀을 만났다.
그는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희 길드 호위병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건일은 신나 죽으려는 테르핀의 발을 살며시 밟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메르시가 가면 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고이진은 예의바르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메르시에게 다가갔다.
그는 메르시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 물었다.
“메르시 님. 생각은 정리하셨습니까?”
메르시는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말했다.
“들어갈게요. 단,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고이진이 되묻긴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동요는 없었다.
메르시는 그걸 확인하고 나서 아이린을 가리켰다.
“유능한 대장장이입니다. 얘도 같이 데려갔으면 해요.”
“대장장이… 라.”
고이진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고민하는 표정이다.
아이린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고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물 영입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길드장님께서 허락을 해주셔야 되거든요.”
“그럼 실력을 보여드리면 되지 않아요?”
“흐음.”
고이진이 망설였다.
그는 생각을 거듭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께서 허가를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메르시가 딱 잘라 말했다. 아이린이 움찔하며 메르시를 바라봤다.
하지만 메르시의 입은 웃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럴 일이 없으니까요.”
메르시와 건일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고이진은 약간 놀란 듯 메르시와 건일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그는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럼 가시죠. 준비는 마치신 거죠?”
“물론입니다.”
메르시가 대답하자, 건일 일행은 지난 밤 챙겨놨던 짐을 짊어 메고 나설 채비를 했다.
그러자 고이진은 그들을 데리고, 지난 날 갔던 선술집으로 안내했다.
선술집 앞엔 꽤 기다란 상단 행렬이 도시를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마차가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는데, 그 마차 하나하나에 엄청난 양의 무기와 식료품이 담겨 있었다.
고이진은 군수물자가 실린 마차행렬을 지나, 상단 가운데에 사람을 싣는 마차로 걸어갔다.
마차 앞에서 고이진이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메르시 님을 모셔왔습니다. 조건이 있다는데요.”
고이진의 말을 듣자, 마차 안에 있던 리가 곧장 말했다.
“자네가 그 자리에서 수락하지 않은 걸 보니, 누굴 같이 데리고 가겠단 건가?”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상인이라면 당연하다.
고이진이 가볍게 대꾸했다.
“네.”
리가 물었다.
“그래, 누굴 데리고 가고 싶다는 건가?”
“접니다.”
아이린이 앞으로 나섰다.
리는 마차 창문을 열어 아이린을 바라봤다.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듯한 눈빛에 아이린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녀는 당차게 똑바로 리를 쳐다봤다.
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일단 배짱은 있군. 그래. 자네 특기가 뭐지?”
“대장장이입니다.”
“호오…….”
다행히 대장장이란 것이 리의 흥미를 끌었다.
리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도 다음 도시에서 대장장이를 영입하려던 차였는데. 지금 이 장소에서 검증할 시간이 없으니, 다음 도시까지 같이 동행하도록 하지.”
아이린에겐 괜찮은 제안이었다.
일단 대장장이란 말로 서류 면접은 통과된 거니까.
이제 다음 도시에서 실기 면접을 끝내면 된다.
아이린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방방 뛰려는 걸 애써 참고 있었다.
고이진이 리의 제안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이진이 몸을 돌려 자신의 비서를 불렀다.
“레이!”
그의 말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젊은 금발 남자가 달려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결코 약해보이진 않았다.
“여기 남자 두 분은 호위병이고, 여자 분은 대장장이시다. 안내를 부탁한다. 메르시 님, 메르시 님은 절 따라오시죠. 지금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테르핀은 고이진을 따라가는 메르시에게 손 인사를 했다.
메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이진을 따라갔다.
건일 일행은 이제 레이란 남자에게 안내를 받으며 다른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레이가 우선 자신을 소개했다.
“고이진 킨님의 비서, 레이 신드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봉급 중 절반을 미리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불쑥, 레이가 건일 일행에게 뭔가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 안에는 은화가 15개 들어 있었다.
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이달 말에 남은 봉급의 절반을 지불하도록 하죠. 확실히 쳐드렸습니다.”
건일은 아이린과 테르핀의 표정을 살폈다.
특히 테르핀.
테르핀의 입이 귀에 걸린 걸로 봐선, 확실히 꽤 많은 양인 듯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 건일 일행도 하나둘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다가 레이가 우뚝 멈춰 한 마차를 가리켰다.
“이쪽이 우리 길드의 여성분이 머무는 마차입니다. 아이린 님은 이곳에서 쉬어 가시면 됩니다.”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차는 리가 탄 것과는 달리 짐마차에 사람들이 올라탄 형태였다.
하지만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아이린은 레이의 소개를 받으며,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마차 안엔 다섯 명이 있었다.
레이는 이제 건일과 테르핀을 다른 마차로 안내했다.
그러다 레이가 불쑥 말했다.
“두 분이 파르크 님의 부하들과 싸웠다는 말을 킨님께 들었습니다.”
“아.”
며칠 전 싸웠던 호위병이 그 인상 쓰는 노인네 부하인 듯 했다.
레이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른 호위병 마차로 안내하는 중입니다. 리 님의 호위병이 계신 곳이죠.”
그를 따라가다 며칠 전 싸웠던 호위병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으르렁거리며 건일을 바라봤다.
건일은 그들의 기세에 지지 않기 위해 활짝 웃으며 그의 총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파르크의 호위병들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안대남이 여전히 건일을 노려보자 건일은 웃는 낯으로 총구를 안대남에게 겨누었다.
안대남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일격에 둔기 하나를 작살낸 파괴력을 잊기는 힘들 것이다.
건일은 기세 싸움에서 완전히 이긴 것을 확인하고 레이를 따라 붙었다.
레이는 걸어가면서 얘기했다.
“파르크 님의 호위병과 불필요하게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이 길드는 파벌이 두 개거든요. 리 님과 파르크 님. 특히 파르크 님이 현재 길드에 유일한 마법사인지라… 신경을 거스르게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고이진이 보여주겠다고 한 마법사가 파르크인 모양이었다.
방금 볼 때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아니, 그런 것 보다.
“그런 것 치고는 방금 아무 제지가 없던데요?”
건일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레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지령이죠. 조용히 끝내고 입 닫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가끔은 눌러줘야 할 때도 있고요.”
레이의 말을 듣고 건일은 약간 섬칫함을 느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제일 위험했다.
건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저분한 싸움엔 도가 튼 모양이군요.”
자신이 받드는 사람을 위해 그 손에 기꺼이 더러운 것을 묻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받드는 사람은 완전무결하게 다음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
건일이 군대내 권력 싸움에서 자주 봤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아군일 땐 든든하지만, 적으로 돌아선다면 그 누구보다 무시무시했다.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니까.
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뭐, 그렇죠.”
심지어 부정도 하지 않았다.
건일은 뒷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다행히 금세 건일과 테르핀이 앉을 마차에 도착했다.
레이는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일과 테르핀을 소개했다.
“자. 여기 두 분은, 며칠 전 파르크 님 호위병을 작살 낸 사람들입니다. 이쪽은 테르핀님. 그리고 이쪽은 건일 님입니다. 킨 님이 영입했어요. 다들 잘 지내길 바래요.”
말을 끝낸 레이는 고이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건일은 조용히 눈치를 보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 총 네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덩치 한 명,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 한 명, 무척이나 완고해 보이는 전사 한 명, 마지막으로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는 순딩이 한 명.
그리고 순딩이가 헤헤 웃으며 건일에게 다가왔다.
“재밌긴…….”
테르핀이 건일에게 핀잔을 준다.
그는 방금 마검을 만질 뻔했기에 이 잡동사니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메르시도 선뜻 상자를 만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공을 들인 티를 팍팍 내는 상자는, 마치 독이 있는 벌레가 화려한 색을 가진 것처럼 경고색인 듯 보였다.
유심히 상자를 내려다보던 메르시가 자신의 반지를 문질렀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험한 건 아닐 거야. 위험했다면 우리 노인네가 말을 했겠지.”
“그럼 증명해 봐.”
건일이 장난삼아 툭 말했다.
설마 아무 준비 없이 만질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진짜로 메르시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건일은 설마 진짜 만지겠냐는 생각에 한 박자 반응이 늦었다.
그리고 그가 메르시를 말리기 전에, 메르시가 상자를 열고 말았다.
“어?”
그러나 생각 외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자는 깔끔하게 열렸고, 반지를 꽂아놓는 구멍이 보였다.
물론 그 구멍 역시 지독하게 공을 들여 조각을 새겨 놓았다.
안에도 음각으로 뭔가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도 같아 보였다.
메르시가 뚫어져라 음각으로 새겨진 지도를 보다 말했다.
“어… 이건, 우리 레이라 왕국의 지도인데?”
“레이라 왕국?”
건일이 설명을 듣기 위해 테르핀과 아이린을 바라봤다.
테르핀은 아무 말이 없고, 대신 아이린이 대답해 줬다.
“우리가 사는 왕국이야. 북부 대륙에서 중간 규모지.”
“흐음.”
건일이 턱을 문질렀다.
이런 잡화점에, 왜 왕국의 지도를 새긴 보석 상자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고민을 이어가기 전에 메르시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 할 셈이야, 그거?”
테르핀이 물었다.
잠시 보석 상자를 내려다보던 메르시가 대답했다.
“우리 노인네가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남겨둘 위인이 아냐. 뭔가 생각이 있어서 남겨둔 거겠지.”
“돈이 안 된다든가?”
건일이 또다시 장난삼아 툭, 내뱉었다.
그러나 메르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어. 이렇게 공들여 조각한 보석 상자가 돈이 안 된다니 말이 안 돼. 아마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럴 거 같긴 해.”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기상천외한 곳에서 마지막에 나온 게 평범한 상자라니. 김이 빠지는데.”
건일의 시선의 끝이 이 잡화점에서 나온 별별 괴물 같은 쓰레기들에 닿았다.
무기나 함정용으로 쓸 수 있는 건 거의 다 챙겼고, 저기 있는 건 진짜로 위험한 것들뿐이었다.
건일로서는 저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다 메르시에게 물었다.
“어떻게 처리할 거야, 저것들?”
“전문 업자가 있어.”
메르시가 즉각 대답했다.
아주 당연히, 그녀도 생각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건일이 무척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런 무시무시한 잡동사니를 아무 조치도 안 하고 냅둔다면 말 그대로 재앙이 덮칠 터였다.
잠시 잡동사니들을 보던 테르핀이 문득 중얼거렸다.
“장 아저씨도 진짜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네… 난 그저 고기랑 가죽이나 취급하는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괜히 만물 잡화점이겠어. 자, 이제 슬슬 자자. 하루 종일 움직였더니 피곤해.”
메르시는 불평을 쏟아내며 살림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그날 밤이 저물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다.
더블 오 길드가 이 도시를 떠나는 날이다.
당연하게도, 고이진이 직접 잡화점에 나타났다.
그는 예의바르게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이진이 메르시와 마주치기 전에 건일와 테르핀을 만났다.
그는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희 길드 호위병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건일은 신나 죽으려는 테르핀의 발을 살며시 밟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메르시가 가면 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고이진은 예의바르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메르시에게 다가갔다.
그는 메르시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 물었다.
“메르시 님. 생각은 정리하셨습니까?”
메르시는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말했다.
“들어갈게요. 단,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고이진이 되묻긴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동요는 없었다.
메르시는 그걸 확인하고 나서 아이린을 가리켰다.
“유능한 대장장이입니다. 얘도 같이 데려갔으면 해요.”
“대장장이… 라.”
고이진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고민하는 표정이다.
아이린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고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물 영입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길드장님께서 허락을 해주셔야 되거든요.”
“그럼 실력을 보여드리면 되지 않아요?”
“흐음.”
고이진이 망설였다.
그는 생각을 거듭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께서 허가를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메르시가 딱 잘라 말했다. 아이린이 움찔하며 메르시를 바라봤다.
하지만 메르시의 입은 웃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럴 일이 없으니까요.”
메르시와 건일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고이진은 약간 놀란 듯 메르시와 건일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그는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럼 가시죠. 준비는 마치신 거죠?”
“물론입니다.”
메르시가 대답하자, 건일 일행은 지난 밤 챙겨놨던 짐을 짊어 메고 나설 채비를 했다.
그러자 고이진은 그들을 데리고, 지난 날 갔던 선술집으로 안내했다.
선술집 앞엔 꽤 기다란 상단 행렬이 도시를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마차가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는데, 그 마차 하나하나에 엄청난 양의 무기와 식료품이 담겨 있었다.
고이진은 군수물자가 실린 마차행렬을 지나, 상단 가운데에 사람을 싣는 마차로 걸어갔다.
마차 앞에서 고이진이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메르시 님을 모셔왔습니다. 조건이 있다는데요.”
고이진의 말을 듣자, 마차 안에 있던 리가 곧장 말했다.
“자네가 그 자리에서 수락하지 않은 걸 보니, 누굴 같이 데리고 가겠단 건가?”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상인이라면 당연하다.
고이진이 가볍게 대꾸했다.
“네.”
리가 물었다.
“그래, 누굴 데리고 가고 싶다는 건가?”
“접니다.”
아이린이 앞으로 나섰다.
리는 마차 창문을 열어 아이린을 바라봤다.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듯한 눈빛에 아이린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녀는 당차게 똑바로 리를 쳐다봤다.
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일단 배짱은 있군. 그래. 자네 특기가 뭐지?”
“대장장이입니다.”
“호오…….”
다행히 대장장이란 것이 리의 흥미를 끌었다.
리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도 다음 도시에서 대장장이를 영입하려던 차였는데. 지금 이 장소에서 검증할 시간이 없으니, 다음 도시까지 같이 동행하도록 하지.”
아이린에겐 괜찮은 제안이었다.
일단 대장장이란 말로 서류 면접은 통과된 거니까.
이제 다음 도시에서 실기 면접을 끝내면 된다.
아이린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방방 뛰려는 걸 애써 참고 있었다.
고이진이 리의 제안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이진이 몸을 돌려 자신의 비서를 불렀다.
“레이!”
그의 말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젊은 금발 남자가 달려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결코 약해보이진 않았다.
“여기 남자 두 분은 호위병이고, 여자 분은 대장장이시다. 안내를 부탁한다. 메르시 님, 메르시 님은 절 따라오시죠. 지금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테르핀은 고이진을 따라가는 메르시에게 손 인사를 했다.
메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이진을 따라갔다.
건일 일행은 이제 레이란 남자에게 안내를 받으며 다른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레이가 우선 자신을 소개했다.
“고이진 킨님의 비서, 레이 신드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봉급 중 절반을 미리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불쑥, 레이가 건일 일행에게 뭔가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 안에는 은화가 15개 들어 있었다.
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이달 말에 남은 봉급의 절반을 지불하도록 하죠. 확실히 쳐드렸습니다.”
건일은 아이린과 테르핀의 표정을 살폈다.
특히 테르핀.
테르핀의 입이 귀에 걸린 걸로 봐선, 확실히 꽤 많은 양인 듯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 건일 일행도 하나둘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다가 레이가 우뚝 멈춰 한 마차를 가리켰다.
“이쪽이 우리 길드의 여성분이 머무는 마차입니다. 아이린 님은 이곳에서 쉬어 가시면 됩니다.”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차는 리가 탄 것과는 달리 짐마차에 사람들이 올라탄 형태였다.
하지만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아이린은 레이의 소개를 받으며,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마차 안엔 다섯 명이 있었다.
레이는 이제 건일과 테르핀을 다른 마차로 안내했다.
그러다 레이가 불쑥 말했다.
“두 분이 파르크 님의 부하들과 싸웠다는 말을 킨님께 들었습니다.”
“아.”
며칠 전 싸웠던 호위병이 그 인상 쓰는 노인네 부하인 듯 했다.
레이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른 호위병 마차로 안내하는 중입니다. 리 님의 호위병이 계신 곳이죠.”
그를 따라가다 며칠 전 싸웠던 호위병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으르렁거리며 건일을 바라봤다.
건일은 그들의 기세에 지지 않기 위해 활짝 웃으며 그의 총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파르크의 호위병들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안대남이 여전히 건일을 노려보자 건일은 웃는 낯으로 총구를 안대남에게 겨누었다.
안대남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일격에 둔기 하나를 작살낸 파괴력을 잊기는 힘들 것이다.
건일은 기세 싸움에서 완전히 이긴 것을 확인하고 레이를 따라 붙었다.
레이는 걸어가면서 얘기했다.
“파르크 님의 호위병과 불필요하게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이 길드는 파벌이 두 개거든요. 리 님과 파르크 님. 특히 파르크 님이 현재 길드에 유일한 마법사인지라… 신경을 거스르게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고이진이 보여주겠다고 한 마법사가 파르크인 모양이었다.
방금 볼 때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아니, 그런 것 보다.
“그런 것 치고는 방금 아무 제지가 없던데요?”
건일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레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지령이죠. 조용히 끝내고 입 닫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가끔은 눌러줘야 할 때도 있고요.”
레이의 말을 듣고 건일은 약간 섬칫함을 느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제일 위험했다.
건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저분한 싸움엔 도가 튼 모양이군요.”
자신이 받드는 사람을 위해 그 손에 기꺼이 더러운 것을 묻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받드는 사람은 완전무결하게 다음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
건일이 군대내 권력 싸움에서 자주 봤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아군일 땐 든든하지만, 적으로 돌아선다면 그 누구보다 무시무시했다.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니까.
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뭐, 그렇죠.”
심지어 부정도 하지 않았다.
건일은 뒷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다행히 금세 건일과 테르핀이 앉을 마차에 도착했다.
레이는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일과 테르핀을 소개했다.
“자. 여기 두 분은, 며칠 전 파르크 님 호위병을 작살 낸 사람들입니다. 이쪽은 테르핀님. 그리고 이쪽은 건일 님입니다. 킨 님이 영입했어요. 다들 잘 지내길 바래요.”
말을 끝낸 레이는 고이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건일은 조용히 눈치를 보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 총 네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덩치 한 명,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 한 명, 무척이나 완고해 보이는 전사 한 명, 마지막으로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는 순딩이 한 명.
그리고 순딩이가 헤헤 웃으며 건일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