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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화 : 클로드 잡화점의 기상천외 쇼]


“그나저나, 그 반지 대체 뭐야?”
“응?”
메르시가 고개를 들어 건일을 바라봤다.
그녀는 질문보다, 왜 반말을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건일을 노려봤다.
건일이 반말을 하고 있단 걸 이제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건일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건일이 재차 물었다.
“그 반지 뭐냐고.”
건일은 메르시가 끼고 있는 반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메르시는 짜증을 내다 그녀의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메르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노인네가 나 태어날 때 맞춰준 반지야.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 내가 성장할 때마다 반지도 커져.”
“흐음…….”
메르시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딱 거기까지만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노련한 상인이란 걸 제쳐두고라도, 더블 오 길드에 있는 간부들은 저 반지를 보고 반응을 보였다.
장 클로드가 더블 오 길드의 창립 인원이니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걸까.
건일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테르핀이 입을 열었다.
“메르시, 그럼 너 어떡할 거야. 더블 오 길드에 들어갈 거야?”
메르시는 허공을 올려다보다 짧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언제?”
테르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마 그녀는 길드의 상인으로, 테르핀은 호위병으로 들어갈 생각인 듯 했다.
그건 건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길드에 이렇게 손쉽게 들어갈 수 있다면 당연히 들어가야 했다.
메르시의 반응을 보니 더블 오 길드가 그리 영세한 규모도 아닌 듯 했고.
뭣보다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길드가 규모가 작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메르시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 짐 쌀 때.”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적당한 시점이었다.
이 쪽에선 더블 오 길드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 블러프를 하는 동시에, 더블 오 길드에선 바짝바짝 목이 타들어갈 테니까.
확실히, 시골 도시에 있기는 아까운 상인이었다.
메르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르핀에게 더 이상 설명하기 지쳤는지, 그에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 메르시는 건일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물었다.
“당신, 대체 어디서 상술을 배운 거야?”
“상술?”
테르핀이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건일을 바라봤다.
아이린도 마찬가지였다.
건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최대한 테르핀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선에서 말을 지어낸다.
“예전에 군인이었을 때, 현지 사람들하고 거래를 했거든. 그러면서 알음알음 배웠지.”
틀린 말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급히 탄환을 구할 때, 근처에 있는 민가에 흥정을 했으니까.
이라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르시는 턱 가를 문질렀다.
“알음알음 배워? 그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치고 빠지는 걸 잘해.”
물론 제대로 배운 건 그가 군수 업체에 들어가고 나서다.
하지만 이들에게 군수 업체에 대해 설명하려면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건일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럼 그냥 똑똑한 거겠지.”
“마음에 안 들어.”
메르시가 입을 삐죽였다.
잠시 두 사람 간의 대화만 이어지자, 테르핀이 끼어들었다.
그는 그가 지니고 있던 강철 사슴 고기를 꺼내며 메르시에게 말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 강철 사슴 두개골을 뺏겨서 노자가 전혀 없거든.”
“뭐야, 괜찮다고 물어보지도 않아?”
메르시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심지어,
“부엌은 저기야.”
라며 부엌의 위치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녀는 아이린을 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야채를 좀 사러 갔다 올까?”
오래되지 않아 메르시와 아이린이 야채를 사서 돌아왔다.
그 사이 테르핀은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푹 끓이고 있었다.
거기에 메르시와 아이린이 사온 야채를 넣자 훨씬 더 풍미가 좋아졌다.
넷이서 냄비 하나를 뚝딱 끝장냈다.
메르시는 부른 배를 두드리다, 테르핀에게 설거지를 맡기고 살림집 쪽으로 들어갔다.
건일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테르핀에게 물었다.
“뭐야, 어디 가는 거야?”
테르핀이 식기를 주워들며 대꾸했다.
“아마 우리 잠자리 준비하는 걸 거야.”
건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좁아 보이는데?”
“괜찮아, 괜찮아. 저기 사냥꾼들이 자주 들렀던 데라, 은근히 자리 있어.”
하지만 정말로 은근히였다.
딱 사람 넷이 누워서 잘 만한 정도의 공간밖엔 없었다.
심지어 그렇지 않아도 좁은 방 한 가운데에 가림막까지 설치했다.
건일에게 이 쪽으로 넘어오지 말란 엄포를 놓고.
‘애초에 넌 내 취향 아니거든.’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건일은 일부러 그 말을 표정으로 대신했다.
메르시가 콧방귀를 뀌며 돌아누웠다.
건일 역시지지 않고 돌아누웠다.
그렇게, 꽤나 소란스럽고 일이 많던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
건일은 멍하니 잠에서 깼다.
워낙 좁은 곳에 자서 그런지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건일은 욱신거리는 부분을 주먹으로 통통 치며 정좌를 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다 명상에 들어갔다.
늘 그렇듯, 5분간 테서랙트를 생각하고, 다른 5분간 마법 연습을 한다.
기본적으로 헤이스트.
좀 더 능숙하게.
최소한 전투 시작 전에 이동하기 빠르도록.
“후우…….”
건일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헤이스트가 걸린 상태에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리저리 빨라진 자신의 몸을 움직이다, 방으로 들어온 아이린과 마주쳤다.
아이린은 건일이 헤이스트가 걸린 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벌써 헤이스트를 걸 수 있는 거야?”
“오래는 못 가.”
건일이 고개를 저으며 헤이스트를 해지했다.
머릿속에서 테서랙트의 이미지가 사라지자 정신적인 피로가 엄습해 왔다.
건일은 숨을 가다듬었다.
“좀 더 단련해야지.”
“아냐. 진짜 오빠, 괴물같이 빨라.”
“칭찬 고마워.”
건일이 가볍게 웃어보였다.
아이린의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그의 마법 습득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빠른 것 같았다.
건일은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아이린을 바라봤다.
아이린이 그제야 방으로 들어온 이유를 말해줬다.
“메르시 언니가 슬슬 잡화점 정리한대. 도와달라는데?”
“아.”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해가기 직전인 잡화점이라 해도 막상 정리를 하려면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일 더블 오 길드로 가는 거니, 오늘 안에 후다닥 정리를 해놔야 메르시에게도 편할 터였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살림집을 나섰다.
“그럼 힘 좀 써볼까?”
그는 테르핀과 함께 잡화점 잡동사니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잡화점은 망해가기 직전이었지만, 막상 치우기 시작하니 생각 외로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예전에 테르핀네 부족과 거래할 때 쓰던 고기 숙성대부터 각종 잡화를 올려놓는 책장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왕래가 뚝 끊겨 팔리지 않은 잡화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 잡화들 중 아이린이 관심을 가진 게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오르골이었다.
음악이 나올 뿐만 아니라, 그 위를 꽤나 화려하게 장식해 놓은 것이었다.
춤추는 발레리나, 검을 든 왕자님, 그리고 휘황찬란한 성이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아이린은 조용히 오르골을 틀어놓고 음악을 감상했다.
서정적인듯 하다가도 귀족스런 기풍이 흐르는, 명곡이었다.
음악을 모르는 건일이 듣더라도 작곡하는 데 꽤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노래 소리를 듣자, 살림집을 정리하던 메르시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머, 이게 여기 있었네?”
그녀는 한참동안 잊고 있던 물건을 찾아낸 표정이었다.
메르시는 아이린과 같이 쭈그려 앉아 오르골의 노래를 감상했다.
한참이 지나 오르골이 다 지나가자, 메르시가 조심스레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아이린이 혹시 버릴까 하는 생각에 걱정스레 물었다.
“언니, 그거 버리게?”
“아니.”
메르시가 단칼에 말하며 오르골을 챙겼다.
그녀는 씨익 웃어보였다.
“이거 우리 노인네가 진짜 좋아하던 거였거든. 챙겨 가야지.”
“응!”
아이린이 기분 좋게 말했다.
그리고 잡화점의 정리가 이어지자 점점 더 많은 잡동사니들이 튀어나왔다.
테르핀은 구석에서 조그만 자루를 발견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자루를 열었다, 그 안에 씨 한 줌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씨앗을 유심히 바라보던 테르핀이 자루를 흔들며 메르시에게 말했다.
“이거 뭐야?”
“어…….”
메르시도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식인 식물 씨앗이야, 그거.”
“으엑.”
테르핀이 질겁했다.
하지만 건일은 흥미가 생긴 듯 보였다.
“식인 식물?”
“그래. 땅이랑 비료가 있으면 순식간에 자라나는데, 넝쿨로 사람을 휘감아 씹어 먹어.”
“호오.”
건일이 테르핀이 들고 있는 자루를 유심히 보다 말했다.
“이거, 무기로 쓸 수 있는 거 아냐?”
“그치. 무기로 쓸 수는 있는데, 통제할 생각은 버려.”
메르시가 동의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건일이 테르핀에게 말했다.
“챙겨라, 그거. 도망칠 때 뿌리면 안성맞춤이겠네.”
테르핀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옆에 서 있던 아이린까지 재밌겠단 표정을 짓자 어쩔 수 없이 식인 식물의 씨앗을 챙겼다.
그리고 식인 식물 씨앗은 애교였다.
잡화점을 정리할수록 기상천외한 것들이 흘러나왔다.
건일이 권총 비슷한 걸 집어 들자, 메르시가 깜짝 놀랐다.
“으앗, 그거 드래곤의 숨결인데……!”
“뭐?”
드래곤이란 말에 건일이 멈칫했다.
메르시가 건일의 손에서 잽싸게 드래곤의 숨결을 담은 용기를 뺏어들었다.
메르시는 마치 위험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레 그것을 고이 모셨다.
사이클롭스가 주인으로 모시는 녀석이 드래곤이라는 게 생각났다.
건일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다 망해가는 이 잡화점에 드래곤의 숨결 같은 게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뭐야, 장 씨가 돌아가기 직전에 돈 되는 거 거의 다 판 거 아냐? 드래곤의 숨결이면 꽤 비쌀 거 같은데?”
“맞아. 돈 되는 거 팔았는데, 이렇게 사람 가려야 되는 위험한 물건은 안 팔았어. 이런 건 팔아봤자 욕만 먹어. 아무리 급하더라도, 신용도 떨어지는 짓까지 하면 안 되거든.”
생각 외로 상도의 기본이 제대로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메르시가 조심스레 그 용기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다.
메르시의 반응을 보아하니, 단순한 숨결도 저렇게 위험하게 취급하는 듯 했다.
그 괴력을 가진 사이클롭스가 주인님이라고 떠받들 정도였으니 당연한 걸지도.
건일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는 건… 지금 남아 있는 물건은 거의 다 꽤 위험한 것들이란 소리네?”
“…응, 아마?”
“살려면 조심해야겠군.”
건일이 투덜거리며 정리에 들어갔다.
그 뒤로 정말 별의별 게 다 튀어나왔다.
사람에게 저주를 씌우는 가면, 어두운 기운을 잔뜩 머금은 마검, 사람 잡아먹는 벌레의 알이 들어 있는 상자 같은 것들.
거의 진기명기 쇼에 버금갈 정도로 눈이 튀어나올 만한 것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 의외로 정상적인 것을 발견했다.
“으음…….”
건일이 턱을 문지르며 그 정상적으로 생긴 것을 내려다봤다.
반지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상자였다.
하지만 상자는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아예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보물을 감싸고 있는 용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음각인데도 입체감이 느껴질 정도의 정성이 남겨 있었다.
거기에 더해 용이 감싸고 있는 보물과 용의 눈, 발톱은 진짜 보석을 박아 장식을 해놓은 상태였다.
너무 고급적이고 정상적이라 오히려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턱을 문지르던 건일이 아직까지 얘기가 없던 메르시를 바라봤다.
“뭐야, 네가 아는 물건 아냐?”
메르시는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보는 거야.”
“네가 처음 본다고?”
지금까지 잡화점에 있는 모든 물건을 파악하고 있던 게 메르시였다.
그런데 이 상자만큼은 모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건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이거… 뭔가 재밌게 돌아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