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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화 : 영입 제의]


고이진의 안내를 받아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건일 일행이 선술집에 들어서자, 안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건일 일행에게 쏠렸다.
고이진이 정중하게 메르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클로드 잡화점의 따님이시다.”
그러자 사람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건일은 1층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근육이 잔뜩 발달된 전사들도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1층을 훑어 본 건일은 이제 2층으로 시선을 올리다, 한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눈에는 불만이 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언제나 불만에 차있는 사람인 듯 했다.
그는 마뜩찮은 시선으로 메르시를 훑고 있었다.
고이진은 예를 갖추고 2층에 있는 노인에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파르크 님.”
“흥.”
파르크라 불린 자는 대꾸조차 안하고 뒤로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건일이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었다.
“노인네가 고집이 엄청나 보이는데요.”
고이진은 대놓고 비꼴 대로 비꼰 건일의 말을 무덤덤하게 받아넘겼다.
“네. 박쥐 공 지엔 파르크이십니다.”
파르크란 사람은 직속상관이 아닌 모양이었다.
고이진의 얼굴은 평온에 가까웠다.
약간의 혐오가 깃든 평온.
상대하기 싫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마주쳤을 때, 아무 일 없는 척 짓는 표정이었다.
건일은 주변을 둘러보다 물었다.
“제이미 리는 아니군요. 그분은 어디 계시죠?”
건일이 묻자, 고이진이 3층 방을 가리켰다.
“저기 계십니다. 길드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빨리 올라가시죠.”
“네.”
메르시가 대답하자, 고이진이 앞장서서 3층 방으로 안내했다.
3층에 도착한 고이진은 리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이진이 말했다.
“고이진입니다. 클로드 잡화점 장 클로드의 따님, 메르시 클로드 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게.”
고이진이 방문을 열었다.
방은 일반 여행객이 머물 수 있게 침대와 소소한 가구가 놓여 있었다.
그 방은 무척이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층의 꼴을 보아하니, 주인의 솜씨가 아니라 이 방에 투숙하고 있는 리의 솜씨인 듯했다.
리는 방 한 가운데에 있는 탁자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방금 전 파르크보단 조금 어렸지만, 충분히 나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세월을 견뎌내 오며 깊어진 눈과 긴 수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리는 건일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마침 차를 마시던 중이었는데. 같이 마시지. 고이진, 차 네 잔 더.”
“네.”
고이진은 가볍게 대꾸하고 내려갔다.
건일 일행은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건일은 자리가 모자라 가만히 설 수 밖에 없었다.
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의 딸이 누군지 안 물어도 되겠군. 똑 닮았어.”
그는 정확히 메르시를 보고 있었다.
메르시는 어색함을 못 이기고 뺨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블 오 길드가 이런 시골 도시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리가 경쾌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연히 사업차 들렀지.”
“사업차요.”
메르시가 재차 물었다.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어느새 차를 우려 온 고이진이 차 네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고이진이 차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리가 그들에게 차를 권했다.
“먹을 만하다네. 동쪽에서 구해온 귀한 차야.”
메르시는 찻잔을 잡고 리를 바라봤다.
“솔직히, 지금 전 어떤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왜 갑자기 이 시점에 찾아오신 거예요?”
“으음.”
리는 차를 마시다, 잠시 먼 허공을 응시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메르시는 조용히 반지를 만지며 리의 입을 바라봤다.
건일 역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리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테르핀은 아무 말 없는 리의 입을 보며 몸을 들썩거렸다.
옆에서 아이린이 지그시 테르핀의 발을 짓밟았다.
건일이 아이린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건일은 테르핀이 들썩거리는 걸 꼴 뵈기 싫었는데, 아이린이 한 건 해준 것이었다.
아이린은 건일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어보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한텐 빚이 많거든.”
“…우리 노인네는 그런 말 안하던데.”
리가 대답하자마자 메르시가 재빨리 말했다.
리는 히죽 웃었다.
“음… 장은 내 상업 스승이자 친구였다. 이 더블 오는 사실 장이 만든 거야.”
말을 하면서, 리는 품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메르시가 조심스레 그림을 집어 들었다.
젊었을 적의 리와, 다른 남자가 있었다.
메르시는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표정을 보아하니 그 남자가 아마 장 클로드일 거라 건일이 생각했다.
리가 말을 이었다.
“다만 그는 사정이 있어서 더블 오에서 벗어나 이 시골 도시로 자리를 옮겼어. 그리고 최대한 연락을 하지 않았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나로서도 사정이 있어 급히 오진 못 했다.”
“핑계군요.”
“핑계네요.”
“핑계대지 마요.”
건일과 테르핀, 메르시가 동시에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건일은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갑작스런 일격에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황급히 차를 홀짝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리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핑계지.”
메르시는 연신 반지를 만지며 리를 바라봤다.
건일은 반지를 만져 대는 메르시가 정신이 사나웠다.
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메르시, 너에게 보상을 하고 싶다. 더블 오에 회계 담당이 비어 있는데, 일을 해보지 않겠니?”
건일은 일을 한다는 게 왜 보상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메르시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의 봉급이 꽤나 괜찮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메르시의 기쁜 표정도 잠시였다.
그녀는 반지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노인네가 죽은 지 1년이 지났어요. 왜 지금 와서 이러는 거죠?”
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메르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분명 메르시를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건일이 잠시 얼어붙었다.
그 눈이 차갑고 날카로워서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간절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눈이었다.
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서.”
메르시도 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리가 천천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제일 좋은 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빚을 탕감해 주고 이 곳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지. 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가 않다. 나와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같이 보자꾸나.”
메르시는 반지를 문지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노인네가 죽기 전에 이 말을 했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떠나면 위험할 거라고 말이죠.”
리가 메르시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믿니?”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건일은 메르시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포장하기 위해 약간은 벌벌 떠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 것도.
시골 도시의 잡화점 상인이라기에 별 볼일 없는 줄 알았건만, 생각 이상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데 익숙해 있다.
건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
테르핀과 아이린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건일이 움직여야 했다.
판단이 내려지자마자 곧장 건일이 행동에 옮겼다.
그가 불쑥 리와 메르시 사이에 끼어들었다.
리와 메르시가 동시에 놀랐다.
하지만 건일은 덤덤하게 말했다.
“대답은 나중에 들려드리겠습니다.”
리는 과장스레 손을 움직이며 살짝 물러났다.
테르핀과 아이린이 메르시의 팔을 꽉 잡아주었다.
메르시는 반지를 쥐고 있었다.
건일은 이제 슬슬 그의 정신을 사납게 하는 저 반지가 대체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장소는 이 곳이 아니다.
건일이 리를 보며 물었다.
“3일 동안 여기 머문다고 들었는데요. 맞으시죠?”
리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그렇다.”
“그럼 3일 내로 대답을 하러 오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문답이 끝나자, 건일이 테르핀에게 눈짓을 했다.
테르핀은 메르시를 일으켜 세우고 아이린과 함께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건일 역시 그 일행을 따라가다,
“이보게.”
리가 건일을 불러 세웠다.
건일이 돌아보자, 리가 건일의 총을 가리켰다.
“그거 꽤 흥미로워 보이는 도구로군. 자네, 뭐하는 사람인가?”
건일이 싱긋 웃었다.
“마찬가지로 3일 내에 답변을 드릴게요. 고이진 씨께 대략적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건일 일행이 방을 나섰다.
그러다가, 방 앞에서 파르크와 마주쳤다.
파르크는 여전히 그 마뜩찮은 눈으로 건일 일행을 쭉 훑다 메르시의 손에 있는 반지에 시선이 닿았다.
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미묘하게 바뀌었다.
건일은 이제 정말로 저 반지가 뭔지 궁금해졌다.
건일이 입을 열었다.
“일단 잡화점으로 돌아가자.”
그 말에 메르시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건일에게 말했다.
“당신, 은근히 눈치 좋은데?”
“응. 한때 이쪽 밥 좀 먹었거든. 우선, 빨리 자리를 피할까.”
테르핀과 아이린은 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에겐 건일이 나중에 천천히 설명을 해줄 생각이었다.
메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꾸했다.
“그러자.”

한참 후, 일행은 허름한 클로드 잡화점으로 되돌아 왔다.
메르시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테르핀이 잠시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메르시, 왜 방금 그 자리에서 확답을 안 한 거야?”
메르시와 건일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테르핀은 두 사람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라고 건일이 생각했다.
테르핀은 도시가 아니라 숲에서 살았고, 그마저도 몇 년은 정보가 차단된 채 살았으니까.
건일이 말을 하려다, 메르시가 설명하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메르시가 설명을 시작했다.
“협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는 당신이 내민 물건이 그다지 필요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응? 무슨 소리야.”
테르핀이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메르시는 좀 더 친절하게 설명했다.
“난 당장 너한테 뭔가를 팔아야 되는데, 상대가 안 산다고 그래. 그럼 어쩌겠어?”
“어… 가격을 낮춘다던가, 뭔가 덤을 올려준다던가.”
“그거야.”
건일이 맞장구쳤다.
테르핀이 건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일은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던 걸 테르핀에게 말했다.
“방금 고이진이 영입하려고 했을 때도. 표정에 너무 많이 드러나잖아. 난 이게 너무 필요해요! 그런 표정을 드러내면 네 몫을 제대로 못 챙긴단 말야.”
“으음…….”
테르핀은 이제 조금이나마 이해한 듯 보였다.
메르시는 헤헤, 웃어보였다.
“솔직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더블 오 길드가 날 영입하려는 거잖아. 우리 노인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근데 말이야…….”
가만히 있던 아이린이 끼어들었다.
“언니랑 오빠들이 더블 오에 들어가면, 난 어떡해?”
“어…….”
건일이 딱 멈춰섰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건일이 머리를 긁적이자, 아이린이 볼멘소리를 냈다.
“뭐야, 건일 오빠. 오빤 내 생각 안 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건일이 변명 거리를 생각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된 변명을 생각해 내기 전에 메르시가 말했다.
“아이린, 너 잘하는 거 있어?”
그 말에, 건일도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건일과 아이린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대장장이 일.”
메르시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풋, 웃어버렸다.
메르시는 유쾌하게 한참 웃음을 쏟아내다가 아이린에게 말했다.
“기어이 대장장이가 됐네. 실력은 어느 정도야?”
“음… 어느 정도냐 해도…….”
아이린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못 잡고 있는 듯했다.
시골 마을에서 자랐으니 비교할 만한 대상을 못 찾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건일은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건일이 입을 열었다.
“처음 본 골렘의 구동 중추를 하룻밤 안에 분해 재조립할 수 있어.”
“호오.”
얘기를 들은 메르시의 눈이 빛났다.
“그거라면 좀 쓸 만하겠는데?”
메르시는 뭔가 떠올린 듯 했다.
건일은 그녀가 방법을 찾아낸 거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 건일이 궁금해 하던 부분을 긁어도 될 듯싶었다.
건일은 잠시 눈치를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