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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화 : 트러블메이커]


장의 가게는 그 상업 지구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클로드 잡화점.
가게에 도착하자 테르핀은 잠시 멈칫했다.
간판은 그대로였지만, 너무나 낡고 사람의 인기척이 없어 보인 탓이었다.
테르핀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세요……?”
대답이 없다.
테르핀은 가게 깊숙히 들어갔고, 아이린과 건일이 그 뒤를 따랐다.
가게는 꽤 오랫동안 장사를 하지 않은 듯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테르핀이 다시 말했다.
“계세요??”
“장사 안 해요.”
문득 가게 안에서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르핀이 가게 안 쪽, 살림집이 위치한 곳을 바라봤다.
테르핀이 목소리가 난 쪽을 향해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칸족입니다. 장 아저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칸족?”
그제야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잠시 뒤, 살림집에서 나온 건 억세 보이는 여자였다.
젊어 보이긴 했지만 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미간에 잡힌 주름 때문일까.
그러나 테르핀과 여자는 서로를 유심히 바라보다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아!”
뭔가 생각난 듯 서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린도 조그맣게 탄성을 내뱉었다.
“메르시!”
“메르시 언니!”
“테르핀?!”
서로 동시에 각자의 이름을 부른다.
셋 다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외지인인 건일은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지켜봤다.
메르시는 미간의 주름을 폈다. 인상을 쓰고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보였다.
그녀는 그녀의 왼쪽 검지에 있는 반지를 매만졌다.
반지 겉면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음각이 새겨져 있었고, 파란 보석으로 마무리돼 있었다.
메르시가 반지에서 손을 떼서 덥석 테르핀의 손을 잡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3년 만인가?”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가게는 왜 이래?”
서로 사정이 많은 얘기를 꺼냈다.
메르시와 테르핀은 재회의 기쁨도 금세 사라지고 딱딱한 표정이 되었다.
테르핀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 일단 강철 사슴 고기가 있는데. 이거나 먹으면서 얘기 좀 할까?”
메르시가 테르핀의 짐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음… 가자. 선술집으로. 여기서 뭔가를 먹기는 싫거든.”
테르핀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시는 가벼운 외투를 챙겨들고, 선술집으로 앞장섰다.
선술집에 도착한 메르시는 익숙한 듯, 여주인에게 말했다.
“여기 술 좀 가져와 줘. 외상…….”
문득 말을 하던 메르시가 테르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철 사슴 고기 얼마나 있어?”
“다섯 마리 분.”
테르핀은 말을 하고, 메르시에게 넘겨줄 기세로 그녀 가까이에 짐을 내려놨다.
하지만 메르시는 자신의 왼쪽 검지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매만지며 혀를 찼다.
“…쳇.”
그녀의 마음에 드는 양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주인에게 물었다.
“강철 사슴 고기 다섯 마리분이 있는데, 이 정도면 외상 달아둔 거 얼마나 갚을 수 있나?”
여주인이 쪼르르 메르시 쪽으로 달려왔다.
후덕한 인상의 여주인은 그 손에 장부를 들고 있었다.
여주인은 장부를 뒤적이는데, 메르시 몫이 꽤나 있었다.
셈을 하던 여주인이 딱 말했다.
“한 달 치.”
“게엑, 쨉도 안 되네. 일단 한 마리 분을 넘길게. 요리 좀 해주고, 술 좀 내줘.”
“알겠다. 오늘은 서비스로 해주지.”
여주인은 흥흥, 가볍게 웃었다.
테르핀이 가방을 가리키자, 여주인은 아주 가볍게 한 마리 분량의 고기를 짊어 메고 부엌으로 향했다.
후덕한 인상이기는 했지만, 그 괴력에 건일 일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메르시는 익숙한 풍경인 듯 그리 놀라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여주인이 우선 술부터 가져왔다.
술이 탁자 위에 올라오자 메르시가 제일 먼저 잔을 따라 혼자 들이켰다.
“워워…….”
그걸 본 테르핀이 메르시를 말리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메르시는 순식간에 세 잔을 비우고 나서 테르핀에게 물었다.
“그래. 3년 전, 갑자기 소식이 끊긴 건 뭐 때문이야?”
테르핀은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말했다.
“일단 이 쪽은 메르시 클로드. 장 아저씨의 딸이야. 그리고 이 쪽은…….”
건일을 소개하려던 테르핀은 일단 얘기를 시작했다.
사악한 마법사와 도적 떼들이 마을을 습격한 것,
그로 인해 지난 3년간 사악한 마법사 밑에서 광산 일과 사냥을 했다는 것,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을 구해준 건일이 마을을 구해준 것,
그리고 아르타한테 잔소리를 듣기 전에 마을에서 도망치듯 도시로 온 것까지.
테르핀이 꽤나 세세하게 얘기한 탓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얘기 도중 삶은 고기가 나왔을 정도니까.
그러나 메르시는 전혀 지루하지 않은 표정으로 테르핀의 말을 하나하나 다 들었다.
반지를 매만지면서.
건일은 그 반지가 꽤나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르핀이 얘기를 하는 동안 건일과 아이린이 각자 한 잔씩 잔을 비웠다.
“내 얘기는 여기서 끝.”
테르핀이 얘기를 마쳤다.
메르시가 씁쓸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 봤다.
그녀를 보던 테르핀이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3년 전, 우리 노인네가 죽었어.”
“뭐??”
테르핀과 아이린이 동시에 놀랐다.
메르시는 쓴웃음을 지었다.
“심장병이었어. 그 노인네, 숨기고 있었더라고. 3년 전에 갑자기 쓰러진 거야. 아마 너희가 마법사한테 잡혔을 그 시기인 거 같아.”
“장 아저씨가…….”
테르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응. 쓰러진 그 영감을 살리려고 무슨 짓이든 했지. 그 탓에 가산을 거의 다 탕진해 버렸어. 노인네가 숨이 끊어졌을 때, 나한텐 저 가게와 엄청난 빚뿐이었지.”
“세상에…….”
“너라면 재기할 수 있잖아. 넌 끝내주는 상인이니까. 그런데 왜 재기를 못한 거야?”
테르핀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건일이 테르핀의 얼굴을 보며, 그 정도로 대단한 상술인지 궁금해졌다.
메르시는 잔을 단숨에 비우고 말했다.
“노인네가 죽었을 때, 갑자기 징집령이 내려졌어.”
“뭐……?”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징집령이라면 재기를 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빚이 산더미인 상태에서 팔 물건마저 사라지면 어쩔 수 없다.
메르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1년 전부터, 북쪽에서 몬스터가 계속 밀려오는 모양이더라고. 거의 바다처럼 밀려온다나봐.”
건일이 다 죽어가는 상업 지구를 떠올렸다.
“그래서…….”
메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덕에 이 도시의 상권이 거의 다 말라 죽어버렸어. 더 이상 재기할 힘이 없어졌지.”
그녀는 분한 듯 테이블을 내리쳤다.
“젠장… 팔 물건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는데!”
“…고기는 어때.”
불쑥 테르핀이 말했다. 메르시가 고개를 들어 테르핀을 바라봤다.
“강철 사슴의 두개골까지 뺏어가는 형국에, 가죽같은 건 꿈도 못 꾸겠지. 하지만 고기는 안 가져가는 모양이야. 고기라면 내가 구할 수 있어.”
“아서라.”
메르시가 딱 잘라서 말했다.
“요즘 성 바깥도 흉흉해져서 사냥 다니다 첩자로 몰릴걸?”
“으음…….”
테르핀이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메르시는 빠르게 잔을 채우고 말했다.
“젠장… 하여간 전쟁만 아니었어도…….”
“그러게.”
테르핀과 메르시가 신세 한탄이 슬슬 마무리되어 갔다.
두 사람이 더 이상 말없이 술만 먹기 시작하자 건일이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난 정보가 필요해.”
“정보?”
메르시는 물으면서 건일을 바라봤다.
그녀는 왜 반말을 하냐는 식의 표정이었지만, 건일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래. 마법이든, 뭐든. 난 어머니에게 돌아가야 해.”
“효자 납셨네.”
메르시가 비꼬았다.
그러나 건일은 이번에도 개의치 않았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으고 싶어. 그렇게 하려면, 길드에 들어가야 된다 들었어. 이 도시에 있는 길드는 어때?”
“망했어.”
메르시가 깔끔하게 말했다.
건일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메르시가 키득거리다,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참 다행이야. 이 도시에 꽤 큰 길드가 지금 머물고 있거든. 더블 오 길드. 군수품을 손에 대고 있는데 요즘 같은 전쟁 철이 호황이라서 말이지.”
“더블 오 길드라…….”
건일이 중얼거렸다.
군수물자 길드라.
전쟁 중이라면 확실히 꽤 큰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훌륭한 군사보다 보급이니까.
그리고 보급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전쟁이라면 마법 같은 것도 많이 사용하게 될 테니, 마법에 대한 정보도 자연스레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 더블 오 길드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 도시에서 유일한 선택지였다.
“거기로 들어가고 싶은데.”
“은근히 쉬워.”
“쉽다고?”
테르핀이 의아하게 물었다.
메르시가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들르는 도시마다 호위병을 모집하거든. 실력만 있다면 쉽게 들어갈 수 있어.”
그거라면 걱정이 없다.
총이 있는 한 웬만한 전사보다는 훨씬 실력이 좋을 테니까.
건일이 다짐을 하는 동안 술집으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총 세 명. 한 덩치 하는 인간들이었다.
갑옷과 무기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는데, 아마 군인 같아 보였다.
덩치에 맞게 도끼나 둔기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빈자리에 앉았는데, 그게 건일 일행의 옆자리였다.
건일은 그들과 부딪히지 않게 의자를 잡아끌었다.
그들은 오자마자 술과 안주를 시켜놓고,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어휴. 도시라길래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놀 만한 곳이 없네.”
“우리가 놀러온 건 아니잖아.”
“어떡하냐. 여기 있는 상인을 데리러 오랬는데, 가게가 폭삭 주저앉기 직전이구만!”
옆자리인데다 그들의 목청까지 컸기 때문에 건일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
건일은 술을 마시며 자리를 피해야 되나,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메르시가 그들이 하는 말에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술잔을 큰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거, 술 처먹으러 왔으면 좀 닥치고 먹읍시다.”
‘…시비네.’
건일이 술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그리고 메르시가 남자들의 웅덩이에 던진 돌은 꽤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남자들이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뭐야, 이 계집년이?!”
“뭐, 이 돼지 새끼야!”
메르시도지지 않고 일어났다.
“어, 어어, 어!”
테르핀이 황급히 일어나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건일도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사태를 키우고 싶지 않아 총을 들지는 않았는데, 남자들은 건일의 총을 보고 무기를 잡아들었다.
“어이고.”
건일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괜히 자극해서 좋을 건 없다.
건일은 양손을 그들 쪽으로 내밀어 총을 잡지 않을 거란 의사를 표시했다.
남자들도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는데.
빠악.
메르시가 던진 잔이 제일 앞에 있던 안대를 하고 있는 남자의 머리에 맞았다.
“이년이!!”
안대남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메르시에게 달려들었다.
테르핀이 몸을 던져 안대남을 막았다.
테르핀과 안대남 사이에 꽤 덩치 차이가 있었는데, 테르핀은 꽤 능숙하게 남자를 막아내고 있었다.
건일은 칸족의 종족 특성이 괴력인가 생각했다.
메르시가 외쳤다.
“여기가 이 꼴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빌어먹을 전쟁 때문이잖아! 니들 먹여 살리겠다고 이것저것 다 뺏어가서 그런 거잖아!! 그런데 뻔뻔스레 여기 와서 망했네 뭐네 지껄여?!”
건일은 메르시가 그것에 화난 게 아니라 생각했다.
진짜 시끄러워서 시비를 건 걸 테지.
그러다 갑자기 대의명분이 생각난 거고.
그리고 역시나 급조한 대의명분은 상대방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안대남의 뒤에 있던 대머리가 또다시 버럭 했다.
“미친년이 가게가 망한 걸 왜 우리한테 풀어? 니가 장사 못 해서 그런 거잖아!!”
“아.”
건일이 퍼뜩 생각이 들었다.
메르시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메르시에게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이 어딘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대머리는 메르시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그순간 건일과 테르핀이 서로를 바라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시가 포크를 집어든 순간, 테르핀이 막고 있던 안대남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건일은 무기를 집어든 대머리의 둔기를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성과 함께 둔기 끄트머리가 박살났다.
남자들이 우뚝 멈춰 섰다.
건일은 총구를 남자들에게 겨누었다.
“나 마법사인데. 어때, 한판 제대로 벌려볼까?”
“윽!”
눈 깜짝할 새 둔기를 박살내는 위력에 남자들이 머뭇거렸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듯하자 건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총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우리 일행이 술 먹어서 취한 모양입니다. 저, 그냥 이쯤에서 서로 조용조용하게…….”
“이게 얼마짜린데!!”
건일이 고개를 숙인 순간, 놈들이 건일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