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018화 : 도시 셀림]
“얘기 끝났어?”
불쑥 테르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세 명 분의 짐을 들고 있었다.
건일이 그걸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인마. 너. 내가 야반도주하는 거 비밀로 하자고 했잖아.”
“아, 뭐… 그건 그런데. 아이린도 워낙 아르타 씨를 싫어해서.”
테르핀이 짐을 내려놨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건일에게 말했다.
“게다가 여기 있으면 쟤가 좋아하는 대장간 일을 못 하잖아. 오빠로서 그건 싫거든.”
“우웩.”
갑자기 아이린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테르핀에게 말했다.
“어디서 오빠인 척이야. 와, 나 소름 돋는다, 진짜.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냐?”
“시끄러.”
이 와중에도 투닥거린다.
건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친한 남매다.
하지만 건일의 웃음소리에 저 남매가 반응했다.
두 사람은 급히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고 쉿, 소리를 냈다.
건일이 급히 웃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혹시 야반도주를 하는 걸 들켰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대신 아이린이 면박을 준다.
“웃으면 어떡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겨우 그런 이유였다.
건일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니들이 더 시끄러웠거든.”
“윽……!”
정곡이 찔려 아이린이 말문이 막혔다.
건일이 피식 웃었다.
이 남매와 같이 길을 떠난다면, 재미는 있을 것 같았다.
테르핀이 말했다.
“장난은 그만 치고. 빨리 튀자. 사람들 슬슬 뻗기 시작한 모양이거든.”
그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 벗어난 건, 야반도주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이렇게 만담을 벌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건일이 말했다.
“좋아. 그럼 여기서 이 화약만 들고 튄다. 불만 없지?”
“빨리 챙겨.”
아이린은 이미 무연화약을 자루에 담고 있었다.
건일은 그녀와 함께 무연화약을 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맞다. 근데 오빠.”
화약을 담던 아이린이 건일을 불렀다.
“도시에 가면, 오빠가 마법사가 아니란 걸 알아 볼 마법사가 많을 텐데. 괜찮겠어?”
“…무슨 소리야? 마법사가 아니라니?”
일을 돕던 테르핀이 고개를 갸웃하며 건일을 바라봤다.
건일이 난처한 표정으로 테르핀과 아이린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아이린에게 말했다.
“그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어차피 도시에 가서 마법사를 만나게 되면 들통날 텐데 뭐. 그 총을 쏘는 데 마나를 안 쓰잖아. 그럼 마법사들은 단번에 알아 채.”
아이린이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한다.
아마 그녀의 말대로 도시에서 마법사를 만나면, 그가 마법사가 아니란 것이 들통나는 게 거의 확정이니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이들 눈에 총이 신비하더라도, 총은 마나를 쓰지 않는다.
건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심스레 테르핀에게 아이린에게 말했듯 ‘연금술사‘라고 말했다.
처음에 테르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말했다.
“결국, 마법이든 뭐든. 우리 마을을 구해준 거잖아? 난 그거면 됐어.”
“아아.”
하긴.
결국 마법이든 총이든, 건일은 테르핀의 마을을 구했다.
그거면 된 거였다.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무연화약을 전부 수거한 세 사람은 술에 뻗은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급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
며칠 후.
여전히 울창한 숲 속.
조용한가 싶었던 숲에서 불쑥 발굽 소리와 함께 테르핀의 고함이 이어졌다.
“건일, 거기로 간다!”
테르핀의 목소리에 나무 위에 있던 건일이 가늠쇠에 눈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저격 각에 강철 사슴이 들어왔다.
건일은 망설이지 않고 놈의 목을 날려 버렸다.
일부러 무른 탄환을 썼지만 총을 새로 만든 덕에 이전보다 훨씬 더 위력이 올랐다.
“좋았어!”
뒤따라오던 테르핀이 쾌재를 불렀다.
강철 사슴.
사슴과 비슷했지만, 뿔을 비롯한 두개골 일부가 마치 철처럼 단단한 녀석이었다.
뼈가 무척이나 단단하기 때문에 가공이 힘들지만, 그 부분을 이용해 각종 방어구로 활용이 가능했다.
다만 건일 일행에 강철 사슴을 가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강철 사슴의 고기와 두개골을 취할 뿐이었다.
두개골을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건일은 테르핀의 마을에서 계획했듯이 이 밑천을 이용해 정보를 불려 나갈 생각이었다.
테르핀은 건일의 총에 맞아 머리와 몸이 분리된 강철 사슴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머리가 떨어졌기 때문에 목의 경동맥을 자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나무에 매달아서 뒷다리 쪽 혈관을 조금 가르니 순식간에 피가 빠지기 시작했다.
피를 빼는 동안 테르핀은 단검으로 머리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건일이 총을 등에 메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유심히 해체 과정을 보던 건일이 천천히 물었다.
“한 3일은 걸은 거 같은데. 며칠이나 더 걸어야 돼?”
“이제 반나절 남았을 걸?”
테르핀은 가죽을 벗긴 두개골을 깨끗이 물에 씻으며 대꾸했다.
얼추 두개골에 묻은 피가 닦여 나가자, 깨끗하게 털어내고 조심스레 그의 짐 안에 집어넣었다.
강철 사슴 두개골 5개.
지난 3일 동안 잡은 강철 사슴이다.
이 정도면 세 명이 그래도 꽤 오랫동안 도시에서 지낼 여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테르핀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강철 사슴 해체에 들어갔다.
가만히 강철 사슴 고기를 보던 건일이 말했다.
“나 이 고기 이제 슬슬 물리는데.”
“어이고, 살 판 나셨수.”
테르핀이 핀잔을 주며, 피 빠진 강철 사슴을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는 깔끔하게 토막 친 고기를 천으로 감싸 건일의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가자. 반나절만 더 걸으면 도시야. 가서 강철 사슴 고기랑 두개골을 팔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오냐.”
건일이 짐을 짊어 메고 테르핀과 함께 야영지로 돌아갔다.
야영지에선 아이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구동 중추를 재조립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건일과 테르핀이 돌아오자, 재빨리 구동 중추를 짐에 집어넣고 일어났다.
“이제 반나절만 더 걸으면 되지?”
아이린이 방금 구동 중추를 조립할 때와는 달리 생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르핀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걸어서 드디어 셀림에 도착했다.
테르핀은 언덕 위에 멈춰 서서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가리켰다.
“저기가 셀림이다!”
성벽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견고한 형태였다.
도시는 방어하기 용이하게, 성 밖에 해자를 이중으로 쳐놨다.
성벽 밖에는 평범한 농민들이 느긋하게 밭일이나, 과수원 일을 하고 있었다.
건일은 묘한 고취감을 느끼며 도시 쪽으로 걸어갔다.
성벽엔 입구가 동문 하나뿐이었다.
도시로 출입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이 많아서 다리가 가득 찬 것이 아니었다.
성문에 서서 검문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본 테르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원래는 검문을 안 하는데…….”
건일도 위화감을 느꼈다.
검문을 하는 병사들은 묘하게 긴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건일 일행은 사람들 틈에 끼어 느릿느릿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이 걸려서야 그들이 검문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테르핀이 능숙하게 군인들에게 인사한 뒤 말했다.
“저희는 강철 사슴 두대골을 거래하러 왔습니다.”
“확인하겠다.”
군인들이 고압적으로 말했다.
테르핀은 낌새가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강철 사슴 두개골을 보여줬다.
군인들은 두개골을 이리저리 살피다 말했다.
“이거 압수다.”
갑작스런 압수 통보에 테르핀과 아이린이 반발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아니, 왜요?”
“징집이야. 다른 두개골이 더 있나?”
징집이란 말에 테르핀과 아이린이 당황했다.
건일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이 군인들에게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던 것이다.
테르핀은 짐 안에서 강철 사슴 두개골을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군인들은 노련하게 그것들을 찾아냈다.
순식간에 강철 사슴 두개골 다섯 개를 뺏겼다.
“아, 제발요. 하나만이라도 주세요. 도시에서 며칠 살 여비 마련하려고 그런 건데!”
테르핀이 악다구니에 받쳐 소리쳤다.
하지만 군인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응?”
강철 사슴 두개골 말고 또 따로 뺏을 게 있나 찾던 군인의 눈에, 건일의 총이 들어왔다.
군인은 칼을 뽑아들어 건일의 총을 가리켰다.
“그건 뭐냐.”
“윽……!!”
테르핀과 아이린의 표정이 바뀌었다.
강철 사슴 두개골은 그렇다치더라도 건일의 총까지 뺏어갈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건일은 조용히 총을 쥐었다.
그는 군인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마법사입니다. 이건 제 마법 지팡이구요.”
“마법사?”
군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건일의 위아래를 살폈다.
건일이 군인을 똑바로 쳐다보다 말했다.
여기서 기선을 잡지 않으면 도리어 건일이 빼앗기고 만다.
그렇지 않아도 허무하게 강철 사슴 두개골을 뺏긴 마당에, 총까지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건일이 재차 말했다.
“뭐 맘에 안 드는 일이라도?”
“으음.”
군인은 건일이 마법사라는 말에 차마 그 이상 말을 하지 못 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건일 일행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건일은 성문을 한참을 지나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그로서도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젠장……!”
테르핀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총을 뺏기지 않았다는 것보다 여비를 마련할 강철 사슴 두개골을 뺏긴 게 뼈아팠다.
남은 건 강철 사슴 고기뿐인데, 두개골에 비해 값이 싼 편이라 충분한 양의 여비를 모으기는 글렀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건일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일단 고기를 팔고, 안 뺏길 만한 걸로 사냥을 해오자.”
테르핀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 수 없나…….”
“별 수 없지. 일단 장 아저씨한테 가자고.”
아이린이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말했다.
장 아저씨는 테르핀의 부족이 붙잡히기 전, 이 도시에서 가죽과 고기를 거래하던 상인이었다.
그의 집은 이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성문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건일 일행이 곧장 북쪽에 있는 상업 지구로 향했다.
“와…….”
하지만 테르핀은, 그의 기억과 다른 상업 지구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북쪽 상업 지구는 무척이나 활기차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곳은…….
“황량하네.”
건일이 짧게 감상을 뱉었다.
말 그대로였다. 이 상업 지구는 이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한참이나 된 듯 했다.
테르핀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전쟁 때문인가?”
아이린이 상업 지구를 보다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도적 떼들한테 잡혀있는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뀐 모양이네. 장 아저씨한테 그간 상황을 물어보자.”
“그리고 이 마을에 길드가 있는지도.”
건일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아이린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장 아저씨가 아직 여기 계시다는 전제 하에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이년아.”
테르핀이 딴죽을 걸었다.
하지만 그 딴죽은 평소와는 달리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조금은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테르핀과 아이린이 장의 가게로 걷기 시작했다.
건일은 총을 한 번 고쳐 메고, 천천히 그 둘의 뒤를 쫓았다.
“얘기 끝났어?”
불쑥 테르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세 명 분의 짐을 들고 있었다.
건일이 그걸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인마. 너. 내가 야반도주하는 거 비밀로 하자고 했잖아.”
“아, 뭐… 그건 그런데. 아이린도 워낙 아르타 씨를 싫어해서.”
테르핀이 짐을 내려놨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건일에게 말했다.
“게다가 여기 있으면 쟤가 좋아하는 대장간 일을 못 하잖아. 오빠로서 그건 싫거든.”
“우웩.”
갑자기 아이린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테르핀에게 말했다.
“어디서 오빠인 척이야. 와, 나 소름 돋는다, 진짜.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냐?”
“시끄러.”
이 와중에도 투닥거린다.
건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친한 남매다.
하지만 건일의 웃음소리에 저 남매가 반응했다.
두 사람은 급히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고 쉿, 소리를 냈다.
건일이 급히 웃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혹시 야반도주를 하는 걸 들켰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대신 아이린이 면박을 준다.
“웃으면 어떡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겨우 그런 이유였다.
건일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니들이 더 시끄러웠거든.”
“윽……!”
정곡이 찔려 아이린이 말문이 막혔다.
건일이 피식 웃었다.
이 남매와 같이 길을 떠난다면, 재미는 있을 것 같았다.
테르핀이 말했다.
“장난은 그만 치고. 빨리 튀자. 사람들 슬슬 뻗기 시작한 모양이거든.”
그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 벗어난 건, 야반도주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이렇게 만담을 벌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건일이 말했다.
“좋아. 그럼 여기서 이 화약만 들고 튄다. 불만 없지?”
“빨리 챙겨.”
아이린은 이미 무연화약을 자루에 담고 있었다.
건일은 그녀와 함께 무연화약을 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맞다. 근데 오빠.”
화약을 담던 아이린이 건일을 불렀다.
“도시에 가면, 오빠가 마법사가 아니란 걸 알아 볼 마법사가 많을 텐데. 괜찮겠어?”
“…무슨 소리야? 마법사가 아니라니?”
일을 돕던 테르핀이 고개를 갸웃하며 건일을 바라봤다.
건일이 난처한 표정으로 테르핀과 아이린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아이린에게 말했다.
“그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어차피 도시에 가서 마법사를 만나게 되면 들통날 텐데 뭐. 그 총을 쏘는 데 마나를 안 쓰잖아. 그럼 마법사들은 단번에 알아 채.”
아이린이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한다.
아마 그녀의 말대로 도시에서 마법사를 만나면, 그가 마법사가 아니란 것이 들통나는 게 거의 확정이니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이들 눈에 총이 신비하더라도, 총은 마나를 쓰지 않는다.
건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심스레 테르핀에게 아이린에게 말했듯 ‘연금술사‘라고 말했다.
처음에 테르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말했다.
“결국, 마법이든 뭐든. 우리 마을을 구해준 거잖아? 난 그거면 됐어.”
“아아.”
하긴.
결국 마법이든 총이든, 건일은 테르핀의 마을을 구했다.
그거면 된 거였다.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무연화약을 전부 수거한 세 사람은 술에 뻗은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급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며칠 후.
여전히 울창한 숲 속.
조용한가 싶었던 숲에서 불쑥 발굽 소리와 함께 테르핀의 고함이 이어졌다.
“건일, 거기로 간다!”
테르핀의 목소리에 나무 위에 있던 건일이 가늠쇠에 눈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저격 각에 강철 사슴이 들어왔다.
건일은 망설이지 않고 놈의 목을 날려 버렸다.
일부러 무른 탄환을 썼지만 총을 새로 만든 덕에 이전보다 훨씬 더 위력이 올랐다.
“좋았어!”
뒤따라오던 테르핀이 쾌재를 불렀다.
강철 사슴.
사슴과 비슷했지만, 뿔을 비롯한 두개골 일부가 마치 철처럼 단단한 녀석이었다.
뼈가 무척이나 단단하기 때문에 가공이 힘들지만, 그 부분을 이용해 각종 방어구로 활용이 가능했다.
다만 건일 일행에 강철 사슴을 가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강철 사슴의 고기와 두개골을 취할 뿐이었다.
두개골을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건일은 테르핀의 마을에서 계획했듯이 이 밑천을 이용해 정보를 불려 나갈 생각이었다.
테르핀은 건일의 총에 맞아 머리와 몸이 분리된 강철 사슴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머리가 떨어졌기 때문에 목의 경동맥을 자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나무에 매달아서 뒷다리 쪽 혈관을 조금 가르니 순식간에 피가 빠지기 시작했다.
피를 빼는 동안 테르핀은 단검으로 머리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건일이 총을 등에 메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유심히 해체 과정을 보던 건일이 천천히 물었다.
“한 3일은 걸은 거 같은데. 며칠이나 더 걸어야 돼?”
“이제 반나절 남았을 걸?”
테르핀은 가죽을 벗긴 두개골을 깨끗이 물에 씻으며 대꾸했다.
얼추 두개골에 묻은 피가 닦여 나가자, 깨끗하게 털어내고 조심스레 그의 짐 안에 집어넣었다.
강철 사슴 두개골 5개.
지난 3일 동안 잡은 강철 사슴이다.
이 정도면 세 명이 그래도 꽤 오랫동안 도시에서 지낼 여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테르핀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강철 사슴 해체에 들어갔다.
가만히 강철 사슴 고기를 보던 건일이 말했다.
“나 이 고기 이제 슬슬 물리는데.”
“어이고, 살 판 나셨수.”
테르핀이 핀잔을 주며, 피 빠진 강철 사슴을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는 깔끔하게 토막 친 고기를 천으로 감싸 건일의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가자. 반나절만 더 걸으면 도시야. 가서 강철 사슴 고기랑 두개골을 팔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오냐.”
건일이 짐을 짊어 메고 테르핀과 함께 야영지로 돌아갔다.
야영지에선 아이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구동 중추를 재조립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건일과 테르핀이 돌아오자, 재빨리 구동 중추를 짐에 집어넣고 일어났다.
“이제 반나절만 더 걸으면 되지?”
아이린이 방금 구동 중추를 조립할 때와는 달리 생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르핀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걸어서 드디어 셀림에 도착했다.
테르핀은 언덕 위에 멈춰 서서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가리켰다.
“저기가 셀림이다!”
성벽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견고한 형태였다.
도시는 방어하기 용이하게, 성 밖에 해자를 이중으로 쳐놨다.
성벽 밖에는 평범한 농민들이 느긋하게 밭일이나, 과수원 일을 하고 있었다.
건일은 묘한 고취감을 느끼며 도시 쪽으로 걸어갔다.
성벽엔 입구가 동문 하나뿐이었다.
도시로 출입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이 많아서 다리가 가득 찬 것이 아니었다.
성문에 서서 검문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본 테르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원래는 검문을 안 하는데…….”
건일도 위화감을 느꼈다.
검문을 하는 병사들은 묘하게 긴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건일 일행은 사람들 틈에 끼어 느릿느릿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이 걸려서야 그들이 검문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테르핀이 능숙하게 군인들에게 인사한 뒤 말했다.
“저희는 강철 사슴 두대골을 거래하러 왔습니다.”
“확인하겠다.”
군인들이 고압적으로 말했다.
테르핀은 낌새가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강철 사슴 두개골을 보여줬다.
군인들은 두개골을 이리저리 살피다 말했다.
“이거 압수다.”
갑작스런 압수 통보에 테르핀과 아이린이 반발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아니, 왜요?”
“징집이야. 다른 두개골이 더 있나?”
징집이란 말에 테르핀과 아이린이 당황했다.
건일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이 군인들에게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던 것이다.
테르핀은 짐 안에서 강철 사슴 두개골을 뺏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군인들은 노련하게 그것들을 찾아냈다.
순식간에 강철 사슴 두개골 다섯 개를 뺏겼다.
“아, 제발요. 하나만이라도 주세요. 도시에서 며칠 살 여비 마련하려고 그런 건데!”
테르핀이 악다구니에 받쳐 소리쳤다.
하지만 군인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응?”
강철 사슴 두개골 말고 또 따로 뺏을 게 있나 찾던 군인의 눈에, 건일의 총이 들어왔다.
군인은 칼을 뽑아들어 건일의 총을 가리켰다.
“그건 뭐냐.”
“윽……!!”
테르핀과 아이린의 표정이 바뀌었다.
강철 사슴 두개골은 그렇다치더라도 건일의 총까지 뺏어갈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건일은 조용히 총을 쥐었다.
그는 군인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마법사입니다. 이건 제 마법 지팡이구요.”
“마법사?”
군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건일의 위아래를 살폈다.
건일이 군인을 똑바로 쳐다보다 말했다.
여기서 기선을 잡지 않으면 도리어 건일이 빼앗기고 만다.
그렇지 않아도 허무하게 강철 사슴 두개골을 뺏긴 마당에, 총까지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건일이 재차 말했다.
“뭐 맘에 안 드는 일이라도?”
“으음.”
군인은 건일이 마법사라는 말에 차마 그 이상 말을 하지 못 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건일 일행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건일은 성문을 한참을 지나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그로서도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젠장……!”
테르핀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총을 뺏기지 않았다는 것보다 여비를 마련할 강철 사슴 두개골을 뺏긴 게 뼈아팠다.
남은 건 강철 사슴 고기뿐인데, 두개골에 비해 값이 싼 편이라 충분한 양의 여비를 모으기는 글렀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건일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일단 고기를 팔고, 안 뺏길 만한 걸로 사냥을 해오자.”
테르핀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 수 없나…….”
“별 수 없지. 일단 장 아저씨한테 가자고.”
아이린이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말했다.
장 아저씨는 테르핀의 부족이 붙잡히기 전, 이 도시에서 가죽과 고기를 거래하던 상인이었다.
그의 집은 이 도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성문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건일 일행이 곧장 북쪽에 있는 상업 지구로 향했다.
“와…….”
하지만 테르핀은, 그의 기억과 다른 상업 지구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북쪽 상업 지구는 무척이나 활기차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곳은…….
“황량하네.”
건일이 짧게 감상을 뱉었다.
말 그대로였다. 이 상업 지구는 이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한참이나 된 듯 했다.
테르핀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전쟁 때문인가?”
아이린이 상업 지구를 보다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도적 떼들한테 잡혀있는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뀐 모양이네. 장 아저씨한테 그간 상황을 물어보자.”
“그리고 이 마을에 길드가 있는지도.”
건일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아이린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장 아저씨가 아직 여기 계시다는 전제 하에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이년아.”
테르핀이 딴죽을 걸었다.
하지만 그 딴죽은 평소와는 달리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조금은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테르핀과 아이린이 장의 가게로 걷기 시작했다.
건일은 총을 한 번 고쳐 메고, 천천히 그 둘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