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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화 : 잔치의 끝]


다음날.
탁 트인 숲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간간히 벌레 울음소리나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지만, 건일이 들어서자 뚝 그쳤다.
그는 어제 그랬듯, 무릎 위에 총을 올려놓은 상태로 정좌를 한 채 명상에 들어갔다.
적당히 마나가 모인 것 같자 그는 이제 머릿속에서 테서랙트를 생각하며, 천천히 마법서를 읽어내려 간다.
제일 처음에 나온 것은 흡수한 마나를 운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제일 기본은, 마법을 쓰는 내내 테서랙트를 생각할 것.
그 다음으로 온몸으로 흡수한 마나는 자연스럽게 심장에 모이는데, 마법은 이를 가공해 방출하는 것이었다.
그 가공의 첫 걸음이 바로 순환.
심장에 모인 마나를 마치 혈액처럼 온몸 구석구석에 보내는 일이었다.
그게 바로 [헤이스트].
마나를 순환시키는 것으로 신체능력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린다.
건일은 간신히 헤이스트의 설명을 다 읽고 책을 내려놓았다.
책 반 페이지 분량의 간단한 설명을 읽는 데 대충 한 시간은 쓴 거 같았다.
건일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에 집중하자, 절반쯤 차 있는 마나가 느껴졌다.
테서랙트를 생각하며, 심장에 있는 마나를 조금씩 몸 이곳저곳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마치 담석처럼 뭉쳐있던 마나가 느릿느릿 녹아가는가 싶더니, 천천히 몸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흘러들어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몸 끝에 다다른 마나를 다시 심장으로 되돌린다.
순환.
심장에서 구석으로, 구석에서 심장으로.
건일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몸에 새로운 기운이 치솟는다.
하지만 그 생각 덕에 머리에 잡생각이 끼어들었다.
마나를 움직일 힘을 잃었다.
그러나 이미 순환하고 있던 마나는 관성 때문에 계속해서 건일의 몸 안을 돌고 있었다.
다만 오래 가지 않았다.
마나는 천천히 순환하는 힘을 잃어가다, 대략 3분쯤을 전후로 완전히 멈춰 섰다.
건일은 손을 쥐락펴락 했다.
“흐음…….”
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끊임없이 테서랙트를 생각해라. 의식을 4차원 너머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한 순간의 판단으로 모든 게 결정 나는 전장에서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헤이스트는 일단 전투 시작 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데 써먹을 수 있겠지만, 이것마저도 정작 전투가 벌어지면 써먹기 힘들 것이었다.
건일은 다시 마법서를 펼쳤다. 혹시 다른 마법이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윽.”
테서랙트를 다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마법을 쓰는 것은 생각 외로 정신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걸 지금 깨달았다.
건일은 쓴웃음을 짓고 마법서를 내려놓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그는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맑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건일이 끙차, 일어나 마법서를 챙겼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게 많다.
그는 총기를 분해했다. 역시나, 총열에는 때가 끼어 있다.
지난 밤 얻어놨던 기름으로 총열을 깨끗이 씻어내고, 헝겊으로 총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순식간에 총기 조립을 하고 나서 이제 숲에서 벗어나 마을로 걸어갔다.
조용했던 숲과는 달리, 마을은 무척 활기찼다.
이제 막 아침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숲에서 착 가라앉았던 건일의 기분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조금씩 올라갔다.
건일은 곧장 테르핀의 집으로 가지 않고, 대장간으로 향했다.
어제 만들어놨던 무연화약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무연화약은 마르켈의 감독 아래 아주 잘 마르고 있었다.
건일은 무연화약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르켈에게 인사했다.
마르켈은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고 말했다.
“건일! 오늘 밤엔 잔치가 있는데! 한잔해야지!”
알고 있다. 오늘 집에서 나올 때 얼핏 들었다.
레칸을 비롯한 부상자들이 슬슬 일어날 때가 됐다고.
그래서 드디어 마을이 해방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잔치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마을이 아침부터 활기찬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네. 한잔해야죠.”
건일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마르켈은 호탕하게 웃었다.
건일은 이제 시선을 돌려 아이린을 바라봤다.
아이린은 구동 중추 옆에서 곯아떨어져 있다.
지난밤에 새 구동 중추를 분해 재조립한 것이었다.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었지만 자는 사람을 깨울 순 없었다.
건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우선 테르핀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마을 전체가 잔치로 떠들썩한 만큼, 테르핀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집 한가운데에 있는 솥에선 그간 식사 때 보지 못했던 싱싱한 고기를 통째로 삶고 있었다.
“어머, 건일 왔구나!”
처음 보는 채소를 썰던 테르핀의 어머니가 건일을 맞이해 말했다.
건일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 옆에선 테르핀이 귀찮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어머니를 돕고 있었다.
어머니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까지 시간이 많으니까 쉬고 있으렴.”
“알겠습니다.”
건일이 가볍게 대꾸하고 테르핀에게 말을 건넸다.
“테르핀. 오늘 밤은 축제네.”
“아아… 알고 있어.”
그렇게 대답하는 테르핀이 건일에게 눈짓을 했다.
건일은 고개를 까딱이고 테르핀의 방으로 향했다.
테르핀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하지만 테르핀의 움직임을 눈치챈 어머니가 냅다 테르핀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테르핀은 꼼짝없이 요리가 끝날 때까지 솥 앞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마을 한복판에 마을 사람들 전부가 모여 있었다.
지난 날 부상을 입었던 레칸을 비롯한 사냥꾼들도 나와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둘둘 매고는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 고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맥주가 담긴 쇠뿔 잔을 들고 있는 아르타와 건일이 서 있었다.
아르타가 천천히 말했다.
“별말 안 하겠다. 우린 여기 있는 한의 아들, 건일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모두 죽을 때까지 갚아라. 건일, 뭐 하고 싶은 말 있나?”
건일은 쇠뿔 잔을 내려다보다 히죽 웃었다.
그는 힘차게 쇠뿔 잔을 들어올렸다.
“먹고 죽죠.”
아르타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먹고 죽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잔치가 시작됐다.
건일은 왁자지껄한 사람들 속에 녹아들었다.
여기저기서 건일과 건배를 하기 위해 잔이 소란스럽게 오갔다.
건일은 크게 웃으며 그들과 잔을 나눴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갑자기 레칸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건일이 웃음을 쏟아냈다.
하지만 레칸만이 아니었다.
그의 병신 짓을 보고 있던 테르핀도 몸이 달았는지, 레칸의 병신 짓에 끼어들었다.
여기저기서 폭소가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보고 있던 아이린이 한마디 감평을 내뱉었다.
“병신.”
그러고 나서 자지러지게 웃었다.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쇠뿔 잔은 예술적으로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술잔 끝이 뾰족해서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계속 잔을 들고 있다 보니, 사람들은 연신 술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건일은 계속 술을 들이켠 탓에, 슬슬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을을 구한 건 건일인데, 정작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술을 먹고 있었다.
건일에게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응?”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건일이 그를 잡은 사람을 돌아봤다.
살짝 취기가 오른 아이린이었다.
아이린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조용히 말했다.
“어지러. 어디 가는 거야?”
건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쉽게 보내줄 거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아이린을 일으켜 세웠다.
“바람 좀 쐬러 가자.”
아이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일은 아이린을 데리고 마을 외곽 쪽으로 걸어갔다.
레칸과 한바탕 병신춤을 춘 테르핀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건일과 아이린이 없어진 것을 알아챘지만, 쇠뿔 잔 가득 술을 따르고 레칸과 잔을 나눴다.
신나게 웃으며 술을 마시던 레칸도, 건일과 아이린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그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물었다.
“뭐야, 건일하고 아이린 어디 갔어?”
“글쎄…….”
테르핀이 술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대장간이라도 가지 않았겠어?”
“크핫하!”
뭐가 그리 웃긴지 레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테르핀은 어느새 비워 버린 쇠뿔 잔을 채우고 일어났다.
“이거 왜 이렇게 조용해? 춤추자고!”
그가 다시 병신춤에 들어섰다.
잠시 그 요란스러운 판에서 벗어난 건일과 아이린은 진짜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이린이 조금 취기가 오르긴 했지만 비틀거리며 걸을 수준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마을 여기저기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대장간에 도착했다.
‘…화약.’
대장간을 보자마자 건일이 생각했다.
건일은 아이린을 툭 건드리고, 대장간 쪽을 가리켰다.
“잠깐 들렀다 갈까?”
아이린은 대장간을 보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 쐰다며. 근데 대장간이야?”
“대장간엔 바람이 안 드나?”
“네이, 네이.”
아이린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대장간으로 향하는 건일을 뒤따랐다.
건일은 대장간에 도착해 무연화약의 상태를 살폈다.
드래곤의 던전에서 만들었을 때보다 훨씬 양질의 화약이었다.
건일은 화약을 손으로 만져본 뒤에 히죽 웃어보였다.
옆에서 그걸 구경하던 아이린이 불쑥 말했다.
“연금술이란 거, 엄청 대단하네. 목면으로 그런 걸 만들다니.”
어제, 목면으로 화약을 만들다 터지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 전부가 놀랐다.
얼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지어냈던 말이 진짜로 의미가 있게 된 순간이었다.
건일이 히죽 웃었다.
“그렇지?”
건일이 근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옆엔 이제 구동 중추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아이린의 작품이었다.
처음엔 밤을 새도 조립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반나절 만에 구동 중추 하나를 해체, 재조립한다.
건일을 보고 있던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이제 어쩔 거야?”
테르핀에게 얘기를 들었던 거다.
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도시로 갈 거야. 길드에 들어가서 세계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어머니께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지.”
“그래……?”
아이린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녀는 건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데려가.”
“어……?”
갑작스런 말에 건일이 멈칫했다.
건일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데려가 달라니.”
“오늘 가는 거잖아? 아르타 씨가 참견 못하게 적당히 술 먹여놓고 야반도주하려는 거지? 오빠한테 들었어.”
“음…….”
건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했는데, 아이린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아이린이 말했다.
“나도 도시에 가고 싶어. 도시에 가서, 내 맘대로 대장간 일을 하고 싶어. 새로운 기술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건일이 말리려다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걸 보고 나서 건일은 그녀를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릴 이유도 없다.
그녀는 유능한 대장장이다.
자신이 발전하기 위해 떠나겠다는데, 꼰대가 아닌 이상 그걸 말릴 사람은 없다.
건일이 히죽 웃었다.
“야반도주로 튀려고 했는데 말이지.”
“왜, 혹이 더 붙은 거 같아?”
아이린의 말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러나 건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처럼 유능한 대장장이에게 얘기가 흘러가서 다행이야.”
“흥. 그렇게 말해도 떨어지는 건 없거든?”
아이린이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금세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헤벌레해진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그렇게 능력이 있어?”
칭찬에 약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칭찬을 못 들어서일 것 같았다.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능력 있어.”
실제로도 그러니까.
아이린은 뛸 듯이 좋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