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013화 : 죽음을 등에 지고]
다음 날.
지은 지 오래 돼서 집 여기저기가 낡았지만, 그래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방에서 건일이 자고 있었다.
그 방에, 누군가가 몰래 들어왔다.
마치 도둑처럼 살금살금 건일에게 다가온 사람은 건일보다는 그가 쥐고 있는 총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자가 조심스레 총을 살피기 위해 건드리려는 순간.
“……?!”
건일이 인기척에 놀라 깨어났다.
그는 반사적으로 총을 견착해 인기척이 난 쪽을 겨누었다.
건일의 시야엔 갈색 반곱슬 머리에 주근깨가 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어제 건일이 본 사람이었다.
건일은 총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린…….”
케일의 딸이자 테르핀의 동생, 아이린이었다.
그녀는 양손을 들고 있다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헤, 헤헤…….”
건일은 총을 옆에 뒀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봐요, 아이린 씨. 남의 방에 들어와서 뭐하는 겁니까?”
“저 총이란 게 궁금해서… 헤헤…….”
아이린이 머쓱한 웃음을 품은 채 대꾸했다.
건일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총을 바라봤다.
이게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건일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쉽게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 됩니다. 영업 기밀이에요.”
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린이 울상을 지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총에 대한 비밀이 풀리면 건일은 더 이상 마법사로 행세할 수 없다.
그건 사양하고 싶다.
그러다 문득,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사실이 있단 걸 깨달았다.
그는 아이린에게 말했다.
“그리고 외간 남자가 자는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 아닙니다.”
그러자 아이린의 표정이 장난기 가득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키득거리며 건일에게 물었다.
“왜요? 왜요??”
“…말을 말자.”
건일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총을 잡고 방을 나왔다.
따끈하고 맛있는 냄새가 확 느껴졌다.
이미 집 한가운데에 있는 화로에선 솥을 올리고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아이린, 건일 님을 깨우지 말랬잖아!”
솥에서 요리를 준비하던 테르핀과 아이린의 어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오던 아이린이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거릴 뿐이었다.
어머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오냐 오냐 키웠더니 마을의 은인에게 민폐나 끼치고…….”
“미안해요…….”
그제야 아이린이 건일에게 사과했다.
건일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테르핀은 잠시 건일의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저기, 건일 님.”
“환자들은 어떻습니까.”
건일이 테르핀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그는 대답을 듣기 위해 테르핀 옆에 앉았다.
테르핀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섯이 죽었어요. 남은 다섯은 아마 살 겁니다.”
“그래요…….”
건일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좀 더 대처를 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가족을 잃는 슬픔을 느끼게 하기 싫어 뛰어든 일이었는데, 결국 가족을 잃게 만들었다.
건일은 슬픈 눈으로 총을 움켜쥔 채, 솥을 노려봤다.
건일은 전장에서 수많은 죽음을 봐왔다.
그러나 역시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게 건일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심일지도 몰랐다.
옆에 있던 테르핀은 건일의 표정을 읽었다.
건일은 자책을 하고 있었다.
테르핀은 건일의 심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건일 님. 너무 자신을 매도하지 마세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린 여전히 서로 떨어진 채였을 겁니다.”
“아…….”
건일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난처하게 테르핀을 바라봤다.
테르핀의 어머니는 솥에 감자 비슷한 것을 썰어 넣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전사에요. 건일 님 덕에 다른 사람들이 가족과 만나 죽음이 헛되지 않았어요. 제이나에 가서도 만족할 겁니다.”
제이나가 어딘지는 몰랐다.
건일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테르핀의 어머니가 대접에 고깃국을 한가득 부어 건일에게 내밀었다.
“자. 식사부터 하세요.”
건일은 대접을 받아들었다.
대접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잠시 대접에 담긴 고깃국을 내려다보던 건일이 물었다.
“그들의 무덤을 만들었나요?”
테르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을 어귀에 있습니다.”
“안내해 주세요. 갔다 오고 싶네요.”
그가 살아온 전장에서 그렇듯, 그들의 무덤가에 가서 살아남은 자로서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들 덕분에 자신이 살았다고, 그리고 그들의 뜻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테르핀이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건일은 식사를 마치고 테르핀과 함께 집을 나섰다.
무덤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
그러나 테르핀이 말하기 전까진 무덤이 있는지도 몰랐다.
봉분은 없었고, 그저 새로 땅을 파냈다가 묻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이게 무덤입니까?”
건일이 그의 상식과 다른 무덤에 고개를 갸웃했다.
테르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사람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제이나로 갈 겁니다.”
방금 테르핀의 어머니도 제이나라고 얘기를 했다.
제이나가 어딘지 모르는 건일이 물었다.
“제이나가 어딥니까?”
“죽으면 가는 곳이죠. 그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삽니다. 물론 악인은 갈 수 없지만…….”
테르핀이 한쪽 무릎을 굽혀, 그들의 무덤에 있는 흙을 들어올렸다.
“이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이제 자연에 녹아들어 제이나로 갈 겁니다.”
“그렇군요…….”
이들의 신앙이나, 신화인 듯 보였다.
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무덤가에 섰다.
그는 절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
이들의 희생으로 건일이 얼마나 오만하고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킬 것이다.
이런 희생은 이번 한 번으로 족했다.
그렇게 다짐을 끝낸 뒤에 건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테르핀을 바라봤다.
테르핀은 방금 전, 식사 시간과는 달리 조금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이나로 간다는 믿음이 있어도 사람이 떠나간다는 건 분명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었다.
이제 만난 지 얼마 안 된 건일보다 훨씬 더.
테르핀은 흙을 쓸어보고는 일어났다.
“가시죠.”
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두 사람은, 마을에서 걸어 나오는 한 무리와 마주쳤다.
테르핀이 옆에서 빠르게 속삭였다.
“죽은 사람들의 가족입니다. 무덤에 인사를 하러 가는 모양이에요.”
“…아.”
건일은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건일을 보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건일은 당황했다.
유가족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불쑥 건일의 손을 잡았다.
건일이 깜짝 놀랐다.
혹시 이 할머니가 그에게 비난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대체 왜 살아남았냐고.
건일이 할머니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건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리 아들이 헛되게 죽지 않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
건일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대신, 테르핀이 옆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베칼의 아들, 골은 무척이나 훌륭한 사냥꾼이자 전사였습니다. 제이나로 편히 갈 수 있을 겁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은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건일은 차마 그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유가족들은 건일에게 감사 인사를 한 번씩 하고 무덤가로 걸어갔다.
건일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역시, 익숙해지지 않네요. 사람이 죽는다는 거요.”
“그게 익숙해지면 사람이 아닙니다.”
테르핀이 말했다. 건일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만으로 품고 있을 때와,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는 확연히 다르다.
건일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럼 이제 죽은 사람 몫까지 감사히 살아야죠.”
“네.”
테르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전에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건일이 강해지려면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당장 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차례대로 시작해야 한다.
건일이 물었다.
“할 일이 있어요. 대장간이 어딥니까?”
***
대장간은 마을에서 시내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장간은 며칠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었지만, 무척이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건일이 구동 중추를 박살낸 골렘 몇 기도. 그건 건일에게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다만 대장장이는 없었다.
테르핀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대장장이들이 쉬는 모양이네요. 데려올까요?”
건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나중에 일하는 날…….”
“어?”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테르핀과 건일이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철광석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있는 아이린이 있었다.
“여긴 웬일이야?”
“너야말로 웬일이야?”
테르핀이 되물었다. 아이린은 대장간 한 구석에 놓인 골렘을 가리켰다.
“난 저거 분해하고 싶어서 왔지. 볼 때마다 몸이 근질근질 했다니까!”
지난 날 테르핀은 아이린이 대장간을 들락거리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당당하게 대장간을 출입하는 정도까지 온 모양이었다.
테르핀이 대꾸했다.
“난 건일 님이 할 일이 있대서…….”
“그래? 며칠 쉰다는데. 대장장이들 불러올까?”
“괜찮습니다.”
건일이 끼어들었다.
이곳에 온 건 총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 급한 건 아니다.
드래곤의 동굴에서 충분히 강하게 만들었다.
쉬는 사람까지 불러 유난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아이린이 와서 궁금한 게 생겼다.
건일은 근처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골렘이 궁금해졌어요. 분해하는 걸 구경할래요. 기계 공학은 조금 배웠으니까.”
그러자 아이린이 키득거리며 웃어보였다.
“이거,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네요?”
“분해하시죠.”
건일이 손짓으로 권유했다.
아이린이 팔을 걷어붙이고 대장간으로 들어섰다.
“얼마든지!”
아이린은 우선 화로를 확인했다.
작지만 아직 불씨가 남아 있다.
그녀는 근처에 있던 풀무를 가져와 능숙하게 풀무질을 시작했다.
작은 불씨가 금세 커다란 불씨로 커졌다.
그녀는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는 건일과 테르핀에게 말했다.
“장작! 아, 오빠는 반병신이라 안 되겠네.”
“뭐?”
테르핀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아이린은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건일 님, 장작 좀 가져다줘요. 대장간 뒤쪽에 있어요.”
“그런 건 너가 갖고 와!”
“아, 닥쳐, 닥쳐.”
평범한 남매구나, 라고 건일이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르핀의 만류를 흘려보내고 대장간 뒤쪽으로 걸어갔다.
대장간 뒤쪽에 놓인 대량의 장작을 집어 들어 되돌아갔다.
그는 아이린의 지시에 따라, 풀무질을 하고 있는 화로에 장작을 집어 넣었다.
아이린의 능숙한 풀무질에 화로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불이 붙고 나서, 아이린은 그녀가 가져온 철광석을 화로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골렘 해체에 들어갔다.
지난 밤, 건일이 머리를 땄던 골렘이었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공구를 집어 들었다.
“헤헤.”
심지어 웃음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골렘은 꽤나 단단했다.
보통의 수단이 먹히지 않자, 그녀는 씩씩거리다가 골렘을 걷어찼다.
“아야!”
그러나 아픈 건 그녀의 발 뿐.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테르핀이 중얼거렸다.
“병신.”
“닥쳐, 병신아!”
아이린도 지지않고 소리쳤다.
그녀는 발을 움켜쥐고 눈물 섞인 눈으로 골렘을 노려봤다.
건일 역시 생각에 잠겼다.
엄청 긴 총신으로 날탄을 날려야 뚫을 수 있는 장비다.
이 대장간에 있는 장비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아. 철 다 녹았겠네.”
문득 아이린이 화로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거기에 건일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화로에 넣어보죠?”
잠시 멍하던 아이린의 표정이 한결 밝아져선 소리쳤다.
“당신, 천재야!”
다음 날.
지은 지 오래 돼서 집 여기저기가 낡았지만, 그래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방에서 건일이 자고 있었다.
그 방에, 누군가가 몰래 들어왔다.
마치 도둑처럼 살금살금 건일에게 다가온 사람은 건일보다는 그가 쥐고 있는 총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자가 조심스레 총을 살피기 위해 건드리려는 순간.
“……?!”
건일이 인기척에 놀라 깨어났다.
그는 반사적으로 총을 견착해 인기척이 난 쪽을 겨누었다.
건일의 시야엔 갈색 반곱슬 머리에 주근깨가 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어제 건일이 본 사람이었다.
건일은 총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린…….”
케일의 딸이자 테르핀의 동생, 아이린이었다.
그녀는 양손을 들고 있다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헤, 헤헤…….”
건일은 총을 옆에 뒀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봐요, 아이린 씨. 남의 방에 들어와서 뭐하는 겁니까?”
“저 총이란 게 궁금해서… 헤헤…….”
아이린이 머쓱한 웃음을 품은 채 대꾸했다.
건일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총을 바라봤다.
이게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건일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쉽게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 됩니다. 영업 기밀이에요.”
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린이 울상을 지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총에 대한 비밀이 풀리면 건일은 더 이상 마법사로 행세할 수 없다.
그건 사양하고 싶다.
그러다 문득,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사실이 있단 걸 깨달았다.
그는 아이린에게 말했다.
“그리고 외간 남자가 자는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 아닙니다.”
그러자 아이린의 표정이 장난기 가득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키득거리며 건일에게 물었다.
“왜요? 왜요??”
“…말을 말자.”
건일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총을 잡고 방을 나왔다.
따끈하고 맛있는 냄새가 확 느껴졌다.
이미 집 한가운데에 있는 화로에선 솥을 올리고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아이린, 건일 님을 깨우지 말랬잖아!”
솥에서 요리를 준비하던 테르핀과 아이린의 어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오던 아이린이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거릴 뿐이었다.
어머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오냐 오냐 키웠더니 마을의 은인에게 민폐나 끼치고…….”
“미안해요…….”
그제야 아이린이 건일에게 사과했다.
건일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테르핀은 잠시 건일의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저기, 건일 님.”
“환자들은 어떻습니까.”
건일이 테르핀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그는 대답을 듣기 위해 테르핀 옆에 앉았다.
테르핀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섯이 죽었어요. 남은 다섯은 아마 살 겁니다.”
“그래요…….”
건일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좀 더 대처를 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가족을 잃는 슬픔을 느끼게 하기 싫어 뛰어든 일이었는데, 결국 가족을 잃게 만들었다.
건일은 슬픈 눈으로 총을 움켜쥔 채, 솥을 노려봤다.
건일은 전장에서 수많은 죽음을 봐왔다.
그러나 역시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게 건일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심일지도 몰랐다.
옆에 있던 테르핀은 건일의 표정을 읽었다.
건일은 자책을 하고 있었다.
테르핀은 건일의 심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건일 님. 너무 자신을 매도하지 마세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린 여전히 서로 떨어진 채였을 겁니다.”
“아…….”
건일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난처하게 테르핀을 바라봤다.
테르핀의 어머니는 솥에 감자 비슷한 것을 썰어 넣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전사에요. 건일 님 덕에 다른 사람들이 가족과 만나 죽음이 헛되지 않았어요. 제이나에 가서도 만족할 겁니다.”
제이나가 어딘지는 몰랐다.
건일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테르핀의 어머니가 대접에 고깃국을 한가득 부어 건일에게 내밀었다.
“자. 식사부터 하세요.”
건일은 대접을 받아들었다.
대접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잠시 대접에 담긴 고깃국을 내려다보던 건일이 물었다.
“그들의 무덤을 만들었나요?”
테르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을 어귀에 있습니다.”
“안내해 주세요. 갔다 오고 싶네요.”
그가 살아온 전장에서 그렇듯, 그들의 무덤가에 가서 살아남은 자로서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들 덕분에 자신이 살았다고, 그리고 그들의 뜻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테르핀이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건일은 식사를 마치고 테르핀과 함께 집을 나섰다.
무덤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
그러나 테르핀이 말하기 전까진 무덤이 있는지도 몰랐다.
봉분은 없었고, 그저 새로 땅을 파냈다가 묻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이게 무덤입니까?”
건일이 그의 상식과 다른 무덤에 고개를 갸웃했다.
테르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사람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제이나로 갈 겁니다.”
방금 테르핀의 어머니도 제이나라고 얘기를 했다.
제이나가 어딘지 모르는 건일이 물었다.
“제이나가 어딥니까?”
“죽으면 가는 곳이죠. 그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삽니다. 물론 악인은 갈 수 없지만…….”
테르핀이 한쪽 무릎을 굽혀, 그들의 무덤에 있는 흙을 들어올렸다.
“이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이제 자연에 녹아들어 제이나로 갈 겁니다.”
“그렇군요…….”
이들의 신앙이나, 신화인 듯 보였다.
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무덤가에 섰다.
그는 절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
이들의 희생으로 건일이 얼마나 오만하고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킬 것이다.
이런 희생은 이번 한 번으로 족했다.
그렇게 다짐을 끝낸 뒤에 건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테르핀을 바라봤다.
테르핀은 방금 전, 식사 시간과는 달리 조금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이나로 간다는 믿음이 있어도 사람이 떠나간다는 건 분명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었다.
이제 만난 지 얼마 안 된 건일보다 훨씬 더.
테르핀은 흙을 쓸어보고는 일어났다.
“가시죠.”
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로 되돌아갔다.
그러다 두 사람은, 마을에서 걸어 나오는 한 무리와 마주쳤다.
테르핀이 옆에서 빠르게 속삭였다.
“죽은 사람들의 가족입니다. 무덤에 인사를 하러 가는 모양이에요.”
“…아.”
건일은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건일을 보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건일은 당황했다.
유가족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불쑥 건일의 손을 잡았다.
건일이 깜짝 놀랐다.
혹시 이 할머니가 그에게 비난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대체 왜 살아남았냐고.
건일이 할머니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건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리 아들이 헛되게 죽지 않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
건일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대신, 테르핀이 옆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베칼의 아들, 골은 무척이나 훌륭한 사냥꾼이자 전사였습니다. 제이나로 편히 갈 수 있을 겁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은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건일은 차마 그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유가족들은 건일에게 감사 인사를 한 번씩 하고 무덤가로 걸어갔다.
건일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역시, 익숙해지지 않네요. 사람이 죽는다는 거요.”
“그게 익숙해지면 사람이 아닙니다.”
테르핀이 말했다. 건일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만으로 품고 있을 때와,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는 확연히 다르다.
건일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럼 이제 죽은 사람 몫까지 감사히 살아야죠.”
“네.”
테르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전에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건일이 강해지려면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당장 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차례대로 시작해야 한다.
건일이 물었다.
“할 일이 있어요. 대장간이 어딥니까?”
대장간은 마을에서 시내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장간은 며칠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었지만, 무척이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건일이 구동 중추를 박살낸 골렘 몇 기도. 그건 건일에게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다만 대장장이는 없었다.
테르핀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대장장이들이 쉬는 모양이네요. 데려올까요?”
건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나중에 일하는 날…….”
“어?”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테르핀과 건일이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철광석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있는 아이린이 있었다.
“여긴 웬일이야?”
“너야말로 웬일이야?”
테르핀이 되물었다. 아이린은 대장간 한 구석에 놓인 골렘을 가리켰다.
“난 저거 분해하고 싶어서 왔지. 볼 때마다 몸이 근질근질 했다니까!”
지난 날 테르핀은 아이린이 대장간을 들락거리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당당하게 대장간을 출입하는 정도까지 온 모양이었다.
테르핀이 대꾸했다.
“난 건일 님이 할 일이 있대서…….”
“그래? 며칠 쉰다는데. 대장장이들 불러올까?”
“괜찮습니다.”
건일이 끼어들었다.
이곳에 온 건 총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 급한 건 아니다.
드래곤의 동굴에서 충분히 강하게 만들었다.
쉬는 사람까지 불러 유난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아이린이 와서 궁금한 게 생겼다.
건일은 근처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골렘이 궁금해졌어요. 분해하는 걸 구경할래요. 기계 공학은 조금 배웠으니까.”
그러자 아이린이 키득거리며 웃어보였다.
“이거,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네요?”
“분해하시죠.”
건일이 손짓으로 권유했다.
아이린이 팔을 걷어붙이고 대장간으로 들어섰다.
“얼마든지!”
아이린은 우선 화로를 확인했다.
작지만 아직 불씨가 남아 있다.
그녀는 근처에 있던 풀무를 가져와 능숙하게 풀무질을 시작했다.
작은 불씨가 금세 커다란 불씨로 커졌다.
그녀는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는 건일과 테르핀에게 말했다.
“장작! 아, 오빠는 반병신이라 안 되겠네.”
“뭐?”
테르핀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아이린은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건일 님, 장작 좀 가져다줘요. 대장간 뒤쪽에 있어요.”
“그런 건 너가 갖고 와!”
“아, 닥쳐, 닥쳐.”
평범한 남매구나, 라고 건일이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르핀의 만류를 흘려보내고 대장간 뒤쪽으로 걸어갔다.
대장간 뒤쪽에 놓인 대량의 장작을 집어 들어 되돌아갔다.
그는 아이린의 지시에 따라, 풀무질을 하고 있는 화로에 장작을 집어 넣었다.
아이린의 능숙한 풀무질에 화로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불이 붙고 나서, 아이린은 그녀가 가져온 철광석을 화로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골렘 해체에 들어갔다.
지난 밤, 건일이 머리를 땄던 골렘이었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공구를 집어 들었다.
“헤헤.”
심지어 웃음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골렘은 꽤나 단단했다.
보통의 수단이 먹히지 않자, 그녀는 씩씩거리다가 골렘을 걷어찼다.
“아야!”
그러나 아픈 건 그녀의 발 뿐.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테르핀이 중얼거렸다.
“병신.”
“닥쳐, 병신아!”
아이린도 지지않고 소리쳤다.
그녀는 발을 움켜쥐고 눈물 섞인 눈으로 골렘을 노려봤다.
건일 역시 생각에 잠겼다.
엄청 긴 총신으로 날탄을 날려야 뚫을 수 있는 장비다.
이 대장간에 있는 장비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아. 철 다 녹았겠네.”
문득 아이린이 화로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거기에 건일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화로에 넣어보죠?”
잠시 멍하던 아이린의 표정이 한결 밝아져선 소리쳤다.
“당신, 천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