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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화 : 진격 개시]


다음날.
레칸이 내려오다가, 1층 홀에 쓰러진 채 자고 있는 건일과 테르핀을 발견했다.
그는 허허 웃다, 건일 아래에 깔린 설계도를 발견했다.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지만.
레칸이 조심스레 건일을 깨웠다.
“건일 님. 잠시 여쭤볼 게 있어서요.”
건일이 비몽사몽 눈을 떴다. 레칸은 설계도를 건일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따가 아이린이 올 텐데, 이걸 넘겨주면 됩니까?”
건일이 졸린 눈을 떠서 레칸이 흔드는 설계도를 바라봤다.
어젯밤, 꽤나 늦게까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 만든 것이었다.
이론상 허점은 없었다.
건일은 잠이 달아났다.
그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레칸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조만간 놈들이 올 겁니다. 테르핀 방으로 옮길 테니, 나오지 말고 숨어 계세요. 외부인이 있다는 걸 알면 인질들을 죽일 겁니다.”
“네.”
레칸이 테르핀을 업고, 건일과 함께 2층으로 향했다.
테르핀의 방은 2층 한 구석에 있었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못해 낡은 침대는 부서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레칸은 대수롭지 않게 테르핀을 침대에 뉘였다.
방에 가구는 별로 없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그저 잠을 자고 사냥 도구들을 정비하는 장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레칸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피고 말했다.
“슬슬 올 겁니다. 나가보겠습니다.”
“예.”
건일이 대답하자, 레칸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레칸의 말대로 놈들이 도착했다.
건일은 테르핀의 방에 숨어 있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말굽 소리를 듣고 알아챘다.
거기에 더해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 왔어!”
아마 테르핀의 동생 아이린인 듯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잠시 이어지는가 싶더니…….
“입 닥치지 못해?!?!”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렸다.
“짜증나게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
꽤나 악랄하게 소리를 질러 댄다.
숨어 있던 건일이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얄밉기도 했고.
급격하게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이 건일에게도 느껴졌다.
그 뒤로 사람들이 묵묵히 고기와 식료품을 교환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말발굽 소리가 났다.
이번엔 멀어지는 소리였다.
잠시 뒤 레칸이 테르핀이 있는 방으로 올라왔다.
“보냈습니다. 설계도도 같이요.”
건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고비를 넘겼다.
건일이 농삼아 레칸에게 한마디 던졌다.
“그나저나, 그 산적 놈들 엄청나게 짜증이 나는군요.”
레칸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도 마세요. 기회가 되면…….”
말을 하던 레칸의 얼굴에 쓴웃음기마저 사라졌다.
그는 주먹을 맞부딪히며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확실히, 이 산적 놈들을 좋게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건일은 레칸의 화가 조금 풀리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물었다.
“다음 저 사람들이 오는 건 언제입니까?”
“아마 3일 뒤일 겁니다. 그 사이 우린 또 사냥을 나가야죠. 놈들은 우리가 사냥해 온 고기를 죄다 마을로 가져갑니다. 그 다음날에 우리가 사냥해온 만큼의 보존 식량을 보내오죠. 보통 조금 적게 먹어야 할 만한 양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인질 때문에 쉽게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에 더해 식량을 비축하기 힘든 상황까지 만들어 놓는다.
생각 외로 이중삼중으로 이 사람들을 얽매어 놓았다.
“그런 식으로 양쪽을 붙잡아두는 모양이군요.”
그러나 그건 오히려 건일에게 기회였다.
적들의 수가 많다면, 이토록 귀찮은 일을 벌일 필요가 없다.
일정량의 감시병을 양 지역에 갖다 놓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적이 운용할 수 있는 인원이 상당히 적다는 것이었다.
골렘만 쓰러뜨린다면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건일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잠시 건일을 보던 레칸이 말했다.
“저흰 오늘 오후에 또 사냥을 나갈 겁니다. 건일 님은 어쩌시겠어요.”
“뭘 물어봅니까.”
건일이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어차피 마을에 있어봤자 사냥꾼들에게 불필요하게 눈치를 봐야 한다.
그런 건 건일의 성격상 절대로 맞지 않았다.
차라리 규율에 얽매여 사는 아르타와 함께 사냥을 나가는 것이 건일에게 속 편했다.
“같이 가죠. 이곳에서는 할 게 없으니까.”
레칸이 웃어보였다.
“그럼, 대장님께 그리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좀 쉬세요. 이따 데리러 오겠습니다.”
“네.”
레칸이 방을 나갔다.

***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아르타가 건일을 불렀다.
다리를 삔 테사라와, 다리를 다친 테르핀 대신 새로운 두 명이 사냥에 참여했다.
둘 다 반투와 레칸을 적당히 섞어놓은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형제인 듯 닮아 있었다.
레칸이 그 둘을 소개했다.
“이 사람들은 세자르의 아들, 게인, 게아르입니다. 쌍둥이죠.”
건일의 예상이 맞았다. 건일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소개했다.
“한의 아들, 건일입니다.”
한동안 한의 아들이란 소개를 뺄까 생각했는데, 이젠 어느새 건일의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게인과 게아르는 유쾌하게 웃으며 건일과 인사했다.
“테사라랑 테르핀을 구해주셨다면서요!”
게인이 손을 내밀었다. 건일이 그와 악수하고 나서, 게아르와 악수하려는데 아르타가 말했다.
“출발한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아르타의 말대로 일행이 출발했다. 어제 왔던 길과는 또 다른 길이었다.
레칸이 앞에서 길을 트면서 걸어갔다.
건일 앞에 있던 반투가 설명했다.
“이번 사냥은 식량 조달을 하러 갑니다. 불곰 가죽은 놈들이 원하는 거라 사냥했던 거죠.”
“식량이라… 그럼 주로 어떤 걸 사냥하죠?”
“강철 사슴이나 나무 원숭이요.”
뒤에 있던 게아르가 끼어들었다. 그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특히 나무 원숭이 골이 별미인데…….”
“골을 먹어요?”
불곰 내장은 안 먹으면서 골을 먹는다니.
건일은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게아르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들은 그 나무 원숭이 골을 꽤 자주, 즐겨먹는 듯했다.
“네. 먹어요. 정말 맛있습니다. 건일 님도 나중에 한 번 드셔보시죠.”
“흐음…….”
중국에서 예전에 원숭이 골을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이야 원숭이 골을 직접 먹는 게 금지돼서 다른 음식으로 대체한다지만.
그나저나 이들이 말하는 나무 원숭이가 건일이 생각하는 원숭이와 비슷한지 의문이었다.
불곰이 곰과 비슷했으니, 아마 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걸어봤다.
3일 뒤.
“으음…….”
건일이 활에 살을 건 채 저 멀리 있는 물체를 겨누었다. 최대한 조준을 하고 사위를 놓았건만, 화살은 엉뚱한 데로 날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건일이 쓴웃음을 짓고 오른팔을 흔들었다.
근육통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레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이거… 마법만 단련할 게 아니라, 체력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게요.”
건일이 장난삼아 웃었다.
탄환이 슬슬 떨어져가는 참이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활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나 원시적인 형태의 나무궁이라 얕본 게 실수였다.
이런 궁도 상상 이상으로 많은 힘이 필요했고, 명중은 또 다른 일이었다.
3일 내내 손에 피가나도록 시위를 쥐며 활을 쐈지만 목표물 근처에라도 맞은 화살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새삼스레 느끼네요. 괴물 같은 체력을요.”
건일이 체념 투로 말했다.
레칸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글쎄요. 저한텐 당신이 쏘는 총이 더 괴물 같은데요.”
레칸의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다.
건일이 찌뿌드드한 몸을 풀고 말했다.
“그럼 움직이죠. 슬슬 마을에 놈들이 올 겁니다.”
“네.”
건일은 고기가 담긴 가방을 짊어 메었다.
지난 3일간의 사냥은 꽤 수확이 좋은 편이었다.
강철 사슴은 구경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무 원숭이는 실컷 볼 수 있었다.
실제로 엄청나게 많이 잡았고.
나무 원숭이는 양팔이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원숭이 비슷한 생물이었다.
놈은 키가 2m가량 됐는데도 나무 위를 날아다니다시피 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양팔의 거대한 근육 덕분이었다.
그래도 팔을 빼고는 온몸이 약점이었다.
멀리서 활을 쏘니, 거대한 팔을 지닌 데 비해 의외로 픽픽 쓰러졌다.
그 덕에 이렇게 나무 원숭이 고기를 한 가득 짊어지고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동네에 도착했다.
테사라가 집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른 사냥꾼들은 건일 일행이 잡아온 나무 원숭이 고기를 받아 적당한 크기로 포장했다.
건일은 뻐근한 어깨를 풀며 테사라에게 물었다.
“놈들은? 어디쯤인지 알 거 같아?”
테사라는 잠시 눈을 감고 귀에 신경을 쏟았다.
이럴 때마다 건일은 정말 테사라가 초능력을 쓴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잠시 뒤 테사라가 눈을 뜨고 말했다.
“1㎞ 정도 밖에 있어요. 금방 올 거예요.”
“그래? 그럼 테르핀 방에 숨어 있을까.”
건일이 여전히 뻐근한 어깨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며 테르핀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테르핀이 건일을 보고 활짝 웃었다.
“수확은 좀 어때요.”
“괜찮게 얻었어요.”
건일이 킬킬대며 대꾸했다.
그리고 테르핀과 가볍게 농담을 따먹고 있는데, 테사라가 말한대로 금세 놈들이 왔다.
말발굽 소리에 이어, 아이린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마을 사람들~! 나 왔어요오오~!!”
저번에도 그랬듯이 잠시 왁자지껄하다,
“이 새끼들이! 닥치지 못 해?!”
또 산적 놈이 시끄럽게 지랄을 해댄다.
뒤이어 검집에서 칼을 꺼내는 소리까지 들린다.
숨어 있던 건일이 움찔하며 총을 쥐고 나갈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옆에 있던 테르핀이 억지로 건일을 붙잡았다.
건일이 뒤를 돌아보자, 테르핀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건일이 쉿쉿거렸다.
테르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젓고 조용히 말했다.
“나가면 안 돼요. 그냥 위협하려는 것뿐입니다.”
“한 번만 더 떠들어 봐라! 죽여 버리겠어!!”
테르핀의 예상이 맞았다.
산적 놈은 단순히 위협만 했을 뿐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산적 놈들의 일이 무사히 끝이 났다.
잠시 뒤에 레칸이 테르핀의 방으로 올라왔다.
그는 사람 몸통만 한 자루를 건일에게 내밀었다.
“아이린이 가져왔어요. 확인 좀 해봐요.”
“네.”
건일이 자루를 열어 안에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일단 총신은 그럴 듯해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총신보다는, 거기에 딸려온 물건들이다.
유심히 살펴보던 건일이 그것들을 바닥에 쏟아냈다.
구리로 된, 신형 탄두와 탄피였다.
“이게… 뭐죠?”
지켜보던 테르핀이 물었다.
건일은 탄두 하나를 집어 들어 자세하게 살폈다.
그가 원하는 모양이 나왔다.
천천히 건일이 설명했다.
“날탄입니다.”
날개 안정 분리 철갑탄. 줄여서 날탄.
건일이 이라크에서 탄환의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 대전차포에서 쓰이던 날탄을 탄환 형태로 옮긴 것이었다.
다만 그 당시에 입안을 하자마자 폐기가 됐는데, 기존의 탄환 생산 라인과 호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탄환으로 된 날탄을 쓸 바엔, 포병이나 공군을 불러 박살내 버리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다르다.
애초에 생산라인이 없고, 무엇보다 포병이나 공군의 지원 없이 오로지 총만으로 두꺼운 철갑을 뚫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최선은 이것뿐이었다.
“날탄…이요?”
테르핀과 레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들에게는 마법 주문같이 들릴 단어였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이게 장갑을 뚫을 수 있냐, 없냐 뿐.
건일이 가볍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거라면 골렘을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희망에 찬 테르핀과 레칸의 얼굴을 무시하고, 혹여나 날탄 중에 불량품이 없는지 확인했다.
3일 만에 15발의 탄환을 만들었는데, 불량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건일은 총신을 확인했다.
총신 역시 원하는 길이에다, 그 안에 난 강선까지 완벽하게 제조를 해줬다.
이제 남은 건 날탄에 화약을 집어넣고, 총신을 갈아끼우는 일 뿐.
건일이 천천히 말했다.
“마을 사람들 준비시키세요. 오늘 밤에 놈들을 칩니다.”
레칸이 마른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