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008화 : 규율따윈 집어치워!]


“저기, 그게…….”
“테사라. 거기까지 해라.”
불쑥, 레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일이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레칸이 이곳에 와 있었다.
테사라는 금세 입을 닫았다.
건일은 머리를 긁적이다 레칸에게 말했다.
“저기, 저는 그저 도와드리고 싶어서…….”
레칸이 건일의 말을 잘라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리는 겁니다. 얘기를 들으면 당신이 도와줄 거라서요. 그걸 결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대장님이어야 합니다. 기다려주세요. 대장님이 말씀하실 때가 되면, 얘기해 드릴 겁니다.”
건일은 레칸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신다면야. 알겠습니다.”
건일이 순순히 한 발 물러나자, 레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테사라를 업고 온 사냥꾼에게 시선을 돌렸다.
“건일 님, 이 녀석하곤 아직 인사를 안 하셨죠?”
“네. 경황이 없어서…….”
레칸이 그를 소개했다.
“이 자는 투란의 아들, 반다르입니다. 반다르, 이 쪽은 한의 아들 건일이다. 불곰 사냥하다 다친 테르핀을 구해주고, 불곰 사냥을 도와준 은인이야.”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반다르가, 레칸의 설명을 듣고는 황급히 표정을 바꿔 건일에게 몸을 숙였다.
“죄송합니다. 은인인 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건일이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이방인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반다르가 도로 몸을 폈지만 여전히 난처한 표정이었다.
건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테사라의 다리를 바라봤다.
건일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처치를 했다.
그는 레칸을 보며 물었다.
“아르타 님은 일이 언제쯤 끝날까요.”
“이제 곧 끝날 겁니다.”
레칸이 대답하고 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건일도 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르타가 들어간 집에서 네 명의 무리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아르타 일행과 비슷하게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죽 갑옷 위에 모피를 얹고 있는데다, 얼굴 여기저기에 칼로 그은 흉터가 나있었다.
인상이 무척이나 더러워서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산적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짐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그게 꽤나 무거운 듯 연신 욕지기를 내뱉고 있었다.
보고 있던 건일이 물었다.
“뭘 들고 가는 겁니까?”
레칸이 대답했다.
“가죽과 고기 일부요. 정기적으로 오는데, 오늘은 조금 일찍 온 모양이오.”
“산적 같아 보이는데요. 저자들이 인질을 잡고 있는 겁니까?”
레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이따 아르타 님께 여쭤보죠.”
“네.”
레칸이 대답했다.
산적 무리는 마구간으로 가서 건장한 체격의 말 네 필에 올라 마을을 빠져나갔다.
잠시 뒤, 아르타가 들어간 집에서 반투가 걸어 나왔다.
그는 건일와 레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내려 와. 대장님이 밥부터 먹자는데.”
“그래. 곧 내려가마.”
레칸이 대꾸하고 테사라를 업었다.
건일은 레칸의 뒤를 따라갔다.
아르타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자, 현관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지난 밤, 테르핀이 이것저것을 모아 만들었던 것과는 천지차이일 정도였다.
1층에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르타가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칸이 말했다.
“아르타 님. 저희 왔습니다.”
아르타가 건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물 안에 있던 사냥꾼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레칸 옆에 있는 건일을 봤다.
걱정스런 눈빛이었다.
무거운 공기가 건일을 짓눌렀다.
테사라가 들어갔던 집에서도 느꼈던 분위기지만, 이 곳이 더 심했다.
방금 그자들이 왔다 간 탓인 것 같았다.
아르타가 그의 빈 옆 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건일 님, 여기 앉아주시오.”
건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르타의 옆 자리에 앉았다.
홀 한 가운데에 있는 솥에는 뽀얀 국물이 각종 고기와 야채를 품은 채 끓고 있었다.
사람들은 요리를 하면서도 힐끗힐끗 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일은 잠시 그것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가죽과 고기를 가져간 자들이 인질을 데리고 있는 겁니까.”
아르타는 말이 없다.
건일이 재차 말했다.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건일은 답답했다.
대체 왜 이들이 건일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없이 시간이 흐르다, 고깃국이 완성됐다.
몇몇이 대접에 고깃국을 담아 분배하기 시작했다.
그중 꼬마 아이가 한가득 찬 대접을 받아 건일에게 다가와 대접을 내밀었다.
그러나 딱 대접을 건낼 수 있는 만큼만 다가온다.
아이의 손이 겁에 질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건일은 대접을 받지 않았다.
꼬마 아이가 난처하게 건일과 아르타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아르타는 건일을 보며 고깃국을 권했다.
“한 그릇 하시죠.”
“얘기해 주세요.”
아르타는 예의 그 먼 산을 보는 듯, 시선을 저 멀리 뒀다.
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도대체. 인질이 잡혀있다면서요. 구하기 싫으신 겁니까? 답답해 미칠 지경입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쇼.”
아르타가 분노를 담아 툭 내뱉었다.
저렇게 화가 날 정도인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건일이 참다못해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장 가서, 저 놈들한테 인질을 되돌려 받을게요.”
건일은 총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자존심만 찬 아르타에게 부탁하느니 다른 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혼자 쳐들어가는 게 속 편했다.
그가 있던 세계에서도 건일은 저격만으로 중대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단 평가를 들었다.
총을 들고 있는 중대를 상대로도 그렇다면, 어차피 총을 들지 못하는 수준의 군대라도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 멈추시오!”
아르타가 크게 소리쳤다.
건일이 짜증스레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가, 그는 아르타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봤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르타의 행동에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르타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너무 착해빠졌소. 우리가 부탁을 하면, 당신은 우리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요. 그게 너무 미안해서 부탁할 수가 없었소. 게다가 우린, 당신이 베푼 은혜를 갚을 수 없소이다. 우리 칸족은 외부인에게 은혜를 입으면, 외부인이 떠나가기 전에 은혜를 갚아야 하오.”
건일이 따져 물었다.
“근데요.”
“하나, 우린 가진 게 별로 없소이다. 당신이 떠나기 전에 은혜를 갚을 수 없단 말이오. 그건 우리 부족의 규율에 위반되오. 그렇기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원들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요. 그러니 조용히 있다 가주십시오. 우리가 규율을 어기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하.”
기가 막혔다.
겨우 그깟 이유 때문에 도와주겠다 팔을 걷어붙인 사람을 걷어찬 게 이해할 수 없었다.
건일이 짜증스레 말했다.
“어이가 없네요. 겨우 그깟 자존심 때문에 가족들을 구할 기회를 내다 버린 겁니까.”
“규율은 지키라고 있는 거요.”
아르타가 이를 꽉 깨문 채 말했다.
하지만 이를 깨물고 싶은 건 오히려 건일 쪽이었다.
이런 개소리를 듣고 있는 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개소리. 규율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겁니다. 사람을 못 지키는 규율 따위 필요 없어요.”
건일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난요, 멀리 떨어진 곳에 내 홀어머니를 놓고 여기로 왔습니다. 지금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요. 어머니 생각만 하면 미어져요. 난 그저 당신들이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고 선의를 베푸는 겁니다.”
아르타는 말이 없다.
다른 사냥꾼들이 건일을 바라봤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있는 아르타 때문에 말을 못 하는 듯 했다.
건일이 이어나갔다.
“누군가 내게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없는 걸 요구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을 바쳐서 그 사람에게 되돌려줄 겁니다. 지금 갚을 수 없다면 평생을 걸쳐서 갚으면 됩니다. 그 정도 각오도 안 되어 있습니까?”
아르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건일이 말을 이었다.
“난 그저 선의를 베푸는 겁니다. 당신들이 은혜를 갚으면 좋고, 안 갚아도 그러려니 할 거예요. 그래도 정 갚고 싶다면, 평생에 걸쳐 갚으면 됩니다. 난 오래오래 살 거라 당신들에게 시간이 많아요. 그거면 되지 않습니까?”
대답이 없다.
건일은 이를 깨물었다.
이들의 답답함에 치가 떨렸다.
건일이 뒤로 돌아서서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알아서들 하세요.”
“잠시만요! 저도 갈게요!”
갑자기, 아르타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건일을 불러 세웠다.
테르핀이었다.
건일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
테르핀은 억지로 일어서서 건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테르핀은 악에 받쳐 걸으며 말했다.
“내 평생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제발 내 가족을 구해주세요.”
“테르핀! 이게 무슨 추태냐!!”
아르타가 소리쳤다. 그러자 테르핀이 그에 지지 않고 외쳤다.
“대장님, 쫌!!”
사냥꾼들이 움찔했다. 테르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내 가족을 구하겠어요! 네?! 평생, 젠장, 평생!! 아무 것도 못하고 가족들을 인질로 잡혀서 이렇게 비참하게 살라구요? 난 싫어요! 지금 저렇게 기회가 와 있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당신 답답함에 질려 버렸다구요!”
“테르핀 너 이 자식…!! 네 아비가 저승에서 울 거다!”
아르타가 조금 눌린 기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테르핀은 콧방귀를 뀌었다.
“아버지라면, 지금 건일 님을 따라서 우리 어머니와 내 누이를 구하러 갔을 겁니다. 난 가겠어요.”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건일이 다른 사냥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또 다른 사람. 없습니까?”
“나도 갑니다.”
뒤에 있던 레칸이 말했다. 아르타의 눈이 흔들렸다.
“레칸, 너…….”
레칸이 쓴 웃음을 짓고 뺨을 긁적였다.
“나도 내 동생이 걱정됩니다. 그리고 뭣보다… 이렇게 좋은 외부인을 무작정 겁내는 게 싫어요. 외부에 알리면 인질들을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에 다들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게 너무 싫어요. 우린 원래 외부인에게 친절한 부족이었잖아요.”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다른 자들도 하나둘 건일을 돕겠다 나섰다.
그 한둘을 시작으로 잠깐 사이에 1층 홀에 있던 사냥꾼 전부가 건일에게 붙었다.
오직 아르타만 빼고.
아르타는 이를 깨문 채 건일에게 붙은 자신의 부족원들을 바라봤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네놈들. 건일 님에게 은혜를 갚을 능력은 있느냐.”
레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없죠. 하지만, 건일 님이 제시를 했잖아요. 갚고 싶으면 평생 노력해서 갚으라고. 나도 오래 살아서 갚을 겁니다. 그럼 되잖아요?”
“후…….”
아르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을 체념한 듯 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놈들의 전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요. 내가 놈들의 전력을 알려드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