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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화 : 마을로!]


반나절이 지나 기도가 끝났다.
레칸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탓에 빠르게 작업을 시작했다.
레칸은 불곰에서 피를 다 빼낸 후, 또 다른 칼을 꺼냈다.
무척이나 길쭉한 칼이었는데, 양옆으로 잘 휘어지는 재질이었다.
레칸은 그 검을 서로 부딪혀 스릉거리는 소리를 내다 불곰 가죽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깔끔하게 벗겨져서 순식간에 불곰 고기만 남게 되었다.
레칸은 불곰 가죽을 반투에게 내밀었다.
반투는 선지를 다 만든 뒤에 가죽을 받아들어 고이 정리를 했다.
레칸은 또 다른 칼을 꺼냈는데, 중화요리에서 쓸 법한 두꺼운 칼이었다.
그리고 레칸은 순식간에 내장을 비워내고, 고기를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단 반나절만에 끝이 났다.
해체된 고기는 네 명이 짊어 멜 수 있는 양으로 나눴다. 물론 건일의 것이 훨씬 더 많이 나눴다.
하지만 나눴다고 해도 체장이 5m짜리 고기니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레칸은 힐끗, 건일을 보고나서 말했다.
“대장. 아무리 건일 님이 도와주신다지만……. 고기는 일단 여기 묻어두고 가는 게 어떨까요.”
“아니. 다 가지고 간다.”
아르타가 단호하게 말했다.
“훈제까지 할 시간이 없어. 건일에게 갈 양을 줄이고, 내 양을 늘려라. 내가 테르핀의 짐까지 메고 간다.”
“네.”
레칸이 건일이 들 분량을 덜어 아르타의 짐에 넣었다.
건일은 짐짓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분배된 고기를 짊어 메고 우선 테르핀이 있는 숙소로 되돌아갔다.
테사라는 걸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테르핀은 부상이 심해 여전히 걷기 힘들었다.
결국 아르타가 테르핀의 짐을, 그리고 레칸이 테르핀을 업고 가게 됐다.
그것이 결정이 되자 아르타가 말했다.
“출발한다. 시간이 없어.”
건일은 자신의 짐에 더해 불곰 고기까지 들게 되었다.
엄청난 무게에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흘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양을 짊어 메서 불평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곧장 행군이 시작됐다.
레칸이 테르핀을 업은 덕에, 선두는 반투가 됐다.
반투는 레칸보다는 아니지만, 꽤나 능숙한 솜씨로 정글도를 휘둘러 길을 냈다.
반투는 반나절을 꼬박 선두에 서서 정글도를 휘둘렀는데, 그런데도 팔이 저린 기색이 없었다.
마른 몸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사냥꾼들과 마찬가지로 내실이 튼실하게 차 있는 모양이었다.
제일 죽어나는 건 건일이었다.
아르타가 꼴찌에 처진 건일을 보곤 멈춰 섰다.
“조금 쉬었다 가지!”
“네?”
반투가 아쉬운 듯 뒤를 돌았다가 건일의 표정을 봤다.
힘들어 죽기 일보 직전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더 가자고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건일은 근처 나무에 기대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아르타는 건일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건일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보르차, 싫어요.”
꽤나 단호하게 말한 덕에 아르타가 멈춰 섰다.
그러나 이내 킬킬거리곤 가방에서 손을 뺐다.
“이방인이 먹기엔 조금 뒤집히는 맛이긴 하겠군.”
“…안 뒤집히면 그게 더 이상하죠. 기름에 기름을 더한 꼴이잖아요.”
“하핫!”
아르타가 웃음을 쏟아냈다.
건일도 웬만하면 참고 먹겠지만, 저 기름 덩어리는 도저히 참고 먹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타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건일은 아차 싶었다.
아르타는 재차 가방에 손을 넣어 보르차를 꺼내더니, 자신이 한 입 베어 물었다.
“확실히 맛대가리가 없소이다. 미안하오. 원래는 좀 더 먹을 만한 음식이라오.”
“…맛있다가 아닌데요.”
건일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식량 비슷한 건데, 맛있으면 그것 나름대로 이상한 거요.”
아르타는 잠시 먼 산을 보는 듯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을에 여러 가지 일이 있다 보니 보르차마저 이 모양이오.”
“음…….”
역시 실수했다.
건일은 눈알을 굴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론이 내려지기 전에 아르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움직입시다. 말했다시피, 저희는 시간이 없소.”
그런 사람이 반나절을 기도로 허송세월을 보내나, 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흘러나왔다.
하지만 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강행군이 재개됐다.
쉬는 시간 없이 저녁까지 강행군이 이어진 탓에, 건일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다른 사냥꾼들은 짐에서 텐트를 꺼내 설치하고 있었지만, 건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건일이 완전히 뻗어 나무에 기대 있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테르핀은 테사라의 도움을 받아 저녁을 준비 중이었다.
테사라가 가져온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고, 솥을 올려 물을 부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아르타의 짐에서 불곰 고기 조금을 꺼내 끓는 물에 집어넣고, 테사라의 가방에 있던 향신료를 조금 넣고 간을 했다.
고기와 향신료, 야채가 익어가며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건일은 냄새를 맡자, 손가락 하나는 까딱일 힘이 생겼다.
그는 간신히 저녁 식사가 만들어지는 모닥가 쪽으로 기어가다시피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다른 사냥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일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간 거죠?”
테르핀이 대답했다.
“아마 근처에 있는 나물을 채취하러 갔을 겁니다.”
그는 숟가락으로 솥에 있는 건더기들을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푹 삶은 야채만 먹다보면 신선한 야채가 그립거든요.”
그의 말대로, 다른 사냥꾼들은 근처로 나물을 캐고 돌아왔다. 레칸이 가장 많은 나물을 캐왔는데, 개중에는 이끼를 닮은 것도 들어 있었다.
건일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레칸이 가져온 나물을 바라봤다.
“이거, 먹을 수 있는 겁니까?”
물론 먹으려면 뭐든지 먹을 수는 있다.
건일이 오늘 낮에 그 기름 덩어리 보르차를 먹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레칸은 괜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씹히는 맛이 일품입니다. 생으로 먹어야 돼요.”
그러면서 레칸은 자신의 가방을 뒤지더니, 액체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일반적인 가죽 주머니가 아니라, 동물의 위로 만든 것이었다.
레칸이 묶여있던 가죽의 구멍을 풀자, 그 안에서 약간의 점성질이 있는 하얀 액체가 흘러 나왔다.
그는 그 액체를 이끼 위에 뿌렸다.
조금 시큼한 냄새가 났다.
“요거트인가?”
건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레칸이 건일을 보고 물었다.
“당신네들은 그렇게 부르나봅니다. 우린 아이란이라 부릅니다.”
레칸이 포크로 아이란이 묻은 이끼를 찍어 건일에게 내밀었다. 건일이 마지못해 한 입 넣었다.
약간은 시큼한 요구르트 맛에 더해, 산뜻하게 톡톡 씹히는 맛이 느껴졌다.
먹을 만했다.
건일의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맛있는데요?”
“보르차보다 훨씬 낫죠.”
레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테르핀은 솥에 있는 고기 국물을 한 번 떠먹고 말했다.
“다 됐습니다. 저녁 먹죠.”
테르핀이 각자 한 대접씩 고깃국을 권했다.
건일은 그중에서 건더기가 제일 많았다.
대접에 가득 찬 고깃국을 보던 건일이 우선 냄새를 맡았다.
진하게 향신료 냄새가 났다.
거부감이 없이 약간은 매콤한 느낌.
건일이 조심스레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얼큰하고 알싸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건일이 좋아하는 맛이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건일이 고깃국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야채는 적당히 익어 아삭한 식감을 냈고, 불곰 고기는 역시나 건일이 먹어 본 곰과는 다른 독특한 향을 품고 있었다.
역하지도, 누린내가 나지도 않은데다 고기에 적당히 지방이 배어 있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운 건일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막 대접 절반을 비운 상황.
건일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스스로 국자로 한 대접을 더 펐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건일은 게 눈 감추듯 세 그릇을 끝장냈다.
“후우…….”
건일이 부른 배를 두드렸다.
생각보다 고깃국이 너무 맛있어서 과식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식사는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반투는 나물 샐러드를 먹지 않다가 갑자기 뭔가를 꺼내들었다.
껍질이 주황색인 사과 비슷한 열매였다.
“이건 파인페어란 건데, 드실 수 있겠어요?”
반투가 배가 불러 숨을 몰아쉬는 건일에게 물었다. 건일은 잠시 과일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는 못 먹어요.”
반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열매를 반으로 쪼갰다.
열매의 안은 초록색이었다.
건일은 반투가 내민 과일 반쪽을 받았다.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향을 한 번 맡아보던 건일이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열매는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있었다.
사과보다 더 맛있었다.
“어우, 밥을 더 안 먹을 걸.”
순식간에 반 조각을 끝장낸 건일이었지만, 이 이상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
결국 남은 것들은 다른 사냥꾼들의 몫이었다.
과일로 후식까지 먹고 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
그리고, 밤이 깊어져갔다.
다음날.
또다시 강행군이 시작됐다.
지난밤에 무리를 한 탓에 건일은 슬슬 근육통이 오고 있었다.
그는 앞서가던 아르타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됩니까?”
“음…….”
아르타가 걸으며 생각에 빠졌다.
“이 속도로 반나절이면 될 거 같소.”
“이 속도로요…….”
건일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르타가 시간이 없다고 말한 탓에 속도를 늦추자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건일은 무릎이 부서져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을 걸어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분지에 위치해 있었다.
“저기요.”
아르타가 언덕 정상에서 분지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상하리만치 산 정상에서 마을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규모도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집은 총 다섯 채였는데, 무척이나 컸다.
가족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합숙소 같은 느낌.
건일은 아르타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가족을 만난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이제 겨우 쉴 수 있겠구나 라는 것 정도.
건일은 인질이 잡혀있단 말이 떠올랐다.
‘인질은 다른 데 있는 모양인가.’
아르타가 불쑥 건일의 생각에 끼어들었다.
“가십시다. 꽤 먹을 만한 걸 내줄 거요.”
“네.”
건일은 아르타를 쫓아 마을로 내려갔다.
멀리서 봤을 때도 이상했던 마을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더 이상했다.
활기찬 분위기보다는 약간 음울하고 축 쳐진 느낌이었다.
마을을 둘러다보던 건일은, 마을에 으레 있을 술집이나, 대장간, 간단한 물건을 파는 잡상점 같은 게 눈에 띄지 않았다.
이 곳은 오직 주거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 같았다.
건일은 아르타의 뒤를 따라가며 그것을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르타가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은 집 옆에 있는 마굿간에 머물러 있었다.
“이 자식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아르타의 말에 건일도 마굿간을 바라봤다.
마굿간에는 비쩍 마른 말 네 필에 더해, 무척이나 잘 먹어 살이 오른 말 세 필이 있었다.
아르타는 혀를 차고 테사라에게 말했다.
“테사라, 건일을 데리고 다른 집에 가 있어라. 내가 신호하면 돌아오고. 알았지?”
“네.”
상황이 갑자기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건일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아르타의 표정을 보고 질문을 삼켰다.
아르타는 약간 쫓기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괜히 시간을 끌면 잔뜩 예민해진 아르타가 짜증을 넘어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건일은 테사라를 따라 다른 집으로 향했다.
아르타가 들어가려는 집 맞은편에 있는 집이었다.
집은 2층 구조로, 1층 한가운데에 식당으로 쓰이는 홀이 있는 구조였다.
테사라가 집으로 들어가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
체격 등을 보면, 그 사람들도 사냥꾼인 듯 보였다.
하지만 테사라에게 살갑게 대하던 그들은 건일을 보자 조금 싸늘한 눈으로 건일의 위아래를 살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테사라의 발목에 부목이 대져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소란을 떨었다.
그중에 레칸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사냥꾼이 테사라에게 물었다.
“테사라, 뭐야. 발목 삐었어?”
“네.”
“업혀. 치료해 줄게.”
그 사냥꾼이 테사라를 업고 2층으로 올라갔다.
건일이 짐을 내려놓고 그 뒤를 따르려다, 다른 사냥꾼들에게 제지를 받았다.
건일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2층을 올려다봤다.
“테사라, 좀 도와줄래?”
사냥꾼들의 시선이 테사라에게 쏠렸다. 사냥꾼의 등에 업혀있던 테사라가 입을 열었다.
“대장님이 데려온 사람이에요. 괜찮을 거예요.”
그제야 사냥꾼들이 건일에게 길을 터줬다.
건일은 테사라를 업은 사냥꾼을 따라 2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침대와 조잡한 가구가 놓여져 있었는데, 찬장 안에 간단히 응급조치를 할 수 있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사냥꾼은 급히 테사라에게 응급조치를 해줬다.
건일은 테사라의 앞에 앉아 치료가 끝나길 기다렸다.
치료가 끝나자, 천천히 건일이 입을 열었다.
“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넌 알고 있지? 아르타님이 있으면 규율이니 뭐니 하면서 얘기 못하게 할 테니, 지금 없는 틈에 말해.”
테사라가 잠깐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건일이 말했다.
“빨리.”
테사라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