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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화 : 저 새를 맞춰 보이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테르핀은 절을 한 상태에서 되뇌었다.
하지만 건일은 감사 인사를 받는 것보다, 테르핀의 다리가 걱정이었다.
건일은 억지로 테르핀을 일으켜 세웠다.
“윽……!”
테르핀이 비명을 삼키려 했지만, 입에서 새어 나왔다.
건일은 억지로 테르핀을 뉘이고 부목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나 절을 하느라 부목이 어긋나 있었다.
단단히 붕대를 맸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건일이 혀를 찼다.
“부목을 고칠 겁니다. 좀 아플 거예요.”
건일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통증이 상당할 텐데 테르핀은 이를 악 물고 참아냈다.
붕대를 한 절반쯤 풀었을 때, 테르핀이 중얼거렸다.
“미안 합니다…….”
“미안하면 일단 치료부터 받아요.”
말을 하고나서 건일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베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가면 꼭, 테르핀에게 했던 것처럼 하리라 다짐했다.
건일은 붕대를 다 풀고 나서 테르핀에게 말했다.
“혹시, 통증을 줄이는 약은 없습니까? 연고가 있긴 하던데 뭐에 쓰는 연고인지는 몰라서…….”
테르핀은 식은땀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연고는 통증을 줄이는 게 아니라 상처를 낫게 하는 거예요. 좀 발라주시겠어요?”
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 듬뿍 손에 묻혔다.
“아플 겁니다.”
테르핀은 또다시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일이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연고를 바르고, 다시 부목을 대서 최대한 세게 붕대를 맸다.
작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엔 테르핀은 통증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린 뒤였다.
그래도 부목이 어긋났을 때보다는 조금 편안한 표정이었다.
건일은 테르핀의 가방에서 천 쪼가리를 꺼내 식은땀을 닦아주고 일어났다.
건일은 테르핀이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해 텐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솥과 식기를 씻기 위해 강가로 걸어갔다.
강에서 솥을 씻고 있는데 상류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멀리 강의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지쳐 보이는 남자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수는 넷. 그들은 무척이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리고 테르핀과 비슷한 크기의 군장에 더해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다.
건일은 잠시 그들을 주시했다.
혹시 테르핀의 동료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리고 사냥꾼 무리 역시 건일을 발견했다.
그중 중년을 넘어 노년에 가까운 남성이 건일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시게!”
목소리를 들으니 나이에 비해 여전히 혈기가 왕성한 모양이었다.
건일이 손을 흔들어 대답했다.
중년 남성이 외쳤다.
“혹시 강에서 떠내려 온 사람을 못 봤나?! 케일의 아들, 테르핀이라는 젊은이인데!”
역시 테르핀의 동료인 듯 했다.
건일이 손나팔을 만들어 크게 소리쳤다.
“네! 제가 지금 돌보고 있습니다! 다리가 부러졌지만, 지금 텐트에서 자고 있습니다!”
건일의 대답에 사냥꾼 무리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다리게! 금방 그쪽으로 건너가지!”
사냥꾼 무리는 상류로 급히 올라가서 강폭이 좁은 곳에 멈춰 섰다.
그들은 방금 전 지친 기색이 완연히 사라지고, 능숙하게 강을 건넜다.
옷이 물에 젖어 무거울 테지만, 그들은 그런 것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지 건일에게 달려왔다.
건일은 그동안 솥과 식기들을 말끔히 씻어놓은 뒤였다.
사냥꾼 무리는 건일 앞에 다다라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이 묻고 싶은 건 어차피 하나.
건일이 숲 쪽으로 몸을 돌렸다.
“테르핀은 이쪽에 있습니다.”
건일이 앞장서서 텐트로 향했다.
사냥꾼 무리는 어미 개를 따르는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오다,
테르핀의 텐트를 발견했다.
사냥꾼들이 급히 텐트로 달려 들어가 잠을 자고 있던 테르핀을 확인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고 나서 곧이어 재회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건일은 그저 텐트 밖에서 조용히 그들의 볼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커다란 호통소리가 들렸다.
“뭐야?!”
건일이 무슨 일인가 싶어 텐트 쪽으로 다가갔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외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생각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네 가족을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지!”
노인은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건일이 사냥을 돕겠다고 한 걸 테르핀이 말한 듯했다.
다만 그게 저렇게 화를 낼만한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
건일로서는 이곳의 문화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이계는 이계인 모양이었다.
건일은 텐트 앞에 서서 얘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얼마 되지 않아, 중년 남성이 텐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텐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일을 보고 한쪽 무릎을 굽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난 엔테르의 아들, 아르타요. 한의 아들, 건일. 우선 테르핀을 구해주신 걸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깁니다.”
건일은 한의 아들이 아니란 것을 바로잡아야 되나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이어가기 전에 아르타가 말을 이었다.
“테르핀이 철없이 외부인에게 사냥을 요청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 사냥은 우리끼리 하겠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신 이것을…….”
아르타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건일에게 내밀었다. 무척이나 조그마한 주머니였다.
건일이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주머니를 열어보자, 푸른색 보석 조각 비슷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아르타가 재차 인사를 올리고 말했다.
“칸족은 외부인에게 은혜를 받으면, 떠나기 전에 은혜를 갚게 되어 있습니다. 테르핀을 구해주신 답례입니다. 냉기 마법을 품고 있는 간단한 마법석입니다.”
“아, 이런 건 굳이 안 주셔도 됩니다.”
건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아르타는 눈을 치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오. 그것이 우리 칸족의 규율이오.”
그 기백에 눌려, 건일이 멈춰 섰다.
받지 않으면 이곳에서 싸움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노인네가 무슨 기백이 이리 강한지, 건일로서도 어이가 없었다.
괜히 이 이상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건일은 조용히 마법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뭔가를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건일이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말입니다. 이 곳에서 다른 무리의 사냥에 참여하는 게 문화적으로 금지입니까?”
아르타는 무슨 질문이 그러냐는 표정으로 눈을 꿈뻑였다.
건일이 뺨을 긁적였다.
일단 그의 생각대로 문화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변명거리를 생각하고 나서 조심히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주 멀리서 와서, 이 지방의 문화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원래 우리 문화는 아니오.”
아르타의 대답을 듣고, 건일이 말을 이었다.
“주제 넘는 건 알지만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다섯이서 잡지 못한 불곰을 넷이서 잡겠다뇨. 여러분 가족이 달린 일 아닙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돕게 해주세요.”
건일은 최대한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조심히 어휘를 선택했다.
그러나 아르타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냥은 우리끼리 하겠소. 지금 외부인을 마을로 들여보낼 수 없어 사냥을 하고나서 대접을 제대로 해드릴 수가 없소. 그건 우리 부족 규율에 위반되는 것이오.”
“마을로 들어가지 못 하는 건, 규율입니까?”
아르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일이 잠시 생각했다.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긴 했다.
금세 답이 나왔다. 저토록 필사적인 거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건일이 그 답을 꺼냈다.
“인질이군요. 마을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인질로 잡혀서 외부인을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거겠죠.”
아르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건일은 외부인이니, 말을 해선 안 될 것이다.
아르타는 대신 다른 말을 꺼내놓았다.
“테르핀이 다친 탓에 판단이 흐려진 모양이오. 이대로 그냥 가주시면 고맙겠소.”
확실한 거부의 표명이다.
건일은 빠르게 아르타를 살폈다.
테르핀이 살았다는 생각에 아주 잠시 피곤을 잊었을 뿐이다.
지금 그에게 부탁을 하는 아르타는 무척이나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이런 무리로 사냥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불곰이 대체 어떤 생물인지는 몰라도, 이런 인원으로 사냥을 나가는 건 개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건일이 잠시 생각한 뒤에 물었다.
“불곰을 왜 사냥하려는 겁니까.”
“그 가죽을 얻기 위해서요. 고기는 부차적인 것이지.”
아르타의 말에 건일은 한 가지 의견을 제안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불곰 사냥을 돕겠습니다. 대신 가죽은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제 고기를 조금 더 많이 주시면 됩니다. 그 정도면 어떻습니까.”
아르타의 눈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당혹감, 의아함, 그리고 경악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그는 놀라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 호구요?”
건일이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쓴웃음이었다.
그는 아르타에게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눈썹이 꿈틀거렸다.
건일이 급히 웃음을 가리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기분 상하게 해서. 그저 속죄입니다.”
말을 하는 내내 입맛이 썼다.
하지만 아르타가 여전히 의심의 빛을 거두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난… 지금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떻게든 만나기 위해 방법을 찾으려고 하겠지만, 지금은 못 만나죠. 이 때문에 가슴이 너무 찢어집니다. 당신들도 가족을 잃으면 나와 같은 기분이겠죠.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르타가 건일과 눈을 마주쳤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아르타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군.”
그 말에 건일이 또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르타는 건일이 다 들으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건일을 보며 말했다.
“마음은 잘 알겠소. 다만 불곰 사냥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오. 당신의 역량을 알고 싶소이다.”
건일의 마음이 확실히 전달됐다.
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어떻게 보여드릴까요.”
아르타는 건일의 위아래를 살폈다. 건일은 아르타가 알고 있는 무기를 쓰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활은 쏠 줄 아시오? 아님 투창.”
건일이 아르타가 들고 있는 활을 살폈다.
건일의 세계에서 비유를 하자면 상당히 원시적인 활이다.
언뜻 보기에도 나무를 통짜로 만든 기다란 활이었다.
다양한 성질과 종류의 재료를 쓴 합성궁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나무를 쓴 복합궁보다 약한 활이었다.
저런 활은 결정력이 부족하다.
왜 이들이 이토록 힘겹게 사냥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건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릅니다. 다만, 이건 쏠 줄 알죠.”
건일이 그의 등 뒤에 멘 총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아르타는 의아한 표정으로 총을 바라봤다.
드래곤의 반응으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는데, 역시 이 세계에는 총이 없었다.
이렇게 원시적인 활이 사냥꾼들의 무기인 세계에서, 총을 가졌다는 건 확실한 이점이었다.
건일이 총을 돌려 견착했다.
아르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대체 뭐요?”
“총이란 겁니다.”
“총……?”
어차피 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다.
그러니 설명을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훨씬 빠르다.
건일이 강가로 돌아섰다.
“직접 보여드리죠. 따라오세요.”
건일은 아르타와 함께 강가로 걸어갔다.
강가에 도착한 건일은 노리쇠를 잡아당겨 장전을 시켰다.
그는 견착 후, 가늠쇠와 가늠좌가 똑바르게 있는지 확인하고 말했다.
“아무거나 쏴봤으면 하는 걸 말씀해 주세요.”
“흐음… 이건, 우리 마을에서 궁술 실력을 뽐낼 때 하는 거랑 비슷한데…….”
“뭐, 비슷합니다.”
아르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새들을 가리켰다.
“저기. 저 새 무리의 왼쪽에서 두 번째 새를 맞춰보시오.”
건일이 무릎 쏴 자세로 하늘을 겨누었다.
생각 외로 가까웠다.
건일이 말했다.
“눈을 맞추죠.”
“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일이 방아쇠를 당겼다.
어마어마한 총성과 함께, 아르타가 가리켰던 새 무리가 흩어졌다.
왼쪽에서 두 번째 새는 이미 추락 중이었다.
아르타는 경악했다.
“뭐요, 당신. 마법사였소?”
그의 반응은 꽤나 격렬했다. 진짜 놀랄 노자였다.
“마법…사라…….”
건일이 되뇌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소설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SF 소설가 아서 C. 클라크가 한 말이다.
건일에게 드래곤의 조형 마법이 마법으로 보이듯, 이들에게 있어 총은 마법이었다.
이건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르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는 잠깐 생각을 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냥을 도와주시면 감사하오. 대신 말씀드렸다시피, 대접을 융숭하게 해드릴 수는 없소. 고기를 조금 더 많이 드리리라. 마을에 들어가면 안 되니. 그 부분에 대해선 죄송스레 생각하오.”
“아닙니다. 원해서 하는 거니까요.”
건일이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