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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2권 (9화)


“진, 물러서.”
한은 진의 팔을 끌어당겨서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경계 자세를 취한 채 전방을 바라보며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빛은 빛나고 있을 뿐, 두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세상을 녹여버릴 듯 작열하던 빛은 사그라졌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뒤, 주위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깜깜이 파티더니… 이번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피라도 찍는 건가.”
주변 풍경을 바라보던 한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마법진 주위에는 울창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할 듯한, 그야말로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이 쭉쭉 솟아 있는 아름드리나무, 쏟아지는 햇볕을 모두 가리고 말겠다는 듯이 울창한 잎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기세로 지상에 내려꽃이는 뜨거운 햇살. 먼 곳에서 들리는 폭포 소리와 피부를 스치는 고온 다습한 바람까지… 흑색 탑에서 정글 탐험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라 주변을 둘러보는 한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진은…….
“세상에… 말도… 안 돼…….”
입을 쩌억 벌린 채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 목젖 보여.”
“지금 목젖이 중요해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한은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히 조금, 아니 많이 울창한 숲이기는 했지만 진이 이토록 경악을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뭐가 저토록 진을 경악하게 한 걸까.
“한, 뭔가 이상한 점 못 느끼겠어요?”
“이상한 점을 못 느끼겠냐고 물어봐도 말이지.”
한은 다시 한 번 사방을 둘러보았다.
“굳이 이상한 점을 말하라면 멀쩡히 있던 석조 건물이 갑자기 정글로 변했다는 점이지. 그거 말고 다른 거는 잘…….”
“눈 감고 귀 한 번 기울여 봐요.”
“…….”
“이래도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어요?”
“아, 확실히 이건 좀 이상한데.”
한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짐승 소리며, 곤충 울음소리가 하나도 안 들려. 이 넓은 정글에서 말이야.”
진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본 한은 그제야 뭐가 이상한 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울창한 숲속이건만 물 떨어지는 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당연히 있어야 할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또 없어요? 이상한 냄새는 안 나요?”
“냄새는… 잘 모르겠는데.”
한은 열심히 코를 킁킁거려 봤으나 별다른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 역시 한은 냄새까지는 안 나나 보네. 한,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요?”
“느껴지는 기운이 아우터 존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아스가르드야?”
“절반만 정답. 이곳은 아스가르드가 맞기는 맞아요. 다만…….”
여기까지 말하고 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곳은 저와 제 친구들이 아스가르드라고 명명하기 전, 그렇니까 아스가르드가 심연의 바다에 가라앉아 있을 때부터 존재하던 원시 공간이에요.”
“응?”
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의 진지한 표정을 보건데 농담은 아닌 것 같은데…….
한은 아스가르드에 전해 내려오는 창세신화를 머릿속에서 되새겨 보았다.
아득한 옛날, 끝없는 허무가 전부인 공허의 공간에 최초의 떨림이 있었다.
떨림의 정체는 미지의 세계에서 위대한 여행을 떠난 이계의 신들. 오랜 여행에 지친 신들은 공허의 공간을 그들의 정착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신들은 공허의 공간에 생명이 없음을 슬퍼하고 신들을 닮은 생명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생명을 창조한다 해도 그들에게 허락된 땅이 없다는 것이었다.
공허의 공간에서 부는 태풍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신들과는 달리, 생명이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였기에 아무런 대책 없이 공허의 공간에 생명을 풀어놓는다면 생명은 몰아치는 공허의 태풍에 쓸려 먼지처럼 흩어지고 말 것이 명백했다.
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러고는 해결책을 찾았다.
공허의 공간 너머에 있는 심연의 바다로 내려가 인간이 살 수 있는 차원을 퍼 올리기로 한 것이다.
고된 여정이었지만 모든 신들이 힘을 합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심연의 바다에서 차원을 건져 올렸고, 신들은 그 차원을 신들의 권능이 머무는 땅 ‘아스가르드’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진이 하는 말은 우리 눈앞에 있는 이 공간이 진과 진의 친구들이 힘을 합쳐서 바다에서 건져 올리기 전 그 상태의 아스가르드라는 거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막 건져 올린 직후죠. 심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직후, 아직 우리들의 권능이 깃들기 전의 아스가르드.”
뭔가 어마어마한 사실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심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원시 상태의 차원이라고? 적당히 큰 규모의 사건이라면 이것저것 캐물을 생각도 들었을 텐데, 상상 이상의 일이 되고 나니 질문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두 가지만 질문해도 될까?”
“더 많이 물어봐도 되요.”
“그 창세신화를 보면 그렇게 쓰여 있잖아. 차원을 건져 올릴 때 모든 신들이 하나로 힘을 합쳤다고. 그런데 말숨 혼자 힘으로 자신의 공간에 원시 상태의 차원을 만드는 게 가능한 거야?”
“불가능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렇게 떡하니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이상 인정해야죠. 가능한 일이었나 봐요. 그렇고 보니 말숨은 옛날부터 혼자서 뭔가를 꾸미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는 했는데, 설마 이런 짓을 꾸미고 있을 거라고는…….”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가능은 하다’ 진의 대답을 이렇게 받아들인 한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음 질문, 원시의 아스가르드라는 이 공간에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유는?”
“에휴∼”
진은 대답 대신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마법진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따라와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걸어가면서 해줄 테니.”
마법진 바깥은 하늘도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치 가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 아스가르드의 창세신화는 알고 있죠?”
“뭐, 대충은 알지.”
“그럼 그 창세신화에 틈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틈?”
“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창세신화에는 심연의 바다에서 차원을 건져 올린 후 신들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생명을 창조한 걸로 나오죠?”
“응.”
“그런데 말이죠. 사실은 차원을 건져 올린 후 생명을 창조하기까지 엄청난 사투가 있었답니다.”
“사투? 잠깐만, 그때 아스가르드에는 신들밖에 없었잖아? 신들 간에 내전이라도 벌어졌다는 거야?”
“아뇨. 물론 시간이 흐른 후 신들 간에 다툼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아니었어요.”
진의 단호한 부정에 한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들 간의 내전이 발발한 게 아니라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도대체 무슨 싸움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걸까.
“신들이 힘을 합쳐 차원을 건져 올릴 때 심연의 바다에서 올라온 건 아스가르드뿐만이 아니었답니다.”
으르르륵르륵!
그때였다. 지금껏 들리지 않았던 무시무시한 울음소리가 한의 귀에 똑똑하게 들려왔다.
“저쪽에서도 우리의 냄새를 맡았나 보네요.”
“진, 아스가르드뿐만이 아니라니? 그럼 신들이 만든 생명 이전에 아스가르드에 이미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야?”
“정답.”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실에 경악하는 한과는 달리 진의 대답은 태연했다.
“우리는 그들을 아스가르드에 태초부터 존재하는 이들이라는 의미로 ‘뿌리’라고 부르기로 정했어요. 그리고 최초에는 뿌리와 우리들이 창조한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답니다.”
으으르르라락! 크롸락!!
방금 전 들었던 무시무시한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천지간을 뒤흔드는 그야말로 흉포하기 그지없는 울부짖음이었다. 한은 그 울음소리에서 격렬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런데 우리의 바람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했음이 드러났어요. ‘뿌리’는 우리가 창조할 생명들과 공존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했고, 또 포악했으니까요.”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걷던 진은 고개를 돌려 한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 물었죠? 왜 이 공간에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진은 손가락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자, 이리 와서 확인해요. 저게 그 이유랍니다.”
“저게… 뭐야?”
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간 한은 무성한 풀잎을 헤치고 어두컴컴한 숲속을 바라봤다.
수풀 너머에는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가릴 듯한 울창한 풀숲이 있는 공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공터였다.
그리고 공터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이 공간 중심에는 공터만큼이나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 위에는…….
“뭐 저런 게 다 있어?”
정체모를 거대한 생명체가 흉포한 울음을 내뱉고 있었다.
까라룩락칵카라라!!
한이 제일 처음 놈을 봤을 때 든 생각은 ‘직립보행하는 거대한 악어’였다.
그 흉포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거대한 주둥이에는 어린아이 팔뚝만한 이빨이 가지런히 돋아나 있었고, 루비를 박아 놓은 듯한 붉은 눈은 핏빛을 사방에 흩뿌렸다.
뒤통수에 닿을 듯이 치솟은 승모근과 태평양처럼 넓은 광배근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으며,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비늘은 군청색 빛을 뿜고 있었다.
발톱이라기에는 너무 거대한 그 무언가는 제멋대로 솟구쳐 있는데, 걸리는 건 그게 뭐든지 잘라 버리겠다는 기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쿵! 쿵! 쿵!
거대한 철퇴를 닮은 꼬리는 끊임없이 지면을 내리치며 본인이 분노해 있다는 걸 연신 사방에 표출하고 있었다.
‘뿌리‘라고 했던가, 정체 모를 괴물의 덩치가 워낙에 크다보니 꼬리 역시 육중하기 짝이 없어 꼬리가 지면을 내리칠 때마다 괴물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당장이라도 뿌리가 뽑힐 듯이 휘청거렸다.
펄럭펄럭.
괴물을 지켜보는 한의 마음에 가장 들지 않는 부분은 바로 괴물의 어깨 웅장하게 솟아오른 네 장의 날개였다.
악어 주제에 직립 보행을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건방진데, 거기에 날개까지 달려 있다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포악함을 뽐내는 괴물을 한참이나 넋 놓고 바라보던 한은 이내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그러니까 저런 엄청난 마물이 태초의 아스가르드에 있었다 이거지?”
진은 대답대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생지옥이었겠군. 태초의 아스가르드는.”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에요. 실제로 자신이 만든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을 만들 때 뿌리의 모습을 참고한 신들도 꽤 많았으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서 있던 진은 한의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어마어마하게 강력하다는 점 이외에도 뿌리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에, 식물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뭐가 됐든 말이죠.”
“그럼, 이 근방에 벌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유는?”
“네, 아마 저 뿌리가 원인이겠죠.”
“그럼 지금 저놈이 저렇게 잔뜩 화가 나 있는 이유도?”
“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한과 저를 용납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는 거랍니다.”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런 놈들이 세상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고, 피아구분 없이 식물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죽이려 든다면 신들이 만들 생명과 뿌리의 공존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진이 말한 ‘사투’란 저 마물들과 신들 간의 전투를 일컫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