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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2권 (8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한은 전방을 주시했다. 한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어둠이 하나로 뭉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어둠을 구분하는 건 우스워 보일 수도 있었으나, 한의 눈에는 분명히 두 가지 어둠이 보였다.
그저 부유할 뿐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어둠과, 이 공간에 자신을 붙들어 놓고 끝내 집어삼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진창과도 같은 어둠.
으워어어엉―!
진창과도 같은 어둠이 울부짖었다. ‘네가 어찌 감히 나의 속박을 벗어나려 하느냐’라고 외치는 듯이, 어둠은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한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려 한 의도였다면 백 점 만점을 줄 만한 울음이었다. 한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어둠의 의도를 완벽하게 한에게 전달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은 어둠이 보여준 진심에 답례코자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자신의 의지 역시 숨김없이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콰앙!
한의 장갑에 머물던 파멸의 권능이 한이 내지른 주먹에 따라 어둠의 중심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으워어어―!
한이 발산한 파멸의 권능에 중심부를 관통당한 어둠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식의 전개는 어둠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울부짖는 어둠을 창조한건 어둠의 신 말숨. 어둠의 신의 권능이 깃든 어둠이 예사로운 공격에 타격을 받을 리 없다.
크와워어어―!!
한이 다시 한 번 내지른 주먹에 직격당한 어둠이 다시 한 차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어둠이 예사 어둠이 아니듯, 한의 주먹 역시 예사로운 주먹이 아니었다.
한은 파괴 신으로 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을 뒤흔들고 깨부수며,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은 파괴 신의 후예.
말숨 본인이었다 해도 장담할 수 없는 일격을, 말숨의 피조물인 어둠이 정통으로 맞았으니 어둠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최후의 발악이냐.”
파멸의 권능에 직격당한 어둠은 그 몸을 사방으로 펼쳐서 한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그러고는 그 몸을 솟구쳐 한을 감싸려 들었다.
몸을 펼쳐 한을 감싸는 어둠은 올가미에 걸린 개미를 집어삼키려 드는 개미지옥만큼이나 집요하고 위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은 이내 한을 집어삼키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콰앙!
한이 서 있던 자리로부터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섬광과 함께 너덜너덜하게 찢겨진 어둠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찢겨진 어둠 사이로 몸을 드러낸 한은 바닥에 드러누워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어둠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꿰에에엑―!!
어둠은 비명을 끝으로 완전히 숨이 끊어졌고, 어둠이 최후를 맞음과 동시에 한의 주위를 배회하던 망령 같은 어둠도 스러져 갔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시공간의 붕괴가 다시 한 번 발생했다.
“이러니까 좀 좋아.”
아픈 기억도, 미친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한은 손을 털었다.
생각보다 싱겁게, 그리고 깔끔하게 삼 층의 시련을 통과한 한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일 층과 이 층에 비해 너무나도 손쉽게 시련을 해치우고 나니 이대로 드러누워 잠이라도 한숨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련의 공간은 한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도전자를 시험한다는 그 본래 목적을 다한 시공간은 격렬한 떨림과 함께 그 종말을 알렸고, 한은 눈을 감은 채 찾아올 시공간의 종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시공간의 종말이 찾아왔고, 한이 있던 시련의 공간은 그 종말을 고했다.

“이번에는 되게 일찍 끝났네요?”
“응, 말숨이 내가 하는 욕을 듣더니 갑자기 철들었나봐. 쉬엄쉬엄 할 수 있는 걸로 난이도를 낮춰줬더라고. 이래서 험담은 일단 하고 볼 일이라니까.”
시련을 마치고 이내 같은 모습의 신전으로 돌아온 한을 먼저 도착해 있던 진이 반겨 주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걸린 시간이나 고생의 정도가 일 층 과 이 층에 비해 덜했던 탓인지 맞아주는 진도, 시련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돌아왔음을 알리는 한도 이전에 비해 그 반가움의 표시 정도가 덜했다.
“아하하. 못 써요, 한. 살인은 한 명을 죽이는 거지만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요?”
“괜찮아, 사람에 대한 험담이 아니라 신에 대한 험담이니까.”
“정말, 험담이 안 되는 거라구요. 험.담.이. 그리고 한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김칫국 그만 마시지 그래요?”
“무슨 김칫국?”
“한이 하는 말을 듣고 말숨이 시련의 정도를 낮췄다는 그 말 말이에요. 그거 완전 헛소리인 거 모르겠어요?”
“그런데 진도 봐서 알겠지만 삼 층이 확실하게 쉬웠잖아. 이 층에서 만난 사이코 패스에 비하면 삼 층에서 만난 어둠은 귀여운 수준이었어.”
“그게 틀렸다는 거예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삼 층의 어둠을 이 층의 흉조보다 상대하기 쉽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음…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래요. 삼 층에서 한이 상대한 그 어둠. 예전에 몇 번 본 적 있어요. 말숨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기술 중 하나였으니까. 아마 말숨은 그 어둠을 가리켜 ‘그림자 놀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아무튼 말숨의 그 기술에 당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만약에 그 사람들 불러다가 말숨의 그림자 놀이와 흉조 한 명을 백 번 죽이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그러면 백이면 백 흉조를 상대한다고 할걸요.”
진의 말마따나 사실이 그랬다.
완전히 맛이 간 사이코 패스의 습격으로부터 일주일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것도 맨 정신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인간의 뼈와 살로 이루어진 흉조를 상대하는 것과 말숨의 권능이 깃든 심연의 어둠을 상대하는 것을 비교했을 시 후자가 압도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런데 난 왜 삼 층이 훨씬 더 쉬웠지.”
“왜긴 왜겠어요? 한에게는 이게 있으니까 그렇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에게 다가선 진이 한의 양손을 움켜잡고 얼굴로 들어올렸다.
“세상에 파괴 신의 권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 그렇게 흔한 줄 알아요?”
“에이, 거짓말. 완전히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건 진도 잘 알면서.”
“사소한 걸로 말꼬리 잡는 거 금지. 어쨌거나 한은 자신이 남들에 비해서 특별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어요.”
“자각하고 있는데.”
“정말로?”
“응, 잡지에서 봤는데. 세상의 남자 중 90%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특별하다고 착각을 한다고 그러더라구. 어쨌거나 나도 남자니까…….”
“진지한 얘기하는데 시답잖은 농담하는 것도 금지. 어쨌거나 한이 가지고 있는 파괴 신의 권능은 한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능력이니까 조금 더 소중하게 할 필요가 있어요. 알겠어요?”
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련의 장소가 말숨이 창조한 말숨의 영역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원래대로라면 ‘그림자 놀이’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무적에 가까운 위력을 자랑했을 것이다.
다만 그림자 놀이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재수가 없게도, 그 몇 되지도 않는 예외적인 경우가 눈앞에 떡 나타난 것이다.
“음, 그렇니까 말숨도 그렇고 다른 신들도 그렇고 자신의 유산을 봉인한 장소를 만들면서 한처럼 예외적인 경우가 도전자일 경우는 상정하지 않았다는 얘기죠. 그 덕분에 한은 비교적 쉽게 삼 층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거고.”
“그래서 진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뭔데?”
“뭐긴 뭐겠어요? 그런 어마어마한 권능을 한에게 가져다주고, 평소에는 보관까지 해주는 나한테 조금 더 감사하라는 말이지.”
“그럴 줄 알았지. 내가.”
한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다음 층으로 이동할 것을 재촉했다.
“자, 사 층 갑시다. 사 층.”
“흥, 만날 저런다니까. 나중에 두고 봐라.”
한에게 곱게 눈을 흘기면서도 진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한의 옆에 섰다.
“이 지하 말이야. 대충 몇 층까지 있을까?”
“음, 글쎄요. 정확한 층수는 모르겠는데 느껴지는 감으로 보면 그래도 절반 이상은 온 것 같은데…….”
“그래, 그렇다면… 짧으면 오 층, 길면 육 층이라는 소리네.”
“뭐, 그렇죠.”
한은 점멸하는 마법진을 바라보며 주먹을 까닥거렸다.
“이곳과 거제도에서 흐르는 시간은 일치하는 건가?”
한의 질문에 진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으으음, 글쎄요. 이곳에 진입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별로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거 보면 공간 축이라면 몰라도 시간 축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 별 차이가 없단 말이지…….”
이 층에서 칠십 시간 정도를 소비했으니 일 층 과 삼 층을 통과하느라 걸린 시간을 모두 더하면 아마 팔십 시간 이상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원정대는 자신보다 한나절은 더 빨리 탑에 진입했으니 원정대가 탑에 진입한 지 만으로 나흘 정도는 지났다고 보면 얼추 들어맞을 터.

“목숨을 구원받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할 기회도 주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행동 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신의 행동이 투정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것 말입니다.”

걱정된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겠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한이 헌터를 시작한 이래로 공적인 이유가 아닌 사적인 이유로 한을 이토록 신경 쓰게 만든 인물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특별했다.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로 말이다.
“원정대가 신경 쓰여서 그래요?”
“뭐, 조금. 혹시 지하에서 큰 소란이라도 벌어지는 바람에 지상에 있을 원정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무 미안하니까.”
“그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에요. 말이 지하지 사실상 별개의 공간 축을 가지는 별개의 공간이니까.”
“그러면 다행이고.”
한은 마법진을 바라봤다. 마법진이 점멸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걸 보니 차원 이동이 그야말로 목전에 다다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빛이 뿜어져 나와 한을 감쌌고, 한은 눈을 감았다.
빛이 사라지자, 한은 눈을 뜨고 전방을 바라봤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여태껏 마법진은 아래층으로 이동을 할 때마다 뭔가 충격적인 공간으로 자신을 데려가고는 했다. 한데 이번에는 마법진을 탔음에도 주변 풍경이 바뀌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 층의 신전과 똑같은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얼레리 꼴레리, 진은 엉덩이가 크대요.”
“누구 엉덩이가 크다는 거에요?!”
따악!
강렬한 타격음이 한의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이 매서운 손맛은 진이 틀림없다.
이상한 점이 하나 더. 분명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진이 여전히 옆에 있다.
“진, 여기서 뭐해?”
“뭐하기는요? 헛소리나 해대는 한을 응징하고 있지.”
“아니, 그러니까 사 층에 왔는데 왜 내 옆에 있냐고. 어디로 가야 되는 거 아냐?”
“어, 그렇고 보니 이상하네. 왜 내 옆에 한이 있는 거지?”
두 사람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 봤다. 그리고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봐도 이 곳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삼 층과 동일한 풍경이었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냐?”
“에이, 설마. 신의 권능이 고장 난다는 게 말이 돼요?”
한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진은 마법진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순간.
“꺄앗!”
진은 비명을 내질렀다. 진이 마법진 밖으로 한 발을 내딛자마자, 다시 한 번 빛이 뿜어져 나왔다.
조금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빛이 마법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법진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