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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2권 (10화)


“그래서 진은 어떻게 저런 놈들이랑 싸워서 이긴 건데?”
“네?”
“아니, 그렇잖아. 어쨌거나 창세신화에 저 놈들의 존재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신들이 창조한 생명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멀쩡히 활동을 했고, 그 얘기는 신들이 뿌리와 싸워서 이겼다는 말 아니겠어?”
“…….”
“아무래도 돌아가는 판이 저 놈을 해치우는 게 사 층의 시련인 것 같은데. 먼저 싸워 본 선배로서 경험 정도는 전수해 줄 수 있잖아?”
이미 ‘뿌리’와 싸워서 쓰러뜨린다는 결론을 도출한 한을 보며 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말숨의 유물은 그냥 포기하지 않을래요?”
“진이 하는 거치고는 재미없는 농담이네.”
“농담이 아니에요, 한. 말숨의 유산을 얻지 못하더라도 아직 다른 신들은 많이 있어요. 무리를 할 필요는 없어요.”
“진, 농담은 첫 번째 할 때나 재미있는 거지 두 번, 세 번이 되면 재미없어.”
한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놈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말했다.
“알 만한 사람이 왜 자꾸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그래.”
“어휴, 그럼 나도 몰라, 이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한에 진이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차마 한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뿌리와 격돌하는 건 차마 볼 수 없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말해 둘게요. 뿌리는 마물이 아니에요. 마물은 뿌리와 그 형태는 닮아 있지만 결국 신들이 창조한 신들의 권능이 닿아 있는 존재,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들의 권능이 통할 수밖에 없어요. 반면에 뿌리는 애초부터 신들의 권능이 닿기 이전의 아스가르드에 존재하던 자들. 즉.”
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부분의 신들의 권능은 뿌리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신들이 심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아스가르드를 두고 뿌리와 사투를 벌일 때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들이 끌어올리기 전, 심연의 바다의 거친 물결에 단련될 대로 된 뿌리에게는 심연의 바다 바깥쪽에서 온 신들의 권능이 거의 통하지 않았다.
신들의 가장 큰 무기이자 존재 이유인 권능이 통하지 않는다면 신들의 힘은 수천 분의 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신들은 공허의 공간으로 넘어온 뒤 처음으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대부분이 통하지 않는 다라… 그렇다면 통하기는 통한다는 소리잖아?”
“모든 신들을 통틀어서 뿌리에게 통하는 권능을 가진 신들은 딱 둘 뿐이었어요.”
“그 둘이 누군데?”
“한 명은 나,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진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처음에는 자기를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돌려 한의 장갑을 가리켰다.
“아흐리만?”
“네. 나와 아흐리만 단 둘.”
한은 자신이 끼고 있는 장갑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보니 파괴 신의 후예가 되어 파멸의 권능을 무기로 쓰게 됐지만, 한은 아직 한 번도 아흐리만의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파괴를 관장하는 아흐리만은 창조를 관장하는 진과 더불어 가장 크고 위대한 권능을 가진 신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파괴 신 아흐리만이 진과 더불어 뿌리에게 통하는 권능을 가진 단 둘 뿐인 신이라는 소식을 확인하고 나니, 새삼 자신을 후계자로 정한 아흐리만의 선택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질문 하나 더. 진과 아흐리만을 제외한 모든 신의 권능이 뿌리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저 놈을 막고 있는 이 결계는 뭐지? 이거 말숨이 한 거 아냐?”
한은 놈과 한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얇은 막을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한을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내뿜는 저 놈이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한과 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얇은 결계 때문이었다.
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숨의 권능은 뿌리를 제약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악어의 형태를 한 뿌리는 명백하게 결계에 의해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진이 거짓을 말할 리는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결계는 말숨이 친 게 아니에요.”
“그럼 누가 친 건데?”
“저요.”
“엉?”
“나라구요, 나. 내가 한 말 못 들었어요? 말했잖아요. 나랑 아흐리만은 뿌리를 상대로도 통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런데 아흐리만이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으니 할 사람이 나밖에 더 있겠어요?”
조금 전 한과 같이 이곳에 도착한 진이 결계를 쳤다고? 언뜻 들으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순적인 발언으로 들리겠지만, 한은 진이 한 말을 전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지금 진 말고 그 뽀샤시하던 ‘과거의 진’ 말하는 거지?”
“흥, 누가 들으면 내가 지금은 안 뽀샤시한 줄 알겠네.”
‘과거의 진’ 이라는 말이 한의 입에서 나오자 진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말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진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진 본인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급작스런 울음이었다.
한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과거의 진’ 이라는 단어는 진에게 있어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였다. 앞으로 영원이 지나도 진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사람.
진은 서둘러 눈물을 닦아 내며 울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매섭게 한을 쏘아 붙였다. 다행히도 뿌리를 바라보고 있던 한은 진의 눈물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진이야 항상 뽀샤시하지. 그래서 말인데 진,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요?”
“진은 아까 우리가 출발했던 마법진으로 돌아가 주지 않을래? 그 마법진도 과거의 진이 남긴 권능으로 보호받는 영역인거 같으니까 거기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이 근처가 조금 소란스러워져도 진은 안전할 것 같은데.”
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뿌리의 크기는 어림잡아도 6―7m, 날개와 꼬리를 전부 합친다면 10m는 가뿐히 넘길 것이다.
잠시 후면 저 어마어마한 크기의 괴물과 한바탕 드잡이를 벌여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이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근처에 진이 있으면 마음 놓고 싸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랑 저 괴물이 싸우는데 근처에 있으면 혹시라도 진이 더이상 뽀샤시하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분위기를 띄울 요량으로 가벼운 농담을 해봤지만, 진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한, 만약에 저놈과 싸우게 되면 파괴의 권능은 사용해서는 안 돼요.”
“조금 전에 아흐리만의 권능은 통한다고 하지 않았나?”
“한이 아프리만의 권능을 사용하면 저 뿌리를 상대로 전투는 승리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한이 아흐리만의 권능을 발동하는 순간 이 공간은 그대로 소멸할 거예요.”
“공간이 소멸한다고?”
“네,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저 뿌리를 가두고 있는 결계를 친 건 ‘과거의 나’예요. 아마 말숨이 저의 권능이 담긴 물건을 이용해 이 결계를 친 거겠죠. 그리고 이 공간을 유지하는 건 말숨의 힘. 즉 이 공간에는 말숨과 나. 두 신의 권능이 녹아 있는 셈이죠. 그런데 여기에 아흐리만의 파괴의 권능까지 더해지면…….”
“그대로 터지겠지. 아마도.”
애초에 원칙대로 따지자면 시련의 공간은 아스가르드에 있어야 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구로 옮겨지게 되었고, 거기에다 같은 공간에 말숨과 진의 권능이 혼재까지 되어 있으니, 현재 이곳의 상태는 그야말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공간 축이 두 번 비틀린 것 자체만 해도 불안한데, 여기에 서로 다른 신의 권능을 세 가지나 들이붓는다면 공간이 박살나는 게 당연한 일이리라.
“한, 다시 한 번 말할게요. 권능도 사용하지 못하는 한이 뿌리와 싸운다는 건 너무 위험해요. 우리 여기까지만 여기서 물러나요. 그래도 되요. 아직 남은 신들은 많으니까.”
진은 다시 한 번 간곡한 목소리로 한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한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권능을 못 쓰게 되도 상관없어. 때려잡을 거니까.”
“정말, 답답한 소리 좀 그만 해요. 악어처럼 생겼다고 해서 정말 평범한 악어인줄 알아요? 저놈은 뿌리라구요, 뿌리. 심연의 바다의 물결 속에서도 살아남은 뿌리. 그런 놈을 상대로 파멸의 권능도 사용 못하는 한이 무슨 수로 이긴다는 거예요?”
웬만한, 정말 웬만한 상대라면 진도 두 번씩이나 한을 뜯어말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말숨의 유산은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한에 비할 바는 아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승산은 충분하니까. 어쨌거나 가끔씩은 진이랑 아흐리만이 없이도 남은 신들끼리 저 놈들을 잡는 데 성공했을 거 아냐?”
하지만 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뿌리와 싸운다는 한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한, 비록 권능을 사용할 수 없고, 아직은 미숙한 시절이었다 해도 그들은 신이었어요. 그 신들이 목숨을 걸고 겨우 사냥한 게 뿌리라구요. 그런데 그런 뿌리를 상대로 거의 맨몸으로 싸운다는게 말이 돼요?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나도 대충은 알아. 신들이라는 그분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분들인지. 그래도 말야. 진 앞에서 잘난척 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의 내가 권능을 잃어버린 신들보다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권능을 잃은 신은 신이 아닌 자나 마찬가지. 신을 우습게 보는 건 안 될 일이지만, 그 이름 앞에 주눅들 생각은 없다.
하물며 권능을 쓸 수 없다시피 한 신들이 성공했다면 자신도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이 만용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까마득한 옛날에 권능을 잃은 신들이 해낸 걸, 지금의 내가 못 하라는 법은 없잖아.”
결국 최후의 순간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적은 신들의 권능을 모두 흡수한 리더.
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들고 일어선 자신이 저따위 파충류같이 생긴 놈에게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까마득한 격차를 벌리며 앞서 나가고 있는 리더를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말숨의 유산은 꼭 필요한 존재.
그걸 눈앞에 둔 채 물러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나는 ‘류 연’과 ‘서 민아’의 아들이니까. 그 두 사람의 아들인 내가 신들보다 못할 리가 없잖아?”
아버지와 엄마. 할 수 있다, 아니 두 사람의 아들이라면 무조건 해내야 한다.
“걱정 말고 가 있어. 금발 갈 테니.”
한은 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은 한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나랑 약속 하나만 해요,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유물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파멸의 권능을 사용하기로. 약속해주면 일단 물러나 줄게요.”
“약속 안 하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물러나요.”
“알았어, 알았어. 약속.”
“…….”
“나 못 믿어? 내가 거짓말은 종종 해도 약속 어긴 적은 없잖아.”
“한은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원래 이런 상황일수록 농담을 해야 하는 거야, 몰랐어?”
여기까지 말하고 한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검집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반대 쪽 손에서는 한이 애용하는 사슬이 감겨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와야 되요. 늦기만 해봐.”
“최대한 노력해 볼게.”
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곧 자리에서 멀어져 가는 진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진이 지금 정도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을 거라는 확신이 들 무렵, 한 발자국을 내밀어 결계 안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