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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2권 (5화)


“네? 제 일기장 말씀인가요?”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한 조이가 반문했지만, 한은 두 번 다시 질문하지 말라는 듯한 단호한 태도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일기장, 꼭 일기장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여기서 작업을 하면서 기록한 기록이면 뭐든 괜찮으니까 당장 내놔.”
조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조이는 지금껏 꾸준히 자신의 업무를 기록해 왔고, 한이 원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 기록장 이라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조이가 이토록 기뻐하는 이유는 한이 보여준 의외성에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자신의 일기장을 달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 해보는 경험은 조이에게 참을 수 없는 흥분으로 다가왔다.
조이는 저기 하반신 깊은 곳에서부터 미친 듯이 날뛰는 격렬한 흥분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 이리도 간절하게 썰어버리고 싶은 인간을 보는 게 얼마만이란 말인가.
조이는 자신이 기록한 일기장을 한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입니다. 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한 님은 모두 저를 아흔아홉 번 죽여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사실 아흔아홉 번이 아니랍니다.”
자꾸 고개를 치켜드는 감당할 수 없는 흥분을 억지로 내리 누르며 조이는 마지막 규칙을 설명했다.
“아흔아홉 번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흔 여덟 번 이나 마찬가지죠. 당신이 저를 첫 번째로 죽여주는 그 순간이 바로 게임의 시작이니까요.”
조이가 내민 업무 일지를 받아든 한은 업무 일지를 코트 품속에 집어넣었다.
“자, 선택하시지요? 어떤 방법으로 저를 죽여주시겠습니까?”
“내가 첫 번째로 당신을 죽이는 순간 게임이 시작이라고 그랬나?”
한은 마시다 만 포도주가 담겨 있는 와인 잔을 집어 들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어떤 방법으로 저에게 최초의 죽음을 선사해 주실 건가요?”
조이가 열망이 불타오르는 표정으로 한에게 물었다. 그동안 겨우겨우 참고 있던 턱은 크게 벌어져 거친 숨결을 사방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드디어 백 년만에 타인의 손에 의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숨결은 마냥 거칠어져만 갔다.
쨍그랑.
한은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와인 잔은 산산이 깨어져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억.”
그리고 무심결에 깨진 와인 잔을 보고 있던 조이는 목이 뻣뻣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의 손에 들려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가 조이의 목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조이의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 이렇게 멋진… 죽음이라니. 역시… 한… 씨,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와인 잔에 정신을 빼앗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목에 나이프를 꽂아버리는 대담함에 식사를 하던 나이프를 사용하는 참신함까지.
조이는 방금 한의 습격에 점수를 매긴다면 백 점짜리 습격일거라고 생각하며 숨을 거두었다.
격렬하게 몸을 떨던 조이의 신체는 곧 떨림을 멈추었다. 그 후 조이의 시체는 검은 재가 되었다가 다시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아흔 여덟 번.”
한은 코트에 매달아 놓은 칼을 뽑아 들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쓸데없이 크기만 그 문을 힘껏 걷어찼다.
현기증이 날 만큼 긴 복도에는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많은 방 문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저 중에 어느 방에서는 되살아난 조이가 한을 노리고 몸을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남은 아흔 여덟 개의 목숨을 가지고…….
한은 서둘러 문을 나섰다. 아흔 여덟 번의 죽음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할 테니.

“후우, 후우……. 얼마만이지, 이런… 기분은…….”
몇 번째 방인지 모를 어느 곳에서 눈을 뜬 조이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숨이 차거나 해서 호흡을 가다듬는 게 아니라 온몸을 타고 오르는 짜릿한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서 호흡을 했다.
한이라고 했나, 그 남자는 완벽했다.
나이프를 잡는 방법, 휘두르는 궤적, 한 치의 빗나감 없이 목을 파고드는 정확한 각도.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 솜씨를 보건대 틀림없이 사람을 여러 번 죽여 본 경험이 있는 놈일 것이다.
“헤헤,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아주… 좋아.”
조이는 입술을 한 번 날름 핥고 거추장스러운 보타이를 풀어 던졌다.
일단 열 번 쯤은 죽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놈이 방심했을 때 귀 하나를 날려 준다.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는 놈이니 귀 하나쯤 없어졌다고 겁을 먹거나 하지는 않을 터. 그리고 또 열 번 쯤 죽어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눈을 하나 가져가자.
아무리 겁이 없는 놈이라 해도 눈이 하나 없어지고 나면 겁을 먹기 마련이다. 그때부터가 진짜 즐거움의 시작이다.
잔뜩 겁을 먹은 주제에 센 척하는 그 허세 가득한 얼굴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그 쾌감. 오, 상상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하악, 하악, 하악…….”
조이는 벽에 매달린 피로 물든 거대한 할버드를 집어 들었다.
대형 할버드는 좁은 복도에서 쓰기에는 어려운 무기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처음 열 번은 그냥 죽어줄 생각이니까.
하지만 놈은 거대한 할버드를 질질 끌면서 나가오는 나를 보면서 겁을 먹겠지.
크크큭,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 아직도 내 목숨은 아흔 하고도 여덟 개나 남았으니까.

“오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오르는 쾌감에 몸부림치며 조이는 여덟 번째로 깨어났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방금 전 그놈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거대한 다짐육 분쇄기에 그대로 쑤셔 박아 버렸다.
정말이지 놀라운 성취가 아닌가, 단 여덟 번 만에 분쇄기를 사용할 생각을 다 하다니.
점잖은 얼굴을 한 주제에 엄청난 미치광이라니. 놈은 최고였다. 지금껏 온갖 악당들을 상대해 봤지만 놈은 단연코 최고였다.
처음에 생각했던 계획을 지킬 수 있을까, 계획을 지키려면 앞으로 열두 번은 더 놈에게 죽어줘야 하는데, 그때까지 참을 자신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놈을 썰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놈을 최대한 오랫동안 가지고 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말숨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런 최고의 장난감을 내게 주셔서…….

“쿨럭!”
조이는 기침과 함께 열여섯 번째 부활을 맞이했다. 목 부근을 어루만져 본다. 아직도 목안에 말뚝이 박혀 있는 것 같아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이번에 그놈은 자신의 입 안에다 거대한 쇠 말뚝을 박아 넣는 방법으로 자신을 해치웠다.
“킥킥킥킥!”
조이는 아직도 화끈한 쇠 말뚝의 맛이 느껴지는 목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훌륭해, 정말 훌륭해. 말할 수 없이 훌륭해.
한참을 그렇게 미친놈처럼 웃던 조이는 문득 자신이 아직도 그놈의 귀를 베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즐거움이 지나쳐 애초에 계획을 잊어버리다니. 나 같은 베테랑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초보적인 실수다.
조이는 이번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을 두 자루 꺼내들었다. 좋아, 이걸로 그놈의 귀를 날카롭게 베어 내자. 그놈의 귀는 최고의 기념품이 될 것이다.

“젠장!!”
조이는 욕설을 지르면서 깨어났다. 벌써 아홉 번째 시도인데 아직도 그놈의 귀를 베어내지 못했다.
자신만 아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몰래 뒤에서 덮쳐 봐도, 기관 장치를 이용한 측면 기습을 시도해 봐도, 천장에서 기습적인 낙하 작전을 시도해 봐도 놈은 귀신같이 자신의 습격을 막아내고 곧바로 반격을 해왔다.
“제길!!”
조이는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방금 전 시도했던 바닥에서 발목을 노리고 들어간 기습은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놈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기습을 막아내고, 그대로 팔을 잡고 들어 올려 산 채로 자신의 몸을 두 조각으로 길게 찢어버렸다.
“이 새끼… 용서 못해.”
조이는 스스로를 추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육체를 이용해 궁극의 미를 창조하는 위대한 예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몸을 이용한 살인이었다.
그런데 감히 자신을 맨 손으로 찢어 죽이다니, 이는 조이에게 있어서 크나큰 모욕이었다. 벌써 한에게 스물다섯 번이나 죽었다는 사실 그 이상으로 말이다.
“그 낯짝을 녹여 없애주마.”
조이는 석궁을 손에 들고 석궁의 촉에 몸에 닿는 즉시 피부를 버터처럼 녹여 버리는 맹독을 칠했다.
제깟 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미스릴로 만든 갑옷도 녹여 버리는 맹독을 바른 석궁을 맞고도 멀쩡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 헉, 하악!”
조이는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이마에 손을 가져가 보니 식은땀이 흥건했다. 채 가시지 않은 소름에 등골이 쭈뼛쭈뼛했다.
잠시 후 자신이 마흔 다섯 번째 부활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정체모를 그 놈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으아아아악∼!!”
조이는 벽을 내리치고 테이블을 발로 차며 발광했다.
내가, 이 공간의 지배자이자 아스가르드의 수많은 밤을 공포에 지새게 만든 이 ‘흉조 조이’가 저딴 놈에게 공포를 느꼈다고?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분노에 조이는 몸을 떨었다.
“젠장… 젠장… 젠자아아아앙∼!!”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수백 등분해서 썰어버려도 성에 차지 않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저 증오스러운 놈을 해치울 방법이 없었다. 창, 칼, 망치, 철퇴, 화살, 독, 강산, 함정…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놈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다.
“어디야, 어디… 어디 있는 거야… 나와, 나오라고!!”
이성을 잃은 조이는 자신이 부활한 방의 구석에 놓인 상자에 고개를 파묻고 미친 듯이 상자를 뒤졌다.
그렇게 한참을 상자를 뒤지던 조이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채 상자에서 고개를 들었다.
“제길, 웬만하면 이건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조이의 손에는 검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말숨 님이 자신에게 임무를 맡기면서 내려주신 말숨 님의 권능이 담긴 비약. 이 약을 먹기만 하면 저 건방진 놈을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처받은 자존심에 있었다. 지금껏 조이는 말숨의 권능에 의존한 바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수많은 죄인을 심판해 왔다. 그런데 저놈 때문에 처음으로 자신의 힘이 아닌 비약에 의존하게 되다니… 조이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꿀꺽꿀꺽.
조이는 비약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비약을 삼키자마자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힘이 온 몸에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상처받은 자존심은 놈의 사지를 절단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 지금 중요한 건 자존심 따위가 아니라 저 놈을 묶어놓고 써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니까.
그 어마어마한 즐거움을 위해서 자존심 따위는 잠시간 접어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