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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2권 (3화)
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됐건 이런 식으로 시험을 하는 말숨도, 그리고 진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래서 말했다.
“그냥 주기 싫으면 주기 싫다고 말로 하지, 쪼잔하기는. 아픈 과거 앞에서 한 점 망설임도 없는 사람? 애초에 그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한 거야?”
지금쯤에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텐데, 한이 일부러 저렇게 아이 같은 투정을 부리는 건 자신이 슬픈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의 마음을 짐작한 진은 손을 뻗어 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평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있구 말구요. 없기는 왜 없어요?”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 한 번 듣기나 해 봅시다.”
“요기 있네.”
진이 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한을 가리켰다.
“나?”
“응.”
“…….”
한은 진의 발언이 영 못마땅한지 오른쪽 눈썹을 꿈틀거렸고, 기운을 회복한 진은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진은 말이야, 다 좋은데…….”
한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어.”
“어머?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진이 몸을 둥실 띄워서 한을 끌어안았다.
진의 달빛을 닮은 은빛 머리카락이 한의 얼굴을 감쌌다.
“모든 엄마에게 한 번 물어봐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똑똑한 남자가 누군지.”
“…….”
진은 한의 양 뺨을 감싸 쥐며 눈을 맞췄다.
“백이면 백, 자기 아들이라고 할 테니.”
“그거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어머? 눈치 챘어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한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빛을 뿜으며 점멸하고 있는 마법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자. 우리 2층으로 갑시다. 융통성 없는 말숨 씨가 이번에는 뭘 준비해 놨는지 구경이나 한 번 하자고.”
“부끄러워하기는… 쿡쿡.”
진은 고운 눈웃음을 지은 채로 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진과 한은 마법진에 몸을 올렸다.
“준비 됐어요? 흑색 탑 지하 2층으로 가는 열차, 출발합니다아∼!!”
“준비 OK. 갑시다.”
진의 몸에서 은색의 섬광이 뿜어져 나왔고, 마법진이 진이 내뿜는 빛에 반응하여 더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섬광에 휩싸여 그 모습을 감추었다.
마법진을 통한 이동이 완료되었음을 깨달은 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 1층이 커다란 신전이었다면, 지하 2층은 무수히 많은 방문이 있는 기다란 복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같은 마법진을 타고 이동했는데 진과 자신이 별개의 공간으로 분류되는 걸 보면 아마도 마법진이 인간이 아닌 진을 파악해 그녀를 의도적으로 시련의 공간에서 배재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혹은 인간인 자신을 시련의 공간으로 몰아넣기 위해 작정을 했던가.
“뭐, 조용한 점은 더 좋지만.”
물론 진이 있으면 좋겠지만, 진이 없는 건 또 그대로의 장점이 있다.
게다가 시련의 대상이 진이 아닌 자신인 이상, 진에게 큰 위협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한은 더 이상 진의 존재를 찾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아니라 움직여야 할 때이니까.
한은 주위를 살피며 복도를 걸었다. 검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길게 쭉 펼쳐져 있다.
천장에 매달린 재질을 알 수 없는 구슬은 백색의 빛을 내뿜고, 바닥에 깔린 대리석 조각은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을 받아 사방으로 반짝임을 뿜어낸다.
어둠의 신이라는 말숨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빛의 천국. 1층의 풍경과 강한 이질감을 느끼며 한은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철컥.
한은 복도를 걷는 도중 손을 뻗어 복도에 있는 방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모든 문은 굳게 잠겨 있는 상태였고, 열리지 않았다.
‘다른 방으로 샐 생각 말고 복도나 쭉 걸어가라 이건가.’
철저하게 불친절한 말숨의 행태.
하지만 어쩌겠는가.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만큼은 말숨은 갑이고 한은 을.
말숨의 유산을 얻기 전까지는 그저 말숨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과 한의 구두가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긴 복도를 한은 계속해서 걸었다.
온통 흑과 백, 두 가지 색채로만 이루어진 공간.
이 공간을 만든 게 말숨이라면 말숨이 편집증 환자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만큼 단조로운 색채의 공간을 한참이나 걸은 끝에, 한은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
지금껏 복도에서 보아온 문이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였다면, 복도의 끝에 있는 분은 대여섯 명도 한꺼번에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랬다.
문 치고는 너무 큰 돌을 깎아 만든 커다란 석문.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크기라는 점에서 이질적이라 할 만했지만, 흑과 백 두 개의 색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그 일관성을 인정해 줄만 했다.
똑똑똑.
한은 석문을 두드렸다. 석문은 그 엄청난 크기에서는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노크를 하기는 했지만 한은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노크에 대한 답변을 기대하기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문, 모두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세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관용적으로 말하는 옥구슬이 쟁반에 흐르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
정상적인 감각이라는 게 결여된 이 공간에서 드디어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걸까. 한은 기대를 품으며 문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죠. 2층을 담당하고 있는 조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한을 기다리고 있는 건 테일 코트를 매끈하게 차려입은 푸른 머리의 소년과,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식탁이었다.
식탁 위에는 각종 고기와 채소, 과일, 해산물로 만든 요리가 즐비해 있고, 크리스털 와인 버킷에는 얼음과 함께 각종 포도주가 곱게 담겨 있었다.
한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향긋한 풍미로 유혹하는 각종 요리와 포도주. 그리고 미소년 집사.
한은 자신을 조이라고 밝힌 소년을 훑어보았다.
푸른색 머리카락은 가을 바다를 닮아 있고, 하얀 피부는 늦가을의 서리마냥 창백했다.
잘 익은 석류처럼 붉은 빛을 발하는 눈동자. 오똑한 콧날.
피를 잔뜩 머금은 듯 붉디붉은 입술과 갸름한 턱선.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곱상한 외모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차려 입은 테일 코트. 하얀색 실크 보타이와 검은색 베스트. 손수건까지 빈틈없이 차려입은 그 모습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대조되어, 이 공간의 이질적인 느낌을 한 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조이는 미소를 지으며 한에게 손짓을 했다.
“자 여기 와서 앉으시죠.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2층을 담당하고 있다니, 2층을 담당하는 집사라도 된다는 건가?
조이의 살가운 손짓에도 불하고 한은 섣불리 식탁에 다가가지 못했다.
식사? 조이? 집사? 모든 게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공간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이 공간이 뭔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 점이 한이 섣불리 식탁에 다가서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이리 오시죠. 한 님이 이 자리에 앉지 않으시면 시험이 시작되지 않으니까요.”
눈앞의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내 이름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조이에게 다가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저 의자에 앉지 않으면 시험을 시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설픈 탐색전으로 괜히 힘을 뺄 필요가 없는 일. 한은 성큼성큼 걸어가 식탁에 앉았다.
“이 일을 맡은 이후로 제법 많은 분들을 만났지만, 한 님처럼 말쑥한 복장을 하신 분은 처음이네요. 저도 무척이나 긴장되는 걸요.”
“…….”
‘제법 많은 사람을 만났다’라고? 눈앞의 소년이 입을 열수록 점점 더 수수께끼는 커져만 갔다.
그렇다고 섣불리 질문을 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야말로 한 본인이 열세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 테니까.
쪼로록.
조이는 한의 옆에 서서 가느다란 볼의 잔에 백포도주를 따랐다. 그리고 그 핏빛처럼 붉은 입술을 움직여 고운 입을 열었다.
“시작은 화이트 와인으로 하시죠. 전채 요리로는 해산물 샐러드가 준비되어 있는데, 어떠신가요?”
“맥주 없나?”
초면인 상대에게 반말을 하는 건 한으로서는 무척이나 이례적인 행동이었으나, 웬일인지 한의 말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미리 알았다면 준비했을 텐데,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식사 때부터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소 무례하게 여겨질 수 있는 한의 발언에도 조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샐러드는 됐고, 바로 메인 요리부터 준비해 줘.”
한은 조이가 따라준 백포도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잔을 밀어냈다.
무례한 행동이라는 건 한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조이’라는 소년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변덕이라고 해도 좋고, 심술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조이라는 소년의 미소도, 표정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이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리네이드한 양갈비 스테이크 입니다.”
조이가 가져온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를 한은 서둘러 씹어 삼켰다. 과일 향이 육즙에 섞여 입안에 가득 흐르는 양갈비는 무척이나 훌륭한 맛이었다.
하지만 한은 훌륭한 요리를 준비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도, 감탄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과 파르페, 벌꿀 타르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걸…….”
“커피.”
“디저트를 드시면 커피는 따로 준비가 됩니다. 먼저 디저트를…….”
“필요 없어. 커피.”
한은 딱 잘라 대답했고, 조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커피를 내왔다.
시종일관 조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그 사실이 한을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떤 커피를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휘핑크림을 얹은 비엔나커피로 준비했는데, 혹 원하시는 커피가 있다고 말씀해 주시면 다음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분명히 한도 선호하는 커피의 종류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커피를 달라고 한 건 식사를 끝냈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지, 조이가 내오는 커피를 먹을 마음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이제 필요한 건 없으니까 그만 돌아다니고 거기 좀 앉지 그래?”
“아, 제법 열심히 준비했는데, 대접이 부족한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여기 있는 식사며 디저트, 전부 당신이 준비한 건가?”
“네. 입맛에는 좀 맞으셨나요?”
“…….”
한은 커피를 마시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이의 손이 닿은 양갈비만으로 속이 불편한데, 여기에 커피까지 마셨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었을 테니.
“밥을 다 먹기 전까지는 당신이 이야기를 해줄 것 같지 않아서 가능하면 빨리 먹었거든. 이제 밥도 다 먹었으니 얘기해 줘도 되잖아?”
“한 님은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댁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말숨 덕분이라고 치고 그냥 넘기도록 하지. 그러니까 시련인지 뭔지에 대해서나 말해 봐.”
“정확하게 말하면 말숨 님이 준비한 시련의 내용이 궁굼한 게 아니라 그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이 궁금하신 거겠죠?”
방긋방긋 꽃 미소를 짓는 조이를 보며 한은 식탁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도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이토록 누군가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하하, 지금 대답해 드릴 테니 그런 무서운 눈빛은 그만둬 주시죠?”
조이는 한이 손도 대지 않은 커피를 자신이 집어 들고 맛있게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2층의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뭔가를 찾을 필요도 없고, 괴물과 싸울 필요도 없어요.”
조이는 연극배우처럼 과장스러운 손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감정에 흠뻑 취한 주연배우와 같은 톤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버티거나…….”
한은 조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여러모로 예상해 봤다.
그리고 조이의 입에서 나온 시련의 통과 방법은 예상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일주일 안에 저를 아흔아홉 번 죽이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것도 훨씬…….
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됐건 이런 식으로 시험을 하는 말숨도, 그리고 진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래서 말했다.
“그냥 주기 싫으면 주기 싫다고 말로 하지, 쪼잔하기는. 아픈 과거 앞에서 한 점 망설임도 없는 사람? 애초에 그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한 거야?”
지금쯤에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텐데, 한이 일부러 저렇게 아이 같은 투정을 부리는 건 자신이 슬픈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의 마음을 짐작한 진은 손을 뻗어 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평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있구 말구요. 없기는 왜 없어요?”
“그 사람이 대체 누군데? 한 번 듣기나 해 봅시다.”
“요기 있네.”
진이 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한을 가리켰다.
“나?”
“응.”
“…….”
한은 진의 발언이 영 못마땅한지 오른쪽 눈썹을 꿈틀거렸고, 기운을 회복한 진은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진은 말이야, 다 좋은데…….”
한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어.”
“어머?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진이 몸을 둥실 띄워서 한을 끌어안았다.
진의 달빛을 닮은 은빛 머리카락이 한의 얼굴을 감쌌다.
“모든 엄마에게 한 번 물어봐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똑똑한 남자가 누군지.”
“…….”
진은 한의 양 뺨을 감싸 쥐며 눈을 맞췄다.
“백이면 백, 자기 아들이라고 할 테니.”
“그거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어머? 눈치 챘어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한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빛을 뿜으며 점멸하고 있는 마법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자. 우리 2층으로 갑시다. 융통성 없는 말숨 씨가 이번에는 뭘 준비해 놨는지 구경이나 한 번 하자고.”
“부끄러워하기는… 쿡쿡.”
진은 고운 눈웃음을 지은 채로 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진과 한은 마법진에 몸을 올렸다.
“준비 됐어요? 흑색 탑 지하 2층으로 가는 열차, 출발합니다아∼!!”
“준비 OK. 갑시다.”
진의 몸에서 은색의 섬광이 뿜어져 나왔고, 마법진이 진이 내뿜는 빛에 반응하여 더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섬광에 휩싸여 그 모습을 감추었다.
마법진을 통한 이동이 완료되었음을 깨달은 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 1층이 커다란 신전이었다면, 지하 2층은 무수히 많은 방문이 있는 기다란 복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같은 마법진을 타고 이동했는데 진과 자신이 별개의 공간으로 분류되는 걸 보면 아마도 마법진이 인간이 아닌 진을 파악해 그녀를 의도적으로 시련의 공간에서 배재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혹은 인간인 자신을 시련의 공간으로 몰아넣기 위해 작정을 했던가.
“뭐, 조용한 점은 더 좋지만.”
물론 진이 있으면 좋겠지만, 진이 없는 건 또 그대로의 장점이 있다.
게다가 시련의 대상이 진이 아닌 자신인 이상, 진에게 큰 위협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한은 더 이상 진의 존재를 찾는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아니라 움직여야 할 때이니까.
한은 주위를 살피며 복도를 걸었다. 검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길게 쭉 펼쳐져 있다.
천장에 매달린 재질을 알 수 없는 구슬은 백색의 빛을 내뿜고, 바닥에 깔린 대리석 조각은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을 받아 사방으로 반짝임을 뿜어낸다.
어둠의 신이라는 말숨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빛의 천국. 1층의 풍경과 강한 이질감을 느끼며 한은 발걸음을 옮겼다.
철컥철컥.
한은 복도를 걷는 도중 손을 뻗어 복도에 있는 방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모든 문은 굳게 잠겨 있는 상태였고, 열리지 않았다.
‘다른 방으로 샐 생각 말고 복도나 쭉 걸어가라 이건가.’
철저하게 불친절한 말숨의 행태.
하지만 어쩌겠는가.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만큼은 말숨은 갑이고 한은 을.
말숨의 유산을 얻기 전까지는 그저 말숨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과 한의 구두가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긴 복도를 한은 계속해서 걸었다.
온통 흑과 백, 두 가지 색채로만 이루어진 공간.
이 공간을 만든 게 말숨이라면 말숨이 편집증 환자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만큼 단조로운 색채의 공간을 한참이나 걸은 끝에, 한은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
지금껏 복도에서 보아온 문이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였다면, 복도의 끝에 있는 분은 대여섯 명도 한꺼번에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랬다.
문 치고는 너무 큰 돌을 깎아 만든 커다란 석문.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크기라는 점에서 이질적이라 할 만했지만, 흑과 백 두 개의 색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그 일관성을 인정해 줄만 했다.
똑똑똑.
한은 석문을 두드렸다. 석문은 그 엄청난 크기에서는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노크를 하기는 했지만 한은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노크에 대한 답변을 기대하기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문, 모두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오세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관용적으로 말하는 옥구슬이 쟁반에 흐르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
정상적인 감각이라는 게 결여된 이 공간에서 드디어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걸까. 한은 기대를 품으며 문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죠. 2층을 담당하고 있는 조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한을 기다리고 있는 건 테일 코트를 매끈하게 차려입은 푸른 머리의 소년과,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식탁이었다.
식탁 위에는 각종 고기와 채소, 과일, 해산물로 만든 요리가 즐비해 있고, 크리스털 와인 버킷에는 얼음과 함께 각종 포도주가 곱게 담겨 있었다.
한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향긋한 풍미로 유혹하는 각종 요리와 포도주. 그리고 미소년 집사.
한은 자신을 조이라고 밝힌 소년을 훑어보았다.
푸른색 머리카락은 가을 바다를 닮아 있고, 하얀 피부는 늦가을의 서리마냥 창백했다.
잘 익은 석류처럼 붉은 빛을 발하는 눈동자. 오똑한 콧날.
피를 잔뜩 머금은 듯 붉디붉은 입술과 갸름한 턱선.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곱상한 외모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차려 입은 테일 코트. 하얀색 실크 보타이와 검은색 베스트. 손수건까지 빈틈없이 차려입은 그 모습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대조되어, 이 공간의 이질적인 느낌을 한 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조이는 미소를 지으며 한에게 손짓을 했다.
“자 여기 와서 앉으시죠.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2층을 담당하고 있다니, 2층을 담당하는 집사라도 된다는 건가?
조이의 살가운 손짓에도 불하고 한은 섣불리 식탁에 다가가지 못했다.
식사? 조이? 집사? 모든 게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공간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이 공간이 뭔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 점이 한이 섣불리 식탁에 다가서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이리 오시죠. 한 님이 이 자리에 앉지 않으시면 시험이 시작되지 않으니까요.”
눈앞의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내 이름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조이에게 다가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저 의자에 앉지 않으면 시험을 시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설픈 탐색전으로 괜히 힘을 뺄 필요가 없는 일. 한은 성큼성큼 걸어가 식탁에 앉았다.
“이 일을 맡은 이후로 제법 많은 분들을 만났지만, 한 님처럼 말쑥한 복장을 하신 분은 처음이네요. 저도 무척이나 긴장되는 걸요.”
“…….”
‘제법 많은 사람을 만났다’라고? 눈앞의 소년이 입을 열수록 점점 더 수수께끼는 커져만 갔다.
그렇다고 섣불리 질문을 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야말로 한 본인이 열세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 테니까.
쪼로록.
조이는 한의 옆에 서서 가느다란 볼의 잔에 백포도주를 따랐다. 그리고 그 핏빛처럼 붉은 입술을 움직여 고운 입을 열었다.
“시작은 화이트 와인으로 하시죠. 전채 요리로는 해산물 샐러드가 준비되어 있는데, 어떠신가요?”
“맥주 없나?”
초면인 상대에게 반말을 하는 건 한으로서는 무척이나 이례적인 행동이었으나, 웬일인지 한의 말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미리 알았다면 준비했을 텐데,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식사 때부터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소 무례하게 여겨질 수 있는 한의 발언에도 조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샐러드는 됐고, 바로 메인 요리부터 준비해 줘.”
한은 조이가 따라준 백포도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잔을 밀어냈다.
무례한 행동이라는 건 한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조이’라는 소년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변덕이라고 해도 좋고, 심술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조이라는 소년의 미소도, 표정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이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리네이드한 양갈비 스테이크 입니다.”
조이가 가져온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를 한은 서둘러 씹어 삼켰다. 과일 향이 육즙에 섞여 입안에 가득 흐르는 양갈비는 무척이나 훌륭한 맛이었다.
하지만 한은 훌륭한 요리를 준비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도, 감탄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과 파르페, 벌꿀 타르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걸…….”
“커피.”
“디저트를 드시면 커피는 따로 준비가 됩니다. 먼저 디저트를…….”
“필요 없어. 커피.”
한은 딱 잘라 대답했고, 조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커피를 내왔다.
시종일관 조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그 사실이 한을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떤 커피를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휘핑크림을 얹은 비엔나커피로 준비했는데, 혹 원하시는 커피가 있다고 말씀해 주시면 다음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분명히 한도 선호하는 커피의 종류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커피를 달라고 한 건 식사를 끝냈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지, 조이가 내오는 커피를 먹을 마음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이제 필요한 건 없으니까 그만 돌아다니고 거기 좀 앉지 그래?”
“아, 제법 열심히 준비했는데, 대접이 부족한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여기 있는 식사며 디저트, 전부 당신이 준비한 건가?”
“네. 입맛에는 좀 맞으셨나요?”
“…….”
한은 커피를 마시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이의 손이 닿은 양갈비만으로 속이 불편한데, 여기에 커피까지 마셨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었을 테니.
“밥을 다 먹기 전까지는 당신이 이야기를 해줄 것 같지 않아서 가능하면 빨리 먹었거든. 이제 밥도 다 먹었으니 얘기해 줘도 되잖아?”
“한 님은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댁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말숨 덕분이라고 치고 그냥 넘기도록 하지. 그러니까 시련인지 뭔지에 대해서나 말해 봐.”
“정확하게 말하면 말숨 님이 준비한 시련의 내용이 궁굼한 게 아니라 그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이 궁금하신 거겠죠?”
방긋방긋 꽃 미소를 짓는 조이를 보며 한은 식탁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도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이토록 누군가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하하, 지금 대답해 드릴 테니 그런 무서운 눈빛은 그만둬 주시죠?”
조이는 한이 손도 대지 않은 커피를 자신이 집어 들고 맛있게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2층의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뭔가를 찾을 필요도 없고, 괴물과 싸울 필요도 없어요.”
조이는 연극배우처럼 과장스러운 손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감정에 흠뻑 취한 주연배우와 같은 톤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버티거나…….”
한은 조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여러모로 예상해 봤다.
그리고 조이의 입에서 나온 시련의 통과 방법은 예상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일주일 안에 저를 아흔아홉 번 죽이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것도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