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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2권 (2화)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을 알아본 건지 그녀의 시선은 한의 얼굴에 정확하게 닿아 있었다. 그녀의 입이 다시 한 번 열렸다.
“한, 내 아기… 나와 연 씨의 아기… 연 씨의… 아기… 연 씨… 연… 씨… 연…….”
한을 부르던 그녀는 이내 한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애타게 부르는 그 이름 또한 한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류 연. 무스펠헤임의 지도자, 인간이되 천상에서 별이 되어 빛나는 자, 아스가르드의 대 신관.
그리고 한과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한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의 아버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이 몇 번이고 나왔다.
하지만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는 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한의 어머니는 이미 백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사람, 지금 이곳에 나타날 수도 없고, 나타나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한… 내 아기… 연과 나의 아기… 연과… 나의… 아… 기…….”
한의 엄마, 혹은 엄마의 모습을 한 그 무언가는 어둠을 헤치고 한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다. 그러다 마침내 한과 닿은 그녀는 한의 양 뺨을 감쌌다.
“내 아기… 연과 나의 아기…….”
엄마의 손이 자신의 뺨에 닿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의 손의 느낌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와 닿은 엄마의 손은 눈물이 날 정도로 따스했고, 꿈처럼 달콤했다.
“내 아기… 나의 아기… 연과 나의 아기… 연의 아기… 연… 연…….”
몽롱한 눈빛으로 한의 뺨을 쓰다듬던 여인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사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연이… 연이 없어. 연? 연, 어딨어?”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엄마를 보며 한은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연… 연… 연…….”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그러고는 한의 뺨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손등 위로 거친 핏줄이 돋아났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어도… 연이… 너 때문이야…….”
한의 뺨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이 한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엄청난 악력이 한의 목을 졸라왔다.
“내 연을 돌려 줘. 너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연을… 돌려 내.”
그녀의 목소리는 지옥 저 깊은 곳 무저갱에서 새어나오는 울부짖음만큼이나 음울했다.
“…….”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부재를 탓하며 자신을 목을 졸라오는 잔인한 상황을 맞이한 한.
하지만 한은 엄마를 원망하거나 신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공간을 벗어나게 되고 진을 만나거든 진은 어디서 뭘 하고 왔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진에게 무슨 답을 줘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아주 잠깐 동안, 아주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왔어.”
낙엽처럼 덧없고, 깃털마냥 가볍지만, 너무나도 달콤해 깨기 힘든 그런 꿈을 꾸었다.
고마워, 말숨. 잠시나마 달콤한 꿈을 꾸게 해줘서.
한은 눈을 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깬 지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죽일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엄마를 닮은 무언가였다.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기껏해야 말숨이 만든 환영에 불과한 그 무언가가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게 자신의 몸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도.
“연을 돌려줘, 연을 다시 돌려 내. 너 같은 거,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나한테 연을 돌려줘.”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환영을 보고 있으니, 영상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안, 내 아기. 미안. 엄마가 정말 너무 너무 미안해. 더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 엄마를 용서하렴.”
온통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야말로 조막만 한 아기의 얼굴에 뺨을 부벼가며 오열을 하는 여인.
아름답지도, 눈부시지도 않지만 너무나도 사랑하는 엄마의 얼굴.
그런데 그런 엄마의 얼굴을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그림자 따위가 흉내 내려 들다니…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에 솟구쳤다.
한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솟구치는 분노를 단 일 초도 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느… 도…녀…져…….”
한은 손을 뻗어 그림자의 입을 위아래로 벌렸다. 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이 그림자를 찢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고, 한은 그렇게 했다.
“야, 꺼져.”
좌락.
한이 엄마의 모습을 한 그림자를 찢어버리자, 그림자와 더불어 한을 둘러쌓고 있던 공간이 찢겨져 나갔다.
“절대… 용서… 못해… 너만… 아니었어도… 너만…….”
반으로 잘린 채로도 여전히 악다구니를 내지르는 그림자를 한은 다시 한 번 즈려밟았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고 있나? 말숨, 네가 준비한 시련이 고작 이 정도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똑같이 해 봐. 오는 족족 찢어줄 테니.
한은 오른쪽 발에 힘을 줘서 그림자를 완전히 으깨 버렸다. 그리고 찢겨진 공간 사이로 파괴의 권능을 담은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말숨이 준비한 시련의 공간이 깨어져 나갔다.
그러다 굉음이 잦아들었을 무렵, 한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은 낯선 석조 건물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오게 된 한은 눈썹을 찡그리고 전방을 바라봤다.
거대하다기 보다는 웅장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석조 건물.
건물의 중심에 그려진 마법진은 한이 지하로 들어올 때 본 그 마법진과 동일했다.
신전을 채우고 있는 거라고는 그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석조 기둥과 텅 빈 제단이 전부였다.
쓸쓸하리만큼 황량한 풍경의 신전이었으나, 신전을 은은하게 감싸는 달빛 덕분에 쓸쓸함 보다는 애절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풍경 속으로 갑자기 초대받은 한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했어요, 한.”
“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한 번 봐 봐요. 다친 데가 있나 없나.”
어둠의 장막을 시전한 모습이 아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진이 한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평소에도 한을 자주 껴안고는 하는 진이었지만, 지금의 포옹은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더 따뜻하고, 더 포근했다.
한이 무슨 시련을 겪었고,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차원 저편에서 모두 지켜본 진은 자신이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와 애정을 담아 한을 끌어안았다.
“이러고 있으면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 볼 수가 없는데.”
“꼭 두 눈으로 봐야 아나. 그냥 딱 안아보면 아는 거지.”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
“응, 한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정말 수고했고. 또 잘했어요.”
잠시간 진의 포옹을 받아들인 한은 슬쩍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시련이니 뭐니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한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초장부터 이런 걸 깔아놓고… 말숨이라는 그 양반 성격 한 번 지랄 맞네.”
한은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보았다.
“신이라고 해서 전부 똑똑하고 예의 바른 건 아닌가 보지? 아니면 말숨이라는 이 양반이 신 중에서도 유달리 손님을 대하는 방법도 모르고, 예의가 없어도 어지간히도 없는 특이 케이스거나.”
1층에서의 시련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은 말숨을 향한 독설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내가 정식으로 초대장 받고 노크하고 들어온 건 아니라고 해도 입구에서부터 이딴 식으로 지저분한 장난을 쳐? 진짜 말숨이라는 그 양반 낯짝 한 번 보고싶네.”
한의 격렬한 독설에도 불구하고, 진은 한을 탓하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진 역시 이런 식의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도전자를 시험하는 말숨의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분노를 토해내는 한과는 달리, 진은 비록 그 수단에는 동의할 수 없더라도 말숨이 왜 이런 식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던 터라 마냥 말숨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음, 글쎄요.”
진은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말해서 말숨이 조금 깐깐하고 무자비한 면은 있지만, 그렇게 예의가 없지는 않았어요. 다만…….”
“다만?”
“음, 융통성이 많이 부족하기는 했죠. 그러니까 이렇게 미움을 받을 짓만 골라하는 거지만. 그래도 나쁜 신은 아니에요, 무엇보다 자신의 임무에 가장 충실한 신이었고. 이런 관문을 설치한 이유도 아마…….”
진은 뒷말 대신 제단을 가리켰다.
한은 제단으로 다가섰다. 제단에는 신들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해석할 수 있어?”
“네, 거기에 써 있는 건 공통 룬 문자거든요. 읽을 수 있어요.”
“뭐라고 써 있는 건데? 이곳에 함부로 발을 디딘 너희들 내가 다 죽여 버리겠어, 뭐 이렇게 쓰여 있는 건가?”
아직도 분노가 풀리지 않았는지 한은 제단을 걷어차며 물었다.
“아하하, 그게 그런 건 아니구요.”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한의 행동에 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어둠을 계승하고자 하는 자, 그대 안의 어둠에 맞설 지어다’라고 쓰여 있네요.”
“그대 안의 어둠에 맞서라고?”
제단에 쓰여 있는 문구를 듣고 난 후, 조금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한의 표정은 조금 전에 비해 진정되어 보였다.
“나의 뜻을 얻고자 하는 자라면, 최소한 자신의 가장 가슴 아픈 과거를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가슴 아픈 과거를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맞서라고?”
진은 빙긋 웃으며 한을 바라봤다.
“말했잖아요. 융통성이 없는 성격이었다고. 말숨도 바보는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시험을 하면 도전자가 어떤 상처를 입을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말숨도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어쩔 수 없다니?”
“아픈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나의 권능을 넘겨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요. 말숨의 권능은 엄청나고, 그 힘이 굳건하지 못한 자에게 계승될 때 엄청난 재앙이 발생할 거라고 믿었을 거예요. 말숨은.”
“결국 인간을 믿을 수 없다, 뭐 이런 건가?”
“어쩔 수 없잖아요.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서는 모두가 무력한 존재였으니까.”
지난날이 떠오른 듯 진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인간도… 그리고 신도…….”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을 알아본 건지 그녀의 시선은 한의 얼굴에 정확하게 닿아 있었다. 그녀의 입이 다시 한 번 열렸다.
“한, 내 아기… 나와 연 씨의 아기… 연 씨의… 아기… 연 씨… 연… 씨… 연…….”
한을 부르던 그녀는 이내 한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애타게 부르는 그 이름 또한 한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류 연. 무스펠헤임의 지도자, 인간이되 천상에서 별이 되어 빛나는 자, 아스가르드의 대 신관.
그리고 한과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한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의 아버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이 몇 번이고 나왔다.
하지만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는 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한의 어머니는 이미 백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사람, 지금 이곳에 나타날 수도 없고, 나타나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한… 내 아기… 연과 나의 아기… 연과… 나의… 아… 기…….”
한의 엄마, 혹은 엄마의 모습을 한 그 무언가는 어둠을 헤치고 한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다. 그러다 마침내 한과 닿은 그녀는 한의 양 뺨을 감쌌다.
“내 아기… 연과 나의 아기…….”
엄마의 손이 자신의 뺨에 닿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의 손의 느낌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와 닿은 엄마의 손은 눈물이 날 정도로 따스했고, 꿈처럼 달콤했다.
“내 아기… 나의 아기… 연과 나의 아기… 연의 아기… 연… 연…….”
몽롱한 눈빛으로 한의 뺨을 쓰다듬던 여인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사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연이… 연이 없어. 연? 연, 어딨어?”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엄마를 보며 한은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연… 연… 연…….”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그러고는 한의 뺨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손등 위로 거친 핏줄이 돋아났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어도… 연이… 너 때문이야…….”
한의 뺨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이 한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엄청난 악력이 한의 목을 졸라왔다.
“내 연을 돌려 줘. 너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연을… 돌려 내.”
그녀의 목소리는 지옥 저 깊은 곳 무저갱에서 새어나오는 울부짖음만큼이나 음울했다.
“…….”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부재를 탓하며 자신을 목을 졸라오는 잔인한 상황을 맞이한 한.
하지만 한은 엄마를 원망하거나 신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공간을 벗어나게 되고 진을 만나거든 진은 어디서 뭘 하고 왔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진에게 무슨 답을 줘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아주 잠깐 동안, 아주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왔어.”
낙엽처럼 덧없고, 깃털마냥 가볍지만, 너무나도 달콤해 깨기 힘든 그런 꿈을 꾸었다.
고마워, 말숨. 잠시나마 달콤한 꿈을 꾸게 해줘서.
한은 눈을 떴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깬 지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죽일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엄마를 닮은 무언가였다.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기껏해야 말숨이 만든 환영에 불과한 그 무언가가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게 자신의 몸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도.
“연을 돌려줘, 연을 다시 돌려 내. 너 같은 거,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나한테 연을 돌려줘.”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환영을 보고 있으니, 영상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안, 내 아기. 미안. 엄마가 정말 너무 너무 미안해. 더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 엄마를 용서하렴.”
온통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야말로 조막만 한 아기의 얼굴에 뺨을 부벼가며 오열을 하는 여인.
아름답지도, 눈부시지도 않지만 너무나도 사랑하는 엄마의 얼굴.
그런데 그런 엄마의 얼굴을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그림자 따위가 흉내 내려 들다니…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에 솟구쳤다.
한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솟구치는 분노를 단 일 초도 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느… 도…녀…져…….”
한은 손을 뻗어 그림자의 입을 위아래로 벌렸다. 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이 그림자를 찢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고, 한은 그렇게 했다.
“야, 꺼져.”
좌락.
한이 엄마의 모습을 한 그림자를 찢어버리자, 그림자와 더불어 한을 둘러쌓고 있던 공간이 찢겨져 나갔다.
“절대… 용서… 못해… 너만… 아니었어도… 너만…….”
반으로 잘린 채로도 여전히 악다구니를 내지르는 그림자를 한은 다시 한 번 즈려밟았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고 있나? 말숨, 네가 준비한 시련이 고작 이 정도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똑같이 해 봐. 오는 족족 찢어줄 테니.
한은 오른쪽 발에 힘을 줘서 그림자를 완전히 으깨 버렸다. 그리고 찢겨진 공간 사이로 파괴의 권능을 담은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말숨이 준비한 시련의 공간이 깨어져 나갔다.
그러다 굉음이 잦아들었을 무렵, 한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은 낯선 석조 건물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오게 된 한은 눈썹을 찡그리고 전방을 바라봤다.
거대하다기 보다는 웅장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석조 건물.
건물의 중심에 그려진 마법진은 한이 지하로 들어올 때 본 그 마법진과 동일했다.
신전을 채우고 있는 거라고는 그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석조 기둥과 텅 빈 제단이 전부였다.
쓸쓸하리만큼 황량한 풍경의 신전이었으나, 신전을 은은하게 감싸는 달빛 덕분에 쓸쓸함 보다는 애절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풍경 속으로 갑자기 초대받은 한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했어요, 한.”
“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한 번 봐 봐요. 다친 데가 있나 없나.”
어둠의 장막을 시전한 모습이 아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진이 한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평소에도 한을 자주 껴안고는 하는 진이었지만, 지금의 포옹은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더 따뜻하고, 더 포근했다.
한이 무슨 시련을 겪었고,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차원 저편에서 모두 지켜본 진은 자신이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와 애정을 담아 한을 끌어안았다.
“이러고 있으면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 볼 수가 없는데.”
“꼭 두 눈으로 봐야 아나. 그냥 딱 안아보면 아는 거지.”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
“응, 한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정말 수고했고. 또 잘했어요.”
잠시간 진의 포옹을 받아들인 한은 슬쩍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시련이니 뭐니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한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초장부터 이런 걸 깔아놓고… 말숨이라는 그 양반 성격 한 번 지랄 맞네.”
한은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보았다.
“신이라고 해서 전부 똑똑하고 예의 바른 건 아닌가 보지? 아니면 말숨이라는 이 양반이 신 중에서도 유달리 손님을 대하는 방법도 모르고, 예의가 없어도 어지간히도 없는 특이 케이스거나.”
1층에서의 시련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은 말숨을 향한 독설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내가 정식으로 초대장 받고 노크하고 들어온 건 아니라고 해도 입구에서부터 이딴 식으로 지저분한 장난을 쳐? 진짜 말숨이라는 그 양반 낯짝 한 번 보고싶네.”
한의 격렬한 독설에도 불구하고, 진은 한을 탓하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진 역시 이런 식의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도전자를 시험하는 말숨의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분노를 토해내는 한과는 달리, 진은 비록 그 수단에는 동의할 수 없더라도 말숨이 왜 이런 식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던 터라 마냥 말숨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음, 글쎄요.”
진은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말해서 말숨이 조금 깐깐하고 무자비한 면은 있지만, 그렇게 예의가 없지는 않았어요. 다만…….”
“다만?”
“음, 융통성이 많이 부족하기는 했죠. 그러니까 이렇게 미움을 받을 짓만 골라하는 거지만. 그래도 나쁜 신은 아니에요, 무엇보다 자신의 임무에 가장 충실한 신이었고. 이런 관문을 설치한 이유도 아마…….”
진은 뒷말 대신 제단을 가리켰다.
한은 제단으로 다가섰다. 제단에는 신들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해석할 수 있어?”
“네, 거기에 써 있는 건 공통 룬 문자거든요. 읽을 수 있어요.”
“뭐라고 써 있는 건데? 이곳에 함부로 발을 디딘 너희들 내가 다 죽여 버리겠어, 뭐 이렇게 쓰여 있는 건가?”
아직도 분노가 풀리지 않았는지 한은 제단을 걷어차며 물었다.
“아하하, 그게 그런 건 아니구요.”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한의 행동에 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어둠을 계승하고자 하는 자, 그대 안의 어둠에 맞설 지어다’라고 쓰여 있네요.”
“그대 안의 어둠에 맞서라고?”
제단에 쓰여 있는 문구를 듣고 난 후, 조금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한의 표정은 조금 전에 비해 진정되어 보였다.
“나의 뜻을 얻고자 하는 자라면, 최소한 자신의 가장 가슴 아픈 과거를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뭐 이런 거 아닐까요?”
“가슴 아픈 과거를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맞서라고?”
진은 빙긋 웃으며 한을 바라봤다.
“말했잖아요. 융통성이 없는 성격이었다고. 말숨도 바보는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시험을 하면 도전자가 어떤 상처를 입을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말숨도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어쩔 수 없다니?”
“아픈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나의 권능을 넘겨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요. 말숨의 권능은 엄청나고, 그 힘이 굳건하지 못한 자에게 계승될 때 엄청난 재앙이 발생할 거라고 믿었을 거예요. 말숨은.”
“결국 인간을 믿을 수 없다, 뭐 이런 건가?”
“어쩔 수 없잖아요.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서는 모두가 무력한 존재였으니까.”
지난날이 떠오른 듯 진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인간도… 그리고 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