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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2권 (1화)


“뒤돌아보기만 했단 봐요, 가만 안 둘 거니까.”
“안 봐, 안 봐. 진이 제발 봐달라고 사정을 해도 안 봐.”
한의 강렬한 부인은 전부 사실이었다.
코트를 내리고 눈가리개를 푼 한의 관심사는 탑의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지, 도발적인 자태의 진에 있지 않았으니까.
설사 진이 지금처럼 야시시한 복장이 아니라 옷을 모두 벗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이 그 모습을 구태여 보고 싶어 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한은 이전에 몇 번 어둠의 장막을 전개한 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터였다.
딱히 궁금하지도, 관심이 있지도 않은 진의 모습을 보느니 마침내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포탈을 보고 분석하는 게 한으로서는 훨씬 더 흥미로운 일이었다.
‘공간 전이 마법에 물리력 투영화, 거기에 마력 봉쇄가 이중으로 걸려 있어. 술식은… 뭐, 나는 손도 못 댈 수준이네.’
마법진을 이리저리 분석하던 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일체의 마력은 통하지 않고, 물리적인 충격은 그냥 투영해 버린다.
고대의 룬에 나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이지만, 마법진을 구성하는 술식은 고대의 룬 수준을 아득하니 초월하는 신들의 룬 문자.
한이 제아무리 날고뛰는 재주가 있다 해도 해독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진, 저 마법진 해독 가능하겠어?”
“아뇨. 불가능해요.”
“진은 말숨이랑 같은 신이잖아. 신끼리 쓰는 말인데 해독 못 해?”
“나만 못하는 게 아니라 어떤 신을 가져다 놔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흥, 무식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신들의 룬 문자는 각각 체계가 다를뿐더러, 그 문자도 상당 부분 달라요. 해독을 못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요. 흥,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랑은 대화를 못한다니까. 정말 기가 막혀서.”
“알았어, 알았어. 내가 실수했으니까 그렇게 화내지 마.”
한으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울컥하는 진의 반응에 한은 손을 내저으며 진을 달랬다.
“분석도 안 되고, 해석도 안 되고, 진도 어쩔 도리가 없다면…….”
한은 목을 주물렀다.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만 역시 신들의 유물은 그리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잖아.”
한은 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 내 장갑.”
진은 차원 문을 열어 한 쌍의 장갑을 꺼내 한에게 건네줬다.
“처음부터 진심으로 할 생각인가 보네요?”
“앞에 뭐가 있을지, 어떤 분이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는데, 나도 예의는 차리고 들어가야지.”
한은 진에게서 받아든 룬 문자가 새겨진 한 쌍의 검은 장갑을 꼈다.
꽤 오랜만에 껴보는 장갑임에도 불구하고, 장갑은 한의 손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한이 최초로 얻은 권능이자 한의 아버지가 한에게 남겨준 유산.
삼라만상을 깨부수는 파괴 신의 권능.
몸속에 흐르는 짜릿한 파멸의 권능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은 포탈에 돌입할 준비를 마쳤다.
“진, 그럼 나갔다 올게. 행운을 빌어 줘.”
“어머? 지금 나는 여기 버려두고 혼자 가겠다는 거예요?”
“응, 말숨의 권능이 담긴 시련이라면 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누구 한 명은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건 한 사람만 해야지.”
한으로서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진이 불사의 존재라는 명제는 분명히 참이었다. 하지만 그 명제가 참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스가르드와 지구 한정이다.
지금부터 한이 가야 하는 곳은 신의 권능이 깃든 신의 영토.
그곳에서도 진이 과연 불사의 존재일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따악!
“아, 뭐하는 거야?”
육중한 소리가 한의 뒤통수에서 울려 퍼졌다. 진과의 약속 때문에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뒤통수에서부터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에 한은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건방진 말투 해도 된다고 누가 그랬어요? 세상에 어이가 없어서.”
“건방지다니, 나는 그냥 진이 걱정돼서…….”
“시끄러워요. 이제 겨우 꼬맹이에서 갓 벗어난 주제에 누구 앞에서 어른 노릇이야. 내 참 기가 막혀서. 이래서 아들은 키워봤자 다 헛 거라더니.”
한은 볼 수 없었지만, 진은 손부채질을 하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부터 진이 내 엄마였어?”
한이 볼멘소리로 항의를 해봤지만, 진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됐고, 시끄러워요.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건방 떨어봐. 가만 안 둘 거니까.”
“이럴 거면 평소에 아줌마라고 할 때 화라도 내지 말던가… 화는 화대로 다 내면서 이럴 때만 어린애 취급이야.”
“어머, 한 군. 오늘따라 입놀림이 제법인 것 같은데. 정말 나한테 혼 좀 나 볼래요?”
진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한은 이쯤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현실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진은 저기 포탈까지 가지도 못하잖아?”
사실이 그랬다. 진이 하늘을 날거나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건 근처에 한이 존재할 때 뿐.
물론 평소처럼 한을 안고 가거나 이마를 맞대는 방법을 취하면 마법진이 있는 곳까지 이동은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은 진을 마주보는 게 금지된 상태.
한과의 접촉이 없으면 비행이 불가능한 진에게 있어 저기 하늘에 떠 있는 마법진은 닿기에는 너무나도 먼 곳이었다.
“못가긴 왜 못가요? 한이 나를 업으면 되지.”
“나보고 진을 업으라고?”
“왜요, 업기 싫어요? 세상에, 내가 젖도 못 뗀 한을 업어 키워가며 지새운 밤만 해도 몇날 며칠…….”
“알았어, 알았어. 업으면 되잖아, 업으면.”
한은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굽혀 진에게 등을 내주었다.
“꽉 잡아. 한 번에 들어갈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된답니다.”
자신의 목덜미를 꽉 움켜잡은 진의 팔목, 등에 와 닿은 진의 묵직한 상반신을 느끼며 한이 입을 열었다.
“저기, 진. 요즘에 식사량이…….”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봐요. 정말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
“어디 한 번 말해 보시지? 식사량이 뭐 어쨌다고?”
“아냐, 됐어. 아무것도 아냐.”
자신의 귀를 거친 손길로 비트는 진의 손길과 서릿발이 묻어나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한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마법진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 왔다. 한을 감지한 마법진이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찬란한 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 빛 속으로 한과 진의 모습은 사라졌다.

마법진으로 돌입한 한을 기다리고 있는 건 어둠이었다.
위아래, 좌우,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가리지 않고 가득한 어둠.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등에 업혀 있던 진은 어느새 보이지도, 그 무게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자신의 손발도 볼 수 없는 어둠에 홀로 남겨진 한.
머리가 있는 방향이 위인지 아래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한은 최대한 정신을 추스르며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일단 자신의 손과 발의 감각을 확인해 본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팔과 다리를 비롯한 온몸의 감각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마나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파괴의 권능도 모두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같은 어둠 속에 갇혔지만 자신의 힘은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한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다 한은 깨달았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늪 같은 어둠 속에 함몰되어 버렸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마법진 너머인 이곳은 누가 뭐래도 말숨의 영역.
작금의 상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파괴 신의 권능을 발동해 이 공간에 깃든 말숨의 권능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상황의 변화를 가져 온다는 점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생각했을 때는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 없었다.
“말숨은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라 충격을 가하는 건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에요.”
낮에 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은 파괴 신의 권능을 이용하는 첫 번째 방안을 포기했다.
자신은 말숨의 유산을 얻기 위해 온 것이지 말숨을 굴복시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한이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방안은…….
“후우…….”
한은 한번 심호흡을 크게 가져갔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정면 승부가 안 된다면 한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장기전뿐이었다.
말숨이 이런 공간을 구태여 창조한 이유는 자신의 권능이 깃든 유산을 가지려 하는 자가 그만 한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에 있을 것이다.
이곳이 말숨의 의지가 담긴 시련의 공간이라면 조만간 말숨이 준비한 시련이 모습을 드러낼 터이니, 한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조만간에 찾아올 그 시련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이 눈을 감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강렬한 빛에 이끌린 한은 눈을 떴다.
온통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에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다
스스스.
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저 빛이 있는 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이 공간이 한의 감정을 읽은 건지 아니면 원래 그 빛이 있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는 건지 한의 몸은 어둠을 가르며 저절로 빛이 있는 그곳을 향하여 이동했다.
‘올 테면 와라.’
명색이 어둠의 신이니 준비된 시련 역시 어둠에 관련된 것일 거라고 짐작한 한은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올 시련을 주시했다.
어둠을 먹고 하늘에 닿을 때까지 자란다는 악마의 나무 애리아더스? 아니면 일곱 구멍에서 어둠을 토해내며 눈앞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 찢고 삼키려 드는 어둠의 짐승 칼라쿡? 그것도 아니라면 아스가르드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달의 마수 문메어러스?
가장 흉포하고 가장 악명이 높은, 존재 자체가 재앙에 가까운 전설상의 마물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한은 시련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푸른빛은 서서히 한에게 다가서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
한의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활짝 떠졌다.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모두 가정했다고 생각했건만, 눈앞에 다가온 현실은 한의 예상보다 훨씬 잔인했다.
푸른빛 속에 있는 것은 마물도 악마도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건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곱게 가르마를 타서 허리까지 닿아 있는, 구불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 오똑하다기 보다는 앙증맞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콧등.
동글동글한 얼굴, 그리고 얼굴보다 더 동그란 눈동자와 마냥 서글서글해 보이는 축 처진 눈매.
그 반면에 뚝심이 보이는 앙다문 입술.
한은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정경은 변하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푸른빛에 휩싸여 눈을 감고 있는 그 여자는 한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엄…마…….”
한 번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부모님이 남겨준 영상을 통해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넘게 부르고 또 불러본 그 이름, 엄마였다.
한의 외침을 들은 걸까.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은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한을 바라봤다.
“한, 내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