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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25화)


“일단 여기저기 두드려 보면 뭔가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한이 주먹을 매만지며 물었다. 원정대원들이 탑 안으로 진입한 걸 확인한 이상 한이 가진 진짜 힘을 드러낸다 해도 상관없을 터. 그러나 한의 제안에 대해 진은 고개를 저었다.
“효과 없을 거에요. 말숨은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라 그런 식으로 충격이 가해지면 입구를 더 숨기면 숨겼지 보여줄 타입은 아니니까. 무력시위를 잘못 했다가는 역효과만 발생할 수 있어요.”
진의 단호한 거부에 한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역시 두 발로 뛰는 수밖에 없나. 진, 아무리 말숨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해도 입구 근처에 가면 뭔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음, 아무래도 입구 근처에 가면 그래도 느껴지는 게 있지 않을까요? 지금 같아서는 대충 접근해서는 안 되고 굉장히 근접해야만 할 것 같지만.”
“그래, 그렇다면 답이 나왔네.”
한은 몸을 일으켰다. 방법이 도출된 이상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다.
“한 번 돌아다녀 보자고. 두 발로 이 근방을 싸그리 훑다 보면 뭔가 걸리는 게 있겠지.”
다소 무모한 방안이었지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인 것 같네요. 가요.”
그리고 두 사람은 흑색 탑 일대를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놈의 탑이 워낙에 거대하다 보니 탑을 한 바퀴 도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바퀴를 돌고 이번에는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다시 한 바퀴 돌고, 조금 더 넓혀서 또 한 바퀴를 돌아도 여전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세 바퀴를 돌았는데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과 진은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건 좀 아닌가?”
“내가 생각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두 사람이 걷기 시작한 지 네 시간을 경과했을 무렵, 뭔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은 한이 걸음을 멈췄고, 진이 거기에 동의했다.
네 시간 동안 두 사람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린 탓에 흑색 탑 인근 부근은 거의 모든 곳을 밟았다고 자신할 수 있음에도 입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볼까? 말숨은 어둠의 신.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아까 말했잖아요. 어둠의 신이면서 동시에 달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잠깐, 달의 신이라고?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
“어라? 내가 말 안했나?”
“안 했어! 분명히 말하는데 어둠의 신이라는 말만 하고 달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말은 안 했어!”
“흠흠,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요?”
멋쩍은 표정을 짓는 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말숨이라는 작자가 어둠뿐만 아니라 달도 관장하는 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무작정 걷지는 않았을 텐데…….
“가만 있자.”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니 흑색 탑 뒤쪽에 솟은 바위산 너머가 붉게 타오른다.
황혼이 지고 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달이 떠오를 것이다.
달이라는 뜻밖의 단서를 얻은 이상 해가 아직 환하게 떠 있는 이때 입구를 찾는 다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면 달이 뜰 테니 입구를 찾는 여정은 그때까지는 잠시 보류해도 좋을 듯싶다.
“아무래도 달이 뜰 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우리 밥이나 먹을까?”
마찬가지로 황혼을 바라보던 진이 대답했다.
“찬성.”

온 세상을 붉게 물들여 버릴 듯이 붉게 타오르던 노을은, 서쪽에서 떠올라 세상을 비출 채비를 마친 달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쓸쓸이 퇴장했고, 창공의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달이 서서히 자신의 영역을 늘려가고 있었다.
“저기 말야, 진.”
“왜요?”
“옛날이야기나 뭐 그런데 보면 주인공 옆에 있는 정령이나 수호령, 뭐 그런 애들은 주인공이 배고프다 그러면 밥도 주고 차도 주고 그러던데.”
방금 전 식사를 마친 진은, 예상하지 못한 한의 공격에 눈초리를 치켜세우며 한을 노려봤다.
“그래서, 다른 정령들은 잘만 하는데 너는 왜 그런 것도 못하냐, 뭐 이런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이것저것 못하는 게 없는 진이 유독 요리만 못한다고 하니까 조금 믿겨지지 않아서.”
“요리 좀 못하면 어때서? 사람이 못하는 거 없이 다 잘하면 인간미 없는 거 몰라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한 진의 태도를 마주하며 한은 조근조근 말했다.
“난 진이 인간미 좀 없어져도 괜찮은데…….”
차마 ‘진은 인간이 아니잖아.’라고는 말할 수 없던 한은 돌려서 말하는 걸 택했다.
“아하, 한 군이 그렇게 나오신다면 까짓것 내가 요리 못할 것도 없죠. 대신!”
“대신?”
“결과는 난 책임 못 져요. 그리고 내가 만든 밥은 한이 남김없이 몽땅 먹을 것.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내가 밥 하지, 뭐.”
진의 매서운 반격에 한은 바로 백기를 들었다. 하긴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지만, 부모를 상대로 진심으로 싸울 수 있는 자식도 없는 거니까.
“커피 한잔할까?”
“한이 타주는 거예요?”
“진이 커피도 탈 줄 모르니까 커피도 내가 타야지 뭐.”
“흥, 꼭 한마디가 많다니까.”
한은 주전자를 들고 물을 뜨러 걸어갔다.
온통 황폐하게만 보였던 거제도였지만 그래도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생명은 존재하는 법인지, 섬 곳곳에서는 숲은 우거져 있고 그 숲 아래에는 샘이 흐르고 있었다.
한은 근처에 있는 샘으로 물을 뜨러 갔다.
“와, 달 떴다. 초승달이 참 예쁘네.”
진의 탄성을 들은 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 어디 아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니, 보름달을 보고 초승달이라고 하니까 그렇지. 혹시 말숨의 기운 때문에 어디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거 아냐?”
“난 멀쩡하거든요? 한이야말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초승달보고 보름달이라니.”
“진, 눈 비비고 다시 한 번 하늘을 봐. 저게 보름달인지, 초승달인지.”
“다시 봤거든요? 초승달 맞아요.”
“틀림없이 초승달이라고?”
“네 초승달 맞아요.”
“진, 잠깐 이쪽으로 와볼래?”
그제야 뭔가 이상한 걸 느낀 진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한쪽으로 이동했다.
달이 무슨 그림자도 아니고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을 바꾼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있는 이곳은 말숨의 권능이 지배하는 영역.
말숨이 어둠과 달을 관장하는 신임을 생각하면 달에 이상이 생긴다 해도 놀랄 이유는 없다. 오히려 두 사람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입구를 찾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의 발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정말 보름달이잖아.”
한이 있던 자리에서 달을 바라본 진이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올려다 본 하늘에는 정말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아스가르드에서 만월은 달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라고 했지?”
“네. 보름달이 뜨는 밤에 달의 힘은 가장 강해지죠.”
“그렇다면 말이야, 저쪽에서 봤을 때는 달의 힘이 약했는데 이쪽에서 볼 때는 달의 힘이 강하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여기 이 장소에 그 말숨이라는 신이 뭔가 수작을 부렸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 장소에 말숨의 권능이 더 많이 부여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수작이라니, 말을 해도 꼭 그렇게 밉게 한다니까.”
진은 한을 향해 눈을 흘겼지만 이내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왜 여기서만 보름달로 보이는 거죠?”
“글쎄… 진 ,여기 가만 있어봐.”
한은 진을 그 자리에 가만 남겨둔 채 탑의 둘레를 한 바퀴 따라 걸었다. 그리고 탑의 둘레를 돌며 달을 관찰한 후 진의 곁으로 돌아왔다.
“뭐 찾아낸 거라도 있어요?”
“뭐, 정답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한 사실을 하나 찾아냈어. 이 흑색 탑 주위에는 밝기의 정도에 따라 그 자리에서 보이는 달의 모양이 달라.”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러니까, 저기 봐봐. 아까 진이 앉아 있던 저기는 달빛도 환하게 비치고 주위에 모닥불도 켜 있고 해서 온통 환하잖아. 빛이 상대적으로 강한 저기서는 달이 초승달로 보였고. 그리고 지금 여기, 진과 내가 서 있는 곳은 꽤나 어둡잖아. 그러니까 달이 보름달로 보인 거야.”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그랬다. 진과 한이 지금 서 있는 이곳은 탑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고 나뭇가지가 무성한 탓에 굉장히 어두웠다.
“아, 그러니까 빛이 많은 곳에서는 보는 달은 힘을 잃은 상태고, 어둠이 드리운 곳에서 보는 달은 힘이 강해지는, 뭐 그런 구조다 이거죠?”
“응, 내가 탑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쭉 봤는데 그 근방의 빛의 양에 따라 보이는 달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는 모양이야.”
“흐음, 그렇다는 얘기는…….”
한에게서 정보를 얻은 진이 막 상황을 파악하려는 찰나, 한이 말했다.
“진, 그거 한 번 해봐.”
“뭘 해보라는 거예요?”
“어둠의 장막 말이야. 왠지 이 주위에 있는 빛을 모두 가리면 뭔가 답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한은 그토록 애타게 찾던 단서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를 머금은 표정으로 진을 재촉했다. 그런데 상기된 한의 표정과는 달리 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한의 제안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에에! 싫어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보긴 누가 본다고 그래? 이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원정대 대원들뿐인데, 그 사람들 전부 탑에 들어갔잖아. 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
양팔을 벌리며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강조하는 한.
반면에 진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며 한을 가리켰다.
“한이 보고 있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내가 눈 가리고 있으면 되는 거지?”
진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한의 끈질긴 재촉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눈 뜨기만 해봐. 그때는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절대 눈 안 뜬다니까. 자 이러면 되지?”
진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은 눈가리개로 눈을 가린 것으로도 모자라 코트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이 되지 않는 듯, 진은 한참 동안이나 한을 흘끔흘끔 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바닥에 진을 중심으로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지고, 진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검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진의 머리카락을 시작으로 어둠이 그녀를 온통 물들이기 시작했다.
진의 상징과도 같았던 은발의 머리카락은 그믐달 보다 짙은 어둠에 물들었고, 그녀의 반짝이던 눈동자도 심연을 닮은 흑색으로 채워졌다.
고운 레이스 장식이 사랑스러움을 자아내던 그녀의 스커트는 어둠이 가득한 색채로 물든 이후 그녀의 몸이 그려내는 매혹적인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도발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진의 온몸을 집어 삼킨 어둠은 그 탐욕스러운 입을 벌려 이내 거제도 전역을 휘감았고, 곧 이어 거제도는 한 올의 빛도 찾아볼 수 없는 암흑 천지로 다시 태어났다.
거제도가 완전한 어둠에 정복당한 그때, 눈을 감았던 진이 눈을 떴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던 양 뺨에는 고대의 룬어가 새겨졌고, 동글동글하니 삶아 놓은 계란마냥 앙증스럽던 정수리에는 흑색의 보석이 박힌 티아라가 도도함을 뽐냈다.
그리고 조신하게 목 끝까지 꼭 채워져 있던 흰색의 블라우스 대신에 그녀의 몸을 감싼 건, 진의 육감적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타이트한 드레스였다.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태어난 그녀의 모습은 진이라기보다는 냉혹한 밤의 여왕에 더 가까웠다.
어둠의 장막하에서 눈을 뜬 냉혹한 밤의 여왕은 생각했다.
‘이런 민망한 모습, 죽었다 깨어나도 한 군에게는 절대로 못 보여주지.’
고개를 숙이자 드레스 위로 상당 부분 노출된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가슴과 그야말로 개미허리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가는 허리, 매끈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쭉 뻗은 각선미가 그대로 드러나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교육상 좋지 않아. 이런 모습.’
진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이래서 어둠의 장막을 치기 싫었던 건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을 바라보니, 한은 약속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휴우∼”
교육상 좋지 않은 이런 모습을 한이 보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한의 예상이 맞다면 거제도에 있는 모든 빛을 가린 지금, 무언가 상황의 변화가 발생해야 했다.
‘빙고!’
한의 영민한 추측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한 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빛을 차단했을 터인데 탑과 지상 중간쯤에 위치한 허공이 반짝거리며 빛을 뿜고 있었다.
빛의 근원은 마법진. 그리고 진의 기억이 맞다면 마법진에 새겨진 룬어는 어둠과 달의 신, 말숨의 언어였다.
드디어 한과 진이 하루를 꼬박 찾아 헤맨 입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 탑의 지하로 가는 그 포탈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