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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24화)
“지금 이 여자 왜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는 거야… 라고 생각하셨죠?”
“설마요, 에스메랄다 씨 본인은 모르고 계시겠지만 남자는 에스메랄다 씨처럼 아리따운 분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종족이랍니다.”
“흐음, 그럼 앞으로도 쭉 이렇게 당신 앞에 불쑥불쑥 튀어나와도 된다는 뜻인가요?”
“물론이죠. 저로서는 바라는 바입니다. 다만…….”
여전히 태연자약한 한. 그러나 한의 좌측 눈썹 끝부분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에스메랄다는 놓치지 않았다.
“다만, 뭐죠?”
“저야 행복하겠지만 공사가 다망할 터인 에스메랄다 씨의 일정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당신,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뻔뻔한 구석이 있네요.”
“…….”
“뻔뻔한데 연기는 잘 못하네. 그래서 더 밉상이야.”
에스메랄다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은 그런 그녀를 보며 더 이상 뻔뻔스러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쯤에서 당신, 나한테 할 말 있지 않나요?”
“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신지.”
“두 번은 우연이고 세 번째 부터는 필연이라는데, 우리들은 필연인 셈인가요?”
“이렇게 반가울 데가…….”
“무슨 뜻이죠?”
“무슨 연유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스메랄다 씨처럼 아름다운 여성분이 저와 필연이라니, 당연히 기쁘지 않을까요?”
콰직.
에스메랄다의 가녀린 주먹이 그녀가 기대고 서 있던 철골 구조물을 후려쳤고, 철골 구조물은 그대로 우그러졌다.
솟구치는 분통을 참지 못하겠는지 에스메랄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한테는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잠시간 분을 가라앉힌 에스메랄다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들리기를 바라면서 말했다.
“이 친구를 보면 이 친구와 나는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는 두 개의 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저에게는 소중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이 친구는…….”
말을 잇기가 어려운 듯,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나 때문에, 내 어리석음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 친구에게 속죄를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어요. 지난겨울에 말이죠.”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죠?”
“에스메랄다 씨가 지금 이렇게 무사한 게 참 다행이라는 겁니다.”
“운이 좋았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살아올 수 있었으니까.”
“기적 같은 일이라 하면, 일전에 얘기하셨던 그 남자 분 말씀인가요?”
“네,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워낙에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니까요.”
“실종에서 돌아온 직후 저는 처음에는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잖아요? 괴물에게 습격을 당해서 죽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마침 그 자리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로부터 목숨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라니, 소설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일 아니겠어요?”
“저는 믿습니다.”
“어머, 고맙기도 하셔라.”
온통 가시가 잔뜩 돋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은 에스메랄다에게 ‘설원의 마녀’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수수께끼의 구원자를 극한 상황에 몰린 내가 본 환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적이나 구원 같은 말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니까요.”
에스메랄다는 철골에서 몸을 떼고 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간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지만, 아직 두 사람간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한은 에스메랄다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후끈후끈한 사람을 보고 ‘설원의 마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무리 봐도 에스메랄다에게는 불꽃의 마녀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내가 구조를 받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내 친구가 나에게 말했어요. 내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그날 저녁…….”
그제야 한은 알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대체 어떤 방법을 써서 자신의 정체를 추론해 냈는지.
“검은 양복과 코트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몰래 자신의 병실에 들어와서 나를 습격한 괴물의 행방을 물었다고 말이죠.”
그녀가 열쇠였나. 분명히 환영 마법을 걸어서 최면 상태에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에스메랄다에게 말해준 것이라면 에스메랄다가 이렇게 집요하게 자신을 추궁해 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제발, 제발. 멜리를 구해주세요. 제발 멜리를…….’
여기저기를 붕대로 칭칭 감은 채로 자신의 손을 꼬옥 움켜잡은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
그 당시에는 최면 상태에 빠진 그녀가 경황이 없는 중에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멜리’는 아무래도 ‘에스메랄다’를 부르는 그녀만의 애칭이었나 보다.
한은 이제야 자신이 놓친 흔적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친구가 한 마디 더 하더군요. 그 남자 얼굴 생김새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점이 있다고요.”
“…….”
“그 남자는 빨려들 것처럼 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참 재미있지 않나요?”
에스메랄다는 한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물론 흑발의 헌터는 한둘이 아니겠죠. 그런데 흑발을 하고, 검은 양복을 입고 다니는 헌터라면 그 대상이 많이 줄어들 거고, 거기에 적색 등급 지역을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겠죠.”
에스메랄다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는 한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씨, 나는요. 목숨을 구원받은 은혜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말 못할 사정이 있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
“목숨을 구원받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할 기회도 주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행동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
“이 말을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한 씨를 부른 거랍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예요.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메랄다가 뒷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한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이 홀가분해 보였다.
그녀에게 대답을 줘야 할 시간이다.
한은 입을 열기 전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편해진 듯 보이니 이제는 자신이 홀가분해질 시간이다.
“에스메랄다 씨, 들려주신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 안타까운 건 이번에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죠. 작년 겨울 저는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습니다.”
에스메랄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온 건 저 역시 에스메랄다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
“에스메랄다 씨. 모든 일에는 멈춰야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한 번 그 때를 놓치면 되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여러 사람이 힘들어지는 법이죠.”
에스메랄다는 이번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기이한 열기를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괴로워진다는 건가요?”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에스메랄다 씨가 괴로워질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에스메랄다 씨가 아니니까요.”
“그럼 누가 괴롭워진다는 거죠?”
“내가 괴로워집니다.”
“뭐라구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에스메랄다는 등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한의 말이 에스메랄다가 등을 돌리는 것을 막았다.
“내가 괴로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괴로워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나더러 이대로 물러서라 이 말인가요?”
“글쎄요. 에스메랄다 씨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에스메랄다 씨의 자유니까 내가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요 며칠간 에스메랄다와의 줄다리기에 한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제는 조금 더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한은 최후의 한 방을 날렸다.
“내가 정말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아니 백만 분의 하나라도 에스메랄다 씨가 찾는 그 사람이 맞다면… 나는 에스메랄다 씨를 믿을 것 같습니다.”
“뭘 믿는다는 거죠?”
“에스메랄다라는 사람은 자신의 은인을 괴롭게 만드는 일을 무작정 저지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이죠. 에스메랄다 씨도 방금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말입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요?”
“농담이 심하군요. 에스메랄다. 이게 협박이 아니라는 것쯤은 현명한 당신이니 이미 알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현명한 에스메랄다 씨라면 이것 또한 충분히 알고 계시겠죠.”
“…….”
“자신의 행동이 투정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것 말입니다.”
에스메랄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거세게 들썩이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에스메랄다가 느끼고 있는 심적인 동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만 가봐야겠군요.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에스메랄다. 부디 항상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바 전부 이루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만.”
한은 산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는 홀로 남겨졌다.
홀로 남겨진 에스메랄다의 등 뒤로 무심한 바람만이 불어올 따름이었다.
“그럼 하나하나 정리해 보자구.”
한은 수첩을 펼쳐들고 펜을 움직여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흑색 탑 지하 탐색에 돌입해야 할 테니 그 전에 지금까지 파악된 사항을 정리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건 이 탑의 주인이 ‘어둠의 신’ 말숨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런 한의 곁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케이, 어.둠.의 신, 말숨.”
한은 진의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잠깐, 어둠의 신이라니까 새카만 신이라고 적으면 어떡해요!”
“어둠이나 까만 거나 그게 그거지 뭐.”
“안 돼요. 그런 건 같은 신으로서 내가 용납 못해요. 얼른 다시 적어요. 어둠의 신이라고. 빨리∼!!”
진의 성화에 못 이긴 한은 새카만 신이라고 적은 곳을 죽 긋고는 옆에 ‘어둠의 신’이라고 다시 적었다.
“그래서 이 ‘말숨‘이라는 신은 뭐하는 양반인데?”
“뭐하긴요? 어둠의 신이 어둠을 관장하지 뭘 하겠어요?”
“아니,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뭘 하냐고.”
“어둠을 관장한다니까?”
대화가 빙빙 돌 것 같다는 예감을 받은 한은 진에게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하고 ‘구체적으로 하는 일 없음’이라고 적었다. 여기까지 적은 후 한은 진에게 물었다.
“일단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찾아야겠네. 진,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있기는 있어요, 다만…….”
“다만?”
“너무 많이 느껴지는 게 문제죠. 이 근처에 온통 말숨의 기운이 가득해서 도대체 어디가 입구인지 감이 안 오네요.”
흑색 탑은 어둠의 신 말숨이 인간을 위해 남겨 둔 그의 유산이 잠든 장소.
말하자면 말숨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방 천지에 넘쳐흐르는 말숨의 기운 중에 지하로 입장하는 입구를 찾으라는 주문은 진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곤란한데…….”
한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고대 신의 유물에 관한한 진의 느낌이 유일한 단서나 마찬가지인데, 그 유일한 단서가 무용지물인 상황에서 입구를 찾는다는 건 바다에서 바늘 찾기나 매한가지였다.
“지금 이 여자 왜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는 거야… 라고 생각하셨죠?”
“설마요, 에스메랄다 씨 본인은 모르고 계시겠지만 남자는 에스메랄다 씨처럼 아리따운 분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종족이랍니다.”
“흐음, 그럼 앞으로도 쭉 이렇게 당신 앞에 불쑥불쑥 튀어나와도 된다는 뜻인가요?”
“물론이죠. 저로서는 바라는 바입니다. 다만…….”
여전히 태연자약한 한. 그러나 한의 좌측 눈썹 끝부분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에스메랄다는 놓치지 않았다.
“다만, 뭐죠?”
“저야 행복하겠지만 공사가 다망할 터인 에스메랄다 씨의 일정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당신,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뻔뻔한 구석이 있네요.”
“…….”
“뻔뻔한데 연기는 잘 못하네. 그래서 더 밉상이야.”
에스메랄다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은 그런 그녀를 보며 더 이상 뻔뻔스러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쯤에서 당신, 나한테 할 말 있지 않나요?”
“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신지.”
“두 번은 우연이고 세 번째 부터는 필연이라는데, 우리들은 필연인 셈인가요?”
“이렇게 반가울 데가…….”
“무슨 뜻이죠?”
“무슨 연유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스메랄다 씨처럼 아름다운 여성분이 저와 필연이라니, 당연히 기쁘지 않을까요?”
콰직.
에스메랄다의 가녀린 주먹이 그녀가 기대고 서 있던 철골 구조물을 후려쳤고, 철골 구조물은 그대로 우그러졌다.
솟구치는 분통을 참지 못하겠는지 에스메랄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한테는 목숨보다 소중한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잠시간 분을 가라앉힌 에스메랄다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들리기를 바라면서 말했다.
“이 친구를 보면 이 친구와 나는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는 두 개의 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저에게는 소중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이 친구는…….”
말을 잇기가 어려운 듯,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나 때문에, 내 어리석음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 친구에게 속죄를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어요. 지난겨울에 말이죠.”
“다행이군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죠?”
“에스메랄다 씨가 지금 이렇게 무사한 게 참 다행이라는 겁니다.”
“운이 좋았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살아올 수 있었으니까.”
“기적 같은 일이라 하면, 일전에 얘기하셨던 그 남자 분 말씀인가요?”
“네,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워낙에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니까요.”
“실종에서 돌아온 직후 저는 처음에는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잖아요? 괴물에게 습격을 당해서 죽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마침 그 자리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로부터 목숨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라니, 소설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일 아니겠어요?”
“저는 믿습니다.”
“어머, 고맙기도 하셔라.”
온통 가시가 잔뜩 돋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은 에스메랄다에게 ‘설원의 마녀’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수수께끼의 구원자를 극한 상황에 몰린 내가 본 환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적이나 구원 같은 말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니까요.”
에스메랄다는 철골에서 몸을 떼고 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간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지만, 아직 두 사람간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한은 에스메랄다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후끈후끈한 사람을 보고 ‘설원의 마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무리 봐도 에스메랄다에게는 불꽃의 마녀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내가 구조를 받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내 친구가 나에게 말했어요. 내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그날 저녁…….”
그제야 한은 알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대체 어떤 방법을 써서 자신의 정체를 추론해 냈는지.
“검은 양복과 코트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몰래 자신의 병실에 들어와서 나를 습격한 괴물의 행방을 물었다고 말이죠.”
그녀가 열쇠였나. 분명히 환영 마법을 걸어서 최면 상태에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에스메랄다에게 말해준 것이라면 에스메랄다가 이렇게 집요하게 자신을 추궁해 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제발, 제발. 멜리를 구해주세요. 제발 멜리를…….’
여기저기를 붕대로 칭칭 감은 채로 자신의 손을 꼬옥 움켜잡은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
그 당시에는 최면 상태에 빠진 그녀가 경황이 없는 중에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멜리’는 아무래도 ‘에스메랄다’를 부르는 그녀만의 애칭이었나 보다.
한은 이제야 자신이 놓친 흔적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친구가 한 마디 더 하더군요. 그 남자 얼굴 생김새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선명하게 기억나는 점이 있다고요.”
“…….”
“그 남자는 빨려들 것처럼 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참 재미있지 않나요?”
에스메랄다는 한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물론 흑발의 헌터는 한둘이 아니겠죠. 그런데 흑발을 하고, 검은 양복을 입고 다니는 헌터라면 그 대상이 많이 줄어들 거고, 거기에 적색 등급 지역을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겠죠.”
에스메랄다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는 한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씨, 나는요. 목숨을 구원받은 은혜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말 못할 사정이 있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
“목숨을 구원받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할 기회도 주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행동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
“이 말을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한 씨를 부른 거랍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예요.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메랄다가 뒷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한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이 홀가분해 보였다.
그녀에게 대답을 줘야 할 시간이다.
한은 입을 열기 전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편해진 듯 보이니 이제는 자신이 홀가분해질 시간이다.
“에스메랄다 씨, 들려주신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 안타까운 건 이번에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죠. 작년 겨울 저는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습니다.”
에스메랄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온 건 저 역시 에스메랄다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
“에스메랄다 씨. 모든 일에는 멈춰야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한 번 그 때를 놓치면 되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여러 사람이 힘들어지는 법이죠.”
에스메랄다는 이번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기이한 열기를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괴로워진다는 건가요?”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에스메랄다 씨가 괴로워질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에스메랄다 씨가 아니니까요.”
“그럼 누가 괴롭워진다는 거죠?”
“내가 괴로워집니다.”
“뭐라구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에스메랄다는 등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한의 말이 에스메랄다가 등을 돌리는 것을 막았다.
“내가 괴로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괴로워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나더러 이대로 물러서라 이 말인가요?”
“글쎄요. 에스메랄다 씨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에스메랄다 씨의 자유니까 내가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요 며칠간 에스메랄다와의 줄다리기에 한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제는 조금 더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한은 최후의 한 방을 날렸다.
“내가 정말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아니 백만 분의 하나라도 에스메랄다 씨가 찾는 그 사람이 맞다면… 나는 에스메랄다 씨를 믿을 것 같습니다.”
“뭘 믿는다는 거죠?”
“에스메랄다라는 사람은 자신의 은인을 괴롭게 만드는 일을 무작정 저지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이죠. 에스메랄다 씨도 방금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말입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요?”
“농담이 심하군요. 에스메랄다. 이게 협박이 아니라는 것쯤은 현명한 당신이니 이미 알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현명한 에스메랄다 씨라면 이것 또한 충분히 알고 계시겠죠.”
“…….”
“자신의 행동이 투정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것 말입니다.”
에스메랄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거세게 들썩이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에스메랄다가 느끼고 있는 심적인 동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만 가봐야겠군요.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에스메랄다. 부디 항상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바 전부 이루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만.”
한은 산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는 홀로 남겨졌다.
홀로 남겨진 에스메랄다의 등 뒤로 무심한 바람만이 불어올 따름이었다.
“그럼 하나하나 정리해 보자구.”
한은 수첩을 펼쳐들고 펜을 움직여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흑색 탑 지하 탐색에 돌입해야 할 테니 그 전에 지금까지 파악된 사항을 정리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건 이 탑의 주인이 ‘어둠의 신’ 말숨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런 한의 곁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케이, 어.둠.의 신, 말숨.”
한은 진의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잠깐, 어둠의 신이라니까 새카만 신이라고 적으면 어떡해요!”
“어둠이나 까만 거나 그게 그거지 뭐.”
“안 돼요. 그런 건 같은 신으로서 내가 용납 못해요. 얼른 다시 적어요. 어둠의 신이라고. 빨리∼!!”
진의 성화에 못 이긴 한은 새카만 신이라고 적은 곳을 죽 긋고는 옆에 ‘어둠의 신’이라고 다시 적었다.
“그래서 이 ‘말숨‘이라는 신은 뭐하는 양반인데?”
“뭐하긴요? 어둠의 신이 어둠을 관장하지 뭘 하겠어요?”
“아니,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뭘 하냐고.”
“어둠을 관장한다니까?”
대화가 빙빙 돌 것 같다는 예감을 받은 한은 진에게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하고 ‘구체적으로 하는 일 없음’이라고 적었다. 여기까지 적은 후 한은 진에게 물었다.
“일단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찾아야겠네. 진,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있기는 있어요, 다만…….”
“다만?”
“너무 많이 느껴지는 게 문제죠. 이 근처에 온통 말숨의 기운이 가득해서 도대체 어디가 입구인지 감이 안 오네요.”
흑색 탑은 어둠의 신 말숨이 인간을 위해 남겨 둔 그의 유산이 잠든 장소.
말하자면 말숨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방 천지에 넘쳐흐르는 말숨의 기운 중에 지하로 입장하는 입구를 찾으라는 주문은 진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곤란한데…….”
한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고대 신의 유물에 관한한 진의 느낌이 유일한 단서나 마찬가지인데, 그 유일한 단서가 무용지물인 상황에서 입구를 찾는다는 건 바다에서 바늘 찾기나 매한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