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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23화)
‘그나저나 조금만 더 있으면 저 친구랑도 이별이군.’
피어스는 일행과 조금 동떨어져서 걷고 있는 한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어색하기만 했던 검은 코트도 이제는 눈에 익은 탓인지 제법 봐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흑색 탑에 도착한 이후 한은 본격적으로 비밀 임무 수행을 위해 일행을 이탈할 테고 그렇게 되면 일단 한과도 이별을 해야 할 것이다.
한을 처음 봤을 때는 통 모를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피어스는 잠자는 자의 협곡 통과를 위해 인원을 나눌 때 다소 다루기 어려운 면이 있는 첸을 일부러 한이 이끄는 팀에 배치하였다.
첸을 한의 팀에 집어넣는다면 다소간의 충돌은 있겠지만 그 충돌을 통해서 한이라는 헌터의 사이즈를 측정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삼일 만에 다시 만난 첸은 한을 완전히 인정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피어스는 한에게 한 번 감탄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건…….
‘에스메랄다 양이 저 친구한테 제법 관심이 있어 보인단 말이야.’
물론 에스메랄다가 한에게 보이는 관심은 남녀 간의 관심과는 다른 의미의 관심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남녀 사이의 관심이든 그렇지 않든 매사에 초연하기로 유명한 에스메랄다가 낯선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통 모를 친구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더 모를 듯한 알쏭달쏭한 친구.
이것이 한을 며칠간 지켜 본 피어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피어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원정대는 착실하게 발걸음을 내딛어 흑색 탑에 도착했다.
흑색 탑은 거제도의 최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 년 전에는 바닷물이 가득했을 터인 거제도의 가장자리는 그 바닥을 드러내며 메말라 있었고, 흑색 탑 너머로 비쭉하니 솟은 헐벗은 산봉우리가 광경의 황량함을 더했다.
가까이에서 본 흑색 탑은 삭막하리만치 거대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철문과 탑 외벽에 층층이 새겨진 테두리만 아니었다면 탑이 아니라 검은 산봉우리로 여겨질 만큼 탑은 거대했다.
미련해 보일 만큼 거대한 그 크기에 비해, 재질을 알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탑의 외벽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고, 원추형의 몸통은 노련한 장인이 빚어낸 도자기마냥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불쑥 불어온 바람이 철문에 매달려 있는 구리종을 뒤흔들자 추가 몸을 떨었고, 투박하리만치 커다란 철문에 달려 있는 종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아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부조화는 원정대원들에게 낯선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드디어 왔네, 왔어.”
“뭐 이렇게 커.”
“주위는 휑한데 덩그러니 까만 탑만 하나 있으니 뭔가 으스스한데.”
“이놈의 탑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드디어 거제도에 도착한 원정대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소회를 내뱉었다.
대격변 이전에는 꽤나 많은 인류가 이곳에서 살아갔다고 한다.
눈을 돌리면 볼 수 있는 칠이 다 벗겨진 철골 구조물과 이제는 잔해만이 남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과거엔 인류의 손길이 머물던 영토가 형편없이 쇠락해진 쓸쓸한 풍경을 목격하면서 ‘상실’이라는 현 인류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원정대원들은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겁나게 크네. 지상이 이정도면 지하도 제법 규모가 되겠는걸.’
그리고 이번 원정대를 있게 한 장본인인 한은 지상으로 솟아난 7층 규모의 거대한 탑을 보며 숨어 있는 지하의 규모를 예측하고 있었다.
한은 점점 그 세기를 더해가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며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보나파스 산 정상에서부터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이 지금은 그야말로 몸서리쳐질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신들의 권능, 잊혀진 유산. 오랜 시간 찾아 헤맨 목표가 비로소 눈앞에 도래했음을 절실하게 느끼며, 한은 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지하로 이동하는 포탈을 찾아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한은 피어스에게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피어스도 한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덤덤한 표정으로 한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피어스 대장. 대장님과 원정대 대원 분들 덕분에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나야말로 자네 덕분에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네. 원정대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걸세. 자네가 무슨 임무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몸조심하고 맡은 바 임무 성공하기를 바라겠네.”
“저도 원정대의 성공을 빌어드리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한은 피어스의 손을 놓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원정대원들을 훑어보았다.
“이처럼 탁월한 대장이 계시고, 저렇게 훌륭한 대원분들이 계시는데 굳이 제 기도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하하, 자네도 그런 농담을 할 줄 아나 보지? 그래, 우리 서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나세.”
“바로 탑의 탐색에 들어가실 건가요?”
“아니, 일단은 점심을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진입할 생각이네. 자네는 바로 움직일 생각인가?”
“네, 지금 바로 움직여 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마냥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군. 그만 가보시게. 그동안 같이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네.”
피어스는 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피어스가 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을 무렵 한의 입가가 꿈틀거렸으나, 이내 그런 기색은 사라졌고 한의 얼굴에는 다시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맞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한의 어깨에서 손을 내린 피어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군용 나이프를 뽑아 근처에 있는 건물 잔해 사이에 내리 꽂았다.
“만약 자네가 임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이 나이프가 여기에 꽃혀 있다면 원정대는 아직 귀환하지 않은 것이니, 자네가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우리를 기다려 줬으면 하네.
바쁜 일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혹여라도 여유가 있다면 여기까지 같이 왔으니 같이 돌아가는 게 좋은 일 아니겠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피어스 대장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나야말로 영광이었네. 잘 가시게.”
한과 피어스는 다시 한 번 손을 맞잡았다.
“잘가요, 한 대장.”
“한 대장, 나중에 다시 봐요.”
“잘 가, 한 대장. 몸 성히 또 만나자구.”
“그동안 즐거웠네.”
한과 같이 잠자는 자의 협곡을 돌파한 일행들이 손을 흔들며 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한 역시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숙여 그들과의 작별을 고했다.
그 후 한은 몸을 돌려 걸었고, 이내 원정대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몇 날 며칠을 동고동락했던 원정대원들과 이별을 맞이한 후, 한은 본격적으로 지하로 진입하는 포탈을 찾을 채비를 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은 포탈을 찾는 대신 흑색 탑을 크게 우회해서 흑색 탑 뒤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올랐다.
조금 전 피어스와 작별 인사를 나눌 당시 피어스가 한의 어깨를 두드리는 척하며 몰래 전달해준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30분 후. 탑 뒤쪽에 있는 산 정상에서 에스메랄다 양이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하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게.’
‘피어스, 이 양반.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식으로 에스메랄다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걸까.
아니, 애초에 자신과 에스메랄다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속이는 자와 속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 사이에 교감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제안을 무시하고 지하로 가는 포탈을 찾는데 전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녀가 정말로 그날의 일을 사방으로 들쑤시고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그럴 수 없었다.
때문에 한은 에스메랄다가 기다리고 있을 산 정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실 그녀와의 독대는 한으로서도 내심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끝을 봐야지.’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답을 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이대로 두는 건 더더욱 불가한 일.
한으로서도 마음 편히 지하 공략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지금 시점에 에스메랄다와 마무리를 지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한은 서둘러 산을 올랐고, 바위산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은 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그다지 멀지 않은 그곳에 에스메랄다가 있었다.
“일찍 왔네요.”
에스메랄다는 이름 모를 산 정상에 있는 커다란 철제 건물에 기대어 선 채로 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나파스 산에서 입고 있던 두터운 가죽 코트는 벗었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여전히 맵시와는 거리가 있는 복장이었다.
목 끝까지 빈틈없이 막고 있는 기름을 먹인 가죽 갑옷과 팔꿈치까지 닿아 있는 금속 재질의 강철 보호대, 젊은 여성이 입기에는 다소 투박해 보이는 사냥용 바지와 무릎 윗부분을 꼼꼼하게 보호하고 있는 보호구까지.
멋과 맵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복장.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메랄다가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두터운 가죽 털 코트를 입고 있어도, 기름이 번들거리는 가죽 갑옷을 걸쳐도,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강철 보호대로 몸을 가려도 그녀는 요정처럼 아름다웠고, 여왕처럼 도도했다.
그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암채색의 배경을 총천연색 정경으로 바꾸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산 아래에서 볼 때는 있는 것이라고는 폐허가 된 철골 구조물과 바위밖에 없는 온통 황량한 풍경뿐인 헐벗은 바위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바위산 정상은 눈이 부셨다.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한은 그녀가 가진 매력에 대한 예의를 표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스메랄다 씨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저절로 서두르게 되더군요.”
“흥.”
한의 정중한 대답에 에스메랄다는 눈을 치켜뜨며 불편한 심기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녀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노골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에스메랄다가 발산하는 불쾌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한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당신 치고는 제법인 대답이네요.”
에스메랄다는 한을 부를 때 더이상 한 씨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고 ‘당신’이라는 지칭어를 썼다. 이것만으로도 에스메랄다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심기가 편치 않을 거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감정 표현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터라 에스메랄다의 격렬한 반응에 한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당혹스러움은 잠시였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끝을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에스메랄다가 이전처럼 간을 보지 않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행동해 준다면 한으로서는 오히려 더 상대가 쉬워질 것이었다.
‘그나저나 조금만 더 있으면 저 친구랑도 이별이군.’
피어스는 일행과 조금 동떨어져서 걷고 있는 한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어색하기만 했던 검은 코트도 이제는 눈에 익은 탓인지 제법 봐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흑색 탑에 도착한 이후 한은 본격적으로 비밀 임무 수행을 위해 일행을 이탈할 테고 그렇게 되면 일단 한과도 이별을 해야 할 것이다.
한을 처음 봤을 때는 통 모를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피어스는 잠자는 자의 협곡 통과를 위해 인원을 나눌 때 다소 다루기 어려운 면이 있는 첸을 일부러 한이 이끄는 팀에 배치하였다.
첸을 한의 팀에 집어넣는다면 다소간의 충돌은 있겠지만 그 충돌을 통해서 한이라는 헌터의 사이즈를 측정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삼일 만에 다시 만난 첸은 한을 완전히 인정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피어스는 한에게 한 번 감탄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건…….
‘에스메랄다 양이 저 친구한테 제법 관심이 있어 보인단 말이야.’
물론 에스메랄다가 한에게 보이는 관심은 남녀 간의 관심과는 다른 의미의 관심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남녀 사이의 관심이든 그렇지 않든 매사에 초연하기로 유명한 에스메랄다가 낯선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통 모를 친구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더 모를 듯한 알쏭달쏭한 친구.
이것이 한을 며칠간 지켜 본 피어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피어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원정대는 착실하게 발걸음을 내딛어 흑색 탑에 도착했다.
흑색 탑은 거제도의 최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 년 전에는 바닷물이 가득했을 터인 거제도의 가장자리는 그 바닥을 드러내며 메말라 있었고, 흑색 탑 너머로 비쭉하니 솟은 헐벗은 산봉우리가 광경의 황량함을 더했다.
가까이에서 본 흑색 탑은 삭막하리만치 거대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철문과 탑 외벽에 층층이 새겨진 테두리만 아니었다면 탑이 아니라 검은 산봉우리로 여겨질 만큼 탑은 거대했다.
미련해 보일 만큼 거대한 그 크기에 비해, 재질을 알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탑의 외벽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고, 원추형의 몸통은 노련한 장인이 빚어낸 도자기마냥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불쑥 불어온 바람이 철문에 매달려 있는 구리종을 뒤흔들자 추가 몸을 떨었고, 투박하리만치 커다란 철문에 달려 있는 종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아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부조화는 원정대원들에게 낯선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드디어 왔네, 왔어.”
“뭐 이렇게 커.”
“주위는 휑한데 덩그러니 까만 탑만 하나 있으니 뭔가 으스스한데.”
“이놈의 탑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드디어 거제도에 도착한 원정대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소회를 내뱉었다.
대격변 이전에는 꽤나 많은 인류가 이곳에서 살아갔다고 한다.
눈을 돌리면 볼 수 있는 칠이 다 벗겨진 철골 구조물과 이제는 잔해만이 남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과거엔 인류의 손길이 머물던 영토가 형편없이 쇠락해진 쓸쓸한 풍경을 목격하면서 ‘상실’이라는 현 인류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원정대원들은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겁나게 크네. 지상이 이정도면 지하도 제법 규모가 되겠는걸.’
그리고 이번 원정대를 있게 한 장본인인 한은 지상으로 솟아난 7층 규모의 거대한 탑을 보며 숨어 있는 지하의 규모를 예측하고 있었다.
한은 점점 그 세기를 더해가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며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보나파스 산 정상에서부터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이 지금은 그야말로 몸서리쳐질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신들의 권능, 잊혀진 유산. 오랜 시간 찾아 헤맨 목표가 비로소 눈앞에 도래했음을 절실하게 느끼며, 한은 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지하로 이동하는 포탈을 찾아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한은 피어스에게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피어스도 한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덤덤한 표정으로 한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피어스 대장. 대장님과 원정대 대원 분들 덕분에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나야말로 자네 덕분에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네. 원정대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걸세. 자네가 무슨 임무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몸조심하고 맡은 바 임무 성공하기를 바라겠네.”
“저도 원정대의 성공을 빌어드리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한은 피어스의 손을 놓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원정대원들을 훑어보았다.
“이처럼 탁월한 대장이 계시고, 저렇게 훌륭한 대원분들이 계시는데 굳이 제 기도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하하, 자네도 그런 농담을 할 줄 아나 보지? 그래, 우리 서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나세.”
“바로 탑의 탐색에 들어가실 건가요?”
“아니, 일단은 점심을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진입할 생각이네. 자네는 바로 움직일 생각인가?”
“네, 지금 바로 움직여 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마냥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군. 그만 가보시게. 그동안 같이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네.”
피어스는 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피어스가 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을 무렵 한의 입가가 꿈틀거렸으나, 이내 그런 기색은 사라졌고 한의 얼굴에는 다시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맞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한의 어깨에서 손을 내린 피어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군용 나이프를 뽑아 근처에 있는 건물 잔해 사이에 내리 꽂았다.
“만약 자네가 임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이 나이프가 여기에 꽃혀 있다면 원정대는 아직 귀환하지 않은 것이니, 자네가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우리를 기다려 줬으면 하네.
바쁜 일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혹여라도 여유가 있다면 여기까지 같이 왔으니 같이 돌아가는 게 좋은 일 아니겠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피어스 대장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나야말로 영광이었네. 잘 가시게.”
한과 피어스는 다시 한 번 손을 맞잡았다.
“잘가요, 한 대장.”
“한 대장, 나중에 다시 봐요.”
“잘 가, 한 대장. 몸 성히 또 만나자구.”
“그동안 즐거웠네.”
한과 같이 잠자는 자의 협곡을 돌파한 일행들이 손을 흔들며 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한 역시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숙여 그들과의 작별을 고했다.
그 후 한은 몸을 돌려 걸었고, 이내 원정대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몇 날 며칠을 동고동락했던 원정대원들과 이별을 맞이한 후, 한은 본격적으로 지하로 진입하는 포탈을 찾을 채비를 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은 포탈을 찾는 대신 흑색 탑을 크게 우회해서 흑색 탑 뒤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올랐다.
조금 전 피어스와 작별 인사를 나눌 당시 피어스가 한의 어깨를 두드리는 척하며 몰래 전달해준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30분 후. 탑 뒤쪽에 있는 산 정상에서 에스메랄다 양이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하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게.’
‘피어스, 이 양반.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식으로 에스메랄다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걸까.
아니, 애초에 자신과 에스메랄다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속이는 자와 속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 사이에 교감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제안을 무시하고 지하로 가는 포탈을 찾는데 전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녀가 정말로 그날의 일을 사방으로 들쑤시고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그럴 수 없었다.
때문에 한은 에스메랄다가 기다리고 있을 산 정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실 그녀와의 독대는 한으로서도 내심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끝을 봐야지.’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답을 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이대로 두는 건 더더욱 불가한 일.
한으로서도 마음 편히 지하 공략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지금 시점에 에스메랄다와 마무리를 지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한은 서둘러 산을 올랐고, 바위산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은 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그다지 멀지 않은 그곳에 에스메랄다가 있었다.
“일찍 왔네요.”
에스메랄다는 이름 모를 산 정상에 있는 커다란 철제 건물에 기대어 선 채로 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나파스 산에서 입고 있던 두터운 가죽 코트는 벗었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여전히 맵시와는 거리가 있는 복장이었다.
목 끝까지 빈틈없이 막고 있는 기름을 먹인 가죽 갑옷과 팔꿈치까지 닿아 있는 금속 재질의 강철 보호대, 젊은 여성이 입기에는 다소 투박해 보이는 사냥용 바지와 무릎 윗부분을 꼼꼼하게 보호하고 있는 보호구까지.
멋과 맵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복장.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메랄다가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두터운 가죽 털 코트를 입고 있어도, 기름이 번들거리는 가죽 갑옷을 걸쳐도,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강철 보호대로 몸을 가려도 그녀는 요정처럼 아름다웠고, 여왕처럼 도도했다.
그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암채색의 배경을 총천연색 정경으로 바꾸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산 아래에서 볼 때는 있는 것이라고는 폐허가 된 철골 구조물과 바위밖에 없는 온통 황량한 풍경뿐인 헐벗은 바위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바위산 정상은 눈이 부셨다.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한은 그녀가 가진 매력에 대한 예의를 표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스메랄다 씨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저절로 서두르게 되더군요.”
“흥.”
한의 정중한 대답에 에스메랄다는 눈을 치켜뜨며 불편한 심기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녀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노골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에스메랄다가 발산하는 불쾌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한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당신 치고는 제법인 대답이네요.”
에스메랄다는 한을 부를 때 더이상 한 씨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고 ‘당신’이라는 지칭어를 썼다. 이것만으로도 에스메랄다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심기가 편치 않을 거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감정 표현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터라 에스메랄다의 격렬한 반응에 한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당혹스러움은 잠시였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끝을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에스메랄다가 이전처럼 간을 보지 않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행동해 준다면 한으로서는 오히려 더 상대가 쉬워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