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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22화)
앞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강한 충격을 받은 탓인지, 아니면 그 끔찍한 괴물이 뿜어낸 독기가 원인인지, 어찌 됐건 분명한 사실은 자신은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고, 괴물에게 곧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안나의 꿈을 깨뜨린 자신의 죄를 이런 식으로라도 속죄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으니까.
다만 걱정이 되는 건 단 하나. 자신의 시체가 안나의 곁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내가 여기서 저 괴물에게 목숨을 잃으면 안나는 나를 용서해 줄까? 나를 다시 한 번 안아줄까?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안나의 품에 안겨서 다시 한 번 엉엉 울고 싶다. 안나에게 용서받고 싶다.
“…….”
어차피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에스메랄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에 하나 자신의 시체가 안나의 곁으로 갈 수 있다면 공포에 치켜뜬 눈으로 안나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나가 늘 해주던 ‘멜리는 평소에도 예쁘지만 잠들었을 때가 가장 예쁘고 귀여워’라는 그 말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평온한 얼굴, 막 잠에 빠져든 것처럼 곱게 감은 눈으로 안나를 맞이하리라.
“…….”
크르르륵.
“…….”
크와악!
“…….”
크콰아악! 크와아옥!!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괴물의 최후의 한 방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 어느 곳에서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고, 호흡이 가빠오지도 않는다.
괴물이 사라진 걸까. 하지만 괴물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지척 거리에 들려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걸까.
“겨우 찾았네.”
크와악!
괴물의 울음소리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울리는 방향 마법이 걸린 탓에 정확하게 식별을 할 수는 없지만,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물이나 몬스터가 아닌 인간 남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겨우 숨은 데가 여기냐.”
괴물이 눈앞에 있을 터인데 남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태연했다. 혹시 남자의 다급한 비명소리를 자신이 잘못들은 건 아닌가 싶어 귀를 기울여 봐도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연했다.
와라칵칵! 카르르륵!
오히려 음성에서 다급함이 느껴지는 것은 괴물 쪽이었다. 괴물이 내지른 울음에서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배어나왔다.
‘그 괴물이 두려움을 느껴? 그게 가능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괴물은 틀림없이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상황을 고려해볼 때 괴물이 느끼는 공포의 원인은 낯선 목소리의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네 주인이 짖는 법만 가르쳐 주고 짖어야 할 상대를 가리는 법은 아직 가르치지 않았나 보지?”
캉캉, 카륵, 카르륵, 캬락칵칵!!
괴물이 내지르는 비명이 더욱더 거칠어졌다.
“가라.”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를 따라 괴물이 내지르는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괴물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고, 괴물의 기척도 사라졌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린 건지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에스메랄다는 눈을 떴다. 여전히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또렷하게 들린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건가요?”
에스메랄다는 입을 열었다.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쇠약하고 무기력한, 절망이 짙게 배어 있는 목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거냐구요. 흐흑.”
무슨 이유였을까. 에스메랄다는 낯선 남자 앞에서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굴 안에는 에스메랄다의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 남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남자는 입을 열었고, 에스메랄다와 약간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남자와의 대화가 끝났을 무렵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에스메랄다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이틀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에스메랄다는 안나의 품에 안겨서 눈을 떴고, 안나는 예전처럼 에스메랄다를 따스하게 안아줬다. 에스메랄다는 안나의 품에 안겨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에스메랄다가 S랭크 자격증을 획득한 건 그 다음 달이었다. 그리고 S랭크 자격증을 획득한 다음날, 에스메랄다는 여행을 떠났다.
***
에스메랄다는 원정대원들이 나란히 누워서 잠들어 있는 모닥불 너머의 공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그 건너편의 숲을 바라보았다.
생긴 것만 봐서는 거짓말이라고는 모를 것처럼 생긴 주제에 입만 열면 거짓말인,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다시 한 번 살게 한 그 남자는 지금 저 숲 건너편에 있을 것이다.
지지직.
그 밉살스러운 남자를 생각하고 있자니 손에 힘이 들어간 걸까. 에스메랄다의 손에 들린 머그컵의 손잡이에 금이 갔다.
“흐음.”
머그컵을 내려놓고 품속에서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추어 본다. 화장 같은 걸 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콤팩트 같은 걸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물건은 예외다. 이 콤팩트를 선물한 건 다름 아닌 안나이니까…….
“멜리는 혼자 있으면 화장이라고는 통 안할 것 같으니까.”
“알아, 알아. 멜리의 생각 정도는. 그래도 다 큰 여자가 화장하는 법도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거든. 자, 이거 받아.”
“이거는 꼭 가지고 다니는 거야, 알겠지? 멜리, 자 나랑 약속!”
에스메랄다가 마을을 떠나던 날, 환하게 건네며 콤팩트를 건넨 안나. 안나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어서 항상 품 안에 가지고는 다녔지만, 한 번도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화장품을 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콤팩트에 부착된 손거울을 통해 얼굴을 비춰보고자 했던 것이다.
“…….”
거울 안에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 얼굴이 비친다.
스스로의 입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거울을 보며 거부감이 들거나 보기 싫은 얼굴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왜 그 남자는 한사코 자신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걸까.
부스럭부스럭.
마른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쑤셔 넣자 불길은 거세게 타오른다.
딱히 그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행을 떠나면서 어렴풋이 생각은 한 적은 있다.
몇 개월이고 몇 년이고 쉬지 않고 이 세상을 떠돌다 보면 언젠가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날 동굴에서 끝내기로 마음먹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그 남자 덕분이니까.
그런데 재회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랐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그런데 그 놈의 놈팽이가 무슨 영문인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무사히 깨어나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그날 마추픽추에서 저를 만났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이라도 했다면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끝이 났다면 일단 이야기는 일단락되는 것이고, 자신은 그 남자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당신 같은 사람 몰라. 그리고 그 날 밤 일도 내 알 바 아니야. 왜, 더 할 말이라도 있어?’
이런 식으로 뻔뻔스러운 대응이라니, 이 문제는 더 이상 마음의 보답이라든가 그런 말랑말랑한 문제가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관한 문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그 점이 에스메랄다를 더욱더 분노케 만들었다.
꿀꺽꿀꺽.
머그컵에 남은 다즐링 차를 한입에 마셔 버렸다. 기분 탓일까, 달콤 쌉싸름해야 할 차가 쓰디쓰게 느껴졌다.
“하아아이이야아아!”
첸의 육중한 몸이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가 다시 지면으로 내려앉았다. 건조한 지면은 지상으로 착지하는 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갈색의 모래와 말라붙은 하얀 소금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춤을 췄다.
“웨테테, 첸 씨 지금 뭐하는 거에요?”
“에헤이, 자네 정신 나갔나? 가뜩이나 건조한데 이 흙먼지 날리는 거 안 보여?”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던 하워드와 클리프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첸을 노려봤다.
가뜩이나 바싹 마른 지면에는 가만히 있어도 먼지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는데, 거기에 첸이 먼지구름을 추가로 일으켰으니 그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게 된 두 사람 입장에서는 불평이 아니 나올 수 없는 일이었다.
“헤헤. 그렇지만 영감님, 신기하지 않습니까?”
“뭐가 신기해? 자네가 몸뚱이 근수 많이 나가는 게 그리도 신기한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 첸을 클리프는 매섭게 쏘아 붙였다.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보세요, 이렇게 먼지랑 소금이 같이 휘날리는 게 말이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백 년 전에는 바다였다니. 헤헤, 참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첸은 먼지와 같이 비산하는 소금 가루를 움켜쥐며 말했다.
첸의 말마따나 백 년 전에는 바다였던 곳이, 지금은 메마른 육지로 변해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모래 사이로 섞인 소금들만이 과거 이곳이 바다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신기하기는 뭐가 신기해? 백 년 전에 일어난 일이 퍽이나 신기하겠다. 이거 가지고 신기하다 뭐다 난리를 치는 거 보니까 자네 헌터 시험 성적표가 훤히 보이네 그려. 자네 헌터 자격증 야매로 딴 거 아니야?”
헌터 자격증을 부여하는 헌터 시험에는 전투 기술 항목만이 있는 건 아니다.
헌터 자격증 획득을 위해서는 기초 인문학에 대한 시험을 거쳐야 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대격변 이후의 인류의 변화를 다루는 역사학과 대격변 이후로의 지형 변화를 다루는 지리학이었다.
그리고 지리학 교과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 바로 대격변 이전에는 바다였다가 대격변 이후로 육지로 변해버린 지역들이었다.
이를테면 거제도 인근 지역처럼 말이다.
“아이구, 우리 영감님. 장난 한 번 친 거 가지고 되게 까칠하시네. 그깟 먼지 좀 묻으면 어때서.”
“자네한테나 그냥 먼지지. 세상 사람이 다 자네같이 둔해 빠진 줄 알아?”
항상 청결을 최우선하는 신사 클리프는 옷에 달라붙은 먼지가 영 신경 쓰이는 듯 까칠한 반응을 보였고, 그런 클리프의 까칠한 반응에 첸은 툴툴거렸다.
원정대의 목적지인 흑색 탑을 앞에 두고 원정대원들끼리 투닥거리는 것은 지나치게 나태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피어스는 이들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보나파스 산맥을 내려온 후부터 거제도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가장 낮은 위험도의 구역인 백색 구역. 출몰하는 마물의 빈도나 그 위험도면에서 보나파스 산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안전한 구역이니 만큼 흑색 탑 도착 전까지는 대원들이 저런 방식으로나마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강한 충격을 받은 탓인지, 아니면 그 끔찍한 괴물이 뿜어낸 독기가 원인인지, 어찌 됐건 분명한 사실은 자신은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고, 괴물에게 곧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안나의 꿈을 깨뜨린 자신의 죄를 이런 식으로라도 속죄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으니까.
다만 걱정이 되는 건 단 하나. 자신의 시체가 안나의 곁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내가 여기서 저 괴물에게 목숨을 잃으면 안나는 나를 용서해 줄까? 나를 다시 한 번 안아줄까?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안나의 품에 안겨서 다시 한 번 엉엉 울고 싶다. 안나에게 용서받고 싶다.
“…….”
어차피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에스메랄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에 하나 자신의 시체가 안나의 곁으로 갈 수 있다면 공포에 치켜뜬 눈으로 안나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나가 늘 해주던 ‘멜리는 평소에도 예쁘지만 잠들었을 때가 가장 예쁘고 귀여워’라는 그 말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평온한 얼굴, 막 잠에 빠져든 것처럼 곱게 감은 눈으로 안나를 맞이하리라.
“…….”
크르르륵.
“…….”
크와악!
“…….”
크콰아악! 크와아옥!!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괴물의 최후의 한 방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 어느 곳에서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고, 호흡이 가빠오지도 않는다.
괴물이 사라진 걸까. 하지만 괴물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지척 거리에 들려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걸까.
“겨우 찾았네.”
크와악!
괴물의 울음소리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울리는 방향 마법이 걸린 탓에 정확하게 식별을 할 수는 없지만,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이 마물이나 몬스터가 아닌 인간 남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겨우 숨은 데가 여기냐.”
괴물이 눈앞에 있을 터인데 남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태연했다. 혹시 남자의 다급한 비명소리를 자신이 잘못들은 건 아닌가 싶어 귀를 기울여 봐도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연했다.
와라칵칵! 카르르륵!
오히려 음성에서 다급함이 느껴지는 것은 괴물 쪽이었다. 괴물이 내지른 울음에서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배어나왔다.
‘그 괴물이 두려움을 느껴? 그게 가능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괴물은 틀림없이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상황을 고려해볼 때 괴물이 느끼는 공포의 원인은 낯선 목소리의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네 주인이 짖는 법만 가르쳐 주고 짖어야 할 상대를 가리는 법은 아직 가르치지 않았나 보지?”
캉캉, 카륵, 카르륵, 캬락칵칵!!
괴물이 내지르는 비명이 더욱더 거칠어졌다.
“가라.”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를 따라 괴물이 내지르는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괴물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고, 괴물의 기척도 사라졌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린 건지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에스메랄다는 눈을 떴다. 여전히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또렷하게 들린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건가요?”
에스메랄다는 입을 열었다.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쇠약하고 무기력한, 절망이 짙게 배어 있는 목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거냐구요. 흐흑.”
무슨 이유였을까. 에스메랄다는 낯선 남자 앞에서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굴 안에는 에스메랄다의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 남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남자는 입을 열었고, 에스메랄다와 약간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남자와의 대화가 끝났을 무렵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에스메랄다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이틀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에스메랄다는 안나의 품에 안겨서 눈을 떴고, 안나는 예전처럼 에스메랄다를 따스하게 안아줬다. 에스메랄다는 안나의 품에 안겨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에스메랄다가 S랭크 자격증을 획득한 건 그 다음 달이었다. 그리고 S랭크 자격증을 획득한 다음날, 에스메랄다는 여행을 떠났다.
에스메랄다는 원정대원들이 나란히 누워서 잠들어 있는 모닥불 너머의 공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그 건너편의 숲을 바라보았다.
생긴 것만 봐서는 거짓말이라고는 모를 것처럼 생긴 주제에 입만 열면 거짓말인,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다시 한 번 살게 한 그 남자는 지금 저 숲 건너편에 있을 것이다.
지지직.
그 밉살스러운 남자를 생각하고 있자니 손에 힘이 들어간 걸까. 에스메랄다의 손에 들린 머그컵의 손잡이에 금이 갔다.
“흐음.”
머그컵을 내려놓고 품속에서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추어 본다. 화장 같은 걸 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콤팩트 같은 걸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물건은 예외다. 이 콤팩트를 선물한 건 다름 아닌 안나이니까…….
“멜리는 혼자 있으면 화장이라고는 통 안할 것 같으니까.”
“알아, 알아. 멜리의 생각 정도는. 그래도 다 큰 여자가 화장하는 법도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거든. 자, 이거 받아.”
“이거는 꼭 가지고 다니는 거야, 알겠지? 멜리, 자 나랑 약속!”
에스메랄다가 마을을 떠나던 날, 환하게 건네며 콤팩트를 건넨 안나. 안나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어서 항상 품 안에 가지고는 다녔지만, 한 번도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화장품을 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콤팩트에 부착된 손거울을 통해 얼굴을 비춰보고자 했던 것이다.
“…….”
거울 안에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 얼굴이 비친다.
스스로의 입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거울을 보며 거부감이 들거나 보기 싫은 얼굴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왜 그 남자는 한사코 자신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걸까.
부스럭부스럭.
마른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쑤셔 넣자 불길은 거세게 타오른다.
딱히 그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행을 떠나면서 어렴풋이 생각은 한 적은 있다.
몇 개월이고 몇 년이고 쉬지 않고 이 세상을 떠돌다 보면 언젠가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날 동굴에서 끝내기로 마음먹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그 남자 덕분이니까.
그런데 재회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랐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그런데 그 놈의 놈팽이가 무슨 영문인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무사히 깨어나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그날 마추픽추에서 저를 만났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이라도 했다면 자신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끝이 났다면 일단 이야기는 일단락되는 것이고, 자신은 그 남자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당신 같은 사람 몰라. 그리고 그 날 밤 일도 내 알 바 아니야. 왜, 더 할 말이라도 있어?’
이런 식으로 뻔뻔스러운 대응이라니, 이 문제는 더 이상 마음의 보답이라든가 그런 말랑말랑한 문제가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관한 문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그 점이 에스메랄다를 더욱더 분노케 만들었다.
꿀꺽꿀꺽.
머그컵에 남은 다즐링 차를 한입에 마셔 버렸다. 기분 탓일까, 달콤 쌉싸름해야 할 차가 쓰디쓰게 느껴졌다.
“하아아이이야아아!”
첸의 육중한 몸이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가 다시 지면으로 내려앉았다. 건조한 지면은 지상으로 착지하는 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갈색의 모래와 말라붙은 하얀 소금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춤을 췄다.
“웨테테, 첸 씨 지금 뭐하는 거에요?”
“에헤이, 자네 정신 나갔나? 가뜩이나 건조한데 이 흙먼지 날리는 거 안 보여?”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던 하워드와 클리프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첸을 노려봤다.
가뜩이나 바싹 마른 지면에는 가만히 있어도 먼지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는데, 거기에 첸이 먼지구름을 추가로 일으켰으니 그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게 된 두 사람 입장에서는 불평이 아니 나올 수 없는 일이었다.
“헤헤. 그렇지만 영감님, 신기하지 않습니까?”
“뭐가 신기해? 자네가 몸뚱이 근수 많이 나가는 게 그리도 신기한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 첸을 클리프는 매섭게 쏘아 붙였다.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보세요, 이렇게 먼지랑 소금이 같이 휘날리는 게 말이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백 년 전에는 바다였다니. 헤헤, 참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첸은 먼지와 같이 비산하는 소금 가루를 움켜쥐며 말했다.
첸의 말마따나 백 년 전에는 바다였던 곳이, 지금은 메마른 육지로 변해 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모래 사이로 섞인 소금들만이 과거 이곳이 바다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신기하기는 뭐가 신기해? 백 년 전에 일어난 일이 퍽이나 신기하겠다. 이거 가지고 신기하다 뭐다 난리를 치는 거 보니까 자네 헌터 시험 성적표가 훤히 보이네 그려. 자네 헌터 자격증 야매로 딴 거 아니야?”
헌터 자격증을 부여하는 헌터 시험에는 전투 기술 항목만이 있는 건 아니다.
헌터 자격증 획득을 위해서는 기초 인문학에 대한 시험을 거쳐야 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대격변 이후의 인류의 변화를 다루는 역사학과 대격변 이후로의 지형 변화를 다루는 지리학이었다.
그리고 지리학 교과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 바로 대격변 이전에는 바다였다가 대격변 이후로 육지로 변해버린 지역들이었다.
이를테면 거제도 인근 지역처럼 말이다.
“아이구, 우리 영감님. 장난 한 번 친 거 가지고 되게 까칠하시네. 그깟 먼지 좀 묻으면 어때서.”
“자네한테나 그냥 먼지지. 세상 사람이 다 자네같이 둔해 빠진 줄 알아?”
항상 청결을 최우선하는 신사 클리프는 옷에 달라붙은 먼지가 영 신경 쓰이는 듯 까칠한 반응을 보였고, 그런 클리프의 까칠한 반응에 첸은 툴툴거렸다.
원정대의 목적지인 흑색 탑을 앞에 두고 원정대원들끼리 투닥거리는 것은 지나치게 나태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피어스는 이들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보나파스 산맥을 내려온 후부터 거제도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가장 낮은 위험도의 구역인 백색 구역. 출몰하는 마물의 빈도나 그 위험도면에서 보나파스 산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안전한 구역이니 만큼 흑색 탑 도착 전까지는 대원들이 저런 방식으로나마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