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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21화)
“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왜 말이 안 되는 소리인거죠?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스스로 알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진,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세상에는 아무리 본인이 알고 싶어 하더라도 결코 알아서는 일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잖아?”
“물론 알고 있죠. 그렇지만 나는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걸요.”
“나는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야. 지옥을 가리고 있는 거지. 그녀가 아스가르드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 미친놈들은 그녀를 사냥하려 들 거야. 지구의 사람이 아스가르드 사냥개들에게 난도질당하는 걸 나보고 보고 있으라는 거야?”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S랭크의 헌터라구요. 그리고 한도 알다시피 내가 버티고 있는 한 그 놈들은 S랭크 급으로 강한 사냥개를 순순히 파견할 수 없어요.”
“얼마나 강한 사냥개가 파견되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나의 부주의로 지구의 사람이 사냥개들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 자체를 나는 용납 못해. 그 미친놈들이 물어뜯으려 드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하니까.”
와락.
한의 목소리가 평소의 자분자분한 수준을 넘어서 고성으로 바뀌려는 그 찰나에 진이 한을 끌어안았다.
“한은 말이죠, 다 좋은데…….”
“후우…….”
한은 진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열다가 그냥 포기해 버렸다.
진이 한을 안아주겠다고 마음먹으면 한은 거기에 거역해서는 안 되고 거역할 수도 없다.
그게 지난날부터 쭉 이어진 진과 한 두 사람간의 규칙. 그 규칙을 일방적으로 깨버릴 수 있는 힘은 한에게 없었다.
“너무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는 게 문제에요.”
“…….”
“한, 한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고민하는지, 왜 그렇게 저쪽 세계의 일에 지구의 사람들을 말려들지 않게 하려는지 나는 잘 알아요. 그렇지만 말이죠.”
진은 손을 뻗어 한의 등을 토닥였다.
“그게 한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지고 가야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에요. 한은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고, 또 잘하고 있어요. 그 점에 관해서는 나를 믿어도 되요. 그러니까…….”
한의 등을 두드려 주던 손이 한의 검은색 머리카락 위로 올라왔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말고, 또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에스메랄다라는 헌터 아가씨가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요제프에 대해서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그 아가씨의 운명인 거지 한의 잘못이 아니에요.”
“글쎄… 잘 모르겠네.”
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착잡해하는 기색이 묻어 나왔지만, 그 목소리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확실히 더 편안해져 있었다.
“에이, 진짜. 남자가 뭘 그런 거 가지고 고민을 해요. 그리고 막말로 그 아가씨가 아무리 감이 좋니 뭐니 해도 한이 딱 잡아떼면 그만이잖아요? 한이 아니라고 잡아떼겠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자기가 증거가 있어, 뭐가 있어?”
대뜸 커다란 목소리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진을 보며 한은 그제야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거 봐, 웃으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그럼 이제 이런 몸에 안 좋은 거 그만 먹고 가서 밥 먹어요. 알겠죠, 한? 가끔씩은 좀 뻔뻔해도 괜찮아요. 철면피, 알았죠? 그럼 나는 이제 가볼게요. 안녕!”
한이 씹고 있던 보존식품을 집어 들고 진은 차원 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한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뻔뻔해도 괜찮다고? 어디 말처럼 그게 쉬워야 말이지…….”
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진의 말대로 잡아떼는 수밖에 없고, 먹던 보존식품도 진이 가지고 가버렸으니 일단 원정대가 머무는 야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밥 아직 남아 있을라나?”
한은 오솔길을 따라 숲을 빠져나갔고, 한마저 사라진 텅 빈 숲속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
눈은 감고 있지만 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요 며칠간은 몸을 많이 움직인 덕에 억지로 잠을 청하면 겨우겨우 잠들고는 했는데, 오늘은 여정이 평탄했던 탓인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찌르륵.
풀벌레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를 가르며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저기… 에스메랄다 님, 아니 에스메랄다 씨. 저기… 저기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누구인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제인 씨라고 했던가. 이번 원정을 통해 처음 만난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앙증맞은 아가씨.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열적인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주는, 대하기 다소 어려운 사람이기도 하다.
“흠, 흠. 에, 에스메랄다 씨. 저기, 시간이 다 되서… 아니, 마음 같아서는 제가 두 시간을 서도 상관이 없는데 분명히 깨워달라고 말씀을 하셔서… 아니, 그렇다고 제가 에스메랄다 씨를 대신하는 게 싫은 건 아니고…….”
분명히 다른 헌터들을 대할 때는 여장부라는 별명이 어울릴 법한 괄괄한 처녀가 왜 자신 앞에만 오면 이렇게 수줍은 꽃 처녀가 되는 걸까.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일어났어요. 제인 씨. 금방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인의 뜨겁디뜨거운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에스메랄다는 뒷모습을 보인 채 벗어놓았던 장구류를 장착했다.
“네, 네. 천천히 오세요, 에스메랄다 씨. 헤헤.”
에스메랄다와 잠깐 대화를 나눈 사실이 그리도 기쁜지 제인은 헤벌쭉한 미소를 지은 채 모닥불 근처로 되돌아갔다.
‘아, 이래서 원정대는 불편해.’
세간에 알려진 에스메랄다의 호칭은 설원의 마녀.
그녀가 마녀라 불리게 된 이유는 마물을 상대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솜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단체 행동을 기피한다는 점에 있었다.
유독 단체 행동을 기피하는 그녀를 두고 항간에는 사교성이 부족하네, 어린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오르니 허파에 바람이 들었네 하는 등의 평가가 있었고, 개중에는 남자 헌터와 다니다가 얄궂은 일을 당한 거 아니냐는 망측한 망상을 입에 담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가 단독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마물의 습격이나 험지에서의 노숙이 아니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건 성별과 연령을 불구하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동경과 찬사의 시선이었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동경의 시선의 이유는 참으로 다양했다.
어떤 이는 그녀의 탁월한 무력을 칭찬했고, 어떤 이는 그녀의 정확한 상황 판단력을 칭찬했으며, 어떤 이는 그녀의 해박한 지식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녀를 향한 찬사의 원인을 에스메랄다의 빼어난 외모에서 찾는 이도 있었다.
그 원인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모든 시선의 공통점은 단 하나. 바로 에스메랄다를 힘들게 한다는 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남들보다 대검을 조금 더 잘 다루고, 남들보다 조금 더 냉철하며, 남들보다 산악 지대에 조금 더 알고 있을 뿐이고, 남들보다 조금 더 피부가 하얗고, 남들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남들보다 조금 더 커다란 눈동자를 가졌을 뿐이라고
자신이 동경이나 찬사를 받아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리도 세상은 자신을 둘러쌓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까.
머리로는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몸은 부지런히 습관적으로 움직여 장구류를 장착해 나갔고, 에스메랄다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불침번을 설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준비가 다 끝났으니까 제인 씨는 가서 쉬세요.”
에스메랄다가 교대를 위해 모닥불 근처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취침을 취하러 가지 않고 쭈뼛쭈뼛 거리며 모닥불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저, 저기, 이거 별거 아니지만…….”
제인이 모닥불 근처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가 드러났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손에 들린 머그컵이었다. 머그컵에 담긴 건 따뜻한 다즐링 티.
제인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말했다.
“클리프 씨를 졸라서 얻어 놓은 거예요. 에스메랄다 씨가 불침번 서실 때 심심하실 테니까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계시면 덜 심심할 것 같아서요.”
제인의 치켜뜬 두 눈이 그녀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제인 씨는요? 제인 씨도 불침번 서시려면 지루하셨을 텐데.”
“아, 아니에요. 저는 차 좋아하지도 않고 마실 줄도 몰라요. 그런데 에스메랄다 씨가 홍차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들어서… 에헤헤.”
분명히 에스메랄다는 홍차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제인한테 해 준 적은 없는데. 도대체 이 자그마한 아가씨는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은 걸까.
하지만 기대감에 반짝반짝 거리는 제인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차마 그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기에, 에스메랄다는 제인이 내민 찻잔을 받아드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제인 씨. 감사히 마실게요.”
“헤헤, 별것도 아닌데요, 뭐. 그럼 수고하세요. 에스메랄다 씨.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에스메랄다에게 들은 그 한마디 인사가 그리도 행복한지 제인은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침낭 속으로 가서 몸을 누였다.
침낭 너머로도 연신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춤을 보건데 제인 역시 곱게 잠들기는 틀린 것 같아 보였다.
“후우.”
에스메랄다는 제인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제인이 건네고 간 다즐링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차 향이 몸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누운 채로 잠들지 못한 채 어중간한 시간을 보내느라 멍해 있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
별도 행동을 취하는 한을 제외한 원정대는 모두 열 명. 그중에서 원정대장을 맡고 있는 피어스와 저녁 식사 때의 메인 요리인 통돼지 구이를 혼자 담당하다시피 한 첸을 제외하면 원정대원은 여덟 명이었다.
원정대에 주어진 취침 시간은 모두 여덟 시간이니, 대원들이 각각 맡아야 할 불침번 시각은 각각 한 시간이었다. 즉 그녀는 앞으로 한 시간여를 혼자서 버텨야 한다.
어차피 시간도 있겠다, 그녀는 호시탐탐 튀어나올 기회를 노리는 잡생각을 굳이 억누르지 않기로 했다.
에스메랄다는 자꾸 고개를 치켜드는 상념의 타래를 둘둘 펼쳐 놓았다. 펼쳐진 생각 타래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그 남자, 한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더없이 불행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 남자는 뻔뻔했으며, 세 번째 만남에서는 턱없이 무례했다.
물론 태도나 대화 예절만을 놓고 보자면 한에게 무례하다는 딱지를 붙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입만 열면 거짓말이란 말이지.’
빤히 보이는 사실을 앞에 두고 대놓고 거짓말이라니, 이 남자를 무례하다 하지 않는다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에스메랄다는 살짝 눈을 감아보았다. 불현듯 지난겨울 그 날이 떠올랐다.
“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왜 말이 안 되는 소리인거죠?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스스로 알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진,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세상에는 아무리 본인이 알고 싶어 하더라도 결코 알아서는 일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잖아?”
“물론 알고 있죠. 그렇지만 나는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걸요.”
“나는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야. 지옥을 가리고 있는 거지. 그녀가 아스가르드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 미친놈들은 그녀를 사냥하려 들 거야. 지구의 사람이 아스가르드 사냥개들에게 난도질당하는 걸 나보고 보고 있으라는 거야?”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S랭크의 헌터라구요. 그리고 한도 알다시피 내가 버티고 있는 한 그 놈들은 S랭크 급으로 강한 사냥개를 순순히 파견할 수 없어요.”
“얼마나 강한 사냥개가 파견되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나의 부주의로 지구의 사람이 사냥개들의 표적이 된다는 사실 자체를 나는 용납 못해. 그 미친놈들이 물어뜯으려 드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하니까.”
와락.
한의 목소리가 평소의 자분자분한 수준을 넘어서 고성으로 바뀌려는 그 찰나에 진이 한을 끌어안았다.
“한은 말이죠, 다 좋은데…….”
“후우…….”
한은 진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열다가 그냥 포기해 버렸다.
진이 한을 안아주겠다고 마음먹으면 한은 거기에 거역해서는 안 되고 거역할 수도 없다.
그게 지난날부터 쭉 이어진 진과 한 두 사람간의 규칙. 그 규칙을 일방적으로 깨버릴 수 있는 힘은 한에게 없었다.
“너무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는 게 문제에요.”
“…….”
“한, 한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고민하는지, 왜 그렇게 저쪽 세계의 일에 지구의 사람들을 말려들지 않게 하려는지 나는 잘 알아요. 그렇지만 말이죠.”
진은 손을 뻗어 한의 등을 토닥였다.
“그게 한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지고 가야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에요. 한은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고, 또 잘하고 있어요. 그 점에 관해서는 나를 믿어도 되요. 그러니까…….”
한의 등을 두드려 주던 손이 한의 검은색 머리카락 위로 올라왔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말고, 또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에스메랄다라는 헌터 아가씨가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요제프에 대해서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그 아가씨의 운명인 거지 한의 잘못이 아니에요.”
“글쎄… 잘 모르겠네.”
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착잡해하는 기색이 묻어 나왔지만, 그 목소리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확실히 더 편안해져 있었다.
“에이, 진짜. 남자가 뭘 그런 거 가지고 고민을 해요. 그리고 막말로 그 아가씨가 아무리 감이 좋니 뭐니 해도 한이 딱 잡아떼면 그만이잖아요? 한이 아니라고 잡아떼겠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자기가 증거가 있어, 뭐가 있어?”
대뜸 커다란 목소리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진을 보며 한은 그제야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거 봐, 웃으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그럼 이제 이런 몸에 안 좋은 거 그만 먹고 가서 밥 먹어요. 알겠죠, 한? 가끔씩은 좀 뻔뻔해도 괜찮아요. 철면피, 알았죠? 그럼 나는 이제 가볼게요. 안녕!”
한이 씹고 있던 보존식품을 집어 들고 진은 차원 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한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뻔뻔해도 괜찮다고? 어디 말처럼 그게 쉬워야 말이지…….”
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진의 말대로 잡아떼는 수밖에 없고, 먹던 보존식품도 진이 가지고 가버렸으니 일단 원정대가 머무는 야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밥 아직 남아 있을라나?”
한은 오솔길을 따라 숲을 빠져나갔고, 한마저 사라진 텅 빈 숲속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
눈은 감고 있지만 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요 며칠간은 몸을 많이 움직인 덕에 억지로 잠을 청하면 겨우겨우 잠들고는 했는데, 오늘은 여정이 평탄했던 탓인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찌르륵.
풀벌레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를 가르며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저기… 에스메랄다 님, 아니 에스메랄다 씨. 저기… 저기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누구인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제인 씨라고 했던가. 이번 원정을 통해 처음 만난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앙증맞은 아가씨.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열적인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주는, 대하기 다소 어려운 사람이기도 하다.
“흠, 흠. 에, 에스메랄다 씨. 저기, 시간이 다 되서… 아니, 마음 같아서는 제가 두 시간을 서도 상관이 없는데 분명히 깨워달라고 말씀을 하셔서… 아니, 그렇다고 제가 에스메랄다 씨를 대신하는 게 싫은 건 아니고…….”
분명히 다른 헌터들을 대할 때는 여장부라는 별명이 어울릴 법한 괄괄한 처녀가 왜 자신 앞에만 오면 이렇게 수줍은 꽃 처녀가 되는 걸까.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일어났어요. 제인 씨. 금방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인의 뜨겁디뜨거운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에스메랄다는 뒷모습을 보인 채 벗어놓았던 장구류를 장착했다.
“네, 네. 천천히 오세요, 에스메랄다 씨. 헤헤.”
에스메랄다와 잠깐 대화를 나눈 사실이 그리도 기쁜지 제인은 헤벌쭉한 미소를 지은 채 모닥불 근처로 되돌아갔다.
‘아, 이래서 원정대는 불편해.’
세간에 알려진 에스메랄다의 호칭은 설원의 마녀.
그녀가 마녀라 불리게 된 이유는 마물을 상대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솜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단체 행동을 기피한다는 점에 있었다.
유독 단체 행동을 기피하는 그녀를 두고 항간에는 사교성이 부족하네, 어린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오르니 허파에 바람이 들었네 하는 등의 평가가 있었고, 개중에는 남자 헌터와 다니다가 얄궂은 일을 당한 거 아니냐는 망측한 망상을 입에 담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가 단독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마물의 습격이나 험지에서의 노숙이 아니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건 성별과 연령을 불구하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동경과 찬사의 시선이었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동경의 시선의 이유는 참으로 다양했다.
어떤 이는 그녀의 탁월한 무력을 칭찬했고, 어떤 이는 그녀의 정확한 상황 판단력을 칭찬했으며, 어떤 이는 그녀의 해박한 지식을 칭찬하기도 했고, 그녀를 향한 찬사의 원인을 에스메랄다의 빼어난 외모에서 찾는 이도 있었다.
그 원인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모든 시선의 공통점은 단 하나. 바로 에스메랄다를 힘들게 한다는 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남들보다 대검을 조금 더 잘 다루고, 남들보다 조금 더 냉철하며, 남들보다 산악 지대에 조금 더 알고 있을 뿐이고, 남들보다 조금 더 피부가 하얗고, 남들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남들보다 조금 더 커다란 눈동자를 가졌을 뿐이라고
자신이 동경이나 찬사를 받아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리도 세상은 자신을 둘러쌓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까.
머리로는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몸은 부지런히 습관적으로 움직여 장구류를 장착해 나갔고, 에스메랄다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불침번을 설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준비가 다 끝났으니까 제인 씨는 가서 쉬세요.”
에스메랄다가 교대를 위해 모닥불 근처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취침을 취하러 가지 않고 쭈뼛쭈뼛 거리며 모닥불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저, 저기, 이거 별거 아니지만…….”
제인이 모닥불 근처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가 드러났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손에 들린 머그컵이었다. 머그컵에 담긴 건 따뜻한 다즐링 티.
제인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말했다.
“클리프 씨를 졸라서 얻어 놓은 거예요. 에스메랄다 씨가 불침번 서실 때 심심하실 테니까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계시면 덜 심심할 것 같아서요.”
제인의 치켜뜬 두 눈이 그녀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제인 씨는요? 제인 씨도 불침번 서시려면 지루하셨을 텐데.”
“아, 아니에요. 저는 차 좋아하지도 않고 마실 줄도 몰라요. 그런데 에스메랄다 씨가 홍차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들어서… 에헤헤.”
분명히 에스메랄다는 홍차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제인한테 해 준 적은 없는데. 도대체 이 자그마한 아가씨는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은 걸까.
하지만 기대감에 반짝반짝 거리는 제인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차마 그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기에, 에스메랄다는 제인이 내민 찻잔을 받아드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제인 씨. 감사히 마실게요.”
“헤헤, 별것도 아닌데요, 뭐. 그럼 수고하세요. 에스메랄다 씨.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에스메랄다에게 들은 그 한마디 인사가 그리도 행복한지 제인은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침낭 속으로 가서 몸을 누였다.
침낭 너머로도 연신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춤을 보건데 제인 역시 곱게 잠들기는 틀린 것 같아 보였다.
“후우.”
에스메랄다는 제인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제인이 건네고 간 다즐링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차 향이 몸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누운 채로 잠들지 못한 채 어중간한 시간을 보내느라 멍해 있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
별도 행동을 취하는 한을 제외한 원정대는 모두 열 명. 그중에서 원정대장을 맡고 있는 피어스와 저녁 식사 때의 메인 요리인 통돼지 구이를 혼자 담당하다시피 한 첸을 제외하면 원정대원은 여덟 명이었다.
원정대에 주어진 취침 시간은 모두 여덟 시간이니, 대원들이 각각 맡아야 할 불침번 시각은 각각 한 시간이었다. 즉 그녀는 앞으로 한 시간여를 혼자서 버텨야 한다.
어차피 시간도 있겠다, 그녀는 호시탐탐 튀어나올 기회를 노리는 잡생각을 굳이 억누르지 않기로 했다.
에스메랄다는 자꾸 고개를 치켜드는 상념의 타래를 둘둘 펼쳐 놓았다. 펼쳐진 생각 타래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그 남자, 한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더없이 불행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 남자는 뻔뻔했으며, 세 번째 만남에서는 턱없이 무례했다.
물론 태도나 대화 예절만을 놓고 보자면 한에게 무례하다는 딱지를 붙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입만 열면 거짓말이란 말이지.’
빤히 보이는 사실을 앞에 두고 대놓고 거짓말이라니, 이 남자를 무례하다 하지 않는다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에스메랄다는 살짝 눈을 감아보았다. 불현듯 지난겨울 그 날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