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디멘션 워커 1권 (20화)


그 타이밍이 워낙에 절묘했던 터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던 한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에스메랄다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어제 밤에 한 씨의 방에 갔었어요.”
“제 방에 오셨다구요?”
“네. 아무래도 사과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니가 내 방에 왜 와?’ 라고 말하는 듯한 한의 눈빛을 ‘왜? 내가 좀 가면 안 돼?’라는 눈빛으로 응답하며 에스메랄다는 말했다.
“저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한 씨에게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고 부탁드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실례인 것 같아서 한 번 더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어젯밤에 한 씨의 방을 찾아뵈었답니다.”
에스메랄다가 스튜를 한 스푼 입으로 넘기는 동안 한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이 양반이 내 방에 찾아왔다고? 그것도 어젯밤에?
“꽤나 여러 번 노크를 했는데 통 대답이 없으시더군요. 혹시 산책이라도 다녀오셨나요?”
“아, 네. 조금 일이 있어서.”
“흠, 그런데 저녁 식사 시간에 제가 당부드리지 않았나요? 보나파스 산맥은 밤에 특히 더 위험하니 되도록이면 야외 활동을 삼가달라고.”
에스메랄다의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하고 또 평온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한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물론 한 씨가 저보다 고랭크의 헌터라면 제가 이런 당부를 드리는 것 자체가 큰 실례가 되겠지만 말이죠.”
에스메랄다의 랭크는 S, 그녀보다 더 높은 랭크는 오직 하나, SS뿐이라는 사실은 에스메랄다도, 한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어제 밤 한 씨를 찾아뵈려고 한 건 사과를 드리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답니다.”
식사를 마친 에스메랄다는 냅킨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열차 안에서 제가 한 질문 기억하시나요? 작년 겨울 마추픽추 산맥에 계시지 않았냐고 여쭤본 것 말이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한의 마음속은 격렬함을 넘어 폭발할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마추픽추? 그 상대가 에스메랄다라면 한으로서는 가장 입에 담기 싫은 대화 주제 중에 하나였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작년 겨울에 마추픽추에 있었습니다.”
“흐음, 그럼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신 건?”
“네, 혹시 그에 관련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에스메랄다는 빙긋 하는 미소를 지었다. 한이 에스메랄다를 만난 이래로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감정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미소였다.
“대외적으로는 작전 중 실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제가 한 행동은 자살에 가까울 정도로 무모한 행동이었어요. 감당 못할 적에게 맨몸으로 달려든 셈이니.”
“…….”
“작년 겨울, 저는 마추픽추에서 죽음을 맞닥쳤습니다. 만약 그때 제 앞에 나타난 그분이 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겠지요.”
귀 뒤로 넘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에스메랄다는 애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 분이라면 에스메랄다 씨를 구해준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에스메랄다를 구해준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계시나 보군요?”
한은 자신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주의하며 에스메랄다의 속을 떠 보았다.
“네, 안타깝게도 저를 구해준 그분이 누구인지 저는 모른답니다.”
한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역시 모르는구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뭐가 안타깝다는 거죠?”
“그분의 정체를 밝히는 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어머, 그런가요?”
“네, 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에스메랄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한 층 더 짙어졌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그렇게 안타까워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에스메랄다는 식기를 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 며칠간 그 사람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조금씩 보이는 것 같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말이에요, 한 씨.”
“네. 말씀하시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죠.”
에스메랄다가 그 투명한 녹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하워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에스메랄다의 추종자들은 그녀의 그 녹색 눈동자를 가리켜 요정의 눈이라고 칭하며, 그녀의 호칭은 설원의 마녀가 아니라 설원의 요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의 의견은 그들과는 달랐다. 에스메랄다에게는 설원의 마녀라는 칭호가 어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이렇게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그녀를 마녀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칭해야 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목숨을 구원받는 큰 은혜를 입었어요. 그런데 그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만날 때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뻔뻔하게 거짓말만 잔뜩 늘어놓는다면…….”
“저런.”
“그 사람은 은인에게 아주 약간은 화를 내도 괜찮은 거겠죠?”
에스메랄다는 몸을 일으켜 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래에서 올려본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더 맑았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은 천천히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답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흥.”
에스메랄다는 콧방귀를 뀌었다. 항상 냉철한 그녀치고는 무척이나 보기 드문 직설적인 감정 표현이었다. 그녀의 미소가 지금껏 이상으로, 이제껏 보지 못한 정도로 짙어졌다.
“한 번쯤은 생각해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에스메랄다는 몸을 돌려 한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남겨진 한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서둘러서 식사를 마친 게 다행이었다. 만약 아직 식사를 끝마치지 못했다면 남은 밥은 꼼짝없이 버려야 했을 터였다.
한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에스메랄다가 마지막에 보여준 그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했다면 밥을 먹을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이. 하워드, 보여? 잘 보이냐구.”
“…….”
“보이면 보인다, 안 보이면 안 보인다 대답을 해.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에헤이. 첸, 이 친구야. 좀 기다릴 줄도 알고 그래야지. 무슨 사람이 그렇게 성격이 급하누?”
“아니, 영감님. 며칠 밤낮을 달려온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데 천하태평하면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클리프와 첸이 여느 때처럼 티격태격하는 동안,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을 끝낸 하워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네, 똑똑히 보입니다. 거제도도 보이고, 그 거제도 위에 비쭉하니 솟은 커다란 탑도 보이고. 여튼 전부 보여요.”
하워드의 격앙된 목소리를 시작으로 원정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토해냈다.
드디어 일주일 넘게 달려온 여정이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100년 전에는 부산이라 불렸던, 현재 위험 랭크 백색 지역으로 분류된 KNT―446지역에 도착한 원정대. 그 원정대의 앞에 드디어 원정대가 이곳을 향하게 만든 원인, 흑색 탑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좋아,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자자, 다들 식사 준비하자고, 와칼루, 거기 불 좀 피워.”
야영할 준비를 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각이었지만, 피어스는 원정대원들에게 식사 준비를 명령했다.
흑색 탑이 관측 가능한 지점까지 다가왔고, 보나파스 산맥을 횡단하며 시간도 적지 않게 절약한 터라 무리해서 원정을 강행하는 것보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흑색 탑을 탐사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헌터들은 분주하게 오가며 식사 준비를 했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닥불 위로 큼지막한 멧돼지 통구이가 올라가고 냄비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어, 한 대장은 어디 갔어?”
그때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이 없다는 걸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원체 우렁우렁한 목소리의 소유자인지라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정대원 전부가 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 그 친구라면 잠깐 정찰 좀 하고 오겠다며 방금 나갔네.”
대원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야채를 손질하던 피어스가 대답했다.
“에, 그래요? 에이, 모처럼 내가 솜씨 좀 발휘하려고 했는데, 밥이라도 먹고 가지.”
첸은 잠시간 구시렁거렸지만 이내 다시 식사 준비에 몰두했다.
한이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원정대원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 한의 행방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를 피하셨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냄비를 휘휘 저으면서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묘한 빛을 뿜었지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흐응, 그 아가씨가 눈치를 챈 것 같다, 이 말이죠?”
“응.”
한은 바위에 걸터앉아 보존식품을 씹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한이 활동한 기록이랑 흔적은 위원장님께서 적당히 손봐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 아가씨가 무슨 수로 한이 작년 겨울에 마추픽추에 있었다고 짐작하고 있다는 거죠?”
“뭐,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래도 뭔가 눈치챈 건 확실한 거 같아. 그 당시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해도 어쨌거나 그녀가 내 목소리를 들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동굴 안은 방향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나요? 거기서 들은 목소리 가지고는 한 목소리를 유추하지 못할 텐데…….”
원정대가 머물고 있는 장소에서 제법 떨어진 숲속에서 한과 진은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회의 주제는 지난겨울 한의 행방을 턱 끝까지 추격해 들어오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의심을 어떤 방법으로 떨쳐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흐음, 그냥 무시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전부 짐작일 뿐이고.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느낌이 좀 불안해. 왠지 그녀랑은 이후로도 자주 부딪칠 것 같거든.”
진의 말에 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감각이 무언가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냥 대충 넘길 일이 아니야. 내가 마냥 아니라고 잡아떼면 이것저것 캐고 다닐 분위기인데. 에스메랄다 씨가 감이 보통이 아닌 것 같거든. 그러다 재수 없으면 키메라, 더 재수 없으면 요제프 근처까지 말해야 할지도 몰라.”
예상 못한 상황에 한은 양 미간을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만은 절대로 피해야 돼. 진도 알겠지만 그 미친놈들에 대해서 평범한 사람이 관여하는 일이 발생하는 건 절대로 안 돼.”
좀처럼 보지 못하는 한의 초조해 하는 모습에, 진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의 정리가 끝나자 한에게 말했다.
“그냥 말해 버리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