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디멘션 워커 1권 (19화)


우우우우우우―
벌판에 모습을 드러내는 망령 기사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울음소리 또한 더욱더 커졌다.
푸르륵, 푸륵.
거칠게 투레질을 하는 철갑마. 하늘 높이 솟구친 세 개의 뿔이 달린 해골 모양의 투구.
불길한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내는 보라색 갑주. 망령의 저주가 새겨진 붉은색의 방패와 사기가 서린 푸른색 검.
그리고 휑하디휑한 투구 너머로 반짝이는 청색의 눈동자.
불멸에 대한 한으로 세계를 떠도는 저주받은 망령 기사 1개 군단이 마침내 그 불길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저놈들은 여전하네.”
“망령이 괜히 망령이겠어요. 망령이 변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렇긴 한데, 구역질나는 저 모습, 이제 좀 그만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망령 기사를 앞에 둔 한과 진의 대화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태평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태연자약한 모습은 망령 기사를 분노케 했다.
우우우우우우―
망령 기사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이계의 마물 중에서도 사후 세계와 이승 사이를 떠도는 망령 기사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해 본능적인 적대감을 가진다. 그런데다가 눈앞에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보여주는 건방진 모습은 망령 기사를 한 층 더 분노케 하였다.
철그럭, 철걱, 철컥.
망령 기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들고 한을 주시했다.
히이이잉!
철갑마들이 돌격할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를 기수에게 보냈고, 망령 기사의 최선두에 위치한 망령 기사 단장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전투가 임박한 것이다.
“한, 장갑 꺼내줄까요?”
“아니, 흑색 탑에 가면 더 어마어마한 분들이 잔뜩 있을 텐데 벌써부터 밑천을 다 까발릴 수는 없지. 장갑은 필요 없고 칼만 한 자루 더 꺼내줘.”
한의 전용 무구인 장갑을 꺼내주겠다는 진의 제안을 거절한 한은 장갑 대신 진이 새로 꺼내준 칼을 한 자루 뽑아들었다.
지금껏 한이 사용했던 나이프가 다소 투박한 모양의 정글도였다면, 새로 진에게 건네받은 무기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시미터였다. 한은 오른손에는 정글도를, 왼손에는 시미터를 손에 든 채 망령 기사를 응시했다.
우워워워!
이윽고 망령 기사의 단장이 들어 올린 손을 아래로 내렸고, 망령 기사가 한을 향해 맹렬한 돌격을 시작했다.
태산이라도 깔아뭉갤 것터럼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은 돌격이었다.
수백 기의 철갑 기마병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고, 그 돌격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어떤 이가 보더라도 무모한 행동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망령 기사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살짝 굽히고 있던 다리가 펴짐과 동시에 한은 쏘아 놓은 탄환처럼 맹렬한 기세로 망령 기사단 쪽을 향해 돌진했다.
선두에서 서서 돌진하던 망령 기사 단장이 오른팔을 가로로 크게 저었다. 그러자 단장을 바로 뒤따르던 일군의 망령 기사들이 한쪽 팔과 상체를 뒤로 젖히며 투척 자세를 취했고, 이내 그 망령 기사의 손바닥 안에 푸른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워어―
기사단장의 외침과 함께 망령 기사들이 일제히 푸른 기운을 내던졌고, 그들이 내던진 푸른 기운은 한 자루 투창이 되어 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꿰뚫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망령 기사들의 투창을 한은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투창이 자신에게 닿을 정도로 접근하자, 한의 왼쪽 손에 들린 시미터가 붉은 기운을 뿜기 시작했다. 한은 투창을 향해 시미터를 휘둘렀고, 시미터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기운은 그대로 망령 기사의 투창을 집어 삼켰다.
천지라도 꿰뚫어 버릴 듯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던 투창은 허무하리만큼 어이없이 소멸해 버렸다.
우우―
하지만 망령 기사단의 공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가로로 그었던 기사단장의 손이 이번에는 세로로 크게 그어졌고, 투창병 후방에 위치해 있던 석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조준했다.
워우―
다시 한 번 기사단장의 울음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고, 석궁수들의 시위가 당겨졌다.
팽팽팽팽.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석궁의 화살을 바라보며 한은 오른손에 들린 정글도로 지면을 세게 내리쳤다.
콰앙!
그야말로 지면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엄청난 양의 흙과 모래가 비산했고, 그 비산하는 흙모래는 정글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에 이끌려 하나의 거대한 모래 방벽을 이루었다.
파바바바바박.
수십, 수백 개의 화살이 모래 방벽에 부딪쳤지만 어느 것하나 모래 방벽을 꿰뚫지 못했고,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던 한과 망령 기사단은 그야말로 지척 거리에까지 서로에게 접근하였다.
우워우―
기사단장은 이번에는 손을 아래위로 흔드는 대신 뒤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기사단 후미에 위치해 있던 중갑기병들이 기사단 최전방으로 들어왔다.
전원이 무식하리만치 커다란 방패를 든 중갑기병들은 기사단 최선두로 나서서 거대한 방패로 기사단의 최선두를 감쌌다.
불길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수십 개의 방패가 하나로 뭉친 그 광경은 마치 피를 머금은 철퇴처럼 보였고, 건방지게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가소로운 인간은 짓이겨 버릴 준비가 이미 끝난 듯했다.
그런데.
서걱.
세상을 짓이겨 버릴 듯 무자비한 기세를 뽐내던 붉은 철퇴는 건방진 인간의 손짓 한 번에 반 토막이 나버렸고, 방패를 내세운 채 돌진하던 중갑기병 대다수는 반으로 토막 난 방패마냥 몸이 이등분되고 말았다.
워, 크륵!
또 다른 지시 사항을 전달하려 했던 기사단장 또한 그 울부짖을 끝내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갔다.
기사단장의 목을 관통하고 그대로 두 토막 내버린 것은 한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새카만 정글도였다. 기사단장의 목에서 정글도를 뽑아낸 한은 지체 없이 기사단장 옆에 있는 중갑기병의 투구를 내리쳤다.
으저적.
칼보다는 망치에 짓눌렸다는 설명이 어울릴 법한 소리가 중갑기병의 투구에서 들려왔고, 으깨질 대로 으깨져 곤죽이 되어버린 중갑기병이 말에서 낙마했다.
그 중갑기병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한의 왼손이 경쾌한 속도로 움직였고, 두 명의 투창병이 가슴팍에 깊숙한 상처를 남긴 채 쓰러져 갔다.
쓰러져 가는 투창병의 투구에 각각 정글도를 한 번씩 쑤셔 박으며 확인 사살을 끝낸 한은 몸을 고개를 돌렸다.
기사단 후방에서 뼈만 남은 앙상한 손가락을 움직이며 스펠을 캐스팅하는 마도병들이 보였다.
워워워!
투창병들이 뼈로 만든 손도끼를 한이 있던 그 자리에 휘둘렀다.
후웅.
하지만 투창병들의 손도끼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한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그 자리에 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파앗.
마도병들의 등 뒤로 차원 문이 열리더니, 두 자루의 칼이 솟구쳐 나와 마도병들의 목을 꿰뚫었다.
우우우―
채 외우지 못한 스펠이 사그라들어 갔고, 그와 동시에 마도병들의 목도 그 육체와 이별을 고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전방에 위치해 있던 한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자신들의 등 뒤에서 나타난 미증유의 사태에 깜짝 놀란 마도병들은 서둘러 몸을 돌려 한을 겨냥하였다.
아니, 겨냥하려 했다.
서걱.
마도병의 몸이 채 절반도 돌기 전에 한의 시미터에 마도병의 육신이 썰려 나갔다. 떨어진 낙엽을 쓸어내듯 한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로 마도병을 도륙해 나갔다.
그러다 최후의 마도병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 한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아직 그 상당수가 잔존해 있던 투창병과 석궁병들이었다.
슈각.
시미터를 휘두를 때마다 망령 기사들의 몸에 상흔이 새겨졌고, 정글도가 그들의 투구를 꿰뚫었다.
망령 기사들은 나름대로 힘을 다해 저항을 시도했지만 이미 기사단장을 잃은 그들의 저항은 오합지졸의 수준에 불과했고, 한은 양의 무리에 뛰어든 굶주린 사자마냥 철저하고, 또 확실하게 망령 기사의 숨통을 끊어갔다.
망령 기사와 한의 칼부림은 더 이상 전투가 아니라 하나의 학살이었다.
그르르으윽…….
최후의 망령 기사의 피 끓는 소리를 끝으로 수백에 달하던 망령 기사는 모두 죽어나갔고, 한 줄기 보랏빛 연기가 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갔다.
“후우…….”
한 차례 활극을 끝낸 한은 입가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했어요, 한.”
“이제 대충 끝난 것 같지?”
한이 벌판에 도착한 지 30여분. 청소를 모두 끝낸 한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서둘러 베이스캠프로 돌아간다면 여섯 시간 정도는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망령 기사는 참 밥맛없는 놈들이지만, 좋은 점도 하나 정도는 있는 것 같아.”
“그게 뭔데요?”
“영혼부터 워낙에 썩어빠진 놈들이라 정화 의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
여타의 몬스터들이 이계에서 그 생명을 다한 영혼이 차원 문을 넘는 과정에서 일그러짐을 겪어 생성된다면, 망령 기사는 그 근본이 되는 영혼 자체가 타락한 이들.
이들을 위해 정화 의식을 해봤자 이계에 쓰레기를 투척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지금의 한이 이계인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처지라지만, 이계는 아버지의 고향.
아버지의 고향을 향해서 침을 뱉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럼 돌아가 볼까.”
“응. 자, 열차 잠시 후에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 출발할 준비하세요.”
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과 이마를 맞대었다. 베이스캠프를 떠날 때처럼, 한의 몸이 서서히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한을 품은 진은 한줄기 어둠이 되어 베이스캠프를 향해 내달렸다.

“한 그릇 더 줘.”
“아직 갈 길이 남았는데 작작 먹어. 벌써 두 그릇 째잖아.”
“내가 먹겠다는데 댁이 무슨 상관이야. 잔말 말고 한 그릇 더 푸기나 해.”
“나 거기 있는 치즈 좀 집어줘.”
“빵 남았는데 더 먹을 사람?”
줄곧 조용하던 보나파스 산은 점심 식사를 하는 원정대원들로 인해 때 아닌 소란을 겪고 있었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 헌터들 간의 킬킬거리는 소리,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한 보나파스 산. 이틀간 잰걸음으로 길을 나선 보람이 있었는지, 원정대는 보나파스 산의 끝 무렵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원정대원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한은 배급받은 빵을 스튜에 적셔서 입으로 가져가는 과정을 끝으로 점심 식사를 마무리했다.
한은 스튜 그릇을 내려놓으며 어제 아침부터 오늘 정오에 이르기까지 이틀간에 걸쳐 통과한 보나파스 산을 바라보았다.
예정에 없었던 보나파스 산 등정과 하산이었지만, 어쨌건 원정대는 보나파스 산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그것도 원정대원 전원 부상 없이.
그 결과 원정대는 5일의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며, 이제 원정대는 바야흐로 거제도에 성큼 다가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성공적인 여정을 가능하게 한 1등 공신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원정대원 전원은 에스메랄다라는 이름을 호명할 것이다.
그 에스메랄다가 스튜를 떠먹는 소리가 한의 귓가에 들렸다.
목덜미에 닿을락 말락한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스튜를 떠먹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설산을 통과하기 위해 입은 멋대가리 없이 투박하기만 한 두꺼운 털 코트도, 빵 한 덩이와 스튜 한 그릇이 덩그러니 담겨있는 조촐한 접시도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녀의 품격을 훼손하지는 못했다.
혹자는 말하고는 한다. 미인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남자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은 에스메랄다에게서 정말 많은 위안을 얻어야 할 터, 그런데 안타깝게도 에스메랄다를 보며 한은 위안은커녕 집어삼킨 빵이 목구멍에 턱 막힌 것 같은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후루룩.
에스메랄다가 스튜를 넘기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한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에스메랄다가 유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튜를 떠먹는 게 아닐 텐데 왜 한의 귓가에 그녀의 수저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떨어져서 먹어도 될 텐데…….’
에스메랄다가 한의 정면에 바싹 붙어 앉아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이 나뭇등걸에 기대 앉아 빵을 찢어서 스튜에 막 담그려는 순간, 에스메랄다가 한의 정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라든가, ‘식사 같이 하시겠어요?’라는 질문 따위는 없었다.
마치 ‘내가 여기서 먹겠다는데 네가 어쩔 거야?’라고 말하는 듯이, 제안보다는 차라리 선언에 가까운 방식으로 한의 맞은편에 앉은 에스메랄다는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고, 한은 빵가루가 목구멍에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둘러 식사를 마쳐야만 했다.
그리고 식기를 반납하는 척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이탈하려는 찰나, 에스메랄다가 불쑥 말했다.
“어제 밤에 어디 외출하셨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