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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8화)
원정대 최선두에 서서 망원경을 보며 정찰을 하던 에스메랄다가 피어스에게 말했다.
“대장님, 저기 저 절벽 보이시나요.”
“음, 보이네.”
“그럼 절벽 정상에서 우하단 방향에 동굴도 보이시겠군요?”
“음, 어디 보자. 보이네, 보여.”
“저 동굴, 아무래도 하피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하피?”
피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큰 난관이 하나 남았다는 사실을 들은 터라 아무리 냉철한 피어스라 해도 김이 빠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피어스는 고개를 흔들어 흩뜨려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다른 마물도 아니고 하피라면 그냥 놔둘 수 없는 일이었다.
“하피가 맞다면 당연히 퇴치해야지. 그런데 하피가 확실한가?”
“네. 저 동굴 앞쪽에 깔려 있는 갈색 물푸레나무, 그리고 동굴 근처에 있는 발톱 자국들.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베이스캠프를 가리켰다. 산 정상에서 쏟아지는 눈을 맞고 있는 베이스캠프는 보기만 해도 아늑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주목하는 바는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베이스캠프 옆에 있는 풀숲, 그중에서도 잎이 다 떨어져 나간 채 줄지어 늘어선 비자나무들이었다.
“설산에 사는 하피는 새끼를 배면 비자나무 잎으로 몸을 감싸 체온을 높이고 물푸레나무 가지로 둥지 바닥을 깔곤 하죠. 저 동굴에 하피, 그것도 번식기에 접어든 하피가 있는 게 확실해요.”
“번식기의 하피라면 당연히 퇴치해야지.”
다른 마물들도 매한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하피는 반드시 퇴치해야 할 마물로 유명했다.
하피를 반드시 해치워야 하는 이유는, 하피는 생존이 아닌 재미로 인간을 사냥하는 마물이며, 특히 어린 새끼들에게 인간을 이용해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곤 한다는 점에 있었다.
“저 하피는 나에게 맡겨 주게.”
피어스가 고글을 고쳐 쓰면서 말했다.
하피는 그 외피가 워낙에 단단한 탓에 총이나 활은 먹히지 않는다. 하피를 퇴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근거리에서 도검류로 목이나 날개를 베어버리는 것.
하지만 하피는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점이 하피의 퇴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의 경우 하피의 둥지마저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공중전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황. 그리고 공중전이라면 ‘음속의 피어스’의 전문 분야였다.
피어스가 고글 뒤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자 고글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피어스 주위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루시앵, 저기 동굴을 향해서 진동파 한번 갈겨주게.”
“예써, 대장.”
배레모를 눌러쓴 근육질의 헌터가 앞으로 나와 바주카포를 장전했다.
― 띠띠띠, 조준 완료. 충격파탄 발사 카운트 5, 4, 3, 2, 1. 발사.
루시앵의 어깨에 놓인 바주카포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고, 탄환이 날아갔다. 그러고는 절벽 근처에서 커다란 굉음을 터뜨리며 폭발했다.
까루루룩!
귀가 찢어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동굴에서 잠들고 있던 한 쌍의 하피가 충격파에 깜짝 놀라 둥지를 뛰쳐나왔다.
번식기에 들어가 포악함이 극에 달한 하피 한 쌍은 밉살스러운 인간들이 버글대는 것을 발견하고 원정대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흉포한 괴성을 내질렀다.
푸슛.
그와 동시에 경쾌한 소리와 함께 피어스가 몸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피어스는 허공을 밟으며 그야말로 순식간에 하피를 향해 도약했다. 어느새 피어스의 양손에는 쌍검이 들려 있었다.
까루룩.
하피는 순식간에 자신들에게 접근하는 피어스를 향해 강철 같이 단단하고 칼날 같이 날카로운 깃털을 흩뿌렸다.
하지만 쏟아지는 깃털 세례에도 불구하고 피어스의 도약은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깃털을 밟고 전진하는 피어스의 도약은 점점 더 빠르기를 더해갔다.
서걱.
암컷 하피와 피어스가 맞닿은 순간, 피어스의 쌍검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암컷 하피의 목이 피를 뿌리며 잘려 나갔다.
카루라락!
암컷 하피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수컷 하피가 흥분해서 피어스를 향해 발톱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하피의 발톱은 움츠린 몸의 탄력을 이용해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피어스에게 닿지 않았고, 오히려 피어스가 휘두른 좌수검에 한쪽 날개가 잘려져 나갔다.
카우악!!
날개가 잘려지는 고통에 수컷 하피가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수컷 하피의 몸부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피어스의 우수검이 반대쪽 날개를 목과 함께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주인을 잃은 하피의 몸은 더 이상 허공에 떠 있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추락을 시작했고, 피어스는 하피의 몸통을 사뿐히 즈려밟고 다시 절벽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동작을 마치기까지 경과한 시간은 약 10초 남짓. 그야말로 음속의 피어스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멋진 솜씨였다.
원정대 곁으로 다시 돌아온 피어스는 쌍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붉은빛을 뿜고 있는 고글을 다시 원상 복귀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원정대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하피는 퇴치했으니 조금만 더 힘냅시다. 출발!”
피어스는 박수를 치며 헌터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피어스가 보여준 놀라운 신위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헌터들은 커다란 함성으로 이에 응했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밤.
긴 하루가 끝이 나고 날짜가 교차하는 시간이 되기까지 채 10분이 남지 않은 시각.
힘든 여정을 거쳐 정상에 도달한 원정대원은 대부분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잠든 그 시각에 한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넥타이를 고쳐 매고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검은색 장갑을 조인다.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어도 모자랄 판국에 한은 무슨 일로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한이 코트의 단추를 채우고 나이프 매기를 마쳤을 무렵, 언제나처럼 홀연히 진이 나타났다.
“어머나, 한. 나 기다리고 있던 거에요? 세상에나, 이렇게 기특한 짓을 다 하고.”
“진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여느 때처럼 부스스한 모습이 아니라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의 모습을 보며 진이 반색을 했다.
“그리고 에스메랄다 씨가 휴식을 준 덕분에 오늘 하루는 푹 쉬었거든. 덕분에 밤 산책을 하기에는 딱 좋은 몸 상태야.”
밤 산책. 그래, 한은 밤 산책을 할 채비를 끝냈다. 그런데 과연 누구를 위한 밤 산책일까.
“한 군 돗자리라도 깔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느낌이 제법 정확한데요.”
“뭐, 사실 완전한 감은 아니고 그냥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어서. 아, 뭔가 거대한 덩어리가 이쪽 세상에 나타났구나 하고.”
한은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나타난 덩어리는 뭐하는 놈인데?”
“망령 기사 1개 군단.”
진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이 무심한 듯 말했지만 담고 있는 의미가 결코 무심한 내용이 아니듯, 진이 웃으며 답했지만 진의 대답 역시 웃으면서 할 대답은 아니었다.
“이야, 이거 어마어마한 놈들이 나타나셨네.”
한은 코트 자락에 매달아놓은 나이프를 꺼내서 얼굴을 비췄다. 잘 손질된 나이프에는 검은 눈의 남자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그놈들, 진이 보낸 초대장 받고 온 거는 확실한 거지?”
“너무해! 그렇니까 꼭 내가 원해서 그놈들이 여기로 넘어온 것 같잖아요.”
“진이 부른 건 아니지만 진 때문에 그놈들이 온 거는 맞잖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과 흑색 탑 지하에 있는 고대 신의 유물이 가까워짐에 따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한 거지만.
진은 지구를 지키는 수호석의 화신, 그리고 고대의 유물은 세상의 규칙을 뒤틀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이른바 신들의 유산.
이 두 개의 엄청난 권능이 서로 접근하는 걸 견디지 못하고 차원은 말 그대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자, 그럼 가보자구. 쓰레기는 청소부가 치워야지.”
나이프를 다시 칼집에 꽃아 넣는 것으로 외출할 채비를 마친 한은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은 밤은 밤이되 온통 쌓인 눈으로 빛나는 하얀 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하얀 밤 너머로 도사리고 있는 저주받은 망령 기사 무리가 한에게는 느껴졌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진이 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그러자 한의 모습이 조금씩 어둠속에 녹아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한은 하얀 밤을 가르는 한줄기 어둠이 되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말이죠. 한은 늘 손해 보는 역할이네요.”
한이 밤하늘을 가르며 아우터 존을 내달리는 동안, 한과 동행하는 진이 한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뭐가?”
“그렇잖아요. 이번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자서 망령 기사 군단과 싸워야 한다니. 그것도 이 오밤중에. 한,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서운하죠?”
“서운하지는 않아, 다만…….”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온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한 거목을 타 넘으면서 한이 대답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이 짓을 하고 다니는 걸 사람들이 눈치 채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거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한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이 모든 행위가 어둠속에 묻힌 채로 시간이 흘렀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이세계에서 넘어온 키메라를 해치우는 광경을 어떤 여인이 목격하고, 그 광경이 꼬투리가 되어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거짓말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 말이다.
우우―
초원에 누워 있던 늑대가 뭔가가 자신의 앞을 스치고 간 것을 감지하고는 긴 울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늑대의 울음이 한이 있던 그 자리에 닿을 무렵, 한은 벌써 초원의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요. 여기에 있으면 망령 기사가 나타날 거예요.”
초원을 지나 강과 초원이 만나는 벌판에 도착한 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망령 기사는 기마병을 닮은 외관이나, 기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지상을 달리는 일이 없다. 그들은 오직 차원 문을 통해서만 이동할 뿐, 결코 지구의 땅을 밟는 일이 없었다.
망령 기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진은 이 벌판을 망령 기사를 요격하기에 적절한 장소로 판단했고, 그 장소로 한을 인도한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너무나도 고귀하셔서 인간이 밟는 땅 따위는 밟지 않으신다는 그분들이 오신다 이거지?”
한 치고는 굉장히 공격적인 반응에 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 군은 여전히 망령 기사를 싫어하네요. 걔네들이 그렇게 싫어요?”
“싫다기보다는 짜증이 나. 죽어 나자빠진 되도 않은 망령 주제에 스스로를 귀족입네 하고 떠드는 그 꼬라지가 말이지.”
망령 기사는 이세계의 타락한 기사의 영혼이 영생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세상에 머무는 탓에 생겨나는 마물.
때문에 망령 기사는 여타의 마물과는 달리 스스로가 고위 기사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그 본능에 남아 그들의 입장에서는 열등한 지구의 인간이 밟는 땅을 밟으려 들지 않는다.
망령 기사들이 차원 문을 통해서만 이동하는 것도, 한이 망령 기사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우우우우우―
그때, 음울한 울음소리와 함께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벌판에 울려 퍼졌다.
“오셨네.”
한은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이 세상에 있으되 있어서는 안 되는 저주받은 기사들이 벌판 너머에서 하나둘 그 음울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정대 최선두에 서서 망원경을 보며 정찰을 하던 에스메랄다가 피어스에게 말했다.
“대장님, 저기 저 절벽 보이시나요.”
“음, 보이네.”
“그럼 절벽 정상에서 우하단 방향에 동굴도 보이시겠군요?”
“음, 어디 보자. 보이네, 보여.”
“저 동굴, 아무래도 하피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하피?”
피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큰 난관이 하나 남았다는 사실을 들은 터라 아무리 냉철한 피어스라 해도 김이 빠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피어스는 고개를 흔들어 흩뜨려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다른 마물도 아니고 하피라면 그냥 놔둘 수 없는 일이었다.
“하피가 맞다면 당연히 퇴치해야지. 그런데 하피가 확실한가?”
“네. 저 동굴 앞쪽에 깔려 있는 갈색 물푸레나무, 그리고 동굴 근처에 있는 발톱 자국들.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베이스캠프를 가리켰다. 산 정상에서 쏟아지는 눈을 맞고 있는 베이스캠프는 보기만 해도 아늑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주목하는 바는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베이스캠프 옆에 있는 풀숲, 그중에서도 잎이 다 떨어져 나간 채 줄지어 늘어선 비자나무들이었다.
“설산에 사는 하피는 새끼를 배면 비자나무 잎으로 몸을 감싸 체온을 높이고 물푸레나무 가지로 둥지 바닥을 깔곤 하죠. 저 동굴에 하피, 그것도 번식기에 접어든 하피가 있는 게 확실해요.”
“번식기의 하피라면 당연히 퇴치해야지.”
다른 마물들도 매한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하피는 반드시 퇴치해야 할 마물로 유명했다.
하피를 반드시 해치워야 하는 이유는, 하피는 생존이 아닌 재미로 인간을 사냥하는 마물이며, 특히 어린 새끼들에게 인간을 이용해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곤 한다는 점에 있었다.
“저 하피는 나에게 맡겨 주게.”
피어스가 고글을 고쳐 쓰면서 말했다.
하피는 그 외피가 워낙에 단단한 탓에 총이나 활은 먹히지 않는다. 하피를 퇴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근거리에서 도검류로 목이나 날개를 베어버리는 것.
하지만 하피는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점이 하피의 퇴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의 경우 하피의 둥지마저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공중전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황. 그리고 공중전이라면 ‘음속의 피어스’의 전문 분야였다.
피어스가 고글 뒤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자 고글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피어스 주위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루시앵, 저기 동굴을 향해서 진동파 한번 갈겨주게.”
“예써, 대장.”
배레모를 눌러쓴 근육질의 헌터가 앞으로 나와 바주카포를 장전했다.
― 띠띠띠, 조준 완료. 충격파탄 발사 카운트 5, 4, 3, 2, 1. 발사.
루시앵의 어깨에 놓인 바주카포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고, 탄환이 날아갔다. 그러고는 절벽 근처에서 커다란 굉음을 터뜨리며 폭발했다.
까루루룩!
귀가 찢어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동굴에서 잠들고 있던 한 쌍의 하피가 충격파에 깜짝 놀라 둥지를 뛰쳐나왔다.
번식기에 들어가 포악함이 극에 달한 하피 한 쌍은 밉살스러운 인간들이 버글대는 것을 발견하고 원정대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흉포한 괴성을 내질렀다.
푸슛.
그와 동시에 경쾌한 소리와 함께 피어스가 몸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피어스는 허공을 밟으며 그야말로 순식간에 하피를 향해 도약했다. 어느새 피어스의 양손에는 쌍검이 들려 있었다.
까루룩.
하피는 순식간에 자신들에게 접근하는 피어스를 향해 강철 같이 단단하고 칼날 같이 날카로운 깃털을 흩뿌렸다.
하지만 쏟아지는 깃털 세례에도 불구하고 피어스의 도약은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깃털을 밟고 전진하는 피어스의 도약은 점점 더 빠르기를 더해갔다.
서걱.
암컷 하피와 피어스가 맞닿은 순간, 피어스의 쌍검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암컷 하피의 목이 피를 뿌리며 잘려 나갔다.
카루라락!
암컷 하피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수컷 하피가 흥분해서 피어스를 향해 발톱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하피의 발톱은 움츠린 몸의 탄력을 이용해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피어스에게 닿지 않았고, 오히려 피어스가 휘두른 좌수검에 한쪽 날개가 잘려져 나갔다.
카우악!!
날개가 잘려지는 고통에 수컷 하피가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수컷 하피의 몸부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피어스의 우수검이 반대쪽 날개를 목과 함께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주인을 잃은 하피의 몸은 더 이상 허공에 떠 있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추락을 시작했고, 피어스는 하피의 몸통을 사뿐히 즈려밟고 다시 절벽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동작을 마치기까지 경과한 시간은 약 10초 남짓. 그야말로 음속의 피어스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멋진 솜씨였다.
원정대 곁으로 다시 돌아온 피어스는 쌍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붉은빛을 뿜고 있는 고글을 다시 원상 복귀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원정대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하피는 퇴치했으니 조금만 더 힘냅시다. 출발!”
피어스는 박수를 치며 헌터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피어스가 보여준 놀라운 신위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헌터들은 커다란 함성으로 이에 응했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밤.
긴 하루가 끝이 나고 날짜가 교차하는 시간이 되기까지 채 10분이 남지 않은 시각.
힘든 여정을 거쳐 정상에 도달한 원정대원은 대부분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잠든 그 시각에 한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넥타이를 고쳐 매고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검은색 장갑을 조인다.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어도 모자랄 판국에 한은 무슨 일로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한이 코트의 단추를 채우고 나이프 매기를 마쳤을 무렵, 언제나처럼 홀연히 진이 나타났다.
“어머나, 한. 나 기다리고 있던 거에요? 세상에나, 이렇게 기특한 짓을 다 하고.”
“진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여느 때처럼 부스스한 모습이 아니라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의 모습을 보며 진이 반색을 했다.
“그리고 에스메랄다 씨가 휴식을 준 덕분에 오늘 하루는 푹 쉬었거든. 덕분에 밤 산책을 하기에는 딱 좋은 몸 상태야.”
밤 산책. 그래, 한은 밤 산책을 할 채비를 끝냈다. 그런데 과연 누구를 위한 밤 산책일까.
“한 군 돗자리라도 깔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느낌이 제법 정확한데요.”
“뭐, 사실 완전한 감은 아니고 그냥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어서. 아, 뭔가 거대한 덩어리가 이쪽 세상에 나타났구나 하고.”
한은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나타난 덩어리는 뭐하는 놈인데?”
“망령 기사 1개 군단.”
진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이 무심한 듯 말했지만 담고 있는 의미가 결코 무심한 내용이 아니듯, 진이 웃으며 답했지만 진의 대답 역시 웃으면서 할 대답은 아니었다.
“이야, 이거 어마어마한 놈들이 나타나셨네.”
한은 코트 자락에 매달아놓은 나이프를 꺼내서 얼굴을 비췄다. 잘 손질된 나이프에는 검은 눈의 남자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그놈들, 진이 보낸 초대장 받고 온 거는 확실한 거지?”
“너무해! 그렇니까 꼭 내가 원해서 그놈들이 여기로 넘어온 것 같잖아요.”
“진이 부른 건 아니지만 진 때문에 그놈들이 온 거는 맞잖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과 흑색 탑 지하에 있는 고대 신의 유물이 가까워짐에 따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한 거지만.
진은 지구를 지키는 수호석의 화신, 그리고 고대의 유물은 세상의 규칙을 뒤틀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이른바 신들의 유산.
이 두 개의 엄청난 권능이 서로 접근하는 걸 견디지 못하고 차원은 말 그대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자, 그럼 가보자구. 쓰레기는 청소부가 치워야지.”
나이프를 다시 칼집에 꽃아 넣는 것으로 외출할 채비를 마친 한은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은 밤은 밤이되 온통 쌓인 눈으로 빛나는 하얀 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하얀 밤 너머로 도사리고 있는 저주받은 망령 기사 무리가 한에게는 느껴졌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진이 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그러자 한의 모습이 조금씩 어둠속에 녹아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한은 하얀 밤을 가르는 한줄기 어둠이 되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말이죠. 한은 늘 손해 보는 역할이네요.”
한이 밤하늘을 가르며 아우터 존을 내달리는 동안, 한과 동행하는 진이 한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뭐가?”
“그렇잖아요. 이번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자서 망령 기사 군단과 싸워야 한다니. 그것도 이 오밤중에. 한,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서운하죠?”
“서운하지는 않아, 다만…….”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온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한 거목을 타 넘으면서 한이 대답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이 짓을 하고 다니는 걸 사람들이 눈치 채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거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한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이 모든 행위가 어둠속에 묻힌 채로 시간이 흘렀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이세계에서 넘어온 키메라를 해치우는 광경을 어떤 여인이 목격하고, 그 광경이 꼬투리가 되어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거짓말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 말이다.
우우―
초원에 누워 있던 늑대가 뭔가가 자신의 앞을 스치고 간 것을 감지하고는 긴 울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늑대의 울음이 한이 있던 그 자리에 닿을 무렵, 한은 벌써 초원의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요. 여기에 있으면 망령 기사가 나타날 거예요.”
초원을 지나 강과 초원이 만나는 벌판에 도착한 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망령 기사는 기마병을 닮은 외관이나, 기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지상을 달리는 일이 없다. 그들은 오직 차원 문을 통해서만 이동할 뿐, 결코 지구의 땅을 밟는 일이 없었다.
망령 기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진은 이 벌판을 망령 기사를 요격하기에 적절한 장소로 판단했고, 그 장소로 한을 인도한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너무나도 고귀하셔서 인간이 밟는 땅 따위는 밟지 않으신다는 그분들이 오신다 이거지?”
한 치고는 굉장히 공격적인 반응에 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 군은 여전히 망령 기사를 싫어하네요. 걔네들이 그렇게 싫어요?”
“싫다기보다는 짜증이 나. 죽어 나자빠진 되도 않은 망령 주제에 스스로를 귀족입네 하고 떠드는 그 꼬라지가 말이지.”
망령 기사는 이세계의 타락한 기사의 영혼이 영생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세상에 머무는 탓에 생겨나는 마물.
때문에 망령 기사는 여타의 마물과는 달리 스스로가 고위 기사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그 본능에 남아 그들의 입장에서는 열등한 지구의 인간이 밟는 땅을 밟으려 들지 않는다.
망령 기사들이 차원 문을 통해서만 이동하는 것도, 한이 망령 기사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우우우우우―
그때, 음울한 울음소리와 함께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벌판에 울려 퍼졌다.
“오셨네.”
한은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이 세상에 있으되 있어서는 안 되는 저주받은 기사들이 벌판 너머에서 하나둘 그 음울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