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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7화)


“자, 여기서 잠시 쉬어가도록 할까요.”
“일동 주목, 휴식. 현 위치에서 20분간 휴식한 후 이동한다.”
에스메랄다의 지시가 원정대 전원에게 전달되었고, 원정대원들은 소복하게 쌓인 눈을 털어내고는 바위에 앉아 물을 마시거나 장구류를 정비하며 휴식을 취했다.
보나파스 산 등정을 시작한 게 이른 새벽이었으니 베이스캠프를 떠나 출발 후 네 시간이 경과한 지금, 태양이 본궤도에 올라 그 찬란한 빛을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다.
“휴우, 이거, 이거 뜻밖에 등산을 하다 보니 팔다리가 다 쑤시네.”
클리프가 짐짓 엄살을 부리며 팔을 주물렀다.
“헹, 영감님도 이제 다 되셨구만. 고작 이 정도 산에 올랐다고 헥헥 거리시니. 이거 원.”
그 딴딴한 근육질의 몸을 두터운 털가죽 외투로 덮어쓴 첸이 클리프에게 따뜻한 커피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얼씨구? 자네야말로 몸 관리 잘하게. 지금처럼 흥청망청 살다가는 내 나이 되면 방바닥에 이불 깔고 드러누워 있는 신세가 될 테니.”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클리프와 첸. 원정대와 한걸음 떨어져서 이동하던 한은 휴식을 취하는 원정대원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전원이 B랭크인 헌터들에게 있어서 자색 구역을 통과한다는 건 크나큰 모험일 텐데 헌터들의 얼굴에는 공포나 긴장감 대신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오전 중에 두 차례나 있었던 마물의 습격을 별 탈 없이 처리한 경험이 이들에게 자신감을 준 것이다.
‘괜히 산악 전문가가 아니라 이건가.’
원정대를 둘러본 한의 시선은 일행의 최선두에 서서 경계를 취하고 있는 에스메랄다에게 닿았다.
보나파스 산에 첫 발을 디딘 순간부터 두 차례에 걸쳐 마물의 습격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에스메랄다가 보여준 모습은 완벽 그 자체였다.
마물이 감지되자마자 미리 지정해둔 대형으로 인원을 배분하는 배치 명령부터, 시기적절한 지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원의 마녀라고 했지.’
진형의 최선두에 서서 그야말로 마물을 도륙하는 그 모습은 왜 그녀의 별명이 얼어붙은 천사나, 눈의 여왕이 아니라 설원의 마녀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얼음 늑대의 1차 습격, 눈싸움 큰 원숭이의 2차 습격을 격퇴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주 무기인 대검은 꺼내지도 않았다.
마물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그녀의 오른손에는 그녀가 허리에 감아둔 푸른 채찍이 들렸고, 반대쪽 손에는 냉기가 서린 짤막한 메이스가 들려 있었다.
얼음 늑대도 눈싸움 큰 원숭이도 눈 덮인 설산을 서식지로 하는 마물들, 냉기나 얼음을 무서워하는 마물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에스메랄다의 채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냉기는 마물들을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 버렸고, 혹여 운이 좋아 채찍을 피해 에스메랄다의 곁에 접근한 마물들은 그녀가 휘두른 메이스에 신체 한 부분이 으깨어져 산산조각이 되어 깨져 나갔다.
대원들이 진형을 짜서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 동안 단신으로 마물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 마물을 학살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제 저녁 관제실에서 그녀가 한에게 한 말이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에스메랄다의 실력이 빛을 발하는 건 마물들의 사냥에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나파스 산맥 초입에서 피어스의 양해를 구한 후 대원들에게 한 가지 공지 사항을 전했다. 보나파스 산을 오르는 동안은 마물들을 쓰러뜨리더라도 마물의 핵을 추출하려 들지 말 것.
마물의 시체는 다른 마물들의 습격을 부르므로 마물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는 가능한 빨리 이탈해야 한다. 따라서 마물의 핵을 추출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는 현장 지휘관 권한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엄격한 통제에 일견 불만을 가지는 헌터도 있을 법했지만, 마물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그녀의 탁월한 솜씨와 마물 격퇴에 가장 공헌이 큰 그녀가 마물 핵 추출에 워낙에 초연한 태도를 보이니, 다른 헌터들 역시 마물의 핵 추출에 욕심을 부리며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에스메랄다와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한은 그녀가 솜씨 좋은 사냥꾼이자 탁월한 리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다시 출발한다. 대원들, 다시 출발!”
원정의 재개를 알리는 피어스의 목소리가 보나파스 산 중턱에 울려 퍼졌다.
대원들은 마시던 커피를 서둘러 입안에 털어 넣고 각자의 무기를 손에 든 채 몸을 일으켰고, 원정대와 조금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걷던 한 역시 몸을 일으켰다.
서벅서벅.
원정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바스락거렸다. 눈 덮인 설산을 줄지어 오르는 10인의 헌터. 그 행렬의 최선두에는 에스메랄다가 있었다.

“잠깐만요.”
휴식을 취한 일행이 보나파스 산맥을 오른 지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에스메랄다가 손을 들어 원정대를 중단시켰다.
일행들을 멈춰 세운 에스메랄다는 몸을 숙여 땅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피어스에게 말했다.
“대장님, 아무래도 이 근처에 눈 지옥 구덩이가 있는 것 같은데, 퇴치하고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눈 지옥 구덩이?”
피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얼음 늑대나 눈싸움 원숭이가 덤벼들었을 때는 표정의 변화가 없던 피어스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릴 만큼 눈 지옥 구덩이는 까다로운 마물이었다.
눈 지옥 구덩이는 설산에 서식하는 몬스터로, 동그란 원형의 몸통에 사방으로 뻗은 가는 촉수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5∼10m 정도 크기의 중대형 몬스터였다.
마법을 다루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능력은 없지만, 눈 속에 구덩이를 파고 잠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인간을 촉수로 휘감아 집어삼키고는 하였는데, 그 교묘한 사냥 기법 덕분에 고랭크 헌터들도 퇴치에 어려움을 겪는 몬스터였다.
“네, 내린 지 이틀 된 눈 위에 일주일이 지난 눈이 다시 한 번 덧씌워져 있는 점과, 눈 속에 있는 이 지옥 구덩이의 외피 세포들… 틀림없어요.”
에스메랄다는 방금 전 퍼 올린 한 움큼의 눈을 피어스에게 보여줬다.
피어스는 에스메랄다가 건넨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다 똑같은 눈처럼 보였다.
특수 고글로 무장한 피어스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눈 속에 자그마한 백색 결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눈 지옥 구덩이의 잠복은 교묘했다.
“대원들을 동원하는 걸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퇴치해 보이겠습니다.”
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에스메랄다는 몇몇 헌터들을 지목했다. 가장 먼저 에스메랄다의 지목을 받은 건 로브를 두른 화염계 마법사 와칼루였다.
“와칼루 씨, 와칼루 씨는 물체에 화염을 주입하거나 덧씌우는 게 특기라 하셨죠?”
무표정한 아프리칸 와칼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메랄다는 쌓인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에스메랄다의 손바닥에서 푸르스름한 한기가 뻗어 나왔고, 바닥에 쌓인 눈들은 이내 뭉치기 시작해 어린아이 팔뚝만한 고드름을 만들었다.
“와칼루 씨, 이 고드름 위에 화염구를 덧씌워 주시겠어요?”
얼음위에 불을 덧씌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냐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은 헌터. 비 일상과 초자연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얼음 위에 불길을 덧씌우는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스피람.”
와칼루가 주문을 외우자 허공에 떠있는 고드름 주위에 불꽃이 피어나더니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고드름은 전혀 녹지 않은 채 그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클리프 씨, 애런 씨.”
고드름 준비가 끝나자 에스메랄다는 총을 쓰는 클리프와 활을 사용하는 애런을 불렀다.
“이제 저기 저 50m 전방에서 눈 지옥 구덩이가 솟아오를 거예요. 놈이 솟아오르면 놈을 과녁으로 삼아 발사해 주시면 됩니다. 워낙에 커다란 놈이니 조준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레이디 에스메랄다.”
“맡겨만 주시오.”
애런과 클리프는 에스메랄다가 말했던 지점을 향해 각자의 무기를 조준했다.
“피격 범위는 크지 않아도 되니 관통력이 강한 것들로 준비해 주세요. 아주 작은 구멍 하나만 뚫을 수 있다면 놈을 해치우는 데에는 문제없습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에스메랄다는 설원을 향해 손을 휘둘렀고, 그녀의 손짓을 따라 불길에 둘러싸인 고드름이 설원을 목표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불길을 머금은 고드름은 순식간에 눈을 녹이며 땅을 파고 들었다. 그러고 잠시 후.
꾸에에에엑!!
엄청난 비명 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눈 지옥 구덩이가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긴 원형의 몸통에는 여기저기 얼음 조각이 달라붙어 있고, 가닥가닥 뻗은 촉수에는 서리가 맺혀 있었다. 하늘을 향해 벌린 흉포한 입에는 가지런히 돋아난 날카로운 이빨이 줄지어 서 있었다.
파바밧.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애런의 화살과 클리프의 탄환이 눈 지옥 구덩이의 거대한 몸통에 명중했다.
관통력을 최우선시 하라는 에스메랄다의 조언에 따라 세형 촉을 부착한 애런의 화살과 끝머리가 뾰족한 탄두를 엄선한 클리프의 탄환은 눈 지옥 구덩이의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었다.
꾸에에에엑!!
모습을 드러낼 때와 마찬가지로 흉포한 비명을 내지르며 눈 지옥 구덩이는 설원에 쓰러졌다. 그러자 그 몸통에서는 누런 진액이 뿜어져 나왔고, 눈 지옥 구덩이의 몸은 급속도로 찌그러졌다.
그 악명 높은 이름값에 비해서 지나치게 쉽게 퇴치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만약 에스메랄다의 조언이 없었다면 퇴치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자, 그럼 다시 출발하시죠. 피어스 대장님.”
다시 한 번 산악 전문 헌터로서의 위용을 뽐낸 에스메랄다는 선두에 서서 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듯한 그 당당한 태도는 원정대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한은 다른 대원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감탄하며 에스메랄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양반, 분명히 예전에는 저렇지가 않았는데…….”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서 만난 에스메랄다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재능은 컸지만, 지금처럼 능숙하고 냉철한 헌터는 아니었다. 그런데 육 개월 남짓한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그녀를 이토록 급격하게 성장하게 만든 것일까.

“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정상이 멀지 않았다. 정상에 가면 베이스캠프가 있으니 쉴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리 조금씩만 더 힘내자고. 알았나!”
원정대원을 독려하는 피어스의 목소리가 산 정상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이른 아침에 시작한 산행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이 되어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탁월한 리딩과 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은 덕에 원정대원은 부상자 없이 보나파스 산 정상 부근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단 한차례의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은 한은 더없이 쌩쌩한 상태에 있었지만.
“이야, 저기 캠프가 보인다.”
“휘유, 드디어 다 온 건가. 내 다시 한 번 산에 오르면 성을 간다, 성을 갈어.”
정상에 위치한 베이스캠프가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자, 헌터들이 피곤함을 달래는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헌터들의 음성에는 자색 구역이라는 고랭크 지역을 무사히 통과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격려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직 마음을 놓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요.”
에스메랄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원정대원 사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