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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6화)


“두 분은 처음 뵙네요. 발할라의 에스메랄다라고 합니다. 클리프 씨와 하워드 씨죠. 마탄의 사수라는 클리프 씨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이네요.”
에스메랄다는 클리프와 하워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막 샤워라도 하고 온 참인지 에스메랄다의 백금발 머리카락은 촉촉했고, 셔츠와 실내용 바지라는 캐쥬얼한 차림의 에스메랄다는 어젯밤처럼 눈발을 헤치고 온 여전사가 아닌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에, 에스메랄다 씨?”
하워드는 서둘러 입가를 닦고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고, 클리프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에스메랄다를 바라봤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웨스트 혼 소속 하워드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레드 버팔로 소속의 클리프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이다.”
주방으로 온 에스메랄다는 살짝 고개를 숙여 두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웨스트 혼 길드에 유명한 젊은 헌터가 계시다는 말을 듣고 늘 궁금했는데 이제야 뵙게 되는군요. 저 또한 만나서 반가워요.”
발할라는 가장 많은 헌터 길드가 활동하고 있는 유럽 지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 중의 명문 길드고, 에스메랄다는 그 발할라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고위 간부였다.
랭크와 업계에서의 비중을 생각해보면 에스메랄다가 클리프와 하워드에게 하대를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에스메랄다는 두 사람에게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아침 식사를 에스메랄다 씨가 준비하셨다는 게?”
자신이 먹은 아침을 에스메랄다가 준비해 줬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하워드는 에스메랄다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준비랄 것까지는 아니고, 눈이 조금 일찍 떠지는 바람에 간단하게 만들어봤는데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에스메랄다는 입가에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띠며 말했고, 하워드는 그야말로 감격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어제 저녁 에스메랄다를 대하는 하워드의 태도를 봤을 때 그녀가 손수 준비한 아침을 먹었다는 사실은 이만저만한 감격이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한 씨를 포함해서 전부 다섯 분이라고 전달받았는데, 두 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나 보죠?”
“첸 그 친구는 지금 자고 있고, 제인 양은 그게 그러니까…….”
첸과 제인의 행방을 에스메랄다에게 알려주던 클리프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에스메랄다 씨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오.”
“준비요?”
“그게… 제인 양이 에스메랄다 양을 만나기를 꽤나 고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첫 만남을 아무렇게나 할 수 없다고 방 안에서 꽃단장 중인 것 같소만… 허허, 이 모든 게 에스메랄다 씨를 향한 제인 씨의 애정이 큰 탓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구려.”
“어머, 저한테 그렇게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시다니, 직접 만나 뵙고 너무 큰 실망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다시 한 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에스메랄다는 커피를 한 잔 따라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전에 모두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을 잊지 않고 말이다.
힐끗.
“…….”
한이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유달리 길게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면 과잉반응인 걸까.
“후아, 사진에서나 영상보다 훨씬 더 예쁘네. 더군다나 목소리까지.”
긴장이 풀린 듯 하워드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에스메랄다의 음성은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청아하지는 않았다. 여자치고는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는 발랄하기보다는 진중한 느낌을 줬으나,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와 어울려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보통 저 정도로 어린 나이에 고랭크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거만해지기 십상인데, 저 친구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그래. 한 대장은 에스메랄다 양과 어제 밤에 인사를 나눴나 보지?”
“네, 어제 밤에 잠깐.”
한은 보울에서 토스트와 훈제 햄을 접시에 옮겨 담고 커피를 따른 후 식탁에 앉았다. 만든 지 꽤 시간이 지났을 텐데 토스트는 여전히 바삭했고, 커피는 따스했다.
그렇게 남모르는 한의 한숨은 깊어져만 갔다.

그날 오후 피어스가 이끄는 원정대 1팀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에스메랄다 양, 이렇게 먼 길을 와줘서 감사하네.”
“별말씀을. 위원장님이 직접 당부하신 일인데 당연히 제가 와야죠. 오히려 처음부터 참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후 잠시간 휴식을 취한 피어스는 이내 한과 에스메랄다 두 사람을 관제실로 호출했다.
랭크만으로 따지면 S랭크인 에스메랄다가 원정대의 대장을 맡는 게 옳겠지만, 여태껏 대원들을 이끌고 온 점과 피어스가 가진 풍부한 경험을 고려해 원정대 대장은 그대로 피어스가 맡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피어스는 앞으로의 여정이 담긴 입체 영상을 허공에 띄운 채 두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우리 원정대는 이 가로슈 평원을 지날 생각이었네.”
피어스의 손에 들린 레이저 포인터가 녹색으로 표시된 평야 지역을 가리켰다.
가로슈 평원은 잠자는 자의 협곡 말엽부터 거제도까지를 연결해 주는 드넓은 평야지대였다.
위험 지역 랭크는 녹색. 원정대에 소속된 모든 헌터가 최소 B랭크임을 감안하면 녹색 구역인 가로슈 평원은 원정대에게 있어서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가로슈 평원이 지나치게 넓다는 점이었다. 가로슈 평원을 횡단하려면 원정대가 잰걸음을 걸어도 일주일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에스메랄다 양이 합류해준 덕분에 다른 선택지가 하나 생겼지.”
피어스의 레이저 포인터가 가로슈 평원의 좌측을 가리켰다.
“보나파스 산.”
레이저 포인터를 본 한이 중얼거렸다. 피어스가 한의 중얼거림을 받아 말했다.
“에스메랄다 양과 한 군도 잘 알고 있겠지만, 보나파스 산맥은 위험도 자색인 고난이도 구역이지. 하지만 보나파스 산맥을 지난다면 이틀 안에 거제도의 문턱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보나파스 산은 해발 고도 15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다지 높지 않는 산이지만, 위험도 자색 구역에 랭크된 고난이도 지역이었다. 한이나 에스메랄다, 피어스라면 모를까 다른 헌터들이 통과하기에는 힘든 구역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나파스 산을 통과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 그런데 에스메랄다 양이 와준 덕분에 보나파스 산맥을 지나는 것도 가능해졌어.”
한은 대부분 개별 활동을 했던 터라 B랭크 헌터를 동반해 자색 구역을 통과한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기에 에스메랄다를 바라봤다.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태연한 모습을 보나파스 산에 대한 자신감으로 받아들인 피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산악 지대가 위험한건 워낙에 기후가 급변하고 돌발 변수가 많기 때문이지, 마물의 위험도는 평지 지역에 비하면 다소 약한 편이야. 산악 전문가인 에스메랄다 양이 선두에 서서 원정대를 이끌어 준다면 보나파스 산맥 통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고개를 주억거린 피어스는 다시 한 번 두사람을 바라봤다. 확정을 내리기 전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두 분의 의견이 그러하시다면 저는 그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한은 피어스의 물음에 답을 줬고, 에스메랄다는 대답 대신 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문제라면 답하겠습니다.”
“위원장님이 저에게 이 원정대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거기에 있는 한이라는 헌터는 거제도까지는 원정대와 동행하지만 그 이후에는 별개의 비밀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탑을 수색하는 임무는 한 씨와는 별개로 저희 원정대의 힘만으로 해야 하는 거겠네요?”
“그렇겠죠.”
“흐음…….”
에스메랄다는 이마를 살짝 덮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피어스 대장, 원정의 총 계획은 피어스 대장의 관할이지만, 현장 전투에 한해서는 저에게 지휘권을 위임한다고 하셨죠?”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네.”
아무리 피어스가 전투 경험이 풍부하다 해도 전투력 자체는 에스메랄다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기에, 피어스는 에스메랄다와 합류하기 전 전투 관련 지휘권은 그녀에게 양도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한 씨, 전투 지휘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부탁 하나만 드리죠.”
피어스로부터 확답을 들은 에스메랄다는 한을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내일부터 거제도 도착까지의 모든 전투에서는 한 씨는 참여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이유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답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뿐만 아니라 피어스 역시 예상 외의 요청이라는 표정으로 에스메랄다를 바라봤다. 한의 공식 랭크는 전달된 바 없지만, 피어스는 내심 한의 랭크를 S 내지는 A랭크로 파악하고 있었다.
고랭크의 헌터 한 명은 소규모 국지전에서는 그 전황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자색 구역인 보나파스 산맥을 돌파하면서 한을 제외한다니, 에스메랄다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한 씨도 아시겠지만, 열 명 내외의 소규모 헌터들 간의 연합 작전에서는 팀워크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전투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팀원들의 역량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거죠.”
에스메랄다는 평온한 눈빛으로 한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피어스 대장의 실력은 제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원정대원분들의 실력은 보나파스 산맥을 통과하면서 알아가면 되는 일이구요. 그런데…….”
평정을 가장했지만 한의 심장은 살짝 요동치기 시작했다. 에스메랄가가 어제 보여줬던 그 가늘게 뜬 눈으로 한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씨의 실력에 대해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는군요. 그리고 한 씨 역시 저한테 그 진지한 실력을 보여줄 생각 같은 건 없는 것 같구요.”
분명히 에스메랄다는 헌터로서의 한의 실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건만, 어쩐 일인지 한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야,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이것저것 많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거제도에 있는 흑색 탑에 어떤 마물이 있을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저로서는 원정대원들과 최대한 많은 실전을 통해서 대원 분들을 파악하고 팀워크를 쌓아가야 합니다.”
“…….”
한 치의 부끄러움도 모르는 에스메랄다의 녹색 눈동자가 이것저것 숨기는게 많은 한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통제할 수 없고, 그 정확한 실력도 모르는 외부 요원은, 냉정히 말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물론 지금껏 원정대를 위해서 많은 노고를 해주신 한 씨에게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실례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투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거제도 도착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에스메랄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릴게요. 내일부터 거제도 도착까지의 모든 전투에 한 씨는 참여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
애초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의 설명을 듣고 보니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한이었다.
한이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너무나도 명백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당신을 부려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투가 발생해도 땀나게 뛰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한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