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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5화)
“아, 그 굉장히 슬픈 눈을 하고 있던 백금발 아가씨 말인가요? 물론 기억하죠. 요제프가 보낸 키메라에 당할 뻔한 걸 한이 구해줬잖아요.”
“어, 그 여자 헌터 말이야. 이번에 속초에 오는 열차에서 그 여자를 만났어.”
“어머, 굉장한 우연이네. 그런데 그 아가씨 그때 키메라한테 당해서 눈이 안 보이는 상태 아니었나? 그럼 한을 못 알아봤을 수도 있겠네요.”
“응, 다행히도…….”
한은 자신이 일부러 정체를 숨겼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거짓말 했다는 사실을 진이 알게 되면 ‘한은 왜 그렇게 거짓말만 하고 다니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요?’라며 따지고 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어쩌면, 불운이 겹치면…….”
다음 말은 차마 하기 껄끄러운 듯 한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 여자 헌터가 이번 원정대에 합류할 수도 있을 것 같대.”
“어머, 그럼 지금 한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응, 왜 내가 잠이 안 올 것 같다고 하는지 알겠지?”
한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리더, 에드문드, 요제프 등 사냥개에 대한 정보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만 하는 사항이다.
그런데 요제프가 보낸 키메라를 목격하고, 그 키메라를 해치우는 한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르는 에스메랄다는 한에게 있어서 가장 껄끄러운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이놈의 운명의 신이라는 작자는 어찌나 얄궂은 성격이기에 이런 상황을 만든단 말인가.
“음, 그 기차에서 만났다는 여자 헌터 분, 혹시 검은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나요?”
“아마 그럴 걸.”
“마추픽추에서 봤을 때는 이렇게 긴 머리였는데, 지금은 단발인가 보네요?”
“응, 머리를 싹둑 잘라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니까.”
“등에는 이러어엏게 커다란 대검을 메고 있고?”
“어 맞아. 대단한데, 진. 꼭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그야 당연하죠.”
진은 한의 머리로 손을 뻗어 한의 고개를 좌측으로 틀었다.
“저기 저 카메라로 직접 보고 있으니까.”
“……!!”
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당연히 정문으로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탓에 정문에 배치 된 감시 카메라만 보고 있었는데, 야밤에 찾아온 손님은 어쩐 일인지 뒷문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보다 더 커 보이는 검은색의 털모자와 그와 대비되어 더 찬란한 빛을 뿜는 백금발.
요정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녹색의 영롱한 눈동자.
창백하리만치 뽀얀 피부에 갸름하지만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턱 선과 자그마한 입술.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과 다리.
그리고 갸냘픈 체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대검.
며칠 전 기차에서 만난 그 헌터가 분명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바로…….
“한,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
“아무래도 혹시, 어쩌면, 불운이 겹치는 상황이 맞나보네요.”
“…….”
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 진이 남자는 징징거리는 거 아니라고 그랬잖아?”
“그랬죠.”
“그런데 나 이번에는 좀 징징거려야겠어. 이놈의 신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아하하, 에휴. 우리 한 군. 불쌍해서 어쩌나.”
진이 다시 한 번 한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한. 저 아가씨 여기까지 그대로 치고 들어올 기세인데 뭔가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잘못하면 불운한 정도로 안 끝날 것 같은데.”
진의 말처럼 에스메랄다는 뒷문을 열고 들어온 이후 거침없이 3층의 관제실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베이스캠프의 뒷문을 포함해서 3층의 관제실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관문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협회 공인 S랭크의 헌터.
S랭크 자격증 하나면 베이스캠프에 설치된 관문 정도는 모두 프리패스였다.
“그나저나 한, 혹시 저 아가씨한테 무슨 잘못한 거 있어요? 저 아가씨 표정이며 태도가 영 심상치 않은데?”
“글세… 뭐,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아마.”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기차에서처럼 무표정했으나, 그 발걸음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럼 힘내요, 한, 나는 이만.”
진은 올 때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관제실에 홀로 남겨진 한은 에스메랄다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지만 한이 대비를 마치기도 전에 에스메랄다가 관제실에 들이닥쳤다.
“어머, 사람이 있었네.”
에스메랄다는 그 고운 입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말했다.
‘거짓말, 불 환하게 켜진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온통 불이 꺼진 베이스캠프 건물에 한 군데만 불이 훤하게 켜져 있다면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터.
여유 있는 태도나 표정을 보건대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에스메랄다의 독백은 전혀 진실성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오호라, 너 여기 있었냐?’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태도였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면 한도 마냥 당당할 수만은 없는 처지인지라, 한은 에스메랄다의 발언의 진실함을 따지기 보다는 일단 그녀를 맞이하기로 했다.
“에스메랄다 씨 맞으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원정대 2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헌터 류 한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발할라의 에스메랄다라고 해요. 고된 원정을 처음부터 함께 하지 못하고 이제야 찾아온 저를 이처럼 반갑게 맞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에스메랄다는 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예기치 않게 재회한 에스메랄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인 에스메랄다를 보며 진은 그녀가 참 언밸런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칼은커녕 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게 생겼지만, 등 뒤에는 자신의 허리보다 더 굵어 보이는 대검을 차고 있고, 세게 움켜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곱고 자그마한 손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수많은 마물들을 우습게 때려잡는 S랭크의 헌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 발할라 길드 소속원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악수를 하는 건… 아니겠지.’
예의바른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그녀가 내민 손에는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 지대인걸 생각하면 에스메랄다 씨가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에스메랄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에스메랄다의 자그마한 손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제가 산악 전문 헌터라는 걸 말씀 드렸었나요?”
“피어스 대장이 보낸 에스메랄다 씨의 소개서에 적혀 있더군요. 산악 지대, 특히 설산에서는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능한 헌터라고.”
“과찬의 말씀이군요. 저는 아직 수행중인 몸. 그 정도의 찬사를 받을 자격은 없답니다.”
에스메랄다가 돌연 눈을 가늘게 뜨고 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저는 또 혹시 예전에 산악 지대에서 저와 마주친 적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드린 말씀인데, 그건 아닌가 보네요. 그리고…….”
“…….”
“구면이죠? 우리.”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런 것 같군요. 열차에서 뵌 적이 있으니 이번이 두 번째인가요.”
“두 번째?”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다시 한 번 가늘어졌다.
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작년 겨울 자신이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다는 말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네. 두 번째. 며칠 사이에 재회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군요.”
어차피 당당할 수 없는 처지라면 한은 차라리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거짓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뻔뻔해지기로 마음먹는다면 한은 적어도 평균 이상으로 뻔뻔해질 자신이 있었다.
“인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뵙게 되서 반가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어요.”
에스메랄다는 커다란 털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지난 겨울 마추픽추의 어둠속에서도, 오늘 관제실의 불빛 아래에서도 에스메랄다의 백금발은 그 빛을 발했다.
“저야말로, 이 험한 길을 가르고 이곳까지 와주신 에스메랄다 씨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한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조금은 어색했던 두 사람의 재회가 마무리되었다.
“피곤하실 텐데 에스메랄다 씨의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아니요. 그렇게까지 신경 쓰시게 할 수 는 없죠. 개별실은 2층이죠? 문패가 없는 방이 빈방일 테니 저는 적당한 빈방에 가서 쉬도록 하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를.”
에스메랄다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등을 돌려 관제실을 빠져나갔다.
에스메랄다의 몸가짐에서 딱히 여유를 과시해야 한다거나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노력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자연스레 느껴지는 여왕의 품격이 있었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움도 그에 일조하겠지만, 그녀에게서는 외모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후우....”
그리고 그 품격덕분에 한은 여느 때보다도 더 긴장을 해야만 했다. 에스메랄다가 사라진 걸 확인한 한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에, 되게 예쁘게 생긴 아가씨네. 한, 좋겠어요?”
어느새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진이 한의 옆구리를 찌르며 생글거렸다.
“저런 예쁜 아가씨랑 알콩달콩 두근두근 동행이라니. 요, 요 앙큼쟁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투닥투닥거리는 진을 바라보며 한이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이 말을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한은 말했다.
“총 인원이 열 명도 넘는 원정대 안에서 내가 두근거릴 이유도 없거니와, 만약에 이런 감정을 알콩달콩이라고 한다면 나는…….”
한은 지휘석의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말했다.
“차라리 평생 동안 쓸개나 냉이 뿌리, 뭐 이런 거만 빨아먹고 사는 걸 택하겠어. 심장에 좋지 않아, 이런 건.”
얼굴을 한 번 쓰다듬은 한은 몸을 일으켜 관제실의 불을 껐다. 어찌어찌 긴 하루가 끝났으니 내일을 위해서 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한, 내가 자장가 불러줄까요?”
“아니, 됐어.”
“왜요? 피곤해 보이는데 내가 잠 잘 오는 노래 불러줄게요.”
“필요 없어.”
한은 관제실의 불을 껐다. 베이스캠프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한은 익숙한 그 어둠을 가르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속초를 출발한 지 엿새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여어, 대장. 잘 주무셨나?”
“덕분에요. 클리프 씨도 편안히 주무셨나요?”
“나이가 들면 잠이 적어지는 법이지.”
“좋은 아침입니다, 대장.”
“네, 좋은 아침입니다.”
속초를 출발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
일어난 한은 세면실에서 간단히 몸을 씻고 1층에 있는 주방으로 갔다. 먼저 주방에 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클리프와 하워드가 한을 발견하고 아침 인사를 건넸다.
“커피 향이 아주 좋은데요, 클리프 씨? 홍차뿐만 아니라 커피에도 조예가 깊으셨나요?”
주방은 향긋한 커피 냄새로 가득했다. 식탁에 놓인 메뉴는 커피와 토스트, 그리고 콘비프로 맛을 낸 콘 샐러드와 훈제 햄이었다.
신선한 야채가 없고 보존식품과 건조식품 몇 가지 소스 정도가 전부인 식재료를 이용해 이 정도로 제대로 된 아침을 차려내는 걸 보면 클리프는 차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제법 솜씨가 있는 듯했다.
“응? 이거 내가 한 거 아닌데? 하워드 자네도 아니지?”
“네. 저야 주방에 오니까 아침이 준비되어 있길래 식탁에 차린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아침을 준비한 건 하워드와 클리프 두 사람 모두 아닌 듯했다.
“혹시 첸 씨?”
“아냐, 첸 그 친구 내가 아침 먹으러 가자고 깨웠더니 조금 더 자겠다고 했는걸. 제인 양이 한 거 아닌가?”
“아닙니다. 제인 그 친구, 요리는 아예 손도 댈 줄 몰라요. 샐러드는커녕 계란 프라이도 못 만드는 친구입니다.”
클리프도 아니고, 하워드도 아니고, 첸과 제인도 아니었다. 물론 한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렇다면 아침식사의 주인공은…….
“부족한 솜씨를 부려봤는데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침식사를 차린 주인공의 목소리가 계단 쪽에서 들려왔다.
“아, 그 굉장히 슬픈 눈을 하고 있던 백금발 아가씨 말인가요? 물론 기억하죠. 요제프가 보낸 키메라에 당할 뻔한 걸 한이 구해줬잖아요.”
“어, 그 여자 헌터 말이야. 이번에 속초에 오는 열차에서 그 여자를 만났어.”
“어머, 굉장한 우연이네. 그런데 그 아가씨 그때 키메라한테 당해서 눈이 안 보이는 상태 아니었나? 그럼 한을 못 알아봤을 수도 있겠네요.”
“응, 다행히도…….”
한은 자신이 일부러 정체를 숨겼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거짓말 했다는 사실을 진이 알게 되면 ‘한은 왜 그렇게 거짓말만 하고 다니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요?’라며 따지고 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어쩌면, 불운이 겹치면…….”
다음 말은 차마 하기 껄끄러운 듯 한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 여자 헌터가 이번 원정대에 합류할 수도 있을 것 같대.”
“어머, 그럼 지금 한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응, 왜 내가 잠이 안 올 것 같다고 하는지 알겠지?”
한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리더, 에드문드, 요제프 등 사냥개에 대한 정보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만 하는 사항이다.
그런데 요제프가 보낸 키메라를 목격하고, 그 키메라를 해치우는 한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르는 에스메랄다는 한에게 있어서 가장 껄끄러운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이놈의 운명의 신이라는 작자는 어찌나 얄궂은 성격이기에 이런 상황을 만든단 말인가.
“음, 그 기차에서 만났다는 여자 헌터 분, 혹시 검은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나요?”
“아마 그럴 걸.”
“마추픽추에서 봤을 때는 이렇게 긴 머리였는데, 지금은 단발인가 보네요?”
“응, 머리를 싹둑 잘라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니까.”
“등에는 이러어엏게 커다란 대검을 메고 있고?”
“어 맞아. 대단한데, 진. 꼭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그야 당연하죠.”
진은 한의 머리로 손을 뻗어 한의 고개를 좌측으로 틀었다.
“저기 저 카메라로 직접 보고 있으니까.”
“……!!”
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당연히 정문으로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탓에 정문에 배치 된 감시 카메라만 보고 있었는데, 야밤에 찾아온 손님은 어쩐 일인지 뒷문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보다 더 커 보이는 검은색의 털모자와 그와 대비되어 더 찬란한 빛을 뿜는 백금발.
요정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녹색의 영롱한 눈동자.
창백하리만치 뽀얀 피부에 갸름하지만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턱 선과 자그마한 입술.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과 다리.
그리고 갸냘픈 체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대검.
며칠 전 기차에서 만난 그 헌터가 분명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바로…….
“한,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
“아무래도 혹시, 어쩌면, 불운이 겹치는 상황이 맞나보네요.”
“…….”
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 진이 남자는 징징거리는 거 아니라고 그랬잖아?”
“그랬죠.”
“그런데 나 이번에는 좀 징징거려야겠어. 이놈의 신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아하하, 에휴. 우리 한 군. 불쌍해서 어쩌나.”
진이 다시 한 번 한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한. 저 아가씨 여기까지 그대로 치고 들어올 기세인데 뭔가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잘못하면 불운한 정도로 안 끝날 것 같은데.”
진의 말처럼 에스메랄다는 뒷문을 열고 들어온 이후 거침없이 3층의 관제실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베이스캠프의 뒷문을 포함해서 3층의 관제실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관문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협회 공인 S랭크의 헌터.
S랭크 자격증 하나면 베이스캠프에 설치된 관문 정도는 모두 프리패스였다.
“그나저나 한, 혹시 저 아가씨한테 무슨 잘못한 거 있어요? 저 아가씨 표정이며 태도가 영 심상치 않은데?”
“글세… 뭐,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아마.”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기차에서처럼 무표정했으나, 그 발걸음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럼 힘내요, 한, 나는 이만.”
진은 올 때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관제실에 홀로 남겨진 한은 에스메랄다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지만 한이 대비를 마치기도 전에 에스메랄다가 관제실에 들이닥쳤다.
“어머, 사람이 있었네.”
에스메랄다는 그 고운 입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말했다.
‘거짓말, 불 환하게 켜진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온통 불이 꺼진 베이스캠프 건물에 한 군데만 불이 훤하게 켜져 있다면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터.
여유 있는 태도나 표정을 보건대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에스메랄다의 독백은 전혀 진실성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오호라, 너 여기 있었냐?’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태도였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면 한도 마냥 당당할 수만은 없는 처지인지라, 한은 에스메랄다의 발언의 진실함을 따지기 보다는 일단 그녀를 맞이하기로 했다.
“에스메랄다 씨 맞으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원정대 2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헌터 류 한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발할라의 에스메랄다라고 해요. 고된 원정을 처음부터 함께 하지 못하고 이제야 찾아온 저를 이처럼 반갑게 맞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에스메랄다는 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예기치 않게 재회한 에스메랄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인 에스메랄다를 보며 진은 그녀가 참 언밸런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칼은커녕 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게 생겼지만, 등 뒤에는 자신의 허리보다 더 굵어 보이는 대검을 차고 있고, 세게 움켜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곱고 자그마한 손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수많은 마물들을 우습게 때려잡는 S랭크의 헌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 발할라 길드 소속원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악수를 하는 건… 아니겠지.’
예의바른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그녀가 내민 손에는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 지대인걸 생각하면 에스메랄다 씨가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에스메랄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에스메랄다의 자그마한 손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제가 산악 전문 헌터라는 걸 말씀 드렸었나요?”
“피어스 대장이 보낸 에스메랄다 씨의 소개서에 적혀 있더군요. 산악 지대, 특히 설산에서는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능한 헌터라고.”
“과찬의 말씀이군요. 저는 아직 수행중인 몸. 그 정도의 찬사를 받을 자격은 없답니다.”
에스메랄다가 돌연 눈을 가늘게 뜨고 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저는 또 혹시 예전에 산악 지대에서 저와 마주친 적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드린 말씀인데, 그건 아닌가 보네요. 그리고…….”
“…….”
“구면이죠? 우리.”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런 것 같군요. 열차에서 뵌 적이 있으니 이번이 두 번째인가요.”
“두 번째?”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다시 한 번 가늘어졌다.
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작년 겨울 자신이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다는 말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네. 두 번째. 며칠 사이에 재회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군요.”
어차피 당당할 수 없는 처지라면 한은 차라리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거짓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뻔뻔해지기로 마음먹는다면 한은 적어도 평균 이상으로 뻔뻔해질 자신이 있었다.
“인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뵙게 되서 반가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어요.”
에스메랄다는 커다란 털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지난 겨울 마추픽추의 어둠속에서도, 오늘 관제실의 불빛 아래에서도 에스메랄다의 백금발은 그 빛을 발했다.
“저야말로, 이 험한 길을 가르고 이곳까지 와주신 에스메랄다 씨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한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조금은 어색했던 두 사람의 재회가 마무리되었다.
“피곤하실 텐데 에스메랄다 씨의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아니요. 그렇게까지 신경 쓰시게 할 수 는 없죠. 개별실은 2층이죠? 문패가 없는 방이 빈방일 테니 저는 적당한 빈방에 가서 쉬도록 하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를.”
에스메랄다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등을 돌려 관제실을 빠져나갔다.
에스메랄다의 몸가짐에서 딱히 여유를 과시해야 한다거나 상대방을 제압하겠다는 노력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자연스레 느껴지는 여왕의 품격이 있었다.
물론 그녀의 아름다움도 그에 일조하겠지만, 그녀에게서는 외모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후우....”
그리고 그 품격덕분에 한은 여느 때보다도 더 긴장을 해야만 했다. 에스메랄다가 사라진 걸 확인한 한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에, 되게 예쁘게 생긴 아가씨네. 한, 좋겠어요?”
어느새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진이 한의 옆구리를 찌르며 생글거렸다.
“저런 예쁜 아가씨랑 알콩달콩 두근두근 동행이라니. 요, 요 앙큼쟁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투닥투닥거리는 진을 바라보며 한이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이 말을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한은 말했다.
“총 인원이 열 명도 넘는 원정대 안에서 내가 두근거릴 이유도 없거니와, 만약에 이런 감정을 알콩달콩이라고 한다면 나는…….”
한은 지휘석의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말했다.
“차라리 평생 동안 쓸개나 냉이 뿌리, 뭐 이런 거만 빨아먹고 사는 걸 택하겠어. 심장에 좋지 않아, 이런 건.”
얼굴을 한 번 쓰다듬은 한은 몸을 일으켜 관제실의 불을 껐다. 어찌어찌 긴 하루가 끝났으니 내일을 위해서 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한, 내가 자장가 불러줄까요?”
“아니, 됐어.”
“왜요? 피곤해 보이는데 내가 잠 잘 오는 노래 불러줄게요.”
“필요 없어.”
한은 관제실의 불을 껐다. 베이스캠프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한은 익숙한 그 어둠을 가르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속초를 출발한 지 엿새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여어, 대장. 잘 주무셨나?”
“덕분에요. 클리프 씨도 편안히 주무셨나요?”
“나이가 들면 잠이 적어지는 법이지.”
“좋은 아침입니다, 대장.”
“네, 좋은 아침입니다.”
속초를 출발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
일어난 한은 세면실에서 간단히 몸을 씻고 1층에 있는 주방으로 갔다. 먼저 주방에 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클리프와 하워드가 한을 발견하고 아침 인사를 건넸다.
“커피 향이 아주 좋은데요, 클리프 씨? 홍차뿐만 아니라 커피에도 조예가 깊으셨나요?”
주방은 향긋한 커피 냄새로 가득했다. 식탁에 놓인 메뉴는 커피와 토스트, 그리고 콘비프로 맛을 낸 콘 샐러드와 훈제 햄이었다.
신선한 야채가 없고 보존식품과 건조식품 몇 가지 소스 정도가 전부인 식재료를 이용해 이 정도로 제대로 된 아침을 차려내는 걸 보면 클리프는 차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제법 솜씨가 있는 듯했다.
“응? 이거 내가 한 거 아닌데? 하워드 자네도 아니지?”
“네. 저야 주방에 오니까 아침이 준비되어 있길래 식탁에 차린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아침을 준비한 건 하워드와 클리프 두 사람 모두 아닌 듯했다.
“혹시 첸 씨?”
“아냐, 첸 그 친구 내가 아침 먹으러 가자고 깨웠더니 조금 더 자겠다고 했는걸. 제인 양이 한 거 아닌가?”
“아닙니다. 제인 그 친구, 요리는 아예 손도 댈 줄 몰라요. 샐러드는커녕 계란 프라이도 못 만드는 친구입니다.”
클리프도 아니고, 하워드도 아니고, 첸과 제인도 아니었다. 물론 한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렇다면 아침식사의 주인공은…….
“부족한 솜씨를 부려봤는데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침식사를 차린 주인공의 목소리가 계단 쪽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