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디멘션 워커 1권 (14화)
에스메랄다… 한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서신을 통해서 한이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새로 합류할 헌터의 이름은 에스메랄다이다.
둘째, 에스메랄다라는 헌터는 산악 지대에서의 활동에 특화된 헌터이다.
이 사실은 희소식이라 할 만했다. 잠자는 자의 협곡을 벗어나서부터는 당분간 고산지대를 누벼야 한다.
여느 아우터 존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산악 지대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 변수가 난무하는 곳, 산악 지대에서의 활동에 익숙한 헌터가 일행에 합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너무나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에스메랄다는 매우 강력한 헌터일 것이다.
S랭크라는 랭크, 그리고 원정대가 팀을 짜서 이동한 거리를 단독으로 돌파해 중간에 합류한다는 사실이 에스메랄다가 강력한 헌터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에스메랄다라는 헌터에 대해서는 아는 거라고는 이름과 랭크 정도뿐.
나이도 성별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일행을 맞이하라는 주문.
꼼꼼하기로 유명한 피어스가 보낸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건성인 서신이었다.
마음같아서는 한 쪽에서도 서신을 보내 에스메랄다라는 인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협곡 사이에서 부는 돌풍이 뿜어내는 전자파 때문에 지금 서신을 보낸다 해도 피어스에게 도착하고 다시 답장을 받으려면 이틀은 꼬박 걸릴 판이었다.
그러니 난감한 상황에 처한 한으로서는 에스메랄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가 많은 것 같은 클리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 ‘설원의 마녀’라는 이름 들어본 적 없어?”
“설원의 마녀? 그 에스메랄다인가 뭔가 하는 사람 별명이 마녀인가 보지?”
“허어, 이 사람 참.”
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클리프가 혀를 찼다.
“에스메랄다.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추정. 북유럽 출생의 여성으로, 올해 초 버림받은 고원에 집단으로 출몰하는 얼음 갈퀴 도마뱀을 몰살한 공적을 인정받아 S랭크로 승급.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와 커다란 대검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헤, 헤헤.”
첸의 무지를 보다 못한 하워드가 대신 설명을 하다 갑자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헤실헤실한 웃음을 지었다.
“커다란 대검 다음에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 그게, 그렇니까…….”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는 하워드를 보며 클리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첸, 이 답답한 친구야. 하워드처럼 젊은 남자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유가 뭐겠나?”
“아, 그 에스메랄다라는 여자가 꽤 미인인가 보지?”
“뭐,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어서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군. 자, 여기 봐봐. 하워드 군이랑 제인 양만 해도 이렇게 정신을 못차리는 거 보면 평범한 생김새는 아니겠지.”
“헤, 그런데 난 왜 그동안 몰랐지.”
‘그런 사람이 있었어?’
첸의 중얼거림과 거의 동시에 한도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20대 초반의 미인 여성 헌터라, 그것도 S랭크의. 전부 사실이라면 유명세를 치루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나름 상위 랭크 헌터에 관련한 정보는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한에게 자신이 모르는 S랭크 헌터의 출몰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녀가 유명해진 건 최근의 일이니까. 사실 이전부터 눈보라의 에스메랄다라고 하면 산악 전문 헌터 사이에서는 재능 있는 유망주로 나름 유명했었지. 그런데 작년까지만 해도 재능 있는 유망주 정도로 알려져 있던 그녀가 단숨에 S랭크로 도약한 건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서 실종 사건이 발생한 이후라고 하더군.”
“실종 사건?”
“아아,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서 토벌 작전을 수행하다 조난당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
“마추픽추면 그 적색 구역 아닌가? 그 에스메랄다라는 여자가 S랭크가 된 건 올해 초라면서? 이봐요, 영감님. 적색 구역은 S랭크가 아니면 접근 금지잖아?”
“말했잖은가,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고. 왜, 어떻게 그녀가 적색 구역에 들어갔는지는 나도 몰라. 내가 들은 건 그녀가 실종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는 것 정도야.”
“뭐야, 그게. 그런 형편 좋은 조난이 있다면 나도 좀 당했으면 좋겠네.”
첸은 툴툴거렸고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워드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수수께끼의 미녀, 그게 좋은 거잖아요? 전부 다 알려진 것보다는 비밀 한두 개 있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요?”
“매력은 무슨, 비밀 같은 거 있어봤자 머리만 아프다고.”
“첸, 자네다운 말이군그래.”
“그게 그렇잖아요, 영감님. 나는 비밀이니 매력이니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알겠네.”
멧돼지 통구이를 큼지막하게 잘라내면서 첸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설원의 마녀인지 뭔지 하는 여자한테 여기 있는 이 하워드랑, 저쪽에 있는 저 제인이라는 아가씨가 푹 빠져 있다는 것 말이야.”
“뭐, 당연한 거지. 누가 뭐래도 하워드 군과 제인 양은 나나 자네와는 달리 아직 젊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스타에 열광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얼씨구? 영감님, 왜 나를 영감님이랑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겁니까? 나는 아직 젊다구요!”
“또 그런 소리를? 자네가 뭘 모르나본데 남자는 서른 넘으면 다 아저씨인 법이야. 자네나 나나 아저씨인 건 매한가지라고.”
모닥불 가에서 티격태격하는 두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한은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렸다.
‘신이시여… 왜 항상 나한테만…….’
진은 항상 한에게 말하고는 했다.
“한은 참 악운에 강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마다 한은 항상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악운 따위에 강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남들 수준의 행운이지 악운에 강한 팔자 따위가 아니라고.”
그런데… 이번에도 한의 결에는 악운이 가득한 듯싶었다.
북유럽 출신 20대 초반의 여성, 큰 키, 커다란 대검, 작년 겨울 마추픽추, 그리고 조난.
모든 단서가 하나의 결과를 가리키고 있었다.
‘푸닥거리라도 한 번 거하게 벌여야 하나.’
한은 고개를 휘저어 상념을 떨쳐버리고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소하기만 했던 고기가 갑자기 퍽퍽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스스로를 안심시켜 봐도 가슴 한편에서 스멀스멀 불길한 기운이 풍겨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대장은 그 에스메랄다라는 여자 헌터에 대해서 좀 알고 계시나?”
클리프가 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이 일행들에게 자신의 랭크를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클리프는 그간의 한의 행적을 통해 내심 한의 랭크가 S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랭크가 S라고 하니, 젊은 S랭크 간의 교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
한은 대답대신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뭔가 찜찜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길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항상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던 한이 모처럼 보여주는 낯선 표정에 클리프는 의아함을 느꼈다.
“클리프 씨. 클리프 씨는 경험이 풍부하시니 징크스나 행운의 부적 같은 것도 많이 알고 계시겠죠?”
“뭐,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몇 가지 상징 같은 건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자네처럼 강한 친구도 행운 같은 거에 의존할 필요가 있나?”
한은 씁쓸하게, 정말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행운이 필요할 것 같군요.”
협곡을 타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기분 탓인가, 유달리 서늘하게 느껴지는 밤바람을 맞으며 한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
“네, 피어스 씨. 저는 지금 4번 루트에 막 돌입했습니다. 네, 네. 내일쯤에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피어스 씨는 내일 모레나 되어야지 도착하실 것 같다는 거죠? 네. 그럼 저는 먼저 2팀이랑 접촉해서 원정대에 합류하겠습니다.”
같은 시각, 백금발의 여인이 헌터 디바이스를 통해 통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흑색 탑 원정대의 대장, 피어스인 듯했다.
“네, 협곡 사이에서는 방해 전파가 심해서 통신은 안 될 테니 어쩔 수 없죠. 아, 그리고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죠? 네, 그러니까 2팀 팀장, 한이라는 헌터 분에게는 제 이름이랑 랭크정도만 전달해 주신 거 맞죠? 제 사진이나 다른 정보는 모르는 상태라고 믿어도 되겠죠? …아뇨,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네, 피어스 씨가 신경 쓸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네, 그럼 베이스캠프에서 뵙겠습니다. 네. 피어스 씨도 조심하세요.”
피어스와의 교신을 마친 에스메랄다는 디바이스의 키패드를 눌렀다. 그러자 디바이스에서 한 장의 사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흐음∼”
에스메랄다는 눈앞에 떠오른 사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총기가 가득한 에스메랄다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대답해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기대하시는 바를 답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에스메랄다는 털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걸음을 서둘러야 할 듯싶었다. 헌터 디바이스를 팔목에 단단히 동여매고 그 위로 장갑을 조였다.
그러고는.
스르릉.
쓰러진 서리거인의 심장에 박혀있던 거대한 대검, ‘눈보라’를 뽑아서 검집에 집어넣었다.
에스메랄다의 주위는 온통 마물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외눈박이 서리거인부터, 강철 같은 비늘과 서리 고드름이 번뜩이는 얼음 귀신, 그 크기나 완력이 일반 트롤에 비할 바 아니라는 얼음 이빨 트롤까지…….
가냘픈 에스메랄다에 비하면 무서우리만큼 거대한 대형 몬스터들의 주검 사이를 에스메랄다는 여유 있고 도도하게 걸었다.
“작년 겨울, 그러니까 11월, 12월 사이에 저는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습니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 그보다 더 짙은 색의 검은 눈동자. 얄미울 정도로 정중한 말투.
그리고 피어스에게서 전송받은 원정대원의 신상명세서에서 발견한 그 남자의 모습.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에스메랄다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눈보라가 치는 밤은 더 깊어져만 갔다.
***
“…….”
으지직.
“…….”
으저적.
한은 깍지 낀 양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댄 채 모니터를 주시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전 0시 17분. 17분 전을 기점으로 한과 원정대 2팀이 잠자는 자의 협곡을 지나 베이스캠프에 들어선 지 이틀째가 되었다.
한이 예상했던 바대로 전날 정오를 기해서 원정대 2팀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2박 3일간 노숙으로 쌓인 피로를 씻어낸 후, 식료품 창고에 저장되어 있던 식품으로 식사를 마치고 한은 일행들에게 자유 시간을 줬고, 모처럼의 망중한을 즐기던 2팀 일원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것이 약 한 시간 전의 일이다.
한은 관제실에 앉아서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초초함을 달래고 있었다.
“한은 왜 안자고 있어요?”
어느새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낸 진이 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올 사람이 한 명 있어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야말로 뜬금없이 진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한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워낙에 자주 있는 일인 터라, 진의 깜짝 등장 정도는 한에게 놀라운 일 축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응∼”
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진의 손길이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 한의 뺨을 매만졌다.
“한도 피곤하잖아요. 저기 저 간이침대에서라도 잠깐 눈 좀 붙여요. 누가 오면 내가 바로 깨워줄 테니.”
“아니, 괜찮아.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누워도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아.”
진의 제안에 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별일이네. 아무데서나 머리만 대면 쿨쿨 잘만 자는 우리 잠돌이 아저씨가 잠이 안 온다니, 어디 보자. 혹시 어디 아픈가?”
진은 앞머리에 곱게 드리워진 은색 머리칼을 걷어내서 이마를 드러낸 채 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한은 눈썹을 잠깐 꿈틀거렸을 뿐, 진의 행동을 제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진, 작년 겨울에 마추픽추에서 만났던 그 여자 헌터 기억나?”
에스메랄다… 한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서신을 통해서 한이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새로 합류할 헌터의 이름은 에스메랄다이다.
둘째, 에스메랄다라는 헌터는 산악 지대에서의 활동에 특화된 헌터이다.
이 사실은 희소식이라 할 만했다. 잠자는 자의 협곡을 벗어나서부터는 당분간 고산지대를 누벼야 한다.
여느 아우터 존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산악 지대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 변수가 난무하는 곳, 산악 지대에서의 활동에 익숙한 헌터가 일행에 합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너무나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에스메랄다는 매우 강력한 헌터일 것이다.
S랭크라는 랭크, 그리고 원정대가 팀을 짜서 이동한 거리를 단독으로 돌파해 중간에 합류한다는 사실이 에스메랄다가 강력한 헌터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에스메랄다라는 헌터에 대해서는 아는 거라고는 이름과 랭크 정도뿐.
나이도 성별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일행을 맞이하라는 주문.
꼼꼼하기로 유명한 피어스가 보낸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건성인 서신이었다.
마음같아서는 한 쪽에서도 서신을 보내 에스메랄다라는 인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협곡 사이에서 부는 돌풍이 뿜어내는 전자파 때문에 지금 서신을 보낸다 해도 피어스에게 도착하고 다시 답장을 받으려면 이틀은 꼬박 걸릴 판이었다.
그러니 난감한 상황에 처한 한으로서는 에스메랄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가 많은 것 같은 클리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 ‘설원의 마녀’라는 이름 들어본 적 없어?”
“설원의 마녀? 그 에스메랄다인가 뭔가 하는 사람 별명이 마녀인가 보지?”
“허어, 이 사람 참.”
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클리프가 혀를 찼다.
“에스메랄다.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추정. 북유럽 출생의 여성으로, 올해 초 버림받은 고원에 집단으로 출몰하는 얼음 갈퀴 도마뱀을 몰살한 공적을 인정받아 S랭크로 승급.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와 커다란 대검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헤, 헤헤.”
첸의 무지를 보다 못한 하워드가 대신 설명을 하다 갑자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헤실헤실한 웃음을 지었다.
“커다란 대검 다음에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 그게, 그렇니까…….”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는 하워드를 보며 클리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첸, 이 답답한 친구야. 하워드처럼 젊은 남자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유가 뭐겠나?”
“아, 그 에스메랄다라는 여자가 꽤 미인인가 보지?”
“뭐,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어서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군. 자, 여기 봐봐. 하워드 군이랑 제인 양만 해도 이렇게 정신을 못차리는 거 보면 평범한 생김새는 아니겠지.”
“헤, 그런데 난 왜 그동안 몰랐지.”
‘그런 사람이 있었어?’
첸의 중얼거림과 거의 동시에 한도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20대 초반의 미인 여성 헌터라, 그것도 S랭크의. 전부 사실이라면 유명세를 치루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나름 상위 랭크 헌터에 관련한 정보는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한에게 자신이 모르는 S랭크 헌터의 출몰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녀가 유명해진 건 최근의 일이니까. 사실 이전부터 눈보라의 에스메랄다라고 하면 산악 전문 헌터 사이에서는 재능 있는 유망주로 나름 유명했었지. 그런데 작년까지만 해도 재능 있는 유망주 정도로 알려져 있던 그녀가 단숨에 S랭크로 도약한 건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서 실종 사건이 발생한 이후라고 하더군.”
“실종 사건?”
“아아,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서 토벌 작전을 수행하다 조난당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
“마추픽추면 그 적색 구역 아닌가? 그 에스메랄다라는 여자가 S랭크가 된 건 올해 초라면서? 이봐요, 영감님. 적색 구역은 S랭크가 아니면 접근 금지잖아?”
“말했잖은가,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고. 왜, 어떻게 그녀가 적색 구역에 들어갔는지는 나도 몰라. 내가 들은 건 그녀가 실종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는 것 정도야.”
“뭐야, 그게. 그런 형편 좋은 조난이 있다면 나도 좀 당했으면 좋겠네.”
첸은 툴툴거렸고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워드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수수께끼의 미녀, 그게 좋은 거잖아요? 전부 다 알려진 것보다는 비밀 한두 개 있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요?”
“매력은 무슨, 비밀 같은 거 있어봤자 머리만 아프다고.”
“첸, 자네다운 말이군그래.”
“그게 그렇잖아요, 영감님. 나는 비밀이니 매력이니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알겠네.”
멧돼지 통구이를 큼지막하게 잘라내면서 첸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설원의 마녀인지 뭔지 하는 여자한테 여기 있는 이 하워드랑, 저쪽에 있는 저 제인이라는 아가씨가 푹 빠져 있다는 것 말이야.”
“뭐, 당연한 거지. 누가 뭐래도 하워드 군과 제인 양은 나나 자네와는 달리 아직 젊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스타에 열광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얼씨구? 영감님, 왜 나를 영감님이랑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겁니까? 나는 아직 젊다구요!”
“또 그런 소리를? 자네가 뭘 모르나본데 남자는 서른 넘으면 다 아저씨인 법이야. 자네나 나나 아저씨인 건 매한가지라고.”
모닥불 가에서 티격태격하는 두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한은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렸다.
‘신이시여… 왜 항상 나한테만…….’
진은 항상 한에게 말하고는 했다.
“한은 참 악운에 강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마다 한은 항상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악운 따위에 강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남들 수준의 행운이지 악운에 강한 팔자 따위가 아니라고.”
그런데… 이번에도 한의 결에는 악운이 가득한 듯싶었다.
북유럽 출신 20대 초반의 여성, 큰 키, 커다란 대검, 작년 겨울 마추픽추, 그리고 조난.
모든 단서가 하나의 결과를 가리키고 있었다.
‘푸닥거리라도 한 번 거하게 벌여야 하나.’
한은 고개를 휘저어 상념을 떨쳐버리고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소하기만 했던 고기가 갑자기 퍽퍽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스스로를 안심시켜 봐도 가슴 한편에서 스멀스멀 불길한 기운이 풍겨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대장은 그 에스메랄다라는 여자 헌터에 대해서 좀 알고 계시나?”
클리프가 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이 일행들에게 자신의 랭크를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클리프는 그간의 한의 행적을 통해 내심 한의 랭크가 S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랭크가 S라고 하니, 젊은 S랭크 간의 교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
한은 대답대신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뭔가 찜찜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길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항상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던 한이 모처럼 보여주는 낯선 표정에 클리프는 의아함을 느꼈다.
“클리프 씨. 클리프 씨는 경험이 풍부하시니 징크스나 행운의 부적 같은 것도 많이 알고 계시겠죠?”
“뭐,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몇 가지 상징 같은 건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자네처럼 강한 친구도 행운 같은 거에 의존할 필요가 있나?”
한은 씁쓸하게, 정말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행운이 필요할 것 같군요.”
협곡을 타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기분 탓인가, 유달리 서늘하게 느껴지는 밤바람을 맞으며 한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네, 피어스 씨. 저는 지금 4번 루트에 막 돌입했습니다. 네, 네. 내일쯤에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피어스 씨는 내일 모레나 되어야지 도착하실 것 같다는 거죠? 네. 그럼 저는 먼저 2팀이랑 접촉해서 원정대에 합류하겠습니다.”
같은 시각, 백금발의 여인이 헌터 디바이스를 통해 통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흑색 탑 원정대의 대장, 피어스인 듯했다.
“네, 협곡 사이에서는 방해 전파가 심해서 통신은 안 될 테니 어쩔 수 없죠. 아, 그리고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죠? 네, 그러니까 2팀 팀장, 한이라는 헌터 분에게는 제 이름이랑 랭크정도만 전달해 주신 거 맞죠? 제 사진이나 다른 정보는 모르는 상태라고 믿어도 되겠죠? …아뇨,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네, 피어스 씨가 신경 쓸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네, 그럼 베이스캠프에서 뵙겠습니다. 네. 피어스 씨도 조심하세요.”
피어스와의 교신을 마친 에스메랄다는 디바이스의 키패드를 눌렀다. 그러자 디바이스에서 한 장의 사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흐음∼”
에스메랄다는 눈앞에 떠오른 사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총기가 가득한 에스메랄다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대답해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기대하시는 바를 답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에스메랄다는 털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걸음을 서둘러야 할 듯싶었다. 헌터 디바이스를 팔목에 단단히 동여매고 그 위로 장갑을 조였다.
그러고는.
스르릉.
쓰러진 서리거인의 심장에 박혀있던 거대한 대검, ‘눈보라’를 뽑아서 검집에 집어넣었다.
에스메랄다의 주위는 온통 마물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외눈박이 서리거인부터, 강철 같은 비늘과 서리 고드름이 번뜩이는 얼음 귀신, 그 크기나 완력이 일반 트롤에 비할 바 아니라는 얼음 이빨 트롤까지…….
가냘픈 에스메랄다에 비하면 무서우리만큼 거대한 대형 몬스터들의 주검 사이를 에스메랄다는 여유 있고 도도하게 걸었다.
“작년 겨울, 그러니까 11월, 12월 사이에 저는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습니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 그보다 더 짙은 색의 검은 눈동자. 얄미울 정도로 정중한 말투.
그리고 피어스에게서 전송받은 원정대원의 신상명세서에서 발견한 그 남자의 모습.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
에스메랄다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눈보라가 치는 밤은 더 깊어져만 갔다.
“…….”
으지직.
“…….”
으저적.
한은 깍지 낀 양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댄 채 모니터를 주시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전 0시 17분. 17분 전을 기점으로 한과 원정대 2팀이 잠자는 자의 협곡을 지나 베이스캠프에 들어선 지 이틀째가 되었다.
한이 예상했던 바대로 전날 정오를 기해서 원정대 2팀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2박 3일간 노숙으로 쌓인 피로를 씻어낸 후, 식료품 창고에 저장되어 있던 식품으로 식사를 마치고 한은 일행들에게 자유 시간을 줬고, 모처럼의 망중한을 즐기던 2팀 일원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것이 약 한 시간 전의 일이다.
한은 관제실에 앉아서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초초함을 달래고 있었다.
“한은 왜 안자고 있어요?”
어느새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낸 진이 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올 사람이 한 명 있어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야말로 뜬금없이 진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한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워낙에 자주 있는 일인 터라, 진의 깜짝 등장 정도는 한에게 놀라운 일 축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응∼”
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진의 손길이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 한의 뺨을 매만졌다.
“한도 피곤하잖아요. 저기 저 간이침대에서라도 잠깐 눈 좀 붙여요. 누가 오면 내가 바로 깨워줄 테니.”
“아니, 괜찮아.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누워도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아.”
진의 제안에 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별일이네. 아무데서나 머리만 대면 쿨쿨 잘만 자는 우리 잠돌이 아저씨가 잠이 안 온다니, 어디 보자. 혹시 어디 아픈가?”
진은 앞머리에 곱게 드리워진 은색 머리칼을 걷어내서 이마를 드러낸 채 한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한은 눈썹을 잠깐 꿈틀거렸을 뿐, 진의 행동을 제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진, 작년 겨울에 마추픽추에서 만났던 그 여자 헌터 기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