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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3화)
“이, 이럴 수가…….”
아직도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첸을 향해 한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 그럼 저도 시작해 볼까요.”
자신의 앞에 선 한을 본 첸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퍼렇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한의 왼손이 조금 더 빨랐다.
“어… 어… 어어!!”
첸의 오른팔을 낚아챈 한은 그 팔을 비틀어 조금 전 자신이 팔목을 올려놓았던 나뭇등걸에 올려놓았다.
“저기 있는 나이프는 그냥 손에 익어서 쓰는 거고, 사실 제 전문 분야는 주먹질이거든요.”
벗어놓은 코트에 비끄러매 놓은 나이프를 힐끔 바라보며 한이 말했다.
“첸 씨처럼 강력한 헌터 분을 상대로 잔재주를 부리는 건 예의가 아닐 테니 저도 진심으로 하겠습니다.”
첸의 손을 단단히 고정시킨 한이 오른손을 세워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첸 씨의 팔목이 이걸 버틴다면 무승부니까 한 번 더 해야겠죠. 물론 이번에도 선수는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마치 요리나 설거지 당번을 정하는 것처럼 덤덤한 한의 말투였지만, 첸의 등에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소름이 돋아났다. 자신의 도끼도 상처 하나 없이 견뎌낸 손으로 자신의 팔목을 내려친다고?
“잠깐, 잠깐만! 기다리라고!”
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눈가에 돋은 실핏줄이 첸이 느끼는 공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장, 그만 두시게. 첸 저 친구도 이제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것이네!”
“대장, 한 번만 참아요. 그 손을 내리치면 첸 씨는……!”
“대장, 대장!”
클리프와 하워드, 제인이 허둥지둥 한을 말리려 들었지만, 치켜든 한의 오른손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장, 이보쇼, 대장. 내가 잘못 했어. 그러니 한 번만.”
첸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첸과 한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지금껏 보지 못한 한의 차가운 눈빛에 첸은 아랫도리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첸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한이 입을 열었다.
“입 다물어 첸. 너는 아직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나?”
첸을 포함한 일행 모두 한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수호위원회로부터 정식으로 비밀 임무 지령을 하달 받았고, 피어스 씨로부터 2팀의 현장 지휘권을 위임받은 네 상관이다.”
“…….”
“그리고 내가 네 상관이라는 사실은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여부와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지.”
“그, 그게…….”
“그런데 명색이 헌터라는 놈이 되도 않는 고집이나 부리며 현장 지휘관의 지휘권을 뒤흔들려 들어? 네놈이 그렇고도 헌터냐?”
“아… 아으… 그게…….”
“무능한 헌터는 최악이지만, 지휘 체계를 흩뜨리는 놈은 헌터도 뭣도 아니야. 내 팀에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
첸의 우측 팔목은 한에게 붙잡혀서 뒤로 꺾여 있었다.
한이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첸의 팔꿈치 아랫부분은 기괴한 각도로 꺾여 나갈 것이고, 첸은 당분간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장, 대장의 뜻은 잘 알았네. 그러니 그쯤에서 그만 두는 게 어떤가? 첸 그 친구도 우리의 팀원이지 않나.”
일행 중에 가장 연장자인 클리프가 한을 만류하며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 팀당 4인 1조 입니다.”
한은 여전히 첸의 팔목을 움켜잡은 채로 말했다.
“잠자는 자의 계곡을 통과하는데 최적 인원은 4인 1조 입니다. 피어스 씨가 팀 인원을 5인 1조로 잡은 건 아마도 결원이나 부상자가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 같군요. 그러니까…….”
한은 첸의 팔목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고, 첸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팀당 비전투원이 한 명 정도는 발생해도 괜찮다, 이 말이죠. 그리고 한 명의 팔목을 희생해서 팀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리더로서 충분히 해봄직한 거래입니다.”
“아니, 이보시게. 물론 그 친구가 잘못을 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혹시 협곡을 통과하는 여정의 안전을 염려하시는 거라면 그런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으그으읍!”
첸의 팔꿈치 아랫부분이 비틀리기 시작했고 첸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제가 싸움을 잘 하니까, 4인 1조에 비전투원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커버 가능합니다. 팀의 리더로서의 저의 판단을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꿀꺽.
광경을 지켜보던 헌터들이 침을 삼켰다. 한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그들도 알아챈 것이다. 게다가 리더로서의 판단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한의 매서운 눈빛이 섣불리 상황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만, 그만하쇼. 내가 다 잘못했어. 대장한테 무례하게 군 거 다 사과할 테니, 한 번만 눈감아 주쇼.다시는 내 무례하게 굴지 않을 테니.”
결국 참지 못한 첸의 입에서 항복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첸의 백기 투항에도 불구하고 한은 움켜잡고 있던 첸의 팔꿈치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니까! 사실 대장의 실력을 떠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그런 거고.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시오, 쫌! 다시는 그따위 버릇없는 짓 안할 테니.”
“이보게, 대장. 나도 부탁하겠네. 첸 그 친구가 다소 거친 부분은 있지만 자기가 한 말도 지키지 않는 소인배는 아니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 친구의 무례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시게.”
첸의 입에서 2차 항복 선언이 나오고 클리프까지 나서자, 그제야 한은 팔꿈치를 놓았다.
“첸, 너는 되도 않는 행동을 통해 리더의 지휘권을 훼손하려 들었고, 팀원들에게 심대한 손해를 끼쳤다.”
“네, 뭐. 그래, 내가 전부 잘못 했시다. 정말 죄송했소, 대장.”
얼얼한 팔목을 부여잡고 있던 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나한테만 사과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팀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해라. 그리고 팀 기강을 흩트린 죄로 이번 계획의 보수는 30% 감액이다. 인정하나?”
“예, 예. 다 인정합니다.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했는데 그깟 급여 감액이 대수겠소? 클리프 영감님, 하워드, 제인, 내가 못난 짓을 하는 바람에 괜히 걱정을 끼쳐 드렸구만.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사죄드리겠소. 정말 잘못했소.”
첸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클리프가 말했던 것처럼 다소 거칠기는 해도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할 소인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이번 일은 이쯤해서 마무리하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해라, 홍 첸. 다음에도 이번 일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손목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
첸에게 마지막 경고를 한 한은 벗어놓은 코트를 다시 걸쳤고 모닥불 근처에 주저앉았다.
“피곤하셨을 텐데 그만 다들 주무시죠. 불침번은 제가 설 테니 여러분들은 마음 편히 주무셔도 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뭇등걸에 몸을 기댄 한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아버렸다.
클리프는 불침번은 교대로 서야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이 조금 전 보여준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봤을 때 며칠 밤을 지새우는 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일 테니…….
클리프는 눈을 감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잠자는 자의 협곡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어디 보자, 잘 익었나.”
큼지막한 야전 나이프가 모닥불에 매달린 채 잘 익어가고 있는 통돼지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이글이글 익어가는 돼지 껍질을 따라 흘러내리는 돼지기름이 구수한 향기를 풍기며 타올랐다.
“흠,흠 음 잘 익었네. 먹어도 되겠어.”
멧돼지를 사냥한 주인공이자 야전용 나이프의 주인인 홍 첸은 나이프를 부지런히 놀려서 부위별 돼지고기를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 한에게 건넸다.
“자, 대장. 다 익었으니 드슈.”
1인분 치고는 지나치게 수북한 접시를 보며 한은 손사래를 쳤다.
“제가 잘라 먹겠습니다. 사냥에 가장 고생한 게 첸 씨니 첸 씨 먼저 드시죠.”
“에이, 그래도 어떻게 대장이 있는데 내가 먼저 먹어. 나는 알아서 먹을 테니 대장 먼저 한 젓가락 하쇼.”
여전히 말투는 거칠고 행동은 투박했지만, 어젯밤 이후 첸이 한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말끝에 꼬박꼬박 대장이라는 칭호를 붙였으며, 한의 말에 토를 다는 행위도 일절 없었다.
“그럼 호의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한은 돼지고기 한 점을 집어 소금을 찍고 입으로 가져갔다. 근처에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향신료로만 간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돼지 노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 그럼 우리도 먹어볼까.”
멧돼지를 사냥하고, 향신료로 노린내를 잡아 불에 굽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첸이 왕성한 식욕을 뽐냈다.
첸은 그 딴딴한 체구만큼이나 많은 양을 먹었고, 하워드나 클리프 역시 평범한 남자보다는 많은 양을 먹었다.
그런데.
“호오…….”
유독 제인만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고 있었다.
“응? 자네 왜 그래? 맛이 없어? 향신료 좀 더 뿌려줄까?”
고기를 가득 삼킨 첸이 제인에게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제인은 고개를 내저을 뿐, 여전히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러더니 제인은 끝내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
제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첸에게 클리프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네 요리가 맛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니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다네.”
“영감님, 저 친구 갑자기 왜 저래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내일이면 제인이 꿈꾸는 왕자님을 만나게 될 텐데, 식욕이 없는 건 당연하지. 아, 왕자님은 아닌가?”
“왕자님?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자네도 조금 전에 대장이 브리핑해 준 거 들었잖아. 협곡 너머에 있는 베이스캠프에서 새로운 헌터랑 합류할 예정이라고.”
“네, 들었죠. 그런데 그게 왕자랑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허 참, 자네 말야. 에스메랄다가 누군지 모르나?”
클리프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메랄다? 아, 대장이 말한 이번에 베이스캠프에서 합류한다는 그 산악전문 헌터? 그런데 왜, 유명한 사람이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첸, 그리고 사실 한도 말은 안했지만 내심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라…….’
상황은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영을 하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첸이 그 모닥불 위로 통돼지를 그슬리기에 여념이 없을 무렵, 한의 헌터 디바이스로 피어스가 보낸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1팀의 이동 경로 및 베이스캠프 도착 예정 시각이 간략하게 적힌 편지, 사실 일정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일정 아랫부분에 있는 내용이었다.
― 협곡을 지나면 베이스캠프에서 헌터 한 명이 추가로 합류할 예정이네. 등록 코드명은 에스메랄다, 헌터 랭크는 S. 산악 전문 헌터인 만큼 앞으로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친구지. 혹시 2팀이 먼저 도착하거든 반갑게 맞아주길 바라네.
“이, 이럴 수가…….”
아직도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첸을 향해 한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 그럼 저도 시작해 볼까요.”
자신의 앞에 선 한을 본 첸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퍼렇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한의 왼손이 조금 더 빨랐다.
“어… 어… 어어!!”
첸의 오른팔을 낚아챈 한은 그 팔을 비틀어 조금 전 자신이 팔목을 올려놓았던 나뭇등걸에 올려놓았다.
“저기 있는 나이프는 그냥 손에 익어서 쓰는 거고, 사실 제 전문 분야는 주먹질이거든요.”
벗어놓은 코트에 비끄러매 놓은 나이프를 힐끔 바라보며 한이 말했다.
“첸 씨처럼 강력한 헌터 분을 상대로 잔재주를 부리는 건 예의가 아닐 테니 저도 진심으로 하겠습니다.”
첸의 손을 단단히 고정시킨 한이 오른손을 세워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첸 씨의 팔목이 이걸 버틴다면 무승부니까 한 번 더 해야겠죠. 물론 이번에도 선수는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마치 요리나 설거지 당번을 정하는 것처럼 덤덤한 한의 말투였지만, 첸의 등에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소름이 돋아났다. 자신의 도끼도 상처 하나 없이 견뎌낸 손으로 자신의 팔목을 내려친다고?
“잠깐, 잠깐만! 기다리라고!”
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눈가에 돋은 실핏줄이 첸이 느끼는 공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장, 그만 두시게. 첸 저 친구도 이제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것이네!”
“대장, 한 번만 참아요. 그 손을 내리치면 첸 씨는……!”
“대장, 대장!”
클리프와 하워드, 제인이 허둥지둥 한을 말리려 들었지만, 치켜든 한의 오른손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장, 이보쇼, 대장. 내가 잘못 했어. 그러니 한 번만.”
첸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첸과 한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지금껏 보지 못한 한의 차가운 눈빛에 첸은 아랫도리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첸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한이 입을 열었다.
“입 다물어 첸. 너는 아직도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나?”
첸을 포함한 일행 모두 한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수호위원회로부터 정식으로 비밀 임무 지령을 하달 받았고, 피어스 씨로부터 2팀의 현장 지휘권을 위임받은 네 상관이다.”
“…….”
“그리고 내가 네 상관이라는 사실은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여부와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지.”
“그, 그게…….”
“그런데 명색이 헌터라는 놈이 되도 않는 고집이나 부리며 현장 지휘관의 지휘권을 뒤흔들려 들어? 네놈이 그렇고도 헌터냐?”
“아… 아으… 그게…….”
“무능한 헌터는 최악이지만, 지휘 체계를 흩뜨리는 놈은 헌터도 뭣도 아니야. 내 팀에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
첸의 우측 팔목은 한에게 붙잡혀서 뒤로 꺾여 있었다.
한이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첸의 팔꿈치 아랫부분은 기괴한 각도로 꺾여 나갈 것이고, 첸은 당분간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장, 대장의 뜻은 잘 알았네. 그러니 그쯤에서 그만 두는 게 어떤가? 첸 그 친구도 우리의 팀원이지 않나.”
일행 중에 가장 연장자인 클리프가 한을 만류하며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 팀당 4인 1조 입니다.”
한은 여전히 첸의 팔목을 움켜잡은 채로 말했다.
“잠자는 자의 계곡을 통과하는데 최적 인원은 4인 1조 입니다. 피어스 씨가 팀 인원을 5인 1조로 잡은 건 아마도 결원이나 부상자가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 같군요. 그러니까…….”
한은 첸의 팔목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고, 첸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팀당 비전투원이 한 명 정도는 발생해도 괜찮다, 이 말이죠. 그리고 한 명의 팔목을 희생해서 팀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리더로서 충분히 해봄직한 거래입니다.”
“아니, 이보시게. 물론 그 친구가 잘못을 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혹시 협곡을 통과하는 여정의 안전을 염려하시는 거라면 그런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으그으읍!”
첸의 팔꿈치 아랫부분이 비틀리기 시작했고 첸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제가 싸움을 잘 하니까, 4인 1조에 비전투원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커버 가능합니다. 팀의 리더로서의 저의 판단을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꿀꺽.
광경을 지켜보던 헌터들이 침을 삼켰다. 한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그들도 알아챈 것이다. 게다가 리더로서의 판단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한의 매서운 눈빛이 섣불리 상황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만, 그만하쇼. 내가 다 잘못했어. 대장한테 무례하게 군 거 다 사과할 테니, 한 번만 눈감아 주쇼.다시는 내 무례하게 굴지 않을 테니.”
결국 참지 못한 첸의 입에서 항복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첸의 백기 투항에도 불구하고 한은 움켜잡고 있던 첸의 팔꿈치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니까! 사실 대장의 실력을 떠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그런 거고.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시오, 쫌! 다시는 그따위 버릇없는 짓 안할 테니.”
“이보게, 대장. 나도 부탁하겠네. 첸 그 친구가 다소 거친 부분은 있지만 자기가 한 말도 지키지 않는 소인배는 아니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 친구의 무례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시게.”
첸의 입에서 2차 항복 선언이 나오고 클리프까지 나서자, 그제야 한은 팔꿈치를 놓았다.
“첸, 너는 되도 않는 행동을 통해 리더의 지휘권을 훼손하려 들었고, 팀원들에게 심대한 손해를 끼쳤다.”
“네, 뭐. 그래, 내가 전부 잘못 했시다. 정말 죄송했소, 대장.”
얼얼한 팔목을 부여잡고 있던 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나한테만 사과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팀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해라. 그리고 팀 기강을 흩트린 죄로 이번 계획의 보수는 30% 감액이다. 인정하나?”
“예, 예. 다 인정합니다.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했는데 그깟 급여 감액이 대수겠소? 클리프 영감님, 하워드, 제인, 내가 못난 짓을 하는 바람에 괜히 걱정을 끼쳐 드렸구만.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사죄드리겠소. 정말 잘못했소.”
첸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클리프가 말했던 것처럼 다소 거칠기는 해도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할 소인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이번 일은 이쯤해서 마무리하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해라, 홍 첸. 다음에도 이번 일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손목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
첸에게 마지막 경고를 한 한은 벗어놓은 코트를 다시 걸쳤고 모닥불 근처에 주저앉았다.
“피곤하셨을 텐데 그만 다들 주무시죠. 불침번은 제가 설 테니 여러분들은 마음 편히 주무셔도 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뭇등걸에 몸을 기댄 한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아버렸다.
클리프는 불침번은 교대로 서야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이 조금 전 보여준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봤을 때 며칠 밤을 지새우는 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일 테니…….
클리프는 눈을 감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잠자는 자의 협곡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어디 보자, 잘 익었나.”
큼지막한 야전 나이프가 모닥불에 매달린 채 잘 익어가고 있는 통돼지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이글이글 익어가는 돼지 껍질을 따라 흘러내리는 돼지기름이 구수한 향기를 풍기며 타올랐다.
“흠,흠 음 잘 익었네. 먹어도 되겠어.”
멧돼지를 사냥한 주인공이자 야전용 나이프의 주인인 홍 첸은 나이프를 부지런히 놀려서 부위별 돼지고기를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 한에게 건넸다.
“자, 대장. 다 익었으니 드슈.”
1인분 치고는 지나치게 수북한 접시를 보며 한은 손사래를 쳤다.
“제가 잘라 먹겠습니다. 사냥에 가장 고생한 게 첸 씨니 첸 씨 먼저 드시죠.”
“에이, 그래도 어떻게 대장이 있는데 내가 먼저 먹어. 나는 알아서 먹을 테니 대장 먼저 한 젓가락 하쇼.”
여전히 말투는 거칠고 행동은 투박했지만, 어젯밤 이후 첸이 한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말끝에 꼬박꼬박 대장이라는 칭호를 붙였으며, 한의 말에 토를 다는 행위도 일절 없었다.
“그럼 호의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한은 돼지고기 한 점을 집어 소금을 찍고 입으로 가져갔다. 근처에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향신료로만 간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돼지 노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 그럼 우리도 먹어볼까.”
멧돼지를 사냥하고, 향신료로 노린내를 잡아 불에 굽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첸이 왕성한 식욕을 뽐냈다.
첸은 그 딴딴한 체구만큼이나 많은 양을 먹었고, 하워드나 클리프 역시 평범한 남자보다는 많은 양을 먹었다.
그런데.
“호오…….”
유독 제인만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고 있었다.
“응? 자네 왜 그래? 맛이 없어? 향신료 좀 더 뿌려줄까?”
고기를 가득 삼킨 첸이 제인에게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제인은 고개를 내저을 뿐, 여전히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러더니 제인은 끝내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
제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첸에게 클리프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네 요리가 맛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니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다네.”
“영감님, 저 친구 갑자기 왜 저래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내일이면 제인이 꿈꾸는 왕자님을 만나게 될 텐데, 식욕이 없는 건 당연하지. 아, 왕자님은 아닌가?”
“왕자님?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자네도 조금 전에 대장이 브리핑해 준 거 들었잖아. 협곡 너머에 있는 베이스캠프에서 새로운 헌터랑 합류할 예정이라고.”
“네, 들었죠. 그런데 그게 왕자랑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허 참, 자네 말야. 에스메랄다가 누군지 모르나?”
클리프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메랄다? 아, 대장이 말한 이번에 베이스캠프에서 합류한다는 그 산악전문 헌터? 그런데 왜, 유명한 사람이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첸, 그리고 사실 한도 말은 안했지만 내심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라…….’
상황은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영을 하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첸이 그 모닥불 위로 통돼지를 그슬리기에 여념이 없을 무렵, 한의 헌터 디바이스로 피어스가 보낸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1팀의 이동 경로 및 베이스캠프 도착 예정 시각이 간략하게 적힌 편지, 사실 일정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일정 아랫부분에 있는 내용이었다.
― 협곡을 지나면 베이스캠프에서 헌터 한 명이 추가로 합류할 예정이네. 등록 코드명은 에스메랄다, 헌터 랭크는 S. 산악 전문 헌터인 만큼 앞으로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친구지. 혹시 2팀이 먼저 도착하거든 반갑게 맞아주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