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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2화)
달그락달그락.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양철 주전자가 달그락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흐음.”
물의 온도를 확인한 클리프가 주전자를 불 위에서 내려 미리 준비해둔 컵에 물을 나누어 부었다. 물이 컵에 절반쯤 차오르자, 향긋한 홍차 향이 사방에 피어올랐다.
“자 대장, 한 잔 드시게. 비록 찻잎이 아니라 가루로 탄 짝퉁이지만, 그래도 이런 밤에는 차를 한 잔 마셔야 하는 법이라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우터 존에서 좋은 차를 마시게 되는군요.”
클리프는 뜨거운 찻잔을 한에게 건넸다. 야외 작전을 나올 때까지 주전자와 홍차 가루를 챙기는 꼼꼼함을 보건대, 홍차에 대한 클리프의 애정은 꽤나 커보였다.
‘그렇고 보니 이 영감님 브리튼 연방 출신이라 그랬지.’
“자, 자 자네들도 한 잔씩 하게.”
클리프는 나머지 인원들에게도 차를 한 잔씩 따라준 후 자신의 잔에도 물을 붓고 차를 맛있게 마시기 시작했다.
“우와, 클리프 씨가 홍차에 조예가 깊다는 건 알았지만 이정도로 차를 잘 끓이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정말, 찻집에서 파는 홍차보다 맛있는 것 같아.”
하워드와 진이 감탄사를 터뜨리자 클리프가 손사래를 쳤다.
“예끼, 이 친구들 과장이 너무 심하구먼그래. 찻잎도 아니고 가루를 쓴 가짜 홍차가 그리 맛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내젓는 손과 일치하지 않는, 흐뭇해하는 클리프의 표정을 보니 칭찬이 듣기 싫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 잠깐 차들 드시면서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차를 마시며 자신의 디바이스를 두드리던 한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지금 각자 디바이스를 확인하시면 제가 보낸 지도가 전송되어 있을 겁니다. 한 번씩 확인 부탁드립니다.”
한의 말을 들은 네 사람은 각자 자신의 디바이스를 꺼내 키패드를 조작했다. 그러자 디바이스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한 장의 입체 지도가 허공에 떠올랐다.
“지금 보고 계시는 그 지도가 저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잠자는 자의 협곡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현재 위치고, 이 붉은 선이 저희가 내일부터 통과할 예정인 루트입니다.”
한이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푸른 점이 떠오르며 일행의 현재 위치를 보여줬고, 다시 한 번 두드리자 붉은색 선이 나타났다.
“제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저희는 내일 이 시각에는 여기, 잠자는 자의 협곡 끝 무렵에 들어설 수 있을 테고, 그 다음날 정오 무렵에는 이곳에 위치한 베이스캠프에서 샤워를 한 후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일 수 있을 겁니다.”
“하아,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인이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비록 몸에다 직접 바른 것은 아니지만 청동 호랑개 나무의 수액을 옷에 바른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제인의 목소리에는 샤워를 향한 열망이 가득 맺혀 있었다.
“돌발 상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저희 쪽이 아무래도 피어스 씨의 1팀보다는 이동이 빠른 것 같으니 잘하면 하룻밤 정도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려던 한의 발언을 중단시키는 소음이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이거 보자보자 하니까 열이 뻗쳐서!!”
소음의 주인공은 조금 전부터 인상을 구기고 있던 첸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헌터들이 서로 살가운 태도로 한을 대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첸의 목소리는 그 여느 때보다 격앙되어 있었다.
“당신이 뭔데 이동 루트를 마음대로 정해? 우리도 어엿한 대원 아니야! 그러면 길을 정하기 전에 우리에게 상담 정도는 했어야지. 누가 그렇게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 앙?!”
오후부터 쌓인 불만이 여기서 폭발하는지, 첸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어투로 한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이보게, 자네 왜 그러나.”
“첸 씨, 그런 말투는 실례잖아요.”
하워드와 클리프가 첸을 뜯어 말렸지만, 흥분한 첸은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놔둬요, 영감님. 나는 처음부터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피어스 대장이라면 모를까.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어린놈 하나가 떡하니 기어 들어와서 리더니 뭐니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몸을 벌떡 일으켜서 당장이라도 한에게 덤벼들 듯한 자세를 취하는 첸을 보며 한은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클리프가 타준 홍차를 한 모금 더 마실 뿐이었다.
“거기 너, 한이라고 했지. 네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몰라도 이 바닥은 무조건 경험이고 실력이야. 네가 대장이네, 리더네 하고 싶으면 최소한 실력이라도 한 판 보이고 그러라고! 알겠냐, 앙!”
한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카운트를 헤아렸다.
‘이걸로 세 번.’
한은 빙긋 웃어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득 오래전에 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한, 한도 언젠가는 다른 헌터들과 공동 작전을 하는 경우도 있겠죠?”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흐응,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게 걱정이에요. 한은 사교성이나 친화력이 그냥 대놓고 빵점이잖아요. 그래서 헌터들 사이에서 왕따라도 당하면 어쩌나 해서.”
“사람 면전에 두고 빵점이라니, 실례잖아? 그리고 이런 성격으로 키운 게 누군데?”
“흐음, 어쩌지… 한처럼 금방 벌컥벌컥 해버리면 친구도 한 명 못 사귈 텐데. 흐음, 이 일을 어쩐다.”
“진, 걱정한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즐거워하는 표정인 거 아냐?”
“어머, 이 무슨 실례의 말씀. 정말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답니다.”
“걱정하지 마. 진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막장이 아니니까.”
“흐응, 그럼 만약에 말이죠. 공동 작전을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한에게 괜히 시비를 걸거나 하면 어쩔 거예요?”
“음, 일단 참아야지.”
“참았는데 또 그러면?”
“한 번 더 참아야지.”
“어머, 마냥 참기만 할 건가요?”
“아니, 참는 건 두 번까지만.”
“그럼 세 번째 또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때는 맛을 보여줘야지. 될 수 있는 한 호되게 말이야.”
한은 빙긋 웃었다. 세 번의 카운드도 다 됐고, 무엇보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있었던 몇 개의 사건으로 인해 한은 복잡한 상황, 어지러운 국면에 넌덜머리가 난 상태였다. 요제프, 사냥개, 거기에 카타나까지… 온통 뒤엉켜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비해, 눈앞에 있는 홍 첸이란 사내는 이 얼마나 명쾌하단 말인가.
“이동 방향과 그 일정을 정하는 건 리더의 고유한 권한이므로 여러분들에게 사전에 동의를 구할 의무는 없다, 첸 씨가 원하는 게 뭐 이런 식의 답변은 아닌 것 같고.”
한은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리고 한의 이런 행동이 거슬리는지 첸의 눈빛은 더욱더 거칠어졌다.
“그러니까 첸 씨가 하는 말은 제가 뭐 잘난 점이 있어서 여러분들의 리더를 맡느냐? 이 말이잖아요?”
“흥!”
첸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크게 콧방귀를 뀔 뿐이었고, 첸의 태도를 긍정이라고 판단한 한은 발걸음을 옮겼다.
“저도 이래 봬도 헌터입니다. 설마 장점 하나 없을까요? 제 장점을 말씀 드리자면…….”
한은 발걸음을 옮겨 첸의 바로 앞에 섰다. 땅딸막하고 떡 벌어진 체구의 첸 앞에 호리호리하고 훌쩍 큰 키의 한이 다가서니 꽤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모닥불에 모여 있던 그 누구도 웃음을 터뜨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한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풍겼던 탓이다.
“저, 싸움을 꽤 잘합니다.”
“뭐, 뭐야?”
한의 명쾌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첸이 벌컥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첸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이죠. 그리고 내친김에 단점도 말씀 드리자면…….”
한의 입가에는 예의 그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첸은 입술을 옴짝거렸다.
“인내심이 참 많이 부족합니다.”
“이익, 당신 뭐 어쩌자는 거야!!”
첸이 내뱉듯이 말을 토해냈다. 꽉 쥔 주먹에 굵은 힘줄이 불거졌다.
“어쩌긴요? 첸 씨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소리죠. 어린놈이 대장이랍시고 설치는 게 보기 싫어 죽겠으니까 시비 한 번 걸어봐야겠다, 첸 씨가 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닌가요?”
“…….”
첸은 죽일 듯한 눈동자로 한을 노려봤다.
“다행히도 저도 그런 방법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아직 갈 길이 머니 이쯤에서 끝을 보고 가는 게 피차 좋을 것 같은데, 이참에 다 풀고 갑시다. 우리.”
한의 말에 첸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으래? 그래, 대장 나리, 어떤 방식으로 끝을 보자는 말이신가? 앙?”
“그래도 제가 명색이 리더인데 대원과 드잡이를 벌일 수는 없고, 이런 건 어떤가요?”
한은 첸의 얼굴 앞으로 손을 불쑥 뻗었다.
“보아하니 첸 씨는 팔 근육에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저도 팔 근육은 나름 자신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팔뚝으로 한 번 겨뤄보는 건 어떨까요?”
“크흐, 나한테 지금 팔씨름을 하자 이건가? 이래서 애송이들은…….”
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첸은 완력, 그중에서 특히 팔의 완력이라면 S랭크 헌터와 겨뤄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 비리비리한 애송이가 자신과 팔로 겨루자고 하다니, 첸으로서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뇨, 팔씨름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은 첸의 짐작을 부정했다.
“제가 겨루고자 하는 건 팔의 힘이 아니라 팔 근육의 경도 입니다.”
“뭐야?!”
첸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팔 근육의 경도를 측정한다니, 어떤 방법을 말하는 건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간단합니다. 첸 씨랑 제가 각자 자신의 무기로 상대방의 팔목을 힘껏 내려치는 거죠. 상대방의 공격에 버티면 승리, 제가 선수는 양보해 드리죠.”
“……!”
한의 과격한 제안에 첸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의 표정에도 경악이 묻어나왔다. 무기로 팔목을 내려친다고? 어디 쪽이 승리하든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호오, 이 새끼 봐라. 그래 선수는 양보하신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명색이 리더인데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고.”
첸의 눈가에 흉폭한 기운이 맺힌데 반해 한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이보게, 대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팔뚝이라니.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클리프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파국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첸이 먼저 말했다.
“영감님은 가만히 계쇼, 이 꼬맹이가 하자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수. 흐흐.”
첸은 허리춤에 꼽아둔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레드 오거의 척추 뼈를 제련해서 만든 도끼의 날이 번뜩였다.
“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대장 나리. 어서 그 손목을 내놓으시지.”
첸이 나뭇등걸을 도끼로 두드리며 말했다. 한은 코트를 벗어 가지런히 정리한 후 나뭇등걸에 오른쪽 손목을 올려놓았다.
“첸 씨, 그만해요. 뭐하는 겁니까, 이게.”
“대장도 그만둬요. 첸은 진심이라구요.”
하워드와 제인이 두 사람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한은 손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을 제지했다.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제 걱정보다는 다음 차례 첸 씨의 손목을 걱정해 주시죠.”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점점…….”
첸은 이를 갈면서 도끼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한의 팔목을 겨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물론 첸도 진심으로 한을 불구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기에 날이 아닌 반대쪽으로 겨냥을 했지만, 도끼의 무게와 첸의 악력, 그리고 도끼 등에 맺힌 불그스름한 기운으로 봤을 때 그 도끼날에 서린 기운이 어마어마한 건 분명해 보였다.
쩌적.
도끼가 하강하는 걸 본 제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들릴 거라 예상했던 우지끈이나, 뼈 부러지는 소리가 아닌 낯선 소리가 들렸다.
“어…….”
“세상에…….”
감았던 눈을 뜬 제인과 하워드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크게 부러져서 덜렁거릴 거라고 예상했던 한의 팔목은 그야말로 멀쩡했고, 첸의 도끼 등에 거미집마냥 금이 사방으로 가 있었다.
레드 오거의 척추 뼈를 수십 번 제련해서 만든 도끼라는 첸의 자랑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라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럼 이제 제 차례인가요?”
한이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리고 첸을 바라봤다.
달그락달그락.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양철 주전자가 달그락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흐음.”
물의 온도를 확인한 클리프가 주전자를 불 위에서 내려 미리 준비해둔 컵에 물을 나누어 부었다. 물이 컵에 절반쯤 차오르자, 향긋한 홍차 향이 사방에 피어올랐다.
“자 대장, 한 잔 드시게. 비록 찻잎이 아니라 가루로 탄 짝퉁이지만, 그래도 이런 밤에는 차를 한 잔 마셔야 하는 법이라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우터 존에서 좋은 차를 마시게 되는군요.”
클리프는 뜨거운 찻잔을 한에게 건넸다. 야외 작전을 나올 때까지 주전자와 홍차 가루를 챙기는 꼼꼼함을 보건대, 홍차에 대한 클리프의 애정은 꽤나 커보였다.
‘그렇고 보니 이 영감님 브리튼 연방 출신이라 그랬지.’
“자, 자 자네들도 한 잔씩 하게.”
클리프는 나머지 인원들에게도 차를 한 잔씩 따라준 후 자신의 잔에도 물을 붓고 차를 맛있게 마시기 시작했다.
“우와, 클리프 씨가 홍차에 조예가 깊다는 건 알았지만 이정도로 차를 잘 끓이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정말, 찻집에서 파는 홍차보다 맛있는 것 같아.”
하워드와 진이 감탄사를 터뜨리자 클리프가 손사래를 쳤다.
“예끼, 이 친구들 과장이 너무 심하구먼그래. 찻잎도 아니고 가루를 쓴 가짜 홍차가 그리 맛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내젓는 손과 일치하지 않는, 흐뭇해하는 클리프의 표정을 보니 칭찬이 듣기 싫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 잠깐 차들 드시면서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차를 마시며 자신의 디바이스를 두드리던 한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지금 각자 디바이스를 확인하시면 제가 보낸 지도가 전송되어 있을 겁니다. 한 번씩 확인 부탁드립니다.”
한의 말을 들은 네 사람은 각자 자신의 디바이스를 꺼내 키패드를 조작했다. 그러자 디바이스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한 장의 입체 지도가 허공에 떠올랐다.
“지금 보고 계시는 그 지도가 저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잠자는 자의 협곡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현재 위치고, 이 붉은 선이 저희가 내일부터 통과할 예정인 루트입니다.”
한이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푸른 점이 떠오르며 일행의 현재 위치를 보여줬고, 다시 한 번 두드리자 붉은색 선이 나타났다.
“제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저희는 내일 이 시각에는 여기, 잠자는 자의 협곡 끝 무렵에 들어설 수 있을 테고, 그 다음날 정오 무렵에는 이곳에 위치한 베이스캠프에서 샤워를 한 후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일 수 있을 겁니다.”
“하아,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인이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비록 몸에다 직접 바른 것은 아니지만 청동 호랑개 나무의 수액을 옷에 바른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제인의 목소리에는 샤워를 향한 열망이 가득 맺혀 있었다.
“돌발 상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저희 쪽이 아무래도 피어스 씨의 1팀보다는 이동이 빠른 것 같으니 잘하면 하룻밤 정도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려던 한의 발언을 중단시키는 소음이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이거 보자보자 하니까 열이 뻗쳐서!!”
소음의 주인공은 조금 전부터 인상을 구기고 있던 첸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헌터들이 서로 살가운 태도로 한을 대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첸의 목소리는 그 여느 때보다 격앙되어 있었다.
“당신이 뭔데 이동 루트를 마음대로 정해? 우리도 어엿한 대원 아니야! 그러면 길을 정하기 전에 우리에게 상담 정도는 했어야지. 누가 그렇게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 앙?!”
오후부터 쌓인 불만이 여기서 폭발하는지, 첸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어투로 한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이보게, 자네 왜 그러나.”
“첸 씨, 그런 말투는 실례잖아요.”
하워드와 클리프가 첸을 뜯어 말렸지만, 흥분한 첸은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놔둬요, 영감님. 나는 처음부터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피어스 대장이라면 모를까.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어린놈 하나가 떡하니 기어 들어와서 리더니 뭐니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몸을 벌떡 일으켜서 당장이라도 한에게 덤벼들 듯한 자세를 취하는 첸을 보며 한은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클리프가 타준 홍차를 한 모금 더 마실 뿐이었다.
“거기 너, 한이라고 했지. 네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몰라도 이 바닥은 무조건 경험이고 실력이야. 네가 대장이네, 리더네 하고 싶으면 최소한 실력이라도 한 판 보이고 그러라고! 알겠냐, 앙!”
한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카운트를 헤아렸다.
‘이걸로 세 번.’
한은 빙긋 웃어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득 오래전에 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한, 한도 언젠가는 다른 헌터들과 공동 작전을 하는 경우도 있겠죠?”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흐응,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게 걱정이에요. 한은 사교성이나 친화력이 그냥 대놓고 빵점이잖아요. 그래서 헌터들 사이에서 왕따라도 당하면 어쩌나 해서.”
“사람 면전에 두고 빵점이라니, 실례잖아? 그리고 이런 성격으로 키운 게 누군데?”
“흐음, 어쩌지… 한처럼 금방 벌컥벌컥 해버리면 친구도 한 명 못 사귈 텐데. 흐음, 이 일을 어쩐다.”
“진, 걱정한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즐거워하는 표정인 거 아냐?”
“어머, 이 무슨 실례의 말씀. 정말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답니다.”
“걱정하지 마. 진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막장이 아니니까.”
“흐응, 그럼 만약에 말이죠. 공동 작전을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한에게 괜히 시비를 걸거나 하면 어쩔 거예요?”
“음, 일단 참아야지.”
“참았는데 또 그러면?”
“한 번 더 참아야지.”
“어머, 마냥 참기만 할 건가요?”
“아니, 참는 건 두 번까지만.”
“그럼 세 번째 또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때는 맛을 보여줘야지. 될 수 있는 한 호되게 말이야.”
한은 빙긋 웃었다. 세 번의 카운드도 다 됐고, 무엇보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있었던 몇 개의 사건으로 인해 한은 복잡한 상황, 어지러운 국면에 넌덜머리가 난 상태였다. 요제프, 사냥개, 거기에 카타나까지… 온통 뒤엉켜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비해, 눈앞에 있는 홍 첸이란 사내는 이 얼마나 명쾌하단 말인가.
“이동 방향과 그 일정을 정하는 건 리더의 고유한 권한이므로 여러분들에게 사전에 동의를 구할 의무는 없다, 첸 씨가 원하는 게 뭐 이런 식의 답변은 아닌 것 같고.”
한은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리고 한의 이런 행동이 거슬리는지 첸의 눈빛은 더욱더 거칠어졌다.
“그러니까 첸 씨가 하는 말은 제가 뭐 잘난 점이 있어서 여러분들의 리더를 맡느냐? 이 말이잖아요?”
“흥!”
첸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크게 콧방귀를 뀔 뿐이었고, 첸의 태도를 긍정이라고 판단한 한은 발걸음을 옮겼다.
“저도 이래 봬도 헌터입니다. 설마 장점 하나 없을까요? 제 장점을 말씀 드리자면…….”
한은 발걸음을 옮겨 첸의 바로 앞에 섰다. 땅딸막하고 떡 벌어진 체구의 첸 앞에 호리호리하고 훌쩍 큰 키의 한이 다가서니 꽤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모닥불에 모여 있던 그 누구도 웃음을 터뜨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한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풍겼던 탓이다.
“저, 싸움을 꽤 잘합니다.”
“뭐, 뭐야?”
한의 명쾌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첸이 벌컥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첸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이죠. 그리고 내친김에 단점도 말씀 드리자면…….”
한의 입가에는 예의 그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첸은 입술을 옴짝거렸다.
“인내심이 참 많이 부족합니다.”
“이익, 당신 뭐 어쩌자는 거야!!”
첸이 내뱉듯이 말을 토해냈다. 꽉 쥔 주먹에 굵은 힘줄이 불거졌다.
“어쩌긴요? 첸 씨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소리죠. 어린놈이 대장이랍시고 설치는 게 보기 싫어 죽겠으니까 시비 한 번 걸어봐야겠다, 첸 씨가 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닌가요?”
“…….”
첸은 죽일 듯한 눈동자로 한을 노려봤다.
“다행히도 저도 그런 방법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아직 갈 길이 머니 이쯤에서 끝을 보고 가는 게 피차 좋을 것 같은데, 이참에 다 풀고 갑시다. 우리.”
한의 말에 첸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으래? 그래, 대장 나리, 어떤 방식으로 끝을 보자는 말이신가? 앙?”
“그래도 제가 명색이 리더인데 대원과 드잡이를 벌일 수는 없고, 이런 건 어떤가요?”
한은 첸의 얼굴 앞으로 손을 불쑥 뻗었다.
“보아하니 첸 씨는 팔 근육에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저도 팔 근육은 나름 자신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팔뚝으로 한 번 겨뤄보는 건 어떨까요?”
“크흐, 나한테 지금 팔씨름을 하자 이건가? 이래서 애송이들은…….”
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첸은 완력, 그중에서 특히 팔의 완력이라면 S랭크 헌터와 겨뤄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 비리비리한 애송이가 자신과 팔로 겨루자고 하다니, 첸으로서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뇨, 팔씨름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은 첸의 짐작을 부정했다.
“제가 겨루고자 하는 건 팔의 힘이 아니라 팔 근육의 경도 입니다.”
“뭐야?!”
첸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팔 근육의 경도를 측정한다니, 어떤 방법을 말하는 건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간단합니다. 첸 씨랑 제가 각자 자신의 무기로 상대방의 팔목을 힘껏 내려치는 거죠. 상대방의 공격에 버티면 승리, 제가 선수는 양보해 드리죠.”
“……!”
한의 과격한 제안에 첸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의 표정에도 경악이 묻어나왔다. 무기로 팔목을 내려친다고? 어디 쪽이 승리하든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호오, 이 새끼 봐라. 그래 선수는 양보하신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명색이 리더인데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고.”
첸의 눈가에 흉폭한 기운이 맺힌데 반해 한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이보게, 대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팔뚝이라니.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클리프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파국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첸이 먼저 말했다.
“영감님은 가만히 계쇼, 이 꼬맹이가 하자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수. 흐흐.”
첸은 허리춤에 꼽아둔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레드 오거의 척추 뼈를 제련해서 만든 도끼의 날이 번뜩였다.
“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대장 나리. 어서 그 손목을 내놓으시지.”
첸이 나뭇등걸을 도끼로 두드리며 말했다. 한은 코트를 벗어 가지런히 정리한 후 나뭇등걸에 오른쪽 손목을 올려놓았다.
“첸 씨, 그만해요. 뭐하는 겁니까, 이게.”
“대장도 그만둬요. 첸은 진심이라구요.”
하워드와 제인이 두 사람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한은 손을 들어 올려 두 사람을 제지했다.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제 걱정보다는 다음 차례 첸 씨의 손목을 걱정해 주시죠.”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점점…….”
첸은 이를 갈면서 도끼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한의 팔목을 겨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물론 첸도 진심으로 한을 불구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기에 날이 아닌 반대쪽으로 겨냥을 했지만, 도끼의 무게와 첸의 악력, 그리고 도끼 등에 맺힌 불그스름한 기운으로 봤을 때 그 도끼날에 서린 기운이 어마어마한 건 분명해 보였다.
쩌적.
도끼가 하강하는 걸 본 제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들릴 거라 예상했던 우지끈이나, 뼈 부러지는 소리가 아닌 낯선 소리가 들렸다.
“어…….”
“세상에…….”
감았던 눈을 뜬 제인과 하워드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크게 부러져서 덜렁거릴 거라고 예상했던 한의 팔목은 그야말로 멀쩡했고, 첸의 도끼 등에 거미집마냥 금이 사방으로 가 있었다.
레드 오거의 척추 뼈를 수십 번 제련해서 만든 도끼라는 첸의 자랑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라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럼 이제 제 차례인가요?”
한이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리고 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