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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9화)
정오가 되기까지 20분여가 남았다. 피어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거울을 봤다.
갈색머리는 가지런히 빗어 넘겨 고정시켰고, 짙은 색 고글로 표정을 숨긴다. 경량화와 방검 처리가 된 라이더 재킷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타이트한 라이더 재킷 너머로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근육질의 상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쉰을 바라보고 있는 피어스지만 20대의 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피어스의 근육은 탄탄했다.
검은색 가죽 강갑을 끼고 방수, 방한 처리가 된 천을 이중, 삼중으로 덧댄 워커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와이번의 뼈를 가공해서 만든 쌍검을 등 뒤로 차는 걸로 무장을 끝낸다.
무장을 하기 전의 피어스가 수호위원회에서 파견된 지휘관 피어스라면, 무장을 끝낸 피어스는 수없이 많은 마물을 해치운 A랭크 헌터 ‘음속의 피어스’로 다시 태어났다.
“원정대장님. 한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아, 금방 내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주게.”
인터폰에서 들리는, 한의 도착을 알리는 직원의 음성에, 피어스는 대답을 주고는 1층으로 향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냥을 경험했지만, 아우터 존에 발을 내딛는 그 기분은 언제나 새롭다.
‘하긴 그렇지 않은 헌터가 누가 있겠나.’
제아무리 숙달된 헌터라 해도, 아니 오히려 숙달된 헌터일수록 아우터 존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그에 따른 긴장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어, 잘 잤나, 한 군. 어라, 자네?”
1층으로 내려온 피어스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한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다 멈칫했다. 빈틈없이 전투복을 차려입은 자신과는 달리 한의 복장은 지나치게 심플하고, 또 단정했다.
더블 버튼 블랙 슈트와 푸른색 넥타이. 슈트보다 조금 더 짙은 색상의 코트. 무장이라고는 등 뒤로 매달린 중형 나이프가 전부였다.
구두가 아니라 전투용 부츠를 신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냥을 떠나는 헌터가 아니라 은행으로 출근하는 은행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쑥한 옷차림이었다.
‘저 꼴을 하고 아우터 존으로 간단 말이야?’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대장님.”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한을 보며 피어스는 역시 고글을 쓰기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고글을 쓰지 않았다면 당황스러워 하는 자신의 표정을 고스란히 들켰을 테니.
“원정대원의 명령을 비롯한 현장 지휘권은 모두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야. 한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거든 자네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것저것 생길 걸세. 자네가 명심해야 할 건 단 하나. 그 친구가 하는 일, 그 친구의 방식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걸세. 내 말 알아듣겠나?”
수호위원회를 벗어나기 전 라무스가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한마디 했겠지만, 자신이 더없이 존경하는 위원장님이 한 말이 떠올라 피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으, 응. 나는 잘 잤다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정오까지 10여분이 남았다. 피어스는 품속에서 자신이 선발한 대원들의 명부를 꺼내 한에게 건네주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할 대원들의 이름과 랭크를 기록한 문서이네. 자네는 우리랑 별도의 작전을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검은 탑까지는 동행을 해야 할 테니 자네도 대원들 이름과 랭크 정도는 숙지해 두는 게 좋을 걸세.”
“알겠습니다, 대장님.”
“자, 그럼 나가 볼까.”
피어스는 대기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연병장으로 걸어 나갔다. 한은 뒷문을 통해 나가 대원들의 최후방에 섰다.
“자. 제군들, 주목!”
대원들의 최선두에 선 피어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시간부로 본 지휘관을 포함한 아홉 명의 대원들은 KKN―23섹터에 출몰한 흑색 탑을 탐사하는 원정을 떠난다. 지금 이 시간부터 작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여러분에 대한 지휘, 명령권은 본 지휘관에게 귀속되는 바이며, 혹여 본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경우에는 수호위원회 회칙 제2조에 근거한 엄중 처벌이 내려질 예정이니 이 점 명심하길 바란다.”
수호위원회 본부에 속한 헌터답게 피어스는 단호하면서도 엄정한 말투로 지시 사항을 하달했다.
피어스가 대원들에게 지시 사항을 하달하는 동안, 한은 피어스가 조금 전에 넘겨준 대원들의 신상명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피어스와 피어스의 부관을 맡고 있는 A랭크 헌터 피터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 헌터들의 랭크는 전원이 B랭크였다.
목표로 하고 있는 거제도까지 가는 여정 중에 가장 위험도가 높은 지역이 회색 지역임을 감안할 때, 준 S랭크 헌터인 피어스와 A랭크 헌터 피터, 그리고 B랭크 헌터 일곱 명을 파견했다는 것 자체가 라무스가 꽤나 많은 배려를 해줬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와 동행할 헌터 한 명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목적지까지 동행은 하겠지만, 한 군에게는 별도의 임무가 있으니 우리와는 때때로 행동을 달리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군도, 우리도 인류를 위해 노력하는 같은 헌터. 제군들이 박수로 그를 맞이해 줬으면 한다. 제군들, 전부 뒤로 돌아서 류 한 군을 향해 박수!”
지시 사항을 전부 하달한 피어스는 원정대원들에게 한을 소개했고, 피어스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은 뒤를 돌아 한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한은 박수에 응하고자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과 원정대원들간의 상견례를 끝으로 출정식은 모두 끝이 났다. 이윽고 피어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헌터들에게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이 시간부로 흑색 탑을 향한 원정의 시작을 알린다!”
크아악∼!!
어린아이 팔뚝만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흑곰이 쇄도해 왔다. 흑곰의 입가에는 붉은 화염이 이글거렸다.
한은 체중을 한껏 실은 흑곰의 돌진을 살짝 피하고는 흑곰의 목덜미에 나이프를 꽃아 넣었다.
크르윽!
피를 토하며 쓰러진 흑곰의 목에서 나이프를 뽑아든 한은 재빨리 백 스탭을 밟아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이 자리를 이탈한 그 순간, 온몸에 철갑 외피를 두른 붉은 뿔 코뿔소가 한이 있던 그 자리를 짓이기며 돌진해 왔다.
한을 덮친 흑곰의 시체를 짓밟은 붉은 뿔 코뿔소가 방향을 선회하며 한을 노려봤다. 핏발이 솟구친 검붉은 눈동자와 번뜩이는 송곳니가 빛을 뿜었다.
송곳니가 달린 철갑 외피의 코뿔소며, 그 크기가 3m에 달하는 불을 뿜는 흑곰 모두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물체였으며, 흑곰과 코뿔소가 같은 지역에 서식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 년의 시간이 흘렀고, 현재 한이 서있는 곳은 인류가 상실한 영토, 아우터 존이었다. 그리고 아우터 존에서라면 인간의 살을 씹으려 드는 코뿔소도, 불을 뿜는 흑곰도 모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한에게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한은 흑곰과 코뿔소가 아니라 코끼리와 북극곰이 동시에 출몰한다고 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 장소가 아우터 존이라면 말이다.
쿠에엑!!
코뿔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표독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 철갑 외피 코뿔소가 한에게 돌진해 왔다.
지축을 뒤흔드는 코뿔소의 돌진을 회피하며 한이 손을 뻗었고, 한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은색 사슬이 코뿔소의 다리를 휘어 감았다.
한이 팔을 당기자 사슬에 휘감긴 코뿔소는 돌진하던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몸을 띄웠고, 그와 거의 동시에 한의 나이프가 코뿔소의 목을 그대로 관통했다.
크륵.
관통된 목구멍에서 푸른 피를 뿜으며 코뿔소는 몸을 떨다 이내 그 숨을 거두었다.
입에서 불을 뿜는 흑곰과 푸른 피의 코뿔소가 놀라운 일이 아니듯, 한이 무게만 해도 3톤 이상이 나가는 코뿔소를 사슬로 감아서 들어 올린 것도, 강철보다 단단한 외피를 나이프로 꿰뚫어 버린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곳 아우터 존에서는 말이다.
순식간에 중대형의 마물화된 야수 두 마리를 해치운 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물들의 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슬슬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세 갈래 뿔이 솟구친 흑색의 사자, 죽어가는 순간에도 전격이 서린 숨결을 뱉어내는 누, 거기에 가시 발톱이 짓이겨진 재규어까지.
차원 문의 세례를 받아 그 모습이 변형되고 포악해진 마수들의 시체가 가득한 아우터 존의 황색 구역. 피어스가 냉기를 머금은 날갯짓을 하며 솟구쳐 오르는 독수리의 목을 베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곳의 전투는 그 막을 내렸다.
속초를 떠나 거제도를 향한지 3일째. 그사이 흑색 탑 원정대는 모두 여섯 번의 전투를 치렀고, 그 여섯 번의 전투를 거치며 대원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이야, 형씨 방패 겁나 단단하더만. 재규어 새끼들이 뚫을 생각도 못하던데.”
“자네 기관총은 어떻고. 그 큼지막한 놈을 순식간에 벌집을 만들어 놓는데 보는 내 속이 다 시원했다니까.”
헌터들이 서로의 공을 치하하며 손을 나누는 장면이 여기저기서 관찰되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헌터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이 전투를 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고, 지난 3일간의 고된 여정은 원정대에 모인 대원들에게 서로간의 신뢰를 심어주었다.
오직 한을 제외하고 말이다.
“영감님, 그런데 저 치는 뭔데 혼자서 개인플레이입니까?”
큼지막한 쌍 도끼를 무기로 다루는 중국계 헌터 홍 첸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옆에 있는 헌터, 클리프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저 친구가 누구인지 난들 알겠나. 다만 피어스 대장이 말하지 않았나, 저 친구는 특별 임무 수행 중이니까 개별 행동을 해도 이해하라고.”
회색 구레나룻을 멋들어지게 기른 클리프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홍 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 아무리 특별 임무라고 해도 그렇지. 하다못해 피어스 대장까지 진형을 짜고 전투를 하는데 저 친구는 뭔데 저리 독불장군식인 겁니까? 영감님도 아시잖아요. 지가 SS랭크라도 되지 않는 이상 이 바닥에서는 협력이 필수라는 거.”
첸은 격앙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클리프와 대화를 시작할 때 외부로 음성이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는 결계를 쳐놓은 것을 믿고 있는 듯, 첸은 목소리를 낮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흠,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물론 B랭크 헌터인 첸이 쳐놓은 음성 차단 결계는 한에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즉, 첸이 클리프를 상대로 떠든 목소리는 고스란히 한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은 첸에게 반감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험담을 대놓고 하지 않고 음성 차단 결계를 사용해준 점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저 첸이라는 양반은 적어도 불화가 팀 전체로 파급되는 건 염려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비록 영감님 정도는 아닐지라도 저도 나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놈입니다. 그동안 온갖 놈들을 다 만나봤지만 저 친구처럼 자기 멋대로인 친구는 본 적이 없어요. 하다못해 S랭크 헌터들도 기본적으로 팀플레이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는데 저 친구는 저게 뭐냔 말입니다!”
‘그야 난 S랭크가 아니라 SS랭크니까.’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는 첸.
사실 이 모든 갈등은 한이 자신의 랭크를 밝히면 끝나는 일이었다. 헌터들 사이에 있어 SS랭크는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존재.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는 기둥이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그 기둥을 찍어내려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
즉, 한이 자신이 SS랭크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한다면 개별 행동이 아니라 벌거벗고 물구나무를 선 채로 거제도까지 간다고 해도 참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게 가장 문제이지만…….’
일반인들이라면 모를까, 헌터들 사이에서 SS랭크라는 사실을 밝힌다는 건 ‘나는 앞으로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모든 헌터들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동급의 의미.
이목을 피해서 행동해야 하는 한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지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나. 엄격하기로 소문난 피어스 대장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데 자네가 무슨 수로 저 친구를 건드릴 수 있겠어?”
“제길, 피어스 대장만 아니었어도 내가 한 수 단단히 가르쳐 주는 건데.”
한은 첸이 자신을 노려보며 주먹을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클리프가 말한 것처럼 원정대의 지휘를 맡고 있는 피어스가 한의 개별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 이상, 원정대 소속 헌터들이 한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피어스가 일행을 이탈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한을 잔뜩 벼르고 있는 헌터들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거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지만, 피어스가 원정대를 이탈하는 사태는 발생할 리가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닥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한이 지금 당장 헌터들의 집단행동을 염려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피어스가 일행을 이탈하지 않는 한 말이다.
정오가 되기까지 20분여가 남았다. 피어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거울을 봤다.
갈색머리는 가지런히 빗어 넘겨 고정시켰고, 짙은 색 고글로 표정을 숨긴다. 경량화와 방검 처리가 된 라이더 재킷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타이트한 라이더 재킷 너머로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근육질의 상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쉰을 바라보고 있는 피어스지만 20대의 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피어스의 근육은 탄탄했다.
검은색 가죽 강갑을 끼고 방수, 방한 처리가 된 천을 이중, 삼중으로 덧댄 워커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와이번의 뼈를 가공해서 만든 쌍검을 등 뒤로 차는 걸로 무장을 끝낸다.
무장을 하기 전의 피어스가 수호위원회에서 파견된 지휘관 피어스라면, 무장을 끝낸 피어스는 수없이 많은 마물을 해치운 A랭크 헌터 ‘음속의 피어스’로 다시 태어났다.
“원정대장님. 한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아, 금방 내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주게.”
인터폰에서 들리는, 한의 도착을 알리는 직원의 음성에, 피어스는 대답을 주고는 1층으로 향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냥을 경험했지만, 아우터 존에 발을 내딛는 그 기분은 언제나 새롭다.
‘하긴 그렇지 않은 헌터가 누가 있겠나.’
제아무리 숙달된 헌터라 해도, 아니 오히려 숙달된 헌터일수록 아우터 존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그에 따른 긴장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어, 잘 잤나, 한 군. 어라, 자네?”
1층으로 내려온 피어스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한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다 멈칫했다. 빈틈없이 전투복을 차려입은 자신과는 달리 한의 복장은 지나치게 심플하고, 또 단정했다.
더블 버튼 블랙 슈트와 푸른색 넥타이. 슈트보다 조금 더 짙은 색상의 코트. 무장이라고는 등 뒤로 매달린 중형 나이프가 전부였다.
구두가 아니라 전투용 부츠를 신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냥을 떠나는 헌터가 아니라 은행으로 출근하는 은행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쑥한 옷차림이었다.
‘저 꼴을 하고 아우터 존으로 간단 말이야?’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대장님.”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한을 보며 피어스는 역시 고글을 쓰기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고글을 쓰지 않았다면 당황스러워 하는 자신의 표정을 고스란히 들켰을 테니.
“원정대원의 명령을 비롯한 현장 지휘권은 모두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야. 한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거든 자네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것저것 생길 걸세. 자네가 명심해야 할 건 단 하나. 그 친구가 하는 일, 그 친구의 방식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걸세. 내 말 알아듣겠나?”
수호위원회를 벗어나기 전 라무스가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한마디 했겠지만, 자신이 더없이 존경하는 위원장님이 한 말이 떠올라 피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으, 응. 나는 잘 잤다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정오까지 10여분이 남았다. 피어스는 품속에서 자신이 선발한 대원들의 명부를 꺼내 한에게 건네주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할 대원들의 이름과 랭크를 기록한 문서이네. 자네는 우리랑 별도의 작전을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검은 탑까지는 동행을 해야 할 테니 자네도 대원들 이름과 랭크 정도는 숙지해 두는 게 좋을 걸세.”
“알겠습니다, 대장님.”
“자, 그럼 나가 볼까.”
피어스는 대기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연병장으로 걸어 나갔다. 한은 뒷문을 통해 나가 대원들의 최후방에 섰다.
“자. 제군들, 주목!”
대원들의 최선두에 선 피어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시간부로 본 지휘관을 포함한 아홉 명의 대원들은 KKN―23섹터에 출몰한 흑색 탑을 탐사하는 원정을 떠난다. 지금 이 시간부터 작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여러분에 대한 지휘, 명령권은 본 지휘관에게 귀속되는 바이며, 혹여 본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경우에는 수호위원회 회칙 제2조에 근거한 엄중 처벌이 내려질 예정이니 이 점 명심하길 바란다.”
수호위원회 본부에 속한 헌터답게 피어스는 단호하면서도 엄정한 말투로 지시 사항을 하달했다.
피어스가 대원들에게 지시 사항을 하달하는 동안, 한은 피어스가 조금 전에 넘겨준 대원들의 신상명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피어스와 피어스의 부관을 맡고 있는 A랭크 헌터 피터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 헌터들의 랭크는 전원이 B랭크였다.
목표로 하고 있는 거제도까지 가는 여정 중에 가장 위험도가 높은 지역이 회색 지역임을 감안할 때, 준 S랭크 헌터인 피어스와 A랭크 헌터 피터, 그리고 B랭크 헌터 일곱 명을 파견했다는 것 자체가 라무스가 꽤나 많은 배려를 해줬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와 동행할 헌터 한 명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목적지까지 동행은 하겠지만, 한 군에게는 별도의 임무가 있으니 우리와는 때때로 행동을 달리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군도, 우리도 인류를 위해 노력하는 같은 헌터. 제군들이 박수로 그를 맞이해 줬으면 한다. 제군들, 전부 뒤로 돌아서 류 한 군을 향해 박수!”
지시 사항을 전부 하달한 피어스는 원정대원들에게 한을 소개했고, 피어스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은 뒤를 돌아 한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한은 박수에 응하고자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과 원정대원들간의 상견례를 끝으로 출정식은 모두 끝이 났다. 이윽고 피어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헌터들에게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이 시간부로 흑색 탑을 향한 원정의 시작을 알린다!”
크아악∼!!
어린아이 팔뚝만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흑곰이 쇄도해 왔다. 흑곰의 입가에는 붉은 화염이 이글거렸다.
한은 체중을 한껏 실은 흑곰의 돌진을 살짝 피하고는 흑곰의 목덜미에 나이프를 꽃아 넣었다.
크르윽!
피를 토하며 쓰러진 흑곰의 목에서 나이프를 뽑아든 한은 재빨리 백 스탭을 밟아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이 자리를 이탈한 그 순간, 온몸에 철갑 외피를 두른 붉은 뿔 코뿔소가 한이 있던 그 자리를 짓이기며 돌진해 왔다.
한을 덮친 흑곰의 시체를 짓밟은 붉은 뿔 코뿔소가 방향을 선회하며 한을 노려봤다. 핏발이 솟구친 검붉은 눈동자와 번뜩이는 송곳니가 빛을 뿜었다.
송곳니가 달린 철갑 외피의 코뿔소며, 그 크기가 3m에 달하는 불을 뿜는 흑곰 모두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물체였으며, 흑곰과 코뿔소가 같은 지역에 서식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 년의 시간이 흘렀고, 현재 한이 서있는 곳은 인류가 상실한 영토, 아우터 존이었다. 그리고 아우터 존에서라면 인간의 살을 씹으려 드는 코뿔소도, 불을 뿜는 흑곰도 모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한에게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한은 흑곰과 코뿔소가 아니라 코끼리와 북극곰이 동시에 출몰한다고 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 장소가 아우터 존이라면 말이다.
쿠에엑!!
코뿔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표독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 철갑 외피 코뿔소가 한에게 돌진해 왔다.
지축을 뒤흔드는 코뿔소의 돌진을 회피하며 한이 손을 뻗었고, 한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은색 사슬이 코뿔소의 다리를 휘어 감았다.
한이 팔을 당기자 사슬에 휘감긴 코뿔소는 돌진하던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몸을 띄웠고, 그와 거의 동시에 한의 나이프가 코뿔소의 목을 그대로 관통했다.
크륵.
관통된 목구멍에서 푸른 피를 뿜으며 코뿔소는 몸을 떨다 이내 그 숨을 거두었다.
입에서 불을 뿜는 흑곰과 푸른 피의 코뿔소가 놀라운 일이 아니듯, 한이 무게만 해도 3톤 이상이 나가는 코뿔소를 사슬로 감아서 들어 올린 것도, 강철보다 단단한 외피를 나이프로 꿰뚫어 버린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곳 아우터 존에서는 말이다.
순식간에 중대형의 마물화된 야수 두 마리를 해치운 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물들의 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슬슬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세 갈래 뿔이 솟구친 흑색의 사자, 죽어가는 순간에도 전격이 서린 숨결을 뱉어내는 누, 거기에 가시 발톱이 짓이겨진 재규어까지.
차원 문의 세례를 받아 그 모습이 변형되고 포악해진 마수들의 시체가 가득한 아우터 존의 황색 구역. 피어스가 냉기를 머금은 날갯짓을 하며 솟구쳐 오르는 독수리의 목을 베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곳의 전투는 그 막을 내렸다.
속초를 떠나 거제도를 향한지 3일째. 그사이 흑색 탑 원정대는 모두 여섯 번의 전투를 치렀고, 그 여섯 번의 전투를 거치며 대원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이야, 형씨 방패 겁나 단단하더만. 재규어 새끼들이 뚫을 생각도 못하던데.”
“자네 기관총은 어떻고. 그 큼지막한 놈을 순식간에 벌집을 만들어 놓는데 보는 내 속이 다 시원했다니까.”
헌터들이 서로의 공을 치하하며 손을 나누는 장면이 여기저기서 관찰되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헌터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이 전투를 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고, 지난 3일간의 고된 여정은 원정대에 모인 대원들에게 서로간의 신뢰를 심어주었다.
오직 한을 제외하고 말이다.
“영감님, 그런데 저 치는 뭔데 혼자서 개인플레이입니까?”
큼지막한 쌍 도끼를 무기로 다루는 중국계 헌터 홍 첸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옆에 있는 헌터, 클리프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저 친구가 누구인지 난들 알겠나. 다만 피어스 대장이 말하지 않았나, 저 친구는 특별 임무 수행 중이니까 개별 행동을 해도 이해하라고.”
회색 구레나룻을 멋들어지게 기른 클리프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홍 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 아무리 특별 임무라고 해도 그렇지. 하다못해 피어스 대장까지 진형을 짜고 전투를 하는데 저 친구는 뭔데 저리 독불장군식인 겁니까? 영감님도 아시잖아요. 지가 SS랭크라도 되지 않는 이상 이 바닥에서는 협력이 필수라는 거.”
첸은 격앙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클리프와 대화를 시작할 때 외부로 음성이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는 결계를 쳐놓은 것을 믿고 있는 듯, 첸은 목소리를 낮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흠,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물론 B랭크 헌터인 첸이 쳐놓은 음성 차단 결계는 한에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즉, 첸이 클리프를 상대로 떠든 목소리는 고스란히 한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은 첸에게 반감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험담을 대놓고 하지 않고 음성 차단 결계를 사용해준 점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저 첸이라는 양반은 적어도 불화가 팀 전체로 파급되는 건 염려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비록 영감님 정도는 아닐지라도 저도 나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놈입니다. 그동안 온갖 놈들을 다 만나봤지만 저 친구처럼 자기 멋대로인 친구는 본 적이 없어요. 하다못해 S랭크 헌터들도 기본적으로 팀플레이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는데 저 친구는 저게 뭐냔 말입니다!”
‘그야 난 S랭크가 아니라 SS랭크니까.’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는 첸.
사실 이 모든 갈등은 한이 자신의 랭크를 밝히면 끝나는 일이었다. 헌터들 사이에 있어 SS랭크는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존재.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는 기둥이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그 기둥을 찍어내려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
즉, 한이 자신이 SS랭크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한다면 개별 행동이 아니라 벌거벗고 물구나무를 선 채로 거제도까지 간다고 해도 참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게 가장 문제이지만…….’
일반인들이라면 모를까, 헌터들 사이에서 SS랭크라는 사실을 밝힌다는 건 ‘나는 앞으로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모든 헌터들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동급의 의미.
이목을 피해서 행동해야 하는 한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지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네가 참아야지 어쩌겠나. 엄격하기로 소문난 피어스 대장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데 자네가 무슨 수로 저 친구를 건드릴 수 있겠어?”
“제길, 피어스 대장만 아니었어도 내가 한 수 단단히 가르쳐 주는 건데.”
한은 첸이 자신을 노려보며 주먹을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클리프가 말한 것처럼 원정대의 지휘를 맡고 있는 피어스가 한의 개별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 이상, 원정대 소속 헌터들이 한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피어스가 일행을 이탈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한을 잔뜩 벼르고 있는 헌터들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거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지만, 피어스가 원정대를 이탈하는 사태는 발생할 리가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닥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한이 지금 당장 헌터들의 집단행동을 염려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피어스가 일행을 이탈하지 않는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