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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8화)


수호위원회 속초 지부는 화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흐음.”
수호위원회 앞에 선 한은 건물의 외벽에 떠 있는 액정 화면을 읽었다.
화면은 쉬지 않고 빛을 내며 최근에 있던 아우터 존의 구역 변경, 헌터 선발 및 승급 시험 일정, 헌터 모집 공고 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모집 공고 최상단에는 거제도 원정대 공고가 위치해 있었다. 거제도 원정대에 참가하기 위한 인원이 지금도 몰려오는지 수호위원회는 무척이나 번잡해 보였다.
사무처에 들어가 접수를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한의 대기 번호를 호명했다.
“헌터 자격증 제시해 주시구요. 여기 양식에 따라 신청서 작성해 주세요.”
몰려드는 헌터들, 그리고 격무에 지칠 대로 지친 접수원 아가씨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을 맞이했다. 하지만 헌터 자격증을 바스티안에게 맡기고 온 한은 자격증을 제출할 수 없었고, 자격증을 대신할 만한 다른 물건을 제시하기로 했다.
“명함 말고 자격증 제시해 주시구요. 양식서 다시 작성해 주세요.”
한이 내민 명함을 흘깃 본 접수원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한이 내밀었던 명함의 반대편을 보여주자, 아가씨의 눈동자가 커졌다.
“확인해 보시죠.”
한이 내민 명함은 한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명함의 뒷면은 온통 검은 바탕에 칼과 방패가 조합된 엠블럼이 새겨져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명함 주인의 직책이 적혀 있었다.

― 수호위원회 위원장. P.라무스 ―

명함의 위력은 대단했다. 명함에 새겨진 코드를 통해 수호위원회의 명함임이 확인된 순간, 한을 바라보는 아가씨의 표정이 바뀌었고, 피어스에게로 통하는 직행 통로가 개통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층으로 가셔서 가장 우측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로비를 뒤로 한 채 한은 2층으로 올라가 안내받은 방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문 안쪽에서는 중년 남성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빛이 도는 갈색머리에 콧수염을 매력적으로 기른 중후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자네가 위원장님이 말씀하셨던 그 ‘한’이라는 친구 인가? 만나서 반갑네. 난 이번 수색 작전의 지휘를 맡은 피어스라고 하네.”
“프리랜서 류 한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자리에 앉게나.”
S랭크로의 승급을 앞둔 헌터라고 하더니, 피어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먼발치에서 몇 번 지켜본 게 전부인 한으로서는 이 정도로 빼어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피어스가 수호위원회의 숨은 실력자라는 평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해볼까. 자네, 위원장님에게 비밀 임무를 하나 하달 받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사전에 미리 약속한 대로 한은 대답을 맞췄다.
이번 조사 작전에서 한은 라무스의 지령을 받고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사정상 원정대와 동행해야만 하는 한의 사정을 감안한 라무스가 한의 행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를 해 준 것이다.
“흐음, 위원장님이 직접 자네를 지명해서 비밀 임무를 하달할 정도면 자네 실력이야 내가 참견할 바가 아니겠지. 뭐 세부적인 사항은 어찌 됐건 당분간은 자네와 동행을 해야할 것 같군. 아무쪼록 잘 부탁하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한은 피어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원정대 선발은 오늘 중으로 다 끝날 것 같으니, 자네만 괜찮다면 내일 정오가 지나서 출발을 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피어스는 생김새만큼이나 진중한 성격의 타입인 듯, 작전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내일 오전 이후라면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출발 시간은 내일 정오로 하기로 하고, 그 이동 경로 말인데…….”
피어스는 지도를 펼치고 자신이 구상했던 원정대의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피어스가 구상한 이동 경로는 향후 일정과 원정대 인원의 수준, 개별차를 고려했을 때 거의 완벽에 가까웠고, 한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이 밖에도 대원들의 배치, 이동과 휴식의 간격 등등 의논을 할 주제는 꽤 많았지만, 피어스의 사전 계획이 워낙에 빈틈이 없었던 지라 논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필요한 얘기는 이쯤에서 끝난 것 같고. 자네는 어쩔 텐가?”
“어떤 걸 물어보시는 건지……?”
“내가 선발한 대원들은 이곳에서 하룻밤 숙박할 예정이거든. 그런데 자네는 어쩔 거냐는 거지. 이곳에서 머물겠나, 아니면 숙소를 따로 잡으셨나?”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조금 준비할 게 남아 있어서, 가능하다면 내일 정오에 이곳으로 합류하는 걸로 했으면 합니다.”
“안 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럼 이제 할 얘기는 다 끝났으니 나가서 자네 볼 일을 보시게. 내일 정오에 만나기로 하지.”
피어스는 시원시원한 말투로 한의 제안에 응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만나세.”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고 한은 수호위원회 지부 밖으로 빠져나왔다.

― 인류의 꿈, 수호위원회는 영광의 날을 기다립니다.

한이 막 수호위원회 지부를 빠져나올 때 허공의 홀로그램에서 영롱한 목소리가 들리며 방패와 칼이 새겨진 수호위원회의 앰블럼이 허공에서 점멸했다.
‘인류의 꿈…….’
한은 목덜미 부근이 뻐근해 오는걸 느끼며 잠시간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인류의 꿈을 짊어질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저런 말을 듣고 있으면 어깨가 뻐근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한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다 고개를 내젓고는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오후 두 시를 지나고 있었다.

오후 내내 속초 곳곳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정보를 수집한 한은 야심한 시각이 되서야 숙소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거제도에 솟아오른 흑색 탑의 지하에 한이 찾아 헤매던 고대 유물이 정말로 있다면 혹시나 그 파장으로 속초 근방에 악영향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를 우려했지만, 다행이도 그 여파가 이 근방까지는 미치지 않은 듯했다.
물론 거제도까지 가는 도중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지만…….
슈트케이스를 열고 가져갈 짐을 정리하던 한의 귓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와 놓고는 노크 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어머, 그래요? 한이 다음부터는 노크를 하라고 그래서 내 딴에는 신경 좀 썼는데, 역시 별로였나?”
“노크를 시도한 건 참 훌륭해. 문제는 이미 남의 방 안에 들어와 놓고 노크를 했다는 점이지.”
“흐응∼ 언제부터 한 군이 내 앞에서 노크 운운하게 된 건지 모르겠네. 사춘기가 오면 방문부터 틀어 잠그는 아들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진다는데. 아,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불쑥 나타난 ‘진’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쥐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허리에 비해 잘 발달된 풍만한 상체를 가진 은발의 미녀가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는 모습을 보는 건 꽤나 흥미로운 광경일 것이다.
물론 비슷한 광경을 20년이 넘게 보고 있는 한으로서는 전혀 흥미가 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흑색 탑에 대한 정보는 어때? 아직도 느낌 정도?”
‘진’은 이 세계를 지키는 힘의 분신 같은 존재. 그 가진 바 능력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아우터 존 곳곳에 등장하는 고대 유물의 존재를 감지해서 그 정보를 한에게 알려주는 탐지 능력도 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을 초월한 능력중 하나이다. 하지만 진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와 정확성은 탐지 대상과 한의 위치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현재 위치는 흑색 탑의 존재를 처음 알려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탑에 가까워진 상태. 한은 혹여나 진이 새로운 사실이라도 감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눈치도 빠르셔라. 대답은 예스.”
진은 배시시 눈웃음을 지으며 뽐내기라도 하듯 가슴을 쭉 폈다.
“그래, 추가 정보가 있다는 소리지? 그럼 얼른 말해 줘.”
“너무 쉽게 말해주면 재미없잖아요. 과연 내가 뭘 알고 있을까요?”
진이 생글거리며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한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본인만 알고 있다는 우위가 썩 만족스러운지 진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진은 눈을 부라렸다.
“이봐요, 거기 깜장머리 아저씨. 다시 한 번 말해봐. 나이가 뭐 어쨌다고?”
“나이라니 무슨 소리야? 나는 비밀이 많은 여자는 참 아름답다는 말을 했는데… 아, 그렇지만 비밀이 너무 오래되어서 김이 새버린 여자는 시시해지는 법이지만 말이야.”
“흥. 착한 내가 한 번 속아준다.”
진이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을 털어놓았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잖아요. 흑색 탑의 지하에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장담은 할 수 없다고. 그런데 이 정도 거리까지 가까이 와보니까 확신이 들어요. 그 탑 지하에 뭔가가 확실하게 있어요. 그리고 이정도 강렬한 존재감이라면 잠들어 있는 유물은 아마도…….”
“……?”
한은 진의 다음말을 경청했다.
“고대 ‘신’이 남긴 유물일 가능성이 커 보여요.”
“고대 신의… 유물.”
한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고대 신의 유물을 찾기 위해서 지금껏 아우터 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이 허탕, 혹은 운이 좋아도 고대인의 유물을 발견하는 정도였다.
고대인의 유물로는 차원의 침식을 늦출 수 있을 뿐, 사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방법은 단 하나. 고대 신이 남긴 유물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고대 신의 유물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야, 이거 갑자기 의욕이 솟아오르는데.”
한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간의 여정이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빛이 보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고대 신의 유물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지금껏 한이 뒤지고 다녔던 장소와는 그 격이 달라요. 고대 신을 받드는 수호자도 존재할 테고. 지금까지와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다칠 수 있어요.”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진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티격태격 하지만 진에게 있어 한은 자신이 키운 자식과도 같은 존재. 고대 신의 유적으로 뛰어들 한을 생각하면 걱정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라, 지금 진이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데.”
한은 진의 걱정을 덜어줄 마음으로 요량으로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은 고맙지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진.”
한은 손을 뻗어 진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니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