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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7화)


한은 고개를 올려 바스티안을 올려다보았다. 한도 190에 육박하는 꽤나 큰 키의 소유자 였지만, 바스티안의 신장은 2m하고 27㎝, 한이 올려다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 없는 신체 조건의 소유자였다.
“이 앞치마, 그 덩치에 분홍색 앞치마라니, 당신에게 이게 당신에게 가당키나 한 짓입니까? 세상에. 양심이 있으면 앞치마를 상대로 이런 짓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앞치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한은 손을 뻗어 바스티안의 허리춤에 매달린 분홍색 앞치마를 손으로 잡고 펄럭거렸다.
분명히 넉넉한 사이즈의 앞치마였을 텐데 워낙에 거인 같은 바스티안이 두르고 있다 보니 턱받이처럼 보이는 형국이었다.
“하하, 그런 걸 고정관념이라고 하는 겁니다, 손님. 이 분홍색, 저와 잘 어울리지 않나요?”
한의 무례한 언행에도 바스티안은 여전히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바스티안은 흑진주를 연상키는 자신의 검은색 피부에 분홍빛 앞치마를 가져다 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색상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 사이즈의 문제입니다.”
한은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바스티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바스티안이 허리를 숙여 한과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 거구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그래서 손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신다? 이 눈을 보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한은 미간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그간 건강하셨나요?”
“하하하, 나야 건강하지. 오랜만이야, 한 군. 정말 반가워. 이게 얼마만이야, 대체?”
한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중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그 미소를 본 바스티안은 그 큼지막한 손을 벌려 한을 덥석 끌어안았다.
“작년에 찾아뵈었으니, 육 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네요.”
“이야, 한 몇 년만에 본 것 같이 반가운데, 겨우 육 개월이라. 하하, 아무튼 반가워. 정말 잘 왔어.”
바스티안의 솥뚜껑 같은 손이 한의 등판을 힘껏 두드렸다.
한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자식이라도 맞이해주는 양 반겨주는 이 남자의 이름은 바스티안 고트맨. 나이트 워커의 현 길드 마스터이자 ‘저거너트’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 SS랭크의 헌터였다.
그리고 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자,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자구. 응?”
바스티안은 한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화원 안으로 들어간 후 셔터를 내렸다.
“문을 벌써 닫으시는 건가요?”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왔는데 그깟 장사 하루 못 하면 좀 어때.”
미련 없이 영업을 종료한 바스티안은 향긋한 허브티를 끓여서 한에게 대접했다.
“그래,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 여기는 또 어쩐 일이고?”
“저야 뭐 늘 똑같죠. 정신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온 이유는 역시 이것 때문이고요.”
한은 디바이스를 켜서 수호위원회에서 올린 거제도 원정대 공고문을 보여줬다. 공고문을 힐끗 쳐다본 바스티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제도에 검은색 탑이 솟아났다는 말을 듣고 자네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은 했네만, 짐작이 틀리지 않았군그래. 어디 보자… 원정대 리더는 피어스 이 친구라. 헤에, 그토록 꽁꽁 숨겨두던 피어스를 꺼내놓은걸 보니 그 영감도 자네한테는 꼼짝 못하나 보구만.”
“설마요. 위원장님은 그저 제 편의를 봐주시는 것뿐입니다.”
“피어스 이 친구라면 제법 믿음직한 친구지. 자네의 발목을 잡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나도 안심이 되는군. 그래, 피어스는 만나고 오는 길인가?”
“아니요. 먼저 마스터를 만나 뵙기 위해서 온 겁니다. 마스터에게 부탁드릴 것도 있고 해서 말이죠.”
한은 디바이스와 헌터 자격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번에 찾아 뵌 이후로 킬리만자로, 대청봉 일대를 훑고 다녔습니다. 그 덕분에 지도며, 정보며, 등급 조정이며 통 갱신하지를 못해서 말이죠. 마스터에게 업데이트도 포함해서 이것저것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흠, 육 개월간 갱신을 하지 않았다라… 그럼 아우터 존 구역 변경도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건가?”
“위원회에서 직접 공문을 보내 준 최중요 사항 몇 가지는 직접 입력했습니만, 아마 태반이 안 돼 있을 겁니다.”
인류가 지구의 절반을 상실한 이후 어느덧 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급변하는 격변의 시간하에 인류를 수호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설립된 연방 정부와 수호위원회. 인류의 무력을 대변하는 이 두 기관이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작전은 아우터 존의 수복이었다.
지금도 수호위원회의 지도하에 수없이 많은 헌터들이 아우터 존을 수복하고 인류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아우터 존은 시시각각 조금씩 그 형태와 등급이 바뀌고는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정보는 헌터 네트워크를 통해 헌터들에게 공개 되는데, 갱신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수호위원회 지부를 방문해서 디바이스와 자격증을 갱신해야 했다.
그런데 최근 6개월을 아우터 존에서 보낸 한은 갱신의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정보의 갱신과 충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탐색용 무장 세트 하나만 맞춰서 준비해 주시구요.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도 마스터만큼 확실한 분은 통 없더군요.”
“갱신과 충전, 그리고 무장 세트 하나라. 오케이, 내일 오전 중으로 끝내 놓을 테니 찾으러 오시게.”
바스티안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Night Walker‘라 하면 정보 수집에 관한 한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길드. 바스티안에게 부탁을 한다면 빼놓고 반영하지 못하는 정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대가라고 하기에는 약소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한은 테이블 위에 주머니 하나를 올려놓았다. 주머니 안에 있는 물건은 한이 지난 육 개월간 사냥한 몬스터에게서 획득한 마도 광물이었는데, 하나같이 최고급 상품들인지라 그 양은 많지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허허, 이 친구야.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생명의 은인을 상대로 대가를 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바스티안은 주머니를 밀어냈다. 한은 주머니를 다시 바스티안 쪽으로 밀어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바스티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스터가 받지 않으신다면 제가 억지로 권할 수는 없는 일이죠. 다만 마스터가 이걸 받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제 두 번 다시 마스터에게 이런 부탁을 하러 찾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
바스티안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럼 저는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놈에게 정비를 부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잘못된 정보 혹은 불량품 장비를 사용하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도 있을 수도 있겠군요. 뭐, 마스터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받으면 되잖아, 받으면. 자네 그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만.”
“어라?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마스터가 받지 않으시면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마스터께서 제 성의를 받아드려 주신다면 저야 기쁜 마음으로 정비를 부탁드릴 수 있겠군요.”
한은 빙긋 웃어보이고는 허브티를 마저 마셨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카타나 그 놈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바스티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스티안의 입에서 카타나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스티안에게 되물었다.
“마스터도 카타나를 신경 쓰고 계시는 건가요? 하, 그놈들 제법이네. 나이트 워커의 길드 마스터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걸 알게 된다면 기무라, 그 관심종자가 기뻐 날뛰겠군요.”
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바스티안의 표정은 못내 진지했다.
“그렇게 쉽게 넘길 일이 아니야. 내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카타나가 은밀하게 자네에 관한 정보를 여기저기서 수집하고 있다고 하네. 자네도 알겠지만 카타나의 길드 마스터인 기무라 마사요시는 보통 집요한 놈이 아니라네. 만약 그놈들이 자네를 노리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닌 셈이지.”
“…….”
한은 아무 말 없이 허브티만 마시고 있을 뿐이었고, 바스티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타나 그놈들, 마냥 잔챙이들은 아니야. 분명히 말해서 저열한 놈들이기는 하다만 자네도 알지 않나? 그놈들 별명이 뭔지.”
“헌터들의 무덤이었죠. 아마.”
한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담담하지 않았다.
카타나는 이제는 아우터 존에 삼켜진 과거 일본 출신의 헌터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헌터 길드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초승달과 바토르의 뒤를 잇는 서열 3위에 해당하는 거대 길드였다.
카타나는 맡은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성하는 치밀함,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 등으로도 유명하지만, 헌터들 사이에서 카타나는 다른 이유로 악명이 높았다.
그 이름하야 헌터들의 무덤 카타나.
막 헌터계에 입문한 어린 헌터들을 픽업해서 반강제로 길드에 가입시키고는 그들을 혹사시킬 대로 혹사시킨 후 폐기처분하는 카타나의 방식은 많은 헌터들의 반감을 샀고, 명망 있는 헌터들 사이에서는 카타나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한이 카타나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외에도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놈들 아무래도 수상해.’
최근 들어 사냥개들의 습격이 잦아지고 있다. 에드문드나 요제프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들이라 해도 그들의 힘만으로 이렇게 쉽게 사냥개를 파견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구에서 그놈들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놈들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리고 카타나는 그 끄나풀 후보로 한이 주시하고 있는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는 건 피차 마찬가지 였는지, 카타나 역시 한에 대해서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물론 자네 실력이야 내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자네는 그 사냥개들로부터도 위협을 받고 있는 신세 아닌가? 여기에 카타나 놈들까지 방해하면 자네의 행동은 더욱더 지장을 받게 될 거야. 그러니 부디 조심하도록 하게.”
누가 ‘사람 좋은 바스티안’ 아니랄까봐 한을 걱정하는 바스티안의 표정은 진지했다.
“네, 뭐 저도 나름대로 조심은 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번 원정이 끝나면 한 번 들쑤셔 볼 생각이에요. 한 번 여기저기 찔러 보면 대충 뭐하는 놈들인지 견적이 나오겠죠.”
한은 카타나가 사실은 사냥개들의 하수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바스티안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놈들,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카타나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점이 있다면 이번 거제도 원정. 사냥개의 끄나풀로 의심되는 카타나가 이번 거제도 원정을 방해하려 든다면 그건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될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는 못한 거 같아. 아, 그리고 그놈들 말야, 지금쯤…….”
말을 하던 바스티안이 갑자기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아프리카 비룽가 산맥 근처를 열심히 뒤지고 있을걸. 크크, 자네의 행방을 찾아서 말이지.”
“하하, 마스터의 솜씨군요.”
한의 행방을 찾아 헤매던 카타나가 비룽가 산맥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스티안이 나이트 워커의 정보망을 이용해 카타나를 교란시킨 것이다. 카타나가 아시아권에서 손가락에 드는 거대 길드라 해도, 정보에 관해서는 수호위원회 정보국과 쌍벽을 이루는 나이트 워커가 교란 작전을 펼치는 데에는 당할 재주가 없을 터였다.
“어찌 됐건 마스터 덕분에 당분간 시간은 번 거 같군요. 감사합니다. 마스터. 카타나는 조만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한은 몸을 일으켰다.
“차 잘 마셨습니다, 마스터. 그럼 내일 찾아뵙도록 하죠.”
“벌써 가게? 조금 더 얘기도 하고 그렇지 그래?”
한은 자신을 따라 몸을 일으키는 바스티안을 만류했다.
“말씀드렸다시피 피어스 씨를 아직 만나 뵙지 못해서 말이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쪽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은 다시 한 번 바스티안에게 고개를 숙여서 작별의 의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화원 밖으로 나와 수호위원회 속초 지부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