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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6화)
“네, 손님. 더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조금 전 아포카토를 가져다 준 검은 머리의 웨이트리스였다.
“필요한 게 있냐구요?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이거 안 보여요?”
한은 냉랭한 목소리로 아포카토가 담긴 잔을 가리켰다.
“네? 저기, 손님.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면…….”
웨이트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무슨 일로 트집을 잡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주문할 때 제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에스프레소를 뜨겁게 해달라고. 그런데 이 꼬라지 좀 보세요.”
지금 막 에스프레소를 뿌린 아이스크림은 채 녹지 않아 군데군데 덩이가 져 있었다.
“에스프레소를 뜨겁게 해달라고 했으면, 붓자마자 아이스크림이 녹을 정도로 뜨겁게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는 게 일생일대의 문제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어 대는 한을 보며, 웨이트리스는 어쩔 줄 모르는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손님, 아포카토는 커피를 부었을 때 아이스크림이 녹는 정도에 따라서 그 풍미가 다르답니다. 저희 카페에서는 손님 분들께서 그 정도에 따른 맛을 모두 느껴보셨으면 하는 생각으로…….”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당신, 지금 나 가르치는 겁니까?”
한은 웨이트리스의 말을 끊으며 말하고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거만한 표정과 태도는 전형적인 진상 고객의 모습이었다.
“다 필요 없고, 매니저 불러오시죠. 내가 직접 한마디 하기 전에는 그냥 못 갈 것 같으니까.”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한을 보는 웨이트리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뭐해요? 가서 매니저 데려오라니까?”
“저기, 손님…….”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선에서 상황을 수습해 보려는 듯 웨이트리스는 안간힘을 다했지만, 한의 거만한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미영 씨, 무슨 일이야?”
홀에서의 소란을 들은 건지, 안쪽의 문이 열리고 정장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여자가 나왔다. 깔끔하게 위아래로 맞춰 입은 한 벌의 정장과 뿔테 안경, 묶어 올린 포니테일이 전체적으로 깐깐한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아, 매니저님.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이 손님 분께서…….”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웨이트리스는 자신이 매니저라 부른 여성을 붙잡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기 매니저입니까?”
한이 대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 아포카토 상태며, 점원 태도가 하도 엉망이라서 내가 한마디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데 통 알아먹지를 못하는 것 같아서요. 매니저 분 상대로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시간 좀 내주시죠?”
오만불손한 태도며 자신이 할 말만 내뱉는 무례한 태도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한 한의 행패를 보고 매니저는 웨이트리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미영 씨, 이 분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미영 씨는 가서 잠깐 쉬고 있어.”
“매니저님…….”
“응,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어. 얼른.”
존경의 눈빛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웨이트리스의 엉덩이를 살짝 두드려 준 매니저는 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께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의견을 주신다니, 당연히 경청해야겠죠. 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진상 고객을 한두 번 다뤄본 게 아닌 듯, 매니저는 관록이 묻어나는 태도로 한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카페 내부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3층으로 올라가자, 계단 정면에 사무실이 보였다. 매니저는 사무실 문을 열고 한을 자리로 안내했다.
“자,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여기 잠깐만 앉아 계시겠어요? 음료는 녹차, 홍차, 코코아가 있는데 어떤 걸로 준비 해드릴까요?”
자신의 홈그라운드로 왔다는 이점 때문인지 매니저의 태도는 한결 여유가 넘쳐흘렀다.
반면 3층으로 올라올 때부터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짓던 한의 태도는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한 층 더 불안해지더니, 의자에 앉아서는 좌절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한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줘요.”
힘없는 점원을 상대로 진상 짓을 했다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한을 보며 카페 ‘골든 선데이’ 의 매니저 수아는 쿡쿡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럴수야 없죠. 고객님. 아무거나 드렸다가 우리 까칠한 고객님께서 이번엔 사장이라도 찾으면 저희는 큰일인걸요.”
깐깐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수아의 목소리에는 둥글둥글한 여유가 넘쳐 흘렀다. 말투나 몸동작을 보건데 한과 수아는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듯 했다.
“수아 씨, 마스터한테 건의 좀 드리라니까요. 이런 식으로 접선하는 방법은 진짜 아니니까 다른 방법으로 바꾸라고 말입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류 한 군 전용 접선 방식을 고안하기 위해서 저와 마스터님이 고민 끝에 만든 게 지금 방식인걸요, 저나 마스터님이나 바꿀 생각은 없답니다.”
수아는 연신 생글거리며 코코아를 타서 한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말 악취미에요. 수아 씨도, 마스터도…….”
한은 코코아를 한 모금 넘겼다. 달디달아야 할 코코아가 무척이나 쓰게 느껴졌다.
지금 한이 방문한 장소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카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헌터 길드 ‘Night Walker’의 비밀 지부 였고, 카페 매니저로 위장하고 있는 수아는 길드의 고위 간부중 한 명이었다.
여타의 길드와는 달리 ‘비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나이트 워커 길드는 그 길드명과 엠블럼을 제외하고는 길드원들의 신상 및 활동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비밀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이 방금 전 벌인 진상 짓은, 단순한 영업 방해 행위가 아니라 한과 나이트 워커 사이에 약속된 접선의 암호였다. 속초에 있는 골든 선데이로 와서 아포카토를 시켜놓고 에스프레소 온도를 가지고 생트집을 잡으며 진상을 부릴 것.
길드 마스터의 별난 취미 덕분에 한은 접선을 시도할 때마다 점원을 상대로 진상 짓을 해야 했고, 이는 점원과 한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정신적 대미지를 안겨 주었다.
“그래서 지금 마스터는 어디 계십니까?”
한은 내뱉듯이 말했다. 이 치욕을 무릅쓰면서까지 접선을 시도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나이트 워커의 길드 마스터인 바스티안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마스터는 지금 여기에 계시지.”
수아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 화원 ‘영원’,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바람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법 감성적인 문구가 새겨진 명함을 보면서 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신장 2m 30㎝, 체중 150㎏에 육박하는 거구가 영원의 꽃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이거는 어울리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범죄의 영역이었다.
“지난번에는 빵집 아니었나요?”
“응, 맞아. 한 군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마스터가 워낙에 다재다능한 분이잖아.”
수아는 고개를 살짝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이 50 넘은 아저씨가 육 개월이 멀다 하고 직업을 갈아치우면 그건 그냥 철이 안 든 거죠.”
명함을 집어든 한은 몸을 일으켰다. 화원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부터 서두르면 점심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영 씨라고 했던가요? 아까 그 점원 분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으니 잘 달래주세요.”
몸을 일으키는 한의 어깨를 수아가 지그시 내리눌렀다.
“아포카토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마시고 가. 응? 한 군 매번 우리 가게에 와서 제대로 마시고 간 적은 없잖아? 다시 홀로 나가기에는 번거로울 테니까 여기로 가져다줄게.”
“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죠.”
한은 몸을 다시 주저 앉혔다. 생각해 보니 수아의 말대로 한은 골든 선데이에 와서 아포카토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상 짓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은데 앉아서 커피나 먹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번 기회를 이용해 골든 선데이의 아포카토를 제대로 맛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괴물을 만나러 갈 텐데, 달달한 차 한 잔 마시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흐음, 분명이 이 부근인데…….”
한은 번화가로 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함에 쓰여 있는 주소가 맞다면 분명 화원 ‘영원’은 이 근처에 있을 텐데, 통 보이지를 않는다.
그때, 사거리 뒤쪽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 한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자신을 가져도 됩니다.”
“저,정말요?”
“그럼요.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을 믿어요. 아가씨에게는 피어나는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어요. 아가씨에게 필요한건 오직 하나,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랍니다.”
깊은 산 속 동굴에서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중후하고 온화한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
한이 찾아 헤매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자, 주문하신 장미 꽃다발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거는 아가씨를 응원하는 제 마음.”
그곳엔 남자 친구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참인지 곱게 차려입은 단발머리의 젊은 아가씨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꽃다발 중앙에 튤립 한 송이가 꽃혔다.
정말이지 큼지막한 두 손이 단발머리 아가씨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위압감을 줄 만큼 커다란 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 때문인지 위압감보다는 따스한 애정이 묻어나는 손동작이었다.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가서 아가씨의 사랑을 이루세요. 저도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아저씨. 저 용기가 생겼어요. 그럼 저 다녀올게요.”
“후훗, 다녀와요. 귀여운 아가씨. 좋은 소식 있거든 전해주고.”
단발머리 아가씨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한참, 정말이지 한참 높은 곳에 있는 미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화원에서 멀어져 갔다.
“이야, 이거 참 감동적인 광경인데요. 귀여운 아가씨의 사랑을 응원하는 다정한 꽃집 아저씨라니, 키가 30, 아니 40㎝만 더 작고 체중이 50㎏만 덜 나갔어도 훨씬 더 보기 좋을 텐데, 그 점이 조금 안타깝군요.”
소녀가 떠나간 자리를 채우고 나타난 한은 히죽거리며 꽃집 아저씨 ‘바스티안‘ 의 앞에 섰다. 누구에게나 정중하고 예의바른 한을 알고 있는 자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불경스러운 태도였다.
“하하, 손님. 불편을 끼쳐드린 점은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래봬도 제 몸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모처럼 화원에 오셨으니 제 신체에 대한 품평보다는 아름다운 꽃들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화원 ‘영원’의 주인, 바스티안이 큼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한을 정중하게 응대했다.
“뭐, 저도 그렇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이 꼴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그럴 수 가 없네요.”
하지만 한은 태도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네, 손님. 더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조금 전 아포카토를 가져다 준 검은 머리의 웨이트리스였다.
“필요한 게 있냐구요?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이거 안 보여요?”
한은 냉랭한 목소리로 아포카토가 담긴 잔을 가리켰다.
“네? 저기, 손님.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면…….”
웨이트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무슨 일로 트집을 잡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주문할 때 제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에스프레소를 뜨겁게 해달라고. 그런데 이 꼬라지 좀 보세요.”
지금 막 에스프레소를 뿌린 아이스크림은 채 녹지 않아 군데군데 덩이가 져 있었다.
“에스프레소를 뜨겁게 해달라고 했으면, 붓자마자 아이스크림이 녹을 정도로 뜨겁게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는 게 일생일대의 문제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어 대는 한을 보며, 웨이트리스는 어쩔 줄 모르는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손님, 아포카토는 커피를 부었을 때 아이스크림이 녹는 정도에 따라서 그 풍미가 다르답니다. 저희 카페에서는 손님 분들께서 그 정도에 따른 맛을 모두 느껴보셨으면 하는 생각으로…….”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당신, 지금 나 가르치는 겁니까?”
한은 웨이트리스의 말을 끊으며 말하고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거만한 표정과 태도는 전형적인 진상 고객의 모습이었다.
“다 필요 없고, 매니저 불러오시죠. 내가 직접 한마디 하기 전에는 그냥 못 갈 것 같으니까.”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한을 보는 웨이트리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뭐해요? 가서 매니저 데려오라니까?”
“저기, 손님…….”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선에서 상황을 수습해 보려는 듯 웨이트리스는 안간힘을 다했지만, 한의 거만한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미영 씨, 무슨 일이야?”
홀에서의 소란을 들은 건지, 안쪽의 문이 열리고 정장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여자가 나왔다. 깔끔하게 위아래로 맞춰 입은 한 벌의 정장과 뿔테 안경, 묶어 올린 포니테일이 전체적으로 깐깐한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아, 매니저님.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이 손님 분께서…….”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웨이트리스는 자신이 매니저라 부른 여성을 붙잡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기 매니저입니까?”
한이 대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 아포카토 상태며, 점원 태도가 하도 엉망이라서 내가 한마디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데 통 알아먹지를 못하는 것 같아서요. 매니저 분 상대로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시간 좀 내주시죠?”
오만불손한 태도며 자신이 할 말만 내뱉는 무례한 태도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한 한의 행패를 보고 매니저는 웨이트리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미영 씨, 이 분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미영 씨는 가서 잠깐 쉬고 있어.”
“매니저님…….”
“응,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어. 얼른.”
존경의 눈빛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웨이트리스의 엉덩이를 살짝 두드려 준 매니저는 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께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의견을 주신다니, 당연히 경청해야겠죠. 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진상 고객을 한두 번 다뤄본 게 아닌 듯, 매니저는 관록이 묻어나는 태도로 한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카페 내부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3층으로 올라가자, 계단 정면에 사무실이 보였다. 매니저는 사무실 문을 열고 한을 자리로 안내했다.
“자,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여기 잠깐만 앉아 계시겠어요? 음료는 녹차, 홍차, 코코아가 있는데 어떤 걸로 준비 해드릴까요?”
자신의 홈그라운드로 왔다는 이점 때문인지 매니저의 태도는 한결 여유가 넘쳐흘렀다.
반면 3층으로 올라올 때부터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짓던 한의 태도는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한 층 더 불안해지더니, 의자에 앉아서는 좌절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한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아무거나 줘요.”
힘없는 점원을 상대로 진상 짓을 했다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한을 보며 카페 ‘골든 선데이’ 의 매니저 수아는 쿡쿡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럴수야 없죠. 고객님. 아무거나 드렸다가 우리 까칠한 고객님께서 이번엔 사장이라도 찾으면 저희는 큰일인걸요.”
깐깐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수아의 목소리에는 둥글둥글한 여유가 넘쳐 흘렀다. 말투나 몸동작을 보건데 한과 수아는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듯 했다.
“수아 씨, 마스터한테 건의 좀 드리라니까요. 이런 식으로 접선하는 방법은 진짜 아니니까 다른 방법으로 바꾸라고 말입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류 한 군 전용 접선 방식을 고안하기 위해서 저와 마스터님이 고민 끝에 만든 게 지금 방식인걸요, 저나 마스터님이나 바꿀 생각은 없답니다.”
수아는 연신 생글거리며 코코아를 타서 한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말 악취미에요. 수아 씨도, 마스터도…….”
한은 코코아를 한 모금 넘겼다. 달디달아야 할 코코아가 무척이나 쓰게 느껴졌다.
지금 한이 방문한 장소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카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헌터 길드 ‘Night Walker’의 비밀 지부 였고, 카페 매니저로 위장하고 있는 수아는 길드의 고위 간부중 한 명이었다.
여타의 길드와는 달리 ‘비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나이트 워커 길드는 그 길드명과 엠블럼을 제외하고는 길드원들의 신상 및 활동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비밀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이 방금 전 벌인 진상 짓은, 단순한 영업 방해 행위가 아니라 한과 나이트 워커 사이에 약속된 접선의 암호였다. 속초에 있는 골든 선데이로 와서 아포카토를 시켜놓고 에스프레소 온도를 가지고 생트집을 잡으며 진상을 부릴 것.
길드 마스터의 별난 취미 덕분에 한은 접선을 시도할 때마다 점원을 상대로 진상 짓을 해야 했고, 이는 점원과 한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정신적 대미지를 안겨 주었다.
“그래서 지금 마스터는 어디 계십니까?”
한은 내뱉듯이 말했다. 이 치욕을 무릅쓰면서까지 접선을 시도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나이트 워커의 길드 마스터인 바스티안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마스터는 지금 여기에 계시지.”
수아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 화원 ‘영원’,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바람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법 감성적인 문구가 새겨진 명함을 보면서 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신장 2m 30㎝, 체중 150㎏에 육박하는 거구가 영원의 꽃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이거는 어울리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범죄의 영역이었다.
“지난번에는 빵집 아니었나요?”
“응, 맞아. 한 군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마스터가 워낙에 다재다능한 분이잖아.”
수아는 고개를 살짝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이 50 넘은 아저씨가 육 개월이 멀다 하고 직업을 갈아치우면 그건 그냥 철이 안 든 거죠.”
명함을 집어든 한은 몸을 일으켰다. 화원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부터 서두르면 점심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영 씨라고 했던가요? 아까 그 점원 분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으니 잘 달래주세요.”
몸을 일으키는 한의 어깨를 수아가 지그시 내리눌렀다.
“아포카토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마시고 가. 응? 한 군 매번 우리 가게에 와서 제대로 마시고 간 적은 없잖아? 다시 홀로 나가기에는 번거로울 테니까 여기로 가져다줄게.”
“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그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죠.”
한은 몸을 다시 주저 앉혔다. 생각해 보니 수아의 말대로 한은 골든 선데이에 와서 아포카토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상 짓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은데 앉아서 커피나 먹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번 기회를 이용해 골든 선데이의 아포카토를 제대로 맛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괴물을 만나러 갈 텐데, 달달한 차 한 잔 마시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흐음, 분명이 이 부근인데…….”
한은 번화가로 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함에 쓰여 있는 주소가 맞다면 분명 화원 ‘영원’은 이 근처에 있을 텐데, 통 보이지를 않는다.
그때, 사거리 뒤쪽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 한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자신을 가져도 됩니다.”
“저,정말요?”
“그럼요.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을 믿어요. 아가씨에게는 피어나는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어요. 아가씨에게 필요한건 오직 하나,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랍니다.”
깊은 산 속 동굴에서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중후하고 온화한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
한이 찾아 헤매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자, 주문하신 장미 꽃다발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거는 아가씨를 응원하는 제 마음.”
그곳엔 남자 친구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참인지 곱게 차려입은 단발머리의 젊은 아가씨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꽃다발 중앙에 튤립 한 송이가 꽃혔다.
정말이지 큼지막한 두 손이 단발머리 아가씨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위압감을 줄 만큼 커다란 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 때문인지 위압감보다는 따스한 애정이 묻어나는 손동작이었다.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가서 아가씨의 사랑을 이루세요. 저도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아저씨. 저 용기가 생겼어요. 그럼 저 다녀올게요.”
“후훗, 다녀와요. 귀여운 아가씨. 좋은 소식 있거든 전해주고.”
단발머리 아가씨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한참, 정말이지 한참 높은 곳에 있는 미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화원에서 멀어져 갔다.
“이야, 이거 참 감동적인 광경인데요. 귀여운 아가씨의 사랑을 응원하는 다정한 꽃집 아저씨라니, 키가 30, 아니 40㎝만 더 작고 체중이 50㎏만 덜 나갔어도 훨씬 더 보기 좋을 텐데, 그 점이 조금 안타깝군요.”
소녀가 떠나간 자리를 채우고 나타난 한은 히죽거리며 꽃집 아저씨 ‘바스티안‘ 의 앞에 섰다. 누구에게나 정중하고 예의바른 한을 알고 있는 자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불경스러운 태도였다.
“하하, 손님. 불편을 끼쳐드린 점은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래봬도 제 몸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모처럼 화원에 오셨으니 제 신체에 대한 품평보다는 아름다운 꽃들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화원 ‘영원’의 주인, 바스티안이 큼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한을 정중하게 응대했다.
“뭐, 저도 그렇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이 꼴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그럴 수 가 없네요.”
하지만 한은 태도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