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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5화)
똑똑똑.
그리고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한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와인 빛깔의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였다.
눌러쓴 털모자 아래로 늘어진 윤기 나는 백금발과 하얀 살결, 코트 아래로 쭉쭉 뻗은 시원시원한 팔다리. 그리고 등 뒤로 비끄러맨 무지막지하리만큼 커다란 대검까지.
복장부터 외모, 가지고 있는 소품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그야말로 ‘나는 헌터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의 여자였다.
꾸벅.
여자는 한을 향해 별다른 인사 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이 보여준 호의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거만해 보이는 몸동작이었지만, 그 행동이 마냥 거만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백금발의 여자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듯한 기품 때문일 것이다.
꾸벅.
마찬가지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례한 한은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금발의 여자 역시 한에게는 큰 흥미가 없는지,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백금발 여자가 짐 정리를 다 마쳤을 무렵, 대륙 횡단 열차가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내달리기 시작했다. 초봄의 대륙을 내달리는 열차의 움직임은 경쾌하기 그지없었고, 창밖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며 천태만상의 흥취를 뽐내었다. 하지만…….
“…….”
“…….”
한과 백금발의 여자가 머무르고 있는 객실에서는 한이 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한이 커피를 찻잔에 따라 붓기 위해 고개를 들 때, 아주 잠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무심한 태도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던 두 사람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건 열차가 운행을 시작한 지 세 시간이 경과했을 무렵이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백금발 여자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여자치고는 나지막한 저음이었으나, 봄날의 새벽만큼이나 깊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네?”
한은 그제야 처음으로 여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혹시 헌터이신가요?”
목덜미 근처에서 짧게 자른 백금발과 크고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한데 어울려 봄의 요정과도 같이 화사하지만,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반듯한 이마가 요정보다는 여왕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렸다.
백금발의 여인은 예의 그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한은 여자를 주시하며 되물었다.
자신의 이마에 헌터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처음 만난 여자가 대뜸 헌터냐고 묻는다? 얼마 전, 사냥개들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한으로서는 순순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아, 별건 아니에요. 보통 일반인이라면 제 대검을 보거나, 제가 헌터라는 걸 알게 되면 아닌 척하면서도 이것저것 궁금해 하거든요. 그런데 그쪽 분은 통 반응이 없으셔서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혹시라도 기분 상하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얼음 왕국에서 온 차가운 여왕 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백금발의 여자는 무척이나 정중한 말투로 스스로를 해명했다.
“굉장히 예리한 분을 만났군요.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혹시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계시지 않았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한은 순간적으로 읽으려던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작년 겨울에 말인가요?”
한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있었는지 답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순순히 답해주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바가 많았다.
“초면에 무례한 질문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라서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백금발의 여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첫인상과는 확연히 다른, 간절함이 담긴 모습이었다.
“뭐, 대답해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기대하시는 바를 답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한은 슬쩍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백금발의 여자가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있었던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작년 겨울, 그러니까 11월, 12월 사이에 저는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어디에 있었는지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장소가 마추픽추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여자는 잠시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자는 다시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한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무례한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한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고, 상황은 여자가 내릴 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새 열차가 출발한 지 열 시간이 흘렀고, 여자는 열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어요. 베풀어 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중했고, 한은 고개를 숙임으로써 여인과 작별을 고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인은 거대한 검을 멘 채로 객실 문을 나섰다.
잠시간 정차를 한 열차는 다시 한 번 철로 위를 내달렸다.
한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어느새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창밖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그래, 마치 작년 겨울 눈 덮인 마추픽추가 그랬던 것처럼.
한은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이래서 세상이 좁다는 건가…….”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아주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아무리 그래도 6개월은 너무 빠르잖아.”
잠자코 묵혀두는 게 명백하게 좋은 일일 터. 그런데 이놈의 얄궂은 인연이란 놈은 때때로 자기 마음대로 일을 망치려 든다.
뭐, 그놈의 짓궂은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분명 나를 제대로 보진 못했을 텐데…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한은 자신이 입고 있는 다크 슈트를 찬찬히 매만졌다.
보통 헌터들은 정장을 입지 않는다. 헌터들이 애용하는 복장은 경량화 작업을 거친 갑옷이나 마물의 가죽을 가공 처리해서 만든 전투복이다. 그 때문에 한이 애용하는 검은색 정장은 헌터들 사이에서는 유독 눈에 띈다.
작년 겨울, 그 장소에 있었던 건 단 둘. 훗날 누군가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준거라면 역시 이 검은 정장이 문제였을 것이다.
“후우…….”
어쨌든, 평상시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도 큰 무리가 없다는 이유로 정장을 전투복으로 애용하던 한으로서는, 이 복장이 역설적으로 눈에 띈다는 게 여러모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한 번 남았으니까.”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한 번 이 더 남았다. 닥치지 않은필연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열차는 속초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본 열차는 종착역인 속초, 속초에 도착했습니다. 뉴 월드 익스프레스를 이용해 주신 고객 분들께 감사드리며…….”
열차가 속초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플랫폼에 울려 퍼졌다. 2박 3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속초에 도착한 한은 속초의 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의 최남단 도시, 속초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이 맥동을 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홀로그램과 입체 영상들이 쉼 없이 점멸했다.
거리의 양쪽에는 3, 400층은 우습게 돌파하는 빌딩들이 죽 늘어서 있고, 빌딩 사이사이로 보이는 각종 헌터 길드의 휘장들과 헌터 상점들, 거리를 누비는 각양각색의 헌터들까지…….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속초는 참으로 이질적인 분위기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남방한계선을 목전에 둔, 인류 활동 가능 구역 최남단이라는 비장함과 함께, 마도 광물의 수급이 가장 원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막대한 부가 주는 풍요로움이 동시에 풍겨 나오는 희한하고 재미있는 도시.
속초의 거리에는 아우터 존의 수복을 향한 인간들의 선망과 인간이라는 종 특유의 무모한 도전 의식, 그리고 막대한 부에 대한 열망이 한데 어우러져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망의 틈바구니 한가운데를 돌파한 한은 목적지인 고층 빌딩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건물 2층의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아포카토. 에스프레소는 진하고 뜨겁게 해주세요.”
주문을 마친 한은 곧바로 디바이스를 꺼내 헌터넷에 접속했다. 헌터넷의 메인 페이지에는 수호위원회가 올린 ‘거제도 원정대 공고’가 점멸하고 있었다.
헌터넷에 원정대원 모집을 위해 공고를 내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공고는 조금 특별했다.
공고를 게시한 자의 신원을 알려주는 게시자 항목에 적혀 있는 이름은 ‘수호위원회’ 단 다섯 글자.
어찌 보면 헌터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다섯 글자이지만, 헌터넷에 올라오는 공문에서 별도의 분과나 세부 기관명이 아닌, 수호위원회라는 다섯 글자를 게시자 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현 수호위원회 위원장 P. 라무스.
즉, 이번 모집 공고는 현 수호위원회 위원장이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게시자명 외에도 위원장이 이번 공고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하나 더 있었다.
‘원정대장이 피어스? 하, 위원장님도 참…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피어스라 하면 한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피어스는 수호위원회 직속의 헌터였다. 현 랭크는 A랭크에 해당하지만, 조만간 S랭크로의 승급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 역시 피어스와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완벽한 일처리로 그 명성이 높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수호위원회 직속의 준 S랭크 헌터를 고작 회색구역인 거제도 원정의 대장으로 임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라무스가 이 계획에 큰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주문하신 아포카토 나왔습니다.”
한이 헌터넷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한이 주문한 아포카토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한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지 카페는 제법 한산했다.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한은 에스프레소를 아이스크림 위에 부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이 녹기를 기다린 후, 스푼을 들고 한 입을 삼켰다.
진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아포카토는 참 훌륭하다. 스푼을 내려놓는 게 힘겨울 정도로…….
삐익.
그때, 한이 갑자기 테이블위에 놓인 호출 벨을 눌렀다.
똑똑똑.
그리고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한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와인 빛깔의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였다.
눌러쓴 털모자 아래로 늘어진 윤기 나는 백금발과 하얀 살결, 코트 아래로 쭉쭉 뻗은 시원시원한 팔다리. 그리고 등 뒤로 비끄러맨 무지막지하리만큼 커다란 대검까지.
복장부터 외모, 가지고 있는 소품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그야말로 ‘나는 헌터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의 여자였다.
꾸벅.
여자는 한을 향해 별다른 인사 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이 보여준 호의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거만해 보이는 몸동작이었지만, 그 행동이 마냥 거만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백금발의 여자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듯한 기품 때문일 것이다.
꾸벅.
마찬가지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례한 한은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금발의 여자 역시 한에게는 큰 흥미가 없는지,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백금발 여자가 짐 정리를 다 마쳤을 무렵, 대륙 횡단 열차가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내달리기 시작했다. 초봄의 대륙을 내달리는 열차의 움직임은 경쾌하기 그지없었고, 창밖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며 천태만상의 흥취를 뽐내었다. 하지만…….
“…….”
“…….”
한과 백금발의 여자가 머무르고 있는 객실에서는 한이 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한이 커피를 찻잔에 따라 붓기 위해 고개를 들 때, 아주 잠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무심한 태도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던 두 사람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건 열차가 운행을 시작한 지 세 시간이 경과했을 무렵이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백금발 여자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여자치고는 나지막한 저음이었으나, 봄날의 새벽만큼이나 깊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네?”
한은 그제야 처음으로 여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혹시 헌터이신가요?”
목덜미 근처에서 짧게 자른 백금발과 크고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한데 어울려 봄의 요정과도 같이 화사하지만,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반듯한 이마가 요정보다는 여왕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렸다.
백금발의 여인은 예의 그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한은 여자를 주시하며 되물었다.
자신의 이마에 헌터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처음 만난 여자가 대뜸 헌터냐고 묻는다? 얼마 전, 사냥개들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한으로서는 순순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아, 별건 아니에요. 보통 일반인이라면 제 대검을 보거나, 제가 헌터라는 걸 알게 되면 아닌 척하면서도 이것저것 궁금해 하거든요. 그런데 그쪽 분은 통 반응이 없으셔서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혹시라도 기분 상하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얼음 왕국에서 온 차가운 여왕 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백금발의 여자는 무척이나 정중한 말투로 스스로를 해명했다.
“굉장히 예리한 분을 만났군요.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혹시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계시지 않았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한은 순간적으로 읽으려던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작년 겨울에 말인가요?”
한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있었는지 답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순순히 답해주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바가 많았다.
“초면에 무례한 질문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라서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백금발의 여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첫인상과는 확연히 다른, 간절함이 담긴 모습이었다.
“뭐, 대답해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기대하시는 바를 답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한은 슬쩍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백금발의 여자가 작년 겨울 마추픽추에 있었던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작년 겨울, 그러니까 11월, 12월 사이에 저는 마추픽추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어디에 있었는지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장소가 마추픽추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여자는 잠시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자는 다시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한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무례한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한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고, 상황은 여자가 내릴 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새 열차가 출발한 지 열 시간이 흘렀고, 여자는 열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어요. 베풀어 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중했고, 한은 고개를 숙임으로써 여인과 작별을 고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인은 거대한 검을 멘 채로 객실 문을 나섰다.
잠시간 정차를 한 열차는 다시 한 번 철로 위를 내달렸다.
한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어느새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창밖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그래, 마치 작년 겨울 눈 덮인 마추픽추가 그랬던 것처럼.
한은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이래서 세상이 좁다는 건가…….”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아주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아무리 그래도 6개월은 너무 빠르잖아.”
잠자코 묵혀두는 게 명백하게 좋은 일일 터. 그런데 이놈의 얄궂은 인연이란 놈은 때때로 자기 마음대로 일을 망치려 든다.
뭐, 그놈의 짓궂은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분명 나를 제대로 보진 못했을 텐데… 역시 이 옷이 문제인가?”
한은 자신이 입고 있는 다크 슈트를 찬찬히 매만졌다.
보통 헌터들은 정장을 입지 않는다. 헌터들이 애용하는 복장은 경량화 작업을 거친 갑옷이나 마물의 가죽을 가공 처리해서 만든 전투복이다. 그 때문에 한이 애용하는 검은색 정장은 헌터들 사이에서는 유독 눈에 띈다.
작년 겨울, 그 장소에 있었던 건 단 둘. 훗날 누군가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준거라면 역시 이 검은 정장이 문제였을 것이다.
“후우…….”
어쨌든, 평상시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도 큰 무리가 없다는 이유로 정장을 전투복으로 애용하던 한으로서는, 이 복장이 역설적으로 눈에 띈다는 게 여러모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한 번 남았으니까.”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한 번 이 더 남았다. 닥치지 않은필연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열차는 속초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본 열차는 종착역인 속초, 속초에 도착했습니다. 뉴 월드 익스프레스를 이용해 주신 고객 분들께 감사드리며…….”
열차가 속초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플랫폼에 울려 퍼졌다. 2박 3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속초에 도착한 한은 속초의 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의 최남단 도시, 속초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이 맥동을 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홀로그램과 입체 영상들이 쉼 없이 점멸했다.
거리의 양쪽에는 3, 400층은 우습게 돌파하는 빌딩들이 죽 늘어서 있고, 빌딩 사이사이로 보이는 각종 헌터 길드의 휘장들과 헌터 상점들, 거리를 누비는 각양각색의 헌터들까지…….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속초는 참으로 이질적인 분위기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남방한계선을 목전에 둔, 인류 활동 가능 구역 최남단이라는 비장함과 함께, 마도 광물의 수급이 가장 원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막대한 부가 주는 풍요로움이 동시에 풍겨 나오는 희한하고 재미있는 도시.
속초의 거리에는 아우터 존의 수복을 향한 인간들의 선망과 인간이라는 종 특유의 무모한 도전 의식, 그리고 막대한 부에 대한 열망이 한데 어우러져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망의 틈바구니 한가운데를 돌파한 한은 목적지인 고층 빌딩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건물 2층의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아포카토. 에스프레소는 진하고 뜨겁게 해주세요.”
주문을 마친 한은 곧바로 디바이스를 꺼내 헌터넷에 접속했다. 헌터넷의 메인 페이지에는 수호위원회가 올린 ‘거제도 원정대 공고’가 점멸하고 있었다.
헌터넷에 원정대원 모집을 위해 공고를 내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공고는 조금 특별했다.
공고를 게시한 자의 신원을 알려주는 게시자 항목에 적혀 있는 이름은 ‘수호위원회’ 단 다섯 글자.
어찌 보면 헌터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다섯 글자이지만, 헌터넷에 올라오는 공문에서 별도의 분과나 세부 기관명이 아닌, 수호위원회라는 다섯 글자를 게시자 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현 수호위원회 위원장 P. 라무스.
즉, 이번 모집 공고는 현 수호위원회 위원장이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게시자명 외에도 위원장이 이번 공고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하나 더 있었다.
‘원정대장이 피어스? 하, 위원장님도 참…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피어스라 하면 한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피어스는 수호위원회 직속의 헌터였다. 현 랭크는 A랭크에 해당하지만, 조만간 S랭크로의 승급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 역시 피어스와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완벽한 일처리로 그 명성이 높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수호위원회 직속의 준 S랭크 헌터를 고작 회색구역인 거제도 원정의 대장으로 임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라무스가 이 계획에 큰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주문하신 아포카토 나왔습니다.”
한이 헌터넷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한이 주문한 아포카토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한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지 카페는 제법 한산했다.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한은 에스프레소를 아이스크림 위에 부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이 녹기를 기다린 후, 스푼을 들고 한 입을 삼켰다.
진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아포카토는 참 훌륭하다. 스푼을 내려놓는 게 힘겨울 정도로…….
삐익.
그때, 한이 갑자기 테이블위에 놓인 호출 벨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