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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4화)
지하층에 다다르자, 역무원 복장을 한 중년 남성이 허리를 숙여 한을 맞이했다.
“뉴 월드 익스프레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떤 서비스를 예약하셨는지요?”
“류 한이라는 이름으로 속초행 특급열차를 예약했습니다. 지금 탑승 가능한가요?”
“확인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 남성은 단말기를 두드려 탑승인 명부를 확인하면서 연신 한을 흘끔거렸다.
속초는 남방한계선 근방에 위치한, 인류가 활동 가능한 최남단의 도시.
그 말인즉, 속초행 특급열차를 탑승한다는 것은 헌터이거나, 혹은 헌터 관련 기관에 종사하는 연방 정부 산하의 고위 관리일 확률이 아주 크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한은 연방 정부 산하 관리로 보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렇다고 헌터로 간주하기에는…….
“…….”
한의 복장이 너무 말쑥했다.
세간의 말로는 헌터들을 가리켜 패션 센스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한 괴짜 중의 괴짜들이라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현재 한의 복장은 말끔한 검은색 투피스 정장.
한쪽 눈에 안대를 하거나, 한쪽 팔에 의수를 단 헌터를 본다 해도 놀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정장 차림의 단정한 헌터를 봤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부지기수리라.
그래서인지, 탑승인 명부를 살피는 역무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 네. 조금 전, 그러니까 10시 18분경에 트윈 리버 호텔을 통해 예약하신 류 한님이 맞으신지요? 실례지만 저희 쪽에서 보내드린…….”
“430―JT184입니다.”
“네. 확인 끝났습니다. 속초행 특급열차, 10분 후에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 플랫폼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인증 코드를 확인한 역무원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한을 안내했고, 한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복도를 지나 플랫폼으로 입장했다.
플랫폼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홀로그램이 점멸하며 한을 반겨 주었다.
허공에 온갖 찬란한 빛을 뿌리며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홀로그램은 각각 맵시를 뽐내며 플랫폼에 입장한 사람들을 유혹했다.
― 추억은 기억보다 향기롭습니다. 내 곁에 남은 당신의 기억은 밀크 티의 향을 닮아 있는…….
푸른색 코트를 입은 깔끔한 남자 모델의 홀로그램이 광고하는 자판기. 한은 원두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대기석에 앉아서 오늘 아침 ‘진’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한, 거제도에 차원 문이 열렸어요! 검은색 탑이 솟아올랐다고요! 고대 문명과 관련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요.”
고대 문명. 한에게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관용구는 적어도 그 대상을 한과 고대 문명으로 한정하면 명백하게 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저기 말야, 진. 명색이 수줍은 소녀를 자처하시는 분이 ‘문화인은 노크를 합니다’라는 기본적인 에티켓도 모른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자신의 머리맡에서 열리는 차원 문을 보며 기상을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의 객실에는 분명히 ‘문’이라는 게 존재한다.
차원 문을 열 수 있다고 해서 문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문을 닫아 놓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한의 까칠한 반응에 5월의 바다를 닮은 진의 푸른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한!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설마, 이 나를 상대로?”
하얗고 매끈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진은 고운 미소를 지었다. 허리 근처에서 찰랑이는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이 유려한 움직임을 그렸다.
“상대가 꼭 진이라서가 아니야.”
한은 벗어놓은 셔츠에 목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성인 남성으로서의 기본적인 부끄러움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야. 이 부끄러움의 절반은 네 몫이라고.”
진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리라도 들은 사람마냥,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지금 똥 기저귀 갈아줘 가며 키워 준 사람한테 부끄러움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들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지. 그리고 모든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지…….”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진의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를 보며, 한은 두통을 느꼈다.
“지혜로운 어머니라면 다 자란 아들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부끄러움 정도는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흥, 다 컸다는 사람치고 정말 다 큰 사람 하나도 없다더라.”
“물론 진이 보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해 보이겠지만…….”
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걸친 반팔 티셔츠와 속옷 밑으로 잘 발달된 근육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알지 못했는데, 몸을 일으킨 한은 꽤나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여성치고는 상당한 장신인 진이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한의 턱 끝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한은 상당한 장신의 소유자였다.
“여기서 더 커버리면 사람들이 무서워할지도 몰라. 사실 지금도 아슬아슬한 상태거든.”
한은 뺨을 긁으며 진을 내려다보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유달리 날카롭고 짙은 눈매였다.
“아무튼,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어머, 맞아!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의 말에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진이 양 손바닥을 맞부딪치고는 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 12시간 전에 거제도에 대규모 차원 문이 열리고 검은색 탑이 솟아올랐어요. 그런데 이 탑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요. 어쩌면 고대인의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대의 유물이라…….”
한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사냥개들이 준동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돌아가는 분위기도 심상치 않는 둥, 영 찝찝한 일만 생기는 터라 짜증이 솟구치는 참이었는데, 거제도에 솟아오른 탑에 고대 유물이 잠들어 있다면 모처럼만에 희소식인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그냥 느낌.”
한의 질문에 진은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한은 거기에 반론을 펴거나 하진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진은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하나의 세계를 지켜온 존재. 지금도 실질적으로 지구의 절반을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근거가 느낌뿐일지라도 그 느낌의 주체가 진이라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더불어 그 느낌이 가리키는 게 고대 유물이라면, 움직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한은 머릿속으로 향후 일정표를 짰다.
일단 라무스 위원장님에게 전화를 해서 원정대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고, 거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남방한계선을 돌파해야 할 터. 남방한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가야하는 곳은…….
“속초로 가야겠네요.”
한의 표정만을 보고 이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한 진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 단언은 얄미우리만치 정확했다.
“후훗, 흥.”
마치 ‘네가 하는 생각 따위는 내가 훤히 꿰뚫고 있지’ 하는 표정으로 뻐기는 진이었다.
한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목표는 속초. 지금은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속초, 속초행 특급열차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탑승하실 승객 분들은 3번 출입구로 이동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플랫폼에 울려 퍼진 안내 방송이 한의 회상을 중단시켰다.
한은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 키패드를 두드렸다. 디바이스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 입체 지도를 그려냈다.
한이 허공에 손가락을 뻗어 입체 영상을 가리키자, 입체 지도가 확대되며 선명한 회색빛을 뿜었다.
― 거제도, 아우터 존. 지역 등급 : 회색
거제도의 입체 영상과 관련 정보를 숙지한 한이 키패드를 다시 한 번 두드리자, 허공에 떠오른 입체 지도가 사라졌다.
한은 대기석에서 몸을 일으켜 개찰구를 지나, 예약한 급행열차에 올랐다.
자신이 예약한 객실 칸에 들어서며 한은 만족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두 개의 퀸 사이즈 침대가 풍기는 향긋한 참나무 냄새가 객실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한이 굳이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기차를 선택한 이유의 절반쯤은 바로 이 뉴 월드 익스프레스가 자랑하는 침대칸에 있었다.
객실 문을 닫고,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 안에 몸을 싣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번잡한 세상사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들고 있던 슈트케이스를 짐칸에 올려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객실에 비치된 따뜻한 커피를 잔에 옮겨 부은 후,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이걸로 대륙 횡단을 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이제 보고 싶었던 책을 펼쳐 들고 열차가 출발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열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책과 커피 한 잔이면 30분은 금방이었다.
그런데 한이 책과 커피를 즐기며 열차의 출발을 기다린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객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 잠시만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한은 보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승무원 복장의 중년 남자였다.
푸른색 벙거지 모자. 모자의 색으로 판단건대 제법 근무 경력이 오래 된 베테랑 승무원임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일단 양해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은 지금 저희 열차에 헌터 한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15분 후에 출발 예정인 이 열차를 꼭 타셔야 한다고 하시는군요.”
“예, 계속하세요.”
“그런데 갑작스레 하달된 공무여서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객실이 꽉 차서 탑승이 힘드실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중년의 승무원은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매우 급한 공무라 꼭 이 열차를 타야 된다고 하시는군요. 복도에서 서서라도 갈 수 있으니, 일단 탑승만 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희 뉴 월드 익스프레스는 입석 승차가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뉴 월드 익스프레스는 대륙 횡단을 주력으로 하는 열차 사업체. 최소 2박 3일, 길면 일주일도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을 어떻게 서서 갈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사정이 이러한데 혹시 손님께서 그분과 동행해 주실 수 있으신지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물론 손님께서 거절하신다면 저희가 억지로 부탁드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이 객실에 합승을요?”
한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한이 일부러 이 4인용 침대칸을 전부 예약한 이유는 최소한 속초까지 가는 길만큼이라도 편하게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제도에 도착하게 되면 이것저것 험한 꼴을 보게 될 거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타인과의 동행이라, 한으로서는 당연히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거절하기에는 합승의 대상이 공무 수행 중인 헌터라는 사실이 걸렸다.
공무를 수행 중인 헌터라 함은 어딘가 헌터를 필요로 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뜻.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지금 탑승하시는 손님께서는 속초까지 가시는 게 아니라 중간의 경유지에서 하차하신다고 하셨으니, 앞으로 열 시간 정도만 같이 가시면 될 겁니다.”
한의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승무원은 더 간절한 표정을 지었고, 한은 그 표정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열 시간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아 줄 수 있는 범위였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감사합니다, 손님. 그 헌터 분도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승무원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는 잰걸음으로 객실을 빠져나갔다.
지하층에 다다르자, 역무원 복장을 한 중년 남성이 허리를 숙여 한을 맞이했다.
“뉴 월드 익스프레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떤 서비스를 예약하셨는지요?”
“류 한이라는 이름으로 속초행 특급열차를 예약했습니다. 지금 탑승 가능한가요?”
“확인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 남성은 단말기를 두드려 탑승인 명부를 확인하면서 연신 한을 흘끔거렸다.
속초는 남방한계선 근방에 위치한, 인류가 활동 가능한 최남단의 도시.
그 말인즉, 속초행 특급열차를 탑승한다는 것은 헌터이거나, 혹은 헌터 관련 기관에 종사하는 연방 정부 산하의 고위 관리일 확률이 아주 크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한은 연방 정부 산하 관리로 보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렇다고 헌터로 간주하기에는…….
“…….”
한의 복장이 너무 말쑥했다.
세간의 말로는 헌터들을 가리켜 패션 센스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한 괴짜 중의 괴짜들이라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현재 한의 복장은 말끔한 검은색 투피스 정장.
한쪽 눈에 안대를 하거나, 한쪽 팔에 의수를 단 헌터를 본다 해도 놀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정장 차림의 단정한 헌터를 봤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부지기수리라.
그래서인지, 탑승인 명부를 살피는 역무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 네. 조금 전, 그러니까 10시 18분경에 트윈 리버 호텔을 통해 예약하신 류 한님이 맞으신지요? 실례지만 저희 쪽에서 보내드린…….”
“430―JT184입니다.”
“네. 확인 끝났습니다. 속초행 특급열차, 10분 후에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 플랫폼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인증 코드를 확인한 역무원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한을 안내했고, 한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복도를 지나 플랫폼으로 입장했다.
플랫폼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홀로그램이 점멸하며 한을 반겨 주었다.
허공에 온갖 찬란한 빛을 뿌리며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홀로그램은 각각 맵시를 뽐내며 플랫폼에 입장한 사람들을 유혹했다.
― 추억은 기억보다 향기롭습니다. 내 곁에 남은 당신의 기억은 밀크 티의 향을 닮아 있는…….
푸른색 코트를 입은 깔끔한 남자 모델의 홀로그램이 광고하는 자판기. 한은 원두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대기석에 앉아서 오늘 아침 ‘진’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한, 거제도에 차원 문이 열렸어요! 검은색 탑이 솟아올랐다고요! 고대 문명과 관련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요.”
고대 문명. 한에게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관용구는 적어도 그 대상을 한과 고대 문명으로 한정하면 명백하게 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저기 말야, 진. 명색이 수줍은 소녀를 자처하시는 분이 ‘문화인은 노크를 합니다’라는 기본적인 에티켓도 모른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자신의 머리맡에서 열리는 차원 문을 보며 기상을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의 객실에는 분명히 ‘문’이라는 게 존재한다.
차원 문을 열 수 있다고 해서 문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문을 닫아 놓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한의 까칠한 반응에 5월의 바다를 닮은 진의 푸른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한!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설마, 이 나를 상대로?”
하얗고 매끈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진은 고운 미소를 지었다. 허리 근처에서 찰랑이는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이 유려한 움직임을 그렸다.
“상대가 꼭 진이라서가 아니야.”
한은 벗어놓은 셔츠에 목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성인 남성으로서의 기본적인 부끄러움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야. 이 부끄러움의 절반은 네 몫이라고.”
진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리라도 들은 사람마냥,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지금 똥 기저귀 갈아줘 가며 키워 준 사람한테 부끄러움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들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지. 그리고 모든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지…….”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진의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를 보며, 한은 두통을 느꼈다.
“지혜로운 어머니라면 다 자란 아들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부끄러움 정도는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흥, 다 컸다는 사람치고 정말 다 큰 사람 하나도 없다더라.”
“물론 진이 보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해 보이겠지만…….”
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걸친 반팔 티셔츠와 속옷 밑으로 잘 발달된 근육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알지 못했는데, 몸을 일으킨 한은 꽤나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여성치고는 상당한 장신인 진이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한의 턱 끝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한은 상당한 장신의 소유자였다.
“여기서 더 커버리면 사람들이 무서워할지도 몰라. 사실 지금도 아슬아슬한 상태거든.”
한은 뺨을 긁으며 진을 내려다보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유달리 날카롭고 짙은 눈매였다.
“아무튼,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어머, 맞아!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의 말에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진이 양 손바닥을 맞부딪치고는 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 12시간 전에 거제도에 대규모 차원 문이 열리고 검은색 탑이 솟아올랐어요. 그런데 이 탑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요. 어쩌면 고대인의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대의 유물이라…….”
한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사냥개들이 준동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돌아가는 분위기도 심상치 않는 둥, 영 찝찝한 일만 생기는 터라 짜증이 솟구치는 참이었는데, 거제도에 솟아오른 탑에 고대 유물이 잠들어 있다면 모처럼만에 희소식인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그냥 느낌.”
한의 질문에 진은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한은 거기에 반론을 펴거나 하진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진은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하나의 세계를 지켜온 존재. 지금도 실질적으로 지구의 절반을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근거가 느낌뿐일지라도 그 느낌의 주체가 진이라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더불어 그 느낌이 가리키는 게 고대 유물이라면, 움직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한은 머릿속으로 향후 일정표를 짰다.
일단 라무스 위원장님에게 전화를 해서 원정대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고, 거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남방한계선을 돌파해야 할 터. 남방한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가야하는 곳은…….
“속초로 가야겠네요.”
한의 표정만을 보고 이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한 진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 단언은 얄미우리만치 정확했다.
“후훗, 흥.”
마치 ‘네가 하는 생각 따위는 내가 훤히 꿰뚫고 있지’ 하는 표정으로 뻐기는 진이었다.
한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목표는 속초. 지금은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속초, 속초행 특급열차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탑승하실 승객 분들은 3번 출입구로 이동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플랫폼에 울려 퍼진 안내 방송이 한의 회상을 중단시켰다.
한은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 키패드를 두드렸다. 디바이스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 입체 지도를 그려냈다.
한이 허공에 손가락을 뻗어 입체 영상을 가리키자, 입체 지도가 확대되며 선명한 회색빛을 뿜었다.
― 거제도, 아우터 존. 지역 등급 : 회색
거제도의 입체 영상과 관련 정보를 숙지한 한이 키패드를 다시 한 번 두드리자, 허공에 떠오른 입체 지도가 사라졌다.
한은 대기석에서 몸을 일으켜 개찰구를 지나, 예약한 급행열차에 올랐다.
자신이 예약한 객실 칸에 들어서며 한은 만족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두 개의 퀸 사이즈 침대가 풍기는 향긋한 참나무 냄새가 객실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한이 굳이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기차를 선택한 이유의 절반쯤은 바로 이 뉴 월드 익스프레스가 자랑하는 침대칸에 있었다.
객실 문을 닫고,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 안에 몸을 싣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번잡한 세상사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들고 있던 슈트케이스를 짐칸에 올려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객실에 비치된 따뜻한 커피를 잔에 옮겨 부은 후,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이걸로 대륙 횡단을 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이제 보고 싶었던 책을 펼쳐 들고 열차가 출발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열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책과 커피 한 잔이면 30분은 금방이었다.
그런데 한이 책과 커피를 즐기며 열차의 출발을 기다린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객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 잠시만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한은 보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승무원 복장의 중년 남자였다.
푸른색 벙거지 모자. 모자의 색으로 판단건대 제법 근무 경력이 오래 된 베테랑 승무원임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일단 양해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은 지금 저희 열차에 헌터 한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15분 후에 출발 예정인 이 열차를 꼭 타셔야 한다고 하시는군요.”
“예, 계속하세요.”
“그런데 갑작스레 하달된 공무여서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객실이 꽉 차서 탑승이 힘드실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중년의 승무원은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매우 급한 공무라 꼭 이 열차를 타야 된다고 하시는군요. 복도에서 서서라도 갈 수 있으니, 일단 탑승만 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희 뉴 월드 익스프레스는 입석 승차가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뉴 월드 익스프레스는 대륙 횡단을 주력으로 하는 열차 사업체. 최소 2박 3일, 길면 일주일도 넘게 걸리는 긴 여정을 어떻게 서서 갈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사정이 이러한데 혹시 손님께서 그분과 동행해 주실 수 있으신지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물론 손님께서 거절하신다면 저희가 억지로 부탁드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이 객실에 합승을요?”
한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한이 일부러 이 4인용 침대칸을 전부 예약한 이유는 최소한 속초까지 가는 길만큼이라도 편하게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제도에 도착하게 되면 이것저것 험한 꼴을 보게 될 거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타인과의 동행이라, 한으로서는 당연히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거절하기에는 합승의 대상이 공무 수행 중인 헌터라는 사실이 걸렸다.
공무를 수행 중인 헌터라 함은 어딘가 헌터를 필요로 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뜻.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지금 탑승하시는 손님께서는 속초까지 가시는 게 아니라 중간의 경유지에서 하차하신다고 하셨으니, 앞으로 열 시간 정도만 같이 가시면 될 겁니다.”
한의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승무원은 더 간절한 표정을 지었고, 한은 그 표정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열 시간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아 줄 수 있는 범위였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감사합니다, 손님. 그 헌터 분도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승무원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는 잰걸음으로 객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