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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3화)


사각, 사각, 사각.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펜이 종이 위를 오가는 소리뿐이었다. 약간의 소리와 진한 커피 향.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피어오르는 아릿한 담배 향기.
격무에 지친 라무스의 심신을 달래주는 친구라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커피와 담배, 이 둘뿐이었다.
세상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라무스였지만, 그가 가진 그 어떤 힘과 권력도 그에게 한 잔의 커피와 담배 한 개비만큼의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때문에 그가 세상의 모든 헌터를 관리하는 수호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사실은 라무스가 소박한 망중한을 만끽하는데 있어 조금의 장애도 되지 못했다.
베어 문 담배가 절반쯤 남았을 무렵, 키보드 모양의 홀로그램이 떠오르며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위원장님, 외선입니다.”
“……음?”
담배를 물고 있던 라무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시간에 외선이라?
“17번 외선입니다.”
빙긋.
라무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했더니 류 한, 그 친구였나.
“연결하게.”
라무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보드 모양의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검은 머리를 한 남자의 홀로그램이 허공에 떠올랐다.
“여어, 이게 누군가. 오랜만일세. 한 군.”
홀로그램 건너편의 남자가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믐달이 뜬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단정한 생김새의 젊은이.
“오랜만입니다, 위원장 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아직 자네에게 부고장이 가지 않은 거 보면 별일 없는 거겠지.”
노인은 실없는 농을 던지고는 빙긋 미소 지었다.
“여전하시군요. 다행입니다.”
검은 머리의 남자, 류 한은 라무스를 향해 마주 웃고는,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알고 있네.”
“예?”
“알고 있다고. 부탁할 일이 없는데 자네가 나한테 연락을 할 리 없지 않은가?”
“하하…….”
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라무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그 부탁할 일이란 게 뭔가?”
“위원장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으로부터 16시간 전에 거제도에 포탈이 열리고 흑색 탑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탑을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그럼 하시게. 언제부터 자네가 우리에게 일일이 허락 맡고 움직였다고 새삼스레 안 하던 짓을 하는가?”
라무스는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이 가지 못하는 아우터 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한이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는 걸까.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한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며칠 전, 사냥개들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
라무스의 눈동자가 살짝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줄곧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라무스의 표정에 처음으로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사냥개라 하면… 일전에 자네가 설명했던 이계의 습격자를 말하는 건가?”
“예. 저를 습격한 사냥개의 주인은 에드문드. 제가 지난번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놈이죠?”
“아아, 기억나는군.”
라무스의 머릿속에 한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저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놈은 에드문드입니다. ‘대도약 계획’의 가장 충실한 신도이자, 주인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물어뜯을 준비가 된 사냥개. 그게 에드문드죠.”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하는 자신의 질문에 한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대도약 계획을 지탱하는 네 개의 큰 기둥. 그 기둥 중, 무투파를 대변하는 게 에드문드입니다. 공식 서열은 리더와 대신관의 뒤를 이어서 세 번째를 차지하고 있으며, 실력으로 따지면 리더의 바로 다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열 2위의 강경 무투파라…….”
미간을 찌푸리는 위원장을 앞에 두고 한은 말을 이어 나갔다.
“객관적으로 봐도 완전히 미친놈입니다. 제아무리 충실한 사냥개라 해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알아야 하는데, 이놈은 그런 게 없습니다.”
지금껏 항상 침착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한의 얼굴에 처음으로 강렬한 증오가 떠올랐다.
“주인의 명만 있다면 자신의 살점까지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물어뜯을 수 있는 미친놈이죠. 그리고…….”
한의 눈빛에서 맹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에드문드라는 자를 벌써 수백 번은 찢어놓았을 법한 맹렬한 살기였다.
“…저에게 있어서 언젠가는 그 심장을 씹어 삼켜야만 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노인의 회상은 한의 말에 의해 중단되었다.
“놈들의 포위망이 점점 더 좁혀지고, 태엽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가능한 빨리 수호석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이것 참, 예삿일이 아니로군.”
다급해 보이는 어조와 달리, 라무스의 행동에는 여전히 여유가 느껴졌다.
누가 뭐래도 라무스는 지난 백 년간 지구를 마물들의 손으로부터 지켜온 수호위원회의 위원장. 기다리고 있는 위험이 아무리 크다 해도 두려움에 떨어서는 안 되는 위치니까.
“그래서 우리가 자네한테 뭘 해주면 되나?”
“A랭크 헌터가 이끄는 원정대를 조직해서 거제도로 보내주십시오.”
라무스의 질문에 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A랭크 헌터? 그거 가지고 되겠나?”
라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의 짐작이 맞는다면, 거제도에 솟아오른 흑색 탑엔 수호석을 완성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는 아티팩트가 봉인되어 있을 터.
그렇다면 A랭크 헌터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건 눈속임이니까요.”
“눈속임?”
“예, 고대 유물에 저 혼자만 덩그러니 접근하는 건 놈들의 시선을 끌 수가 있으니까요. 제 예상이 맞다면 유물이 숨겨져 있는 건 지하입니다.”
“진짜는 지하에 있다라……. 그렇다는 말은?”
“네, 지상에서 꼭대기 층 까지를 조사할 원정대는 눈속임입니다. 어차피 빈 껍데기나 다름없는 지상 층은 큰 위험도 없을 겁니다. A랭크 정도면 충분하죠.”
진짜 알맹이가 숨겨져 있는 건 탑의 지하. 그리고 그 알맹이를 찾아 취합할 수 있는 건 한뿐이었다. 그렇다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다.
한의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던 라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최대한 빨리 원정대를 파견하도록 하지. 그래서 자네는 어디에서 원정대와 합류할 계획인가?”
“속초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속초… 알겠네. 그쪽에서 도킹할 수 있도록 내 준비를 다 해놓겠네. 그런데 말이야, 한 군.”
“예.”
“자네 혼자서 위험하지 않겠나?”
라무스의 표정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정리하자면 한은 지금부터 속초를 경유해 거제도로 가서 원정대를 따돌리고, 고대 유물이 잠들어 있는 흑색 탑의 지하를 탐사해야 했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한의 실력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라무스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걱정해 주시는 건 참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위원장님.”
한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니까요.”
“하핫!”
노인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이렇게 크게 웃어보는 게 얼마만인가.
“자네는 말이야, 참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
조금 전까지의 걱정은 완전히 사라진 표정으로 라무스는 한을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예의 바른 친구가 이쪽 일에 관해서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해지거든.”
라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유쾌한 기분 탓인지 커피 맛이 유달리 달콤했다.
“내 앞에서 그런 건방진 말을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할 수 있는 사람, 이 지구를 통틀어 자네밖에 없을 걸세.”
“과찬의 말씀입니다.”
한은 고개를 꾸벅하고 숙였다.
“이보게, 한 군. 앞으로는 말야. 용건이 없더라도 자주 연락도 좀 하고 그러게나. 자네가 아니면 무료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이 늙은이를 재미있게 해줄 사람이 아무래도 없을 것 같으니 말야.”
고개를 숙였던 한은 단호한 표정으로 노인의 말을 부정했다.
“세계 최강의 헌터가 심심해서 돌아가실 만큼 이 세상이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허허, 이 친구야. 무슨 옛날얘기를 하고 있는 겐가.”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 최강이 아니라 세계 최강이었던 게지. 이보게, 30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시간이라네. 그 증거로 봐봐. 30년 전에는 자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였지 않은가.”
라무스는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붙을 붙였다.
하지만 한은 알고 있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은 노인에게 끊임없는 진화의 시간이었음을.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법칙 따위는 무시해 버리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고, 라무스는 지구가 생긴 이래로 가장 큰 예외 중 하나였다.
30년이 아니라 그 배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한의 짐작이 맞는다면, 노인이 수호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한 30년 전의 그 날 이후, 라무스는 지상 최강의 인간을 논할 때 그에 가장 근접한 인물 중에 하나였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쁘신 분을 귀찮게 해드린 건 아닌지 걱정스럽군요.”
“미안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 앞으로 연락도 자주 좀 하고 그러라니까.”
한은 다시 한 번 미소 짓고는 대답했다.
“노력하도록 하죠.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이 말을 끝으로 한과의 통화는 끝이 났다. 한의 홀로그램이 떠 있던 허공엔 뿌연 담배연기만이 가득했다.
라무스는 3분의 2정도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른 후, 라무스에게 세상은 늘 지겹고 따분했다. 그런데 저 기특하고 유능한 젊은 청년을 보는 것만으로 이리도 즐거울 수 있다니.
라무스는 자신이 노인이 되었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하지만 지금의 자각은 서글픔이나 안타까움과는 거리가 먼, 뿌듯함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라무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처리해야 할 격무의 가장 위쪽에 ‘류 한, 거제도 원정대’를 적어 넣었다.
‘가만 있자, 속초로 파견할 A랭크 헌터라……. 누가 적당할까?’

위원장과 통화를 끝낸 한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와 벨트를 하고, 재킷을 잠그는 걸로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한은 걸어둔 검은색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프런트를 연결해 교통편 조회 서비스를 부탁했다.
목적지는 대한민국 지부의 속초. 포탈과 비행기, 대륙 횡단 열차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기차를 누르고 좌석을 예약했다.
이제 출발할 준비가 끝났다. 한은 가방을 들고 호텔 지하로 연결된 대륙 횡단 열차 탑승구로 향했다.